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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사회』, 새물결 2012
체계이론 ‘최후의 대작’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kim.jongyup@gmail.com
니클라스 루만(Niclas Luman)의 『사회의 사회』(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를 『창작과비평』 촌평 코너에서 다룬다는 것은 여느 책의 경우와 다르게 두가지 도전적 과제를 함축한다. 루만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복잡성 감축 문제이다. 전자는 모든 촌평이 맞닥뜨리는 문제지만 루만의 경우에 더 심해진다. 정보-전달-이해의 통일적 과정인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공통의 의미 자원을 전제한다. 이 자원이 너무 희박하면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 그런데 『창작과비평』의 독자와 니클라스 루만 사이에는 공유된 의미 자원이 너무 적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기도 하다. 그의 저서는 잘 훈련된 사회학자조차, 더 정확히 말하면 잘 훈련된 사회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반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나조차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다면 도대체 누구더러 이런 책을 읽으라는 것인가? 루만은 내내 커뮤니케이션이 곧 사회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쓴 책을 도대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두 과제 중 후자는 그의 저서 가운데 특히 『사회의 사회』가 유발하는 어려움이다. 이 책은 1300면이 넘는 루만 최후의 대작(magnum opus)이다. 이렇게 책이 두꺼워진 이유는 이전 저작에 비하면 그래도 이 책이 조금은 더 친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여전히 경제적이고 축약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설명 좀 더 해주지. 이 정도 설명하고 충분하다는 듯이 다음 주제로 넘어가다니.”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두꺼운 책이 막상 한줄 한줄 읽는 순간에는 너무 간결해서 따라잡기 힘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루만의 이론은 이 두가지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후속 커뮤니케이션의 유무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사회의 사회』의 성공 여부는 책 내용에 대해 긍정과 수용의 태세를 유도하는 것보다 선차적인 것, 즉 이 책에 반응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이어서 발생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의 책은 번역되었고, 읽혀지고 있으며, 이렇게 촌평이 쓰이고 있다. 그리고 촌평이 읽힐 것이며,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호기심을 유발하고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인지를 계속해서 이끌어내고 있다. 언젠가(아마도 곧) 우리는 사회학자 또는 문예비평가가 체계/환경, 작동/관찰, 자기지시/타자지시 같은 이분법이나 커뮤니케이션, 복잡성, 자기관찰, 혹은 자기기술 같은 개념을 더 활발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장담컨대 『사회의 법』(Das Recht der Gesellschaft, 1993) 『사회의 정치』(Die Politik der Gesellschaft, 1998) 『사회의 예술』(Die Kunst der Gesellschaft, 1997) 같은 책이 추가로 번역되는 모습도 보게 될 것이다.
복잡성 감축 문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체계는 환경의 복잡성을 감축한다. 그 과정에서 체계 내부의 복잡성은 증대할 수 있다. 하지만 체계 내부의 복잡성을 감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체계/환경의 구별을 체계 내부로 재진입시킴으로써 복잡성 감축 작업을 수행하면 된다. 1300여면의 책을 4면 정도의 글로 간추리는 것은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체계는 본래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촌평도 가능하며,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 촌평은 책의 구체적 내용을 요약하기보다 『사회의 사회』가 제공하는 개념으로 『사회의 사회』에 대한 촌평 작업 자체를 살피는 제2열의 관찰(관찰의 관찰)을 시도한 것이다.
복잡성 감축이라는 테마를 좀더 밀고 나가보자. 그의 주장에 의하면 체계이론 또한 체계작동의 한 형태이며, 그런 한에서 복잡성을 감축한다. 복잡성 감축이라는 인지적 과제는 간결성(parsimony)이라는 과학의 오랜 이상이다. 근대 물리학이 지적으로 영민한 이들의 감수성에 불을 활활 지필 수 있었던 것은 ‘F〓ma’ 또는 ‘E〓mc2’ 같은 거의 아름답기까지 한 간결한 공식, 그리고 그것이 지닌 엄청난 의미 응집 능력 때문이었다. 루만은 자신의 작업 속에서 이런 시도를 반복한다.
예컨대 그의 저서명은 간결하다. 1984년에 그는 『사회체계들』(Soziale Systeme)이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이 저서는 탤컷 파슨즈(Talcott Parsons)의 1951년 저작 『사회체계』(The Social System)에 대한 오마주이자 자신의 사회이론의 중심 개념을 정리한 저서이다. 이 책의 함의는 파슨즈의 저서명을 복수로 전환한 디테일의 가벼운 변화에 결정적으로 요약되어 있으며,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을 깨닫게 된다(하지만 한국어판은 유감스럽게도 역서명을 『사회체계이론』〔박여성 옮김, 한길사 2007〕으로 삼았다).
이번 저서는 『사회의 사회』이다. 수수께끼 같은 제목이지만, ‘의’가 주격·소유격·목적격·동격으로 두루 쓰인다는 것에 착목하면 그것이 얼마나 책 전체의 주장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제목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면 다른 단어, 예컨대 커뮤니케이션을 대입해보자. ‘커뮤니케이션의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만이 커뮤니케이션을 생산한다는 것(자기생산, autopoiesis),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을 커뮤니케이션 대상으로 삼는 것(메타커뮤니케이션 또는 자기관찰), 커뮤니케이션을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자기준거 또는 자기지시)등을 모두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사회의 사회로서만 존속 및 이해 가능하다. 즉 사회 또한 자기생산·자기관찰·자기지시를 거듭하는 체계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자신을 다음 순간에도 존속시켜간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사회가 사회를 관찰하고 서술하는 일도 가능하며, 이 관찰과 서술은 사회의 자기존속의 자원 또는 교란 요인으로 환류되는 것이다.
이 글은 마침 어린이날에 씌어지고 있다. 루만은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개념의 하나로 우연성을 강조한다. 그런 우연성에 입각해서 『사회의 사회』와 어린이날 사이의 개연성 없는 연결을 시도해보자. 사회는 아직 결속되지 않은 요소들, 체계 이전의 상호작용도 포함하니 말이다. 어린이날이면 자주 불리는 동요가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루만은 이 노래처럼 이제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한다. 가능한 연결에 대해서 세계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이 개방된 커뮤니케이션 연결 속에서 우리는 루만이라는 각별한 어린이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만나려면 어른의 완고함을 버려야 한다. 완고함이란 학습하지 않으려는 의지, 또는 기존의 인지 도식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루만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사회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낡은 의미론에 집착하고 있는 때가 많다. 그러므로 어려져야 한다. 루만과 만나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특권적 힘, 학습에 대해 열려있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우리의 내부에서 재활성화시켜야 한다. 최소한 우리가 의지해온 인지 도식을 사정없이 파괴하는 그의 급진적 성찰에 자신을 내맡겨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