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목소리
문학에는 여전히 길이 있다
● 이십대인 나에게 여름호 특집 ‘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는 다소 무거운 화두로 다가왔다. 안도현 시인이 절필을 하고 137명의 문인들이 시국선언을 하는 이 시기에, 출판사 입사를 준비한다는 핑계를 대며 문학으로 도피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평소 가져온 터였다. 이런 나에게 좌담 「작가들이 만난 현실」은 내게 어떻게 문학과 사회를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특히 정지아 작가의 문학에 대한 희망적인 언술은 내가 가진 부채감을 상당히 덜어주었다. ‘이전과 같은 명료한 대안이 없을 뿐이고, 또한 명료한 대안이 없는 것조차 발전한 측면이 있다’는 그녀의 말은 문학 속에서 길을 찾고자 헤매는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비록 문학작품 속에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명확한 해답이 없더라도, 섣불리 판단내리지 않고 현실을 하나의 서사로 꿰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문학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지 않을까 낙관해본다.
최민주 mminju11@naver.com
‘레 미제라블’ 열풍과 다시 읽는 루카치
● 여름호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단연 루카치 관련 평론이었다. 내가 맑스주의 문예비평가 루카치를 사숙한 때는 80년대였다. 그때는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역사의 거센 파도가 출렁거리던 격변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변화’에 기초한 진보적 문예이론이 조명을 받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런 루카치의 문예론을 창비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었다. 광부가 광맥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흥분되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연구한 흔적이 역력한 전문가의 시각으로 개괄한 글을 읽자니 학이(學而)의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대의 아들이라 했던가. 진보의 거센 파도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 단적으로 말해 ‘죽은 개’ 취급을 받고 있는 지난 시대 비평가의 글이 다시 호명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배경 설명과 구체적 접근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오늘 왜 다시 루카치인가. 더구나 왜 장편소설인가. 이는 무엇보다 분열되고 찢겨진 너와 내가 다시 만나야 하고 상처받고 소외된 우리들이 다시금 일어서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이 이론의 소개보다 더 심도있게 논의돼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는 단순한 지적 호사취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선 패배 이후 한동안 『레 미제라블』 열풍이 불었다. 『레 미제라블』은 혁명의 좌절과 극복을 보여주는 장편로망이다. 1848년은 평자의 말대로 지배 이데올로기로 정착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체제 변호론으로 전락하기 시작, 전반적인 타락기로 접어든 시기로 오늘 한국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런 시대적 정황에서 볼 때, 『레 미제라블』을 비롯한 「악의 꽃」 『마담 보바리』 등 리얼리즘을 확대, 심화시킨 고전들에 대한 분석은 오늘을 돌아보고 새길을 모색하는 데 하나의 표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호사를 넘어 루카치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상천 criticks@hanmail.net
송경동 시를 읽고 떠올린 문답
● 여름호에 실린 송경동 시인의 시 「저작권」과 「사다리에 대하여」는 화자의 경험이 자아내는 묵직한 물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자의 질문에 반응하고 싶어졌다. 두 시 다 모호하지 않고 어렵게 숨기지 않아서 솔직하고 사실적이다. 겹겹이 쌓인 구절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한줄씩 읽을 때마다 상상 속 이미지가 정교해지게 도와준다. 특히 「사다리」는 한 사물이 여러 곳에서 각각 어떤 의미의 오브제로 쓰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데, 건설현장에서 쓰는 속어들이 시 속에 등장하자 흙먼지 날리는 빛바랜 회색의 공사판과 인부들의 땀 냄새가 그대로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일상의 사물인 ‘사다리’가 계층이동이란 의미로 확장될 때는 ‘사다리’에서 파생되는 여러 모습이 점진적이라기보다 자석처럼 하나로 달라붙는 느낌을 받았는데 시어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시 「저작권」에서도 ‘내 삶의 저작권도 실상은 내게 있지 않다’라는 문장이 권리라는 이름으로 또 물질로 환산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말하고 있지만 너무 명료한 문장이라 많은 이야기를 일단락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박인영 any6111@naver.com
어두운 시대를 함께 걷는 일에 대해
● 여름호 소설 중 김연수의 「벚꽃 새해」가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은 2013년 봄에 씌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2013년 봄을 살아낸 대한민국 국민 절반쯤의 심정을 이렇게 잘 표현해낼 수 있었을까. 주인공의 시계는 정권이 바뀌던 밤에 멈춘다(이것은 지나치게 직설적인 은유다). 그는 멈춰버린 시계를 시계방에 팔고 한동안 잘 지낸다. 시계를 선물했던 ‘구여친’(옛 여자친구)이 ‘진상’짓을 하기 전까지. 잊힌 물건들의 거리에서 찾을 수 없을 시계를 찾으며 주인공과 구여친은, 더 어두운 시대를 함께 했던 노인과 아내의 이야기를 듣는다. 노인은 말한다.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다.”(이것은 지나치게 직설적인 교훈이다) 작가는 ‘카톡’ ‘구여친’ 등으로 현재를 말하고 ‘장국영’ ‘몽중인’ 등으로 과거를 말할 뿐 아니라 2012년 12월 19일과 2009년 5월도 이야기한다. 시계가 멈춰도 시간은 흐르고 벚꽃이 피는 것처럼, 한 시기가 끝나도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작가는 황학동 시계방의 노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은 ‘이야기’에서 나오며, 더 정확히는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작가는 2013년을 살고 있는 독자에게 ‘좋았던’ 2004년과 1997년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시계가 멈출 만큼’ 어두운 현재를 코앞에 들이대기도 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의 이야기를 읽고 공유하며 이 시대를 함께 버텨내자고 말하는 것 같다. ‘홍곡지지’를 마음속에 걸어두고 결코 헛되지 않을 이 시간을 함께 걷자고.
김영주 debbykim@paran.com
만수를 기다리며
● 2013년 여름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성석제 장편소설 「투명인간」. 성석제 작가의 소설을 단번에 읽지 못하고 다음호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답답하고도 두근거릴 따름이다. 성석제 작가의 글은 마치 입담 좋은 친구의 아버지가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약주도 적당히 하시며 권위적이지 않고 한없이 다정한 그런 아버지의 모습. 이번 작품은 어떨 때는 장난꾸러기 같은 귀여운 남동생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기도 하고, 사실 듬직하지 못한 남자애랑 연애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한없이 여리고 보호하고픈 주인공 만수가 나에게 다가왔다. 제목 ‘투명인간’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억울한 유령의 느낌이다. 처음에는 만수가 억울하기만 한 인물일 줄 알았는데 읽고 나니 나름 행복했을 것 같고 사랑스러운 존재였을 것도 같다. 다음호의 만수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은 뜨거운 여름 속 기분 좋은 바람 같은 설렘이다.
전민영 20jmin@gmail.com
동아시아라는 시좌(視座)
● 쑨 거와 백영서의 대담을 재미있게 읽었다. 학자들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 사유체계를 글과 말로 풀어내는 법을 터득하기에, 이들의 대화는 흡사 불똥이 튀는 것처럼 치열한 사유체계의 접촉이었다. 한명의 독자로서 대화라는 형식은 나 스스로를 그 안의 상황에 참여시키기에 좋았다. 이른바 동아시아론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고 비대칭, 중심과 주변, 중국 내의 상황 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가 단순히 적절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라는 관점은 유효하지만, 이것을 부르짖기만 할 뿐 어떤 식으로든 한걸음씩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학계가 쑨 거 교수의 논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윤여일이라는 한 신진연구자의 공이 크지 않았는가. 그만큼 우리 학계는 동아시아라는 시좌에 우연히 참가하고 있을 뿐, 적극적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과 더불어 동아시아를 논의하는 데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동아시아라는 시좌는 실천 속에 존재한다.
김동광 nanunsara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