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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칼 짐머 『바이러스 행성』, 위즈덤하우스 2013

지구 생명체의 주역, 바이러스

 

 

장대익 張大翼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djang@snu.ac.kr

 

 

160_촌평_바이러스행성_fmt‘지구 생태계가 다 파괴되어 인류가 멸종하기 전에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외계 행성으로 이주해야 한다’ ‘지금도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와 있을지 모른다.’ 만일 누군가 이런 주장을 정색하고 늘어놓는다면, 그는 SF를 너무 많이 봤다거나 약간의 정신감정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전세계적 베스트쎌러 『시간의 역사』의 저자이자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천체물리학자로 평가받는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한 말이라면? 그가 요즘 심심치 않게 언론의 해외토픽에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발언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좀더 진지하게 경청해보자.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외계 지성체를 찾으려는 인류의 시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대목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현 시점에서 인류가 외계 생명체를 만난다는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플루엔자와 천연두 같은 바이러스를 달고 온 콜럼버스를 만나는 꼴’이라며 인류의 몰살을 걱정하고 있다. 어쩌면 호킹은 젊은 시절에 영화 「안드로메다 스트레인」(로버트 와이즈 연출, 1971)을 보았을지 모른다. 이 영화는 외계 바이러스를 지닌 운석이 지구에 떨어지는 바람에 치명적 바이러스가 퍼져 인류가 전멸할 위기에 봉착한다는 줄거리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저널리스트 칼 짐머(Carl Zimmer)가 최근에 내놓은 『바이러스 행성』(A Planet of Viruses, 이한음 옮김)은 호킹의 이런 우려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감기 바이러스, 독감 바이러스, 해양 바이러스, 면역결핍 바이러스, 웨스트나일 바이러스, 에볼라 바이러스, 천연두 바이러스 등이 어떻게 발견되었고 어떤 행동을 보이며 생태계와 인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바이러스의 관점에서 인류와 지구의 역사를 재구성해보라고 은근히 제안한다.

예를 들어, 천연두 바이러스의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다시 조망해보자. 오한과 발열, 끔찍한 통증과 고름물집을 선사하는 천연두는 지난 3천년 동안 인류의 건강을 가장 위협했던 바이러스다. 실제로 기원전 430년경에는 아테네로 유입되어 전체 군인의 25%와 수많은 시민의 생명을 앗아갔고, 1241년에는 아이슬란드에 처음으로 상륙해 섬 주민 7만명 중 2만명이 사망했으며, 15~18세기 사이에 유럽에서만 한 세기마다 5억명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도 밝혔듯이, 16세기초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의 금속 무기가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에 첫발을 내딛은 지 수십년도 안되어 원주민의 90% 이상이 사망했는데, 이런 떼죽음은 천연두 때문이었다. 이렇다면 바이러스는 인류의 역사에서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행위자(agent)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천연두만이 아니다. 피나 정액 같은 특정한 체액을 통해 50년 동안 은밀하게 인류를 감염시키고 있다가 1980년대에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낸 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HIV)는 현대의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HIV 감염자의 수는 6천만명을 넘었으며 이 중 거의 절반이 사망했다.

저자는 이 무서운 전염병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HIV 유사 바이러스는 원래 아프리카의 침팬지 집단에 퍼져 있었는데 사냥꾼들이 침팬지를 잡아먹는 과정에서 감염되곤 했다. 하지만 사냥꾼들은 자기 동네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의 충실한 숙주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부터 오지가 개발되고 도로망이 대도시를 연결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HIV는 침팬지의 몸에서 점차 벗어나 본격적으로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기 시작했다. 이제 이 바이러스의 침팬지에 대한 살상력은 줄어든 반면 인간에 대한 공격력은 배가 되었다. 즉 HIV도 수십종의 다른 바이러스들과 마찬가지로 동물 숙주에서 인간 종으로 진화적 도약을 감행하여 꽤 성공을 거둔 DNA 서열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의 관점에서는 숙주들의 원활하고 광범위한 이동이 자신의 ‘삶의 목표’(자신의 복제본을 더 많이 퍼뜨리기)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독창적인 유전자 서열로 인류를 골탕 먹이는 바이러스는, 그래서 전세계의 오지 출신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2002년 초겨울에 홍콩과 중국에서 사망자를 내면서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도 비슷한 유의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바이러스는 중국의 박쥐에게서 시작해 동물시장에서 흔히 거래되는 사향고양이로 넘어갔고 인류에게까지 도약했다. 즉 SARS 바이러스도 오지에서 출발하여 대도시로 잠입한 경우다. 감염자의 10%가 며칠 이내에 사망할 만큼 무서운 바이러스였지만, 인류는 동물시장의 사향고양이 거래를 즉각 금지하고 감염자를 신속하게 식별하여 격리함으로써 사망자를 900명 정도(감염환자 8천여명)로 막아냈다. 전염병 관리 역사에서 이 정도의 선방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바이러스가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를 몰고 올지를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전작 『진화』(Evolution, 2001)의 저자답게 짐머는 이 책의 곳곳에서 진화론적 논리로 바이러스의 기원과 미래에 대해 답하고 있다. 예컨대 사람의 온갖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게 만드는 치사율 100%의 에볼라(ebola) 바이러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에볼라 유행병이 발생하면 사망자는 수십명 선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예측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앓게 하는 능력이 너무나 뛰어난 까닭에 새 숙주를 찾기도 전에 희생자들을 죽이기 때문”(123면)이다. 에볼라가 끔찍한 바이러스이긴 하지만 인류 전체의 입장에선 사망률이 낮아도 더 많은 숙주로 퍼질 수 있는 바이러스가 더욱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다. 독감 바이러스가 그런 유일 것이다. 어쩌면 독감 바이러스를 비롯한 몇몇 흔한 바이러스들은 숙주의 원할한 이동을 위해 자신의 독성을 적당히 조정하는 쪽으로 진화했는지 모른다. 최근에도 종종 출현하고 있는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런 진화론적 관점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바이러스와 인간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만일 그랬다면 ‘바이러스 행성’이라는 제목은 다소 부적절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이러스를 대하는 저자의 스케일은 훨씬 크다. 그는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종 사이에서 DNA를 옮겨주고 진화의 새로운 재료를 제공하며, 생물 개체군의 크기를 조절하는 지구 생태계의 주역으로 바이러스를 바라본다. 심지어 바이러스가 지구의 바다와 민물, 그리고 토양과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외계인의 눈’으로 지구라는 행성과 그 속의 생명체를 관찰해보자. 그러면 식물의 중요성이 보일 것이고, 곤충이 새롭게 보일 것이며, 박테리아(세균)가 위대해 보일 것이다. 가령, 세균은 생명 탄생 이후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개체수가 가장 많다(당신의 예쁜 얼굴에도 1천종이 서식하고 있다). 물론 인간도 이 지구를 한방에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배종이기에 눈여겨봐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들은 ‘지구 리그’의 주전선수를 하나 더 보강해야 한다. 외계인의 시선(객관적인 제3자의 시각)에서 보면, 지구는 바이러스가 접수한 행성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