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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생태담론과 사회변혁

생태사회주의의 현주소

데이비드 페퍼 David Pepper

영국 옥스퍼드브룩스대학 지리학과 교수. 저서로 Modern Environmentalism: An Introduction, Eco-Socialism: From Deep Ecology to Social Justice, The Roots of Modern Environmentalism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On Contemporary Eco-socialism”으로, Qingzhi Huan ed., Eco-socialism as Politics: Rebuilding the Basis of Our Modern Civilisation (Springer Netherlands 2010)의 2부 3장을 옮긴 것이다. 원문의 이탤릭체는 고딕체로 바꾸었다. ⓒ David Pepper 2010 / 한국어판 ⓒ 창비 2013

 

 

생태사회주의 원리

서구의 많은 사람들, 가령 영국사회당(SPGB)은 대체로 사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사회주의는 부를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체제를 구축하는 것인바, 부의 생산과 분배는 공동체 전체에 의해 결정되고 그 이익에 부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1)

생태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 분석과 처방을 환경주의에 생태중심적(ecocentric)이 아니라 인간중심적(homocentric)으로, 또한 급진적으로 적용한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와 관점을 다루기 위해 전통 사회주의를 수정하기도 한다. 역사와 사회 변화,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생태사회주의의 틀은 역사적으로는 19세기의 맑스 저작에—부분적으로는 윌리엄 모리스의 해석을 거쳐—대체로 의존한다.2) 생태사회주의에서 제시하는 처방은 지방분권, 직접적 경제민주화,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처럼,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전통을 되살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생태사회주의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의 유형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에 가깝다. 생태아나키즘과 생태사회주의는 분석과 전략의 측면에서 중요한 차이점이 있지만 말이다. 생태사회주의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양식과 그런 생산양식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제도 및 세계관은 현재의 환경파괴를 초래했다. 생태사회주의는 환경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이며 따라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을 중단하려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가 도래하면 환경 파괴에 일조하는 (자연으로부터의 또한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를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의 기획’을 추구하는 생산과 산업은 계속해도 괜찮다고 한다. (생태사회주의가 심층생태주의 같은 생태중심적 환경주의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과 갈라서는 것은 이 지점이다.) 생태사회주의는 생산과 분배를 (이를테면 유능한 국가가) 합리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고 간주하지만, 대체로 국가를 불신하며 지역공동체와 지방의 연합 같은 한층 아나키즘적인 비전을 갖고 있다.

생태사회주의적 사회는 인간이 자연과 맺는 진정한 관계를 재발견하고 표현하려고 하며 현대자본주의가 전제하는 분리와 우월성, 생태중심주의가 신봉하는 단순한 평등을 모두 거부한다. 그러면서 사회와 자연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사회는 자연을 통해, 자연은 사회를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인간이 하는 행위는 자연적인 것이다. 생태사회주의 공동체는 ‘심층생태주의’ 원리에 반대하여 인간이 다른 종()과 달리 자연의 한계에 본질적으로 구속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럼에도 모든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관리하고 보호하며 자연과의 관계를 현명하게 꾸려가고자 한다.

생태사회주의가 환경주의자의 이익이 자본의 이익과 본질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태맑스주의자들, 이를테면 미국과 서유럽의 『자본주의자연사회주의』(Capitalism, Nature, Socialism) 그룹은 자본주의에 생태적 모순이라는 제2의 모순이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 자본주의의 주요 모순이 노동력과 노동력이 생산하는 상황을 훼손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성향—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봉기하여 체제를 무너뜨린 뒤에 무계급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을 뜻하는 데 비해 제2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은 생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시장의 구매력을 초과하려 생산하려는 내재적인 성향이 있다.

2. 이와 더불어 이익률을 나날이 증대함으로써 투자를 유치하려는 경쟁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거느린 채 전세계에 전파되고 강화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3. 게다가 생산이 이뤄지는 극도로 치열한 경쟁과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는 자본가 투자자들로 인해 생산력은 계속 증가하지만 기업은 이같은 상황에서 환경보호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는 본질적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오염을 예방하기보다는 사후에 제거하는 생산기법을 쓰며, 오염예방 기술을 활용하거나 폐기물 발생을 아예 차단하여 애초에 환경을 파괴하지 않기보다는 환경 파괴에 대처하는 비용을 사회 전체로 돌리는 것이다.

4. 자본은 끊임없이 팽창하고 순환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문화를 조장하고 확산시켜 대중소비시장을 지탱한다. 이 때문에 기본 자원이 고갈되고 오염이 가중된다. 이를테면 온실가스가 그렇다. 제한적인 자원 재활용만 가지고는 비재생 에너지원을 비롯한 원자재의 고갈과 폐기물 발생을 상쇄하기에 역부족이다.

5. 결국 최종적인 씨나리오는 위험사회가 만들어내는 환경적사회적 위협, 가령 지구온난화나 원자력에 직면하여 자본주의가 의존하는 생산기반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생태사회주의는 어디에 와 있나

이론의 전개과정에서 서구의 생태사회주의는 맑스주의의 ‘프로메테우스적 경향’을 탈피하려고 했다.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이 역사라고 간주하는 맑스주의적 역사관은 결국 자연을 착취하고 자원을 낭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생태사회주의자들은 또다른, 어쩌면 간과된 맑스주의의 전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이 총체적이고 변증법적으로 더 섬세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결합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전통 말이다.4) 그런 결합을 위해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지구 수용능력의 한계로 인해 경제성장과 인구성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일부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의 생태중심적 논리를 대체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생태사회주의는 극단적인 사회적 건설주의에서 벗어나 비판적 현실주의 쪽으로 이동했으며, 사회가 자연을 분별없이 착취하여 정복하는 데 한계와 제약이 있음을 인정했다. 게다가 이 제약은 상대적으로 역사를 넘어서는 양태로 작용하기에 시간과 공간에 두루 적용되지만, 이와 동시에 제약의 정확한 발현 양태는 지배적 생산양식, 즉 사회의 물적 토대에 의해 규정된다.

이 마지막 논점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조야한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토대–상부구조 모형’의 단순한 해석을 배격하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문화적 요인’의 역할을 인정한다. 따라서 생태사회주의 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문화적 해석과 구성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연과 환경 문제가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경제적 요인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다른 언어적 ‘담론’에 속한다고 간주한다.5)

더 나아간 맑스주의 이론의 재구성 작업에서는 여성주의와 생태여성주의 논쟁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의 공헌은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보편적이고 ‘근본적’이라고 가정하면서 그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본질주의’의 함정에서—보호하고 양육하는 여자들이 삶의 물질적 현실과 더 가깝게 접촉하고 있다는 등의 주장에서—생태여성주의를 구해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생태여성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변형하고 형성하는 과정을 논의할 때 ‘생산양식’의 중요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서 벗어나 ‘사회적 재생산’ 양식에도—여기에서는 서구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동등하게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 맑스주의 이론을 수정하고자 했다. (1960년대 이후로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의 고용기회 확대라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여성들은 맑스주의가 과거에 과소평가한, 가정의 삶을 중심으로 한 재생산 영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종합하면, 세계화된 현대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며, 과거에 숱한 자칭 맑스주의 이론가운동가들을 좌절시키고 특히 급진적 환경주의자를 소외시킨 조야한 경제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이런 추세는 모두 생태사회주의 이론을 ‘건강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세계적인 사건을 형성하고 변형하며 특히 환경의 보전 및 보호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서 ‘문화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열광과, 그에 상응하여 경제적 토대의 중요성에 대한 부당한 무시는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는 모두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의 문제인데, 우리는 지구적 근대화와 지구적 생태적 근대화의 과정을 형성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물질적경제적기득권적 이해관계의 중요성을 온당히 평가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일어난 이래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생태적 영역에서 이러한 이해관계가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졌다.

따라서 지난 10년간 유럽에서는 자본의 세계화와 무역 자유화, 복지지출 삭감을 감행하는 경제세력에 항의하는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최근에는 신자유주의 의제를 옹호하는 새 유럽연합 헌법에 반대표가 던져졌다. 이 모든 경제세력은 사회가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실업, 질병, 저임금, 노동조건 악화, 노령화 등에 대해서뿐 아니라 환경위험으로부터의 보호에도 타격을 입힌다. 서구에서 생태환경이 어느정도 나아진 것은 틀림없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지구온난화나 소비주의로 인한 폐기물 발생 및 처리, 지구적 빈곤 같은 진짜 환경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려는 노력은 턱없이 미흡했다. 재계와 산업계의 강력한 로비집단은 이러한 노력에 완강히 저항했다. 가령 비선출 기구인 유럽원탁회의(European Round Table)가 경제부문의 경쟁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규제를 완화하고 환경기준을 낮추라는 캠페인을 효과적으로 벌인 것이 그 한 예다. 유럽연합과 각국이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제품을 유럽에서 회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기업도 있었다. 이러한 로비의 힘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서는 환경을 지나치게 보호하면 재계와 산업 부문의 국제경쟁력이 약해진다’라는 식의 협박에서 나온다. 2010년에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불황이 시작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각국 정부의 진심어린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환경주의 논리가 다시 득세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는 석유업계 로비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커질 텐데, 그런 영향력은 물론 석유가 여전히 점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경제적인 역할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세계 최대의 화석연료 소비국인 미국은 전지구적 탄소배출을 규제하려는 쿄오또의정서의 실행을 지연시키고 있다.

실천적 생태사회주의: 대안적생태사회주의적 조직들

생태사회주의가 더욱 발전하면서 생태사회주의 이론과 구상의 실천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커졌다. 유토피아적 생태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안을 마련하려는 시도에 대한 관심인바, 이같은 대안에서 핵심은 사회적환경적 고려와 소비주의를 통한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따른 생산의 원리다.6)

일부 현장에서 이같은 대안적 조직들이 늘고 있다. 그런 조직은 다양하며 자본주의 안에서 대안적 공간의 공동체 경제를 구성한다. 어떤 공간은 한눈에 보기에도 생태사회주의적인가 하면 그다지 생태사회주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도 있다. 하지만 생태사회주의 이론가와 운동가는 이 공간들을 뭉뚱그려 전환기적 조직으로 간주할 것이다. 녹색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것이다.6)

이런 대안적 조직은 추상적 유토피아가 아니다. 나날이 팽창하며 주위를 집어삼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모델에 포섭된 단순한 판타지가 아닌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아프리카, 인도, 동유럽의 일부 개발도상국의 지역경제에는 대안적 조직이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 사실, 영국 같은 서구의 경제에서도 전체 노동시간의 30~50퍼센트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가사노동과 정부 업무, 그리고 대안적 형태의 상품생산으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의 조직상 형태는 다양하다. 한편에는 ‘대안적 자본주의’ 기업, 즉 전래 시장에서 물건을 팔지만 환경적사회적 윤리를 실천하려는 대기업이 있다. 일례로 영국의 스콧베이더 조합(Scott-Bader Commonwealth)은 1950년대에 결성된 협동조합 네트워크로, 무기 생산에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스콧베이더는 화학기업이다옮긴이). 다른 한편에는 비자본주의 기업이 있다. 이 기업들은 대체로 공동소유이고 비영리이며 소규모다. 두 종류 기업에서의 노동 형태는 다양한데, 협동, 자영업, 자원봉사, 자발적 저임금 등으로 이뤄진다.

목적도 저마다 다르다.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살아남기만 바라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의도적으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즉 자본주의경제 및 이와 결부된 개인주의화로부터 궁극적으로 사회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기업도 있다. 주류 자본주의경제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이러한 조직형태는 협력의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공동체의 감각을 창조하려는 한다. 또한 사회주의 원칙을 구현하는 생태적으로 착한 사회를 만들어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경우도 있고 종교적 이상이나 이념적 목적을 추구하는 사례도 있다.7)

대안적 조직들의 공통되는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자신이 창출하는 부를 점유하여 잉여수익을 공동체 투자에 지출할 수 있게 되는 데 집중한다는 점이다. 생태사회주의의 이러한 잠재적 발현에서 개인 및 그 잠재력의 실현과 집단의 발전이 동시에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유념해야 한다. 대체로 이런 집단성은 국민국가로서보다는 지역과 지방적 차원의 살아 있는 공동체로 표출된다.

사례들

대안적 조직들은 고도로 조직화되어 국제적 규모로 운용되기도 하고 지역에 기반을 두고서 자연발생적이고 비공식적으로 운용되기도 한다.

흔히 인용되는 사례로는 스페인 북부 바스끄 주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있다8).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1950년대에 출범했으며 영국 협동조합 운동의 창시자 로버트 오원(Robert Owen)이 제시한 원칙과 이상을 토대로 삼았다. 현재 조합원 노동자가 3만명, 일반 노동자가 16만명이며 2003년 매출액은 96억유로다. 몬드라곤의 1차 조합기업에서는 자동차부품, 백색가전제품(브랜드명은 UlgorFagor다), 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시장을 겨냥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한다. 하지만 이들 조합기업은 전통적인 자본주의경제에 둥지를 틀어 생존을 위해 그런 경제에 의존하는 대안적 조직에 머물지 않는다. 1차 조합기업은 공동체 은행, 교육, 훈련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2차 조합기업과 독립적 기반시설(사회보장, 보건, 주택)을 생산하는 3차 조합기업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현재 몬드라곤은 제휴 협동조합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이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의 원칙으로는 자본의 부차성(사업 및 재무건정성과 사회적환경적 목표 간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과 (자본가나 주주가 아니라) 공동체와 노동자를 위한 잉여수익 할당 등이 있다. 임금을 지급하고 남은 이윤은 자선사업에 10퍼센트, 개인 조합원에게 70퍼센트를 분배하며 20퍼센트는 조합이 보유한다.

규모가 큰 형태의 또다른 사례로는 네트워크를 이룬 제조 및 서비스 기업인 영국의 스콧베이더 조합과 미국 매사추세츠의 세컨드이코노믹모델(Second Economic Model, e2m)을 들 수 있다.9) 조합기업이 초과이윤의 일부를 공동체가 목표하는 사업에 기부하고 공동체 구성원이 e2m이 인증한 기업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조합기업과 공동체는 호혜적 관계다. 그 결과는 더 많은 사업기회와 일자리의 창출만이 아니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지역경제협의회를 통해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일련의 방안을 내놓기도 한다. e2m조합기업들은 이윤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숱한 환경적사회적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윤의 극대화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자본주의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조합기업들은 자신이 속한 자본주의적 맥락과 분리된 ‘순수한’ 생태사회주의적 실험과는 거리가 멀며, 국제적 시장경제의 맥락에 ‘오염’된 정도에 따라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아래 참고). 또한 그 기업들은 일각에서 말하는 세계화에 대항하는 ‘국지화’(localisation) 운동의 사례도 아니다. 즉 지구적인 경제학과 통치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소규모의 시도가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관점을 ‘지역 기반의 세계화’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들은 국제적 시야를 유지하면서도 장소, 지역성, 공동체의 개별 정체성과 경제독립을—심층생태학에서 말하는 생물지역(bioregion)의 ‘고삐 정주’(rein habitation, 원주민이 하는 것처럼 땅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살아간다는 뜻옮긴이)가 그렇듯이—되살리고 재활성화하려고 한다.10)

더 작은 규모의 실험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1. 지역적이고 연성(軟性)이며(‘소프트 에너지’란 화석연료나 원자력이 아닌 태양열, 풍력, 해양 에너지 등에서 얻는 에너지를 뜻한다옮긴이)재생가능한 산업용 에너지.

2. 식량과 공동체 발전을 위한 도시 경작 공간을 포함한 공동체 농업.

3. 공동체 능력 함양: 사람들이 조직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4. 생산자 및 소비자 조합.

5. 지역통화 레츠(LETS), 지역 고용 및 교환 체계.

6. 지역금융, 기업, 은행, 신용조합, 스위스의 ‘비르트샤프츠링’(Wirtschaftsring, ‘경제순환’이라는 뜻으로, 기업을 하는 회원을 대상으로 큰 액수의 자금을 빌려준다)같은 연합 형태.11)

7.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한 공동체 협의회.

이러한 소규모 실험이 구현하는 생태적사회주의적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지역과 지방의 자립을 키움으로써 중앙과 외국의 경제에 예속되지 않도록 한다.

2. 지역에 필요한 물품을 지역에서 생산하여 지역 일자리를 지키고, 상품유통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줄인다.

3. 생산수단을 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한다.

4. 공동체 은행과 금융 지원.

5. 생산에 대한 의사결정이 시장의 힘에 의해 덜 좌우된다. 그러면 환경적으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단기적인 금융개발이익보다 미래세대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다.

6. 생활수준의 하락이 일어날 때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과 삶의 질.

7. 자급자족이 아니라 자립을 추구하면서도 매우 진취적인 태도로 다른 지방이나 국가와 연합하고 상호부조 관계를 맺는다.12)

소규모의 대안적 협동조합 사례들은 ‘농촌의 사회적 기업’(rural social enterprise)으로서 연구되었다.13) 이런 사례로는 마을 가게(village shop)를 소유하고 자금이 부족한 주민을 위해 주택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공동체 협동조합, 사과주스 제조공장 같은 소기업, 스코틀랜드의 로리스턴홀(Laurieston Hall) 같은 ‘대안 공동체’(회원 30명은 공동체의 살림을 꾸리기 위한 활동에 노동일수의 절반을 할애한다), 윤리적 공동체 은행(공동체의 후원하에 소비자와 직거래하는 농장과 농민을 지원한다)등이 있다.14)

이들의 생존 전략에는 주류 경제를 통한 융자, 보조금, 토지 분배, 값싼 노동(자발적 노동, 저임금, 일자리 나눔), 내부적 교차 보조금, 물물교환, 상조 계약 등이 포함된다.15) 이들은 모두 사회적기업(social enterprise), 즉 부분적으로 주류 시장과 거래하기도 하지만 경제상의 생존과 더불어 사회적환경적 목표를 중시하는 기업의 사례들이다. 노동자뿐 아니라 이해 당사자, 즉 기업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기업을 사회적으로 소유하며, 경제적일뿐 아니라 사회적인 목표도 추구하기 때문에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효율성’(가령 기계화)에서 나오는 이익을 포기할 수 있다.16)

폴란드나 슬로바키아 같은 동유럽의 과거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비슷한 사회적 기업을 연구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사회적기업은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에서 살아남은 형태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를 혼합한 형태로, 공식비공식 노동계약, 유연성(한 사람이 여러 직업에 종사한다), 가내 생산(이를테면 식품), 상품과 서비스의 상호 제공, 국가에서 제공하는 수당이나 국외 체류가족으로부터의 송금을 통한 소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일자리를 공유하고 분담하는 개인적인 네트워크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네트워크들은 작업장보다는 가정을 주요 전략거점으로 삼는 경제적 실천의 보금자리 지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들은 복잡한 권력관계 속에 서로 맞물려 있다.

더 부유한 사회에서는 생태적 감수성과 공동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지역통화, 즉 지역 고용 및 교환 체계인 레츠를 주요한 대안적 사업으로 선택한다. 지역통화는 생활정치의 한 형태로서 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17) 1970년대부터 서유럽,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지의 도시에서 수백개의 지역통화 체제가 개발되었다. 레츠는 주류 통화의 대안으로서 노동교환권의 형태로 비주류 경제에서 교환수단으로 쓰인다. 다자간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물물교환보다 더 유연하다. 대개는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지역 내에서만 유효한 화폐를 받는다. 레츠 체제에는 20~30명이 참여할 수도 있고 100명이 참여할 수도 있고 2명이 참여할 수도 있다. ‘통화’는 해당 지역을 벗어나면 유효하지 않으며 지폐와 주화를 쓰지 않고 단순히 거래를 기장(記帳)하기만 하므로, 레츠를 쓰면 보편 통화의 많은 단점을 해결할 수 있다. 화폐 자체의 상품화나 환투기, 그로 인한 통화가치의 널뛰기 현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초국적 기업의 이윤이 본국으로 회수됨으로써 지역에서 부가 빠져나가는 일도—이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불가능해진다. 따라서 레츠는 외부의 경제 관행과 상황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한다. 생태사회주의자들이 레츠에 주목하는 것은 그 사회공동체적 면모인바, 레츠는 지역 공동체를 연결하고 공동체 의식을 진작하며 다른 식으로는 급여를 받지 못했을 노동에 보상하고 저임금 계층이 자조를 달성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레츠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이를테면 화폐의 유통에 기한을 둘 수도 있다) 부의 축적이 불가능하도록 화폐를 유통시킬 수도 있다. 실제로, 사람들이 교환에 참여하지 않고 화폐를 쌓아두려고만 들면 대안 통화체제가 무너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소규모 지역통화를 경제 전체의 기반으로 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규모 지역통화는 거시경제와 나란히 존재하며 주류 거시통화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두 통화 체제는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위계를 이루지는 않는다. 주류 통화가 못하는 일을 지역통화가 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생물학의 격언을 통화체제에 적용하여, 통화의 다양성이 클수록 외부의 영향—2008년 미국 은행들의 도산은 세계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에 맞서는 복원력도 크며 따라서 더 ‘건강’하다고 말한다. 또한 지역통화로써 형성된 시장은 상품을 물신숭배하는 세계화의 비정한 시장보다 더 인간적이며 구성원을 덜 소외시킨다. 지역통화 시장은 ‘고객’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즉 내가 누구를 위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18) 이런 시장에서는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기존의 경제 및 발전 이론은 이같은 시도를 대부분 퇴행으로 간주할 테지만, 환경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삶의 질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진보로 볼 것이다.

1. 사회적 상호작용과 공동체의 향상.

2. 경제적 자생력의 회복(원거리 경제세력과 결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

3. 따라서 민주주의적 권한의 재강화.

4. 환경적 목표의 우선순위 높이기.19)

국가 ‘사회주의/공산주의’체제와 달리 중앙집권적 국가가 부과하는 형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나오는 힘으로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유의하라. 하지만 국가도 전제조건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비판: 이들이 전환기의 조직들인가?

녹색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많은 논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조직들이 일련의 경제적사회적 체제를 구성할 수 있고, 그런 체제는 궁극적으로 원하는 녹색사회주의, 또는 녹색아나키즘로 가는 ‘전환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20) 이러한 관점은 ‘내재적 비판’이라는 맑스의 개념, 즉 세계가 이미 그것을 향해 분투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명에 의거한다.21) 지금 여기서 선취하는 실천 속에 현실의 객관적인 가능성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취적 실천은 그런 실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혁명적이고 생태사회주의적인 의식을 일깨울 것이다.

이는 혁명 이후 사회를 예표(豫表, prefigure)하는 전략의 일환이다. 곧, 유토피아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는 수단과 목적 사이에 불일치가 있을 수 없으며 혁명에는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아나키스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주장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를테면 폭력이나 전위주의는 폭력, 엘리트 사회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옹호될 수 없다.22)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혁명의 방법이란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특성들을 지금 여기에 세워놓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선을 따라 사유하는 사회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화폐를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공간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표현으로 묘사한다. 화폐의 사회적 권력은 특권과 사회통제의 체계를 구성하는 패권적 영토 지형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하비는 레츠에는 새로운 시공간적 특징, 즉 해당 지역 바깥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레츠의 수용이 대안적이고 비헤게모니적인 사회적 실천을 확고하게 추진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23) 또다른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주의적 사회관계에 내포된 자립적 지역경제들로 이루어진 ‘사회화된 시장’을 요구한다. 이들은 상업적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환경적 목표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레츠나 공정무역 조직 같은 기존 운동을 활성화함으로써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녹색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축소된 풍요로움, 자급자족, 작은 규모의 생활, 지역화된 경제, 참여민주주의, 대안 기술 등은 모두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사회적으로 올바른 사회를 이룰 수 있게 하는 핵심 요소다. 녹색운동가 테드 트레이너는 계획공동체, 도시의 동네, 생산자공동체 협동조합, 지역통화 등이 네트워크를 이룬 지구적 생태마을 운동에 그런 요소들이 이미 들어 있다고 강조한다.24) 트레이너는 이 운동을 ‘비이론적이고 비정치적’으로 규정하지만, 그럼에도 현존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건설하는 암묵적인 전환 전략의 일환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전환적 조직’의 딜레마는 변혁적 잠재력이 아니라 현상태를 유지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기본적인 이유는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상술한 바 있다. 지역공동체 수준에서 개혁에 치중하는 것은 더 큰 체제를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고 따라서 체제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이나 주장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태사회주의 사회로 가는 누적적인 과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작은 변화에 스스로를 국한시키게 된다.)

대안적 조직을 옹호하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론과 정치를 거부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그런 위험은 더 커진다. 대다수가 자본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현재의 물질적 힘과 과정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허위의식을 부추길 수 있는데, 그로써 (1) 이성과 ‘상식’에 호소하면 대중이 따르고 싶어하는 모범을 제시할 수 있다거나 (2) 대안적 조직이 기존의 권력 헤게모니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면 헤게모니 집단이 그런 도전을 용인하리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현실감각의 그런 결여로 인한 한가지 잠재적 위험은 주류 문화에 동화될 수 있는 상황에 경각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전환적’으로 보이는 생각이라도 쉽사리 제도화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어떤 레츠 체제는 국세를 납부함으로써 국가를 지원하기도 한다. 또한 중앙집권적이윤추구적 대기업에 의한 식량시장 장악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농산물 직거래’와 ‘공정무역’ 업체가 대형 슈퍼마켓에 진출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실제로 일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대안적 사업 덕에 가난하고 만성적인 실업자가 기존 사회에 계속 참여하게 되는 그만큼 국가는 사회보험을 제공할 부담이 줄어든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혹자는 그럼으로써 본질적으로 사회적 배제를 야기하는 경제학의 정당성을 사실상 연장시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에 비추어 보면 그같은 대안적 사업은 변혁적이기보다는 반()혁명적이다.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위험은 ‘전환’의 과정이 아니라 형식을 더 중시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25) 그래서 대부분의 생태사회주의적 구상은 자족적인 꼬뮌과 노동자 협동조합이 본질적으로 환경에 이롭다고 가정하는데, 소규모에다가 삶의 질에 공헌할 수 있는 잠재성,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지역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가정은 매우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협동조합이 규모가 작아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협동조합이 민주주의와 포용력, 환경에 대한 관심을 필연적으로 예시하는 것도 아니다.26) 참여자들이 자본주의적 환경에서 경쟁에 뛰어드는 와중에 소외와 자기착취의 수단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27) 이 점에서 형식 자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은 거의 모든 의미를 채울 수 있는 그릇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핵심은 잠재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형식을 둘러싼 맥락이다. 이 조직들은 비자본주의적 가치의 문화와 명백히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의제 안에 자리잡아야 한다. 맑스주의를 사사(師事)한 생태아나키스트 타키스 포토풀로스가 전환기적 조직들을 옹호하면서도 테드 트레이너의 무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체제변혁의 뚜렷한 목표가 부재하다고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다.28) 생태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이 성공하려면—포토풀로스가 말하듯이 궁극적으로 무국가 무화폐 경제로 가는—체제변혁의 프로그램을 명확하게 수립해야 한다. 명확한 프로그램이 없으면 오늘날의 거대한 권력 집중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다수의 형성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 생태사회주의 이상은 부실한 기반 위에 세워질 때 반혁명적 실용주의와 개량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녹색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한 연구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새로운 사회를 궁극적으로 고집하지 못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재건하”거나 “환경에 더 친화적인 선택”을 장려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꼴이다.29)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녹색운동가 조너선 포릿(Jonathan Poritt)도 환경주의자들에게 ‘녹색성장’ 자체를 목표로 잡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녹색성장은 결국 의미상 모순되는 말이다. 서구 환경주의자들은 휠씬 급진적인 목표, 즉 소비주의 자체의 철폐를 위한 전환적 수단이 되는 한에서만 녹색성장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릿은 궁극적인 근본목표를 망각하지 않고서 그러한 매개적 개혁조치들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이야말로 “대다수 환경주의자들이 맞서기를 극구 꺼려하는 본질적 딜레마”라고 말한다.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번역 | 노승영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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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 Duncan, “The centrality of agriculture: History, ecology and feasible socialism,” in L. Panitch, & C. Leys (eds.), Necessary and Unnecessary Utopias: Socialist Register, Rendlesham, Suffolk: Merlin Press 2000, 199면.

2) E. P. Thompson, William Morris: Romantic to Revolutionary, London: Merlin Press 1977.

3) A. Gare, “Creating an Ecological Socialist Future,” in Capitalism, Nature, Socialism 11(2), 2000, 23~40면.

4) D. Pepper, Eco-socialism: From Deep Ecology to Social Justice. London: Routledge 1993.

5) J. Dryzek, The Politics of the Earth: Environmental Discours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6) V. Fournier, “Utopianism and the Cultivation of Possibilities: Grassroots Movements of Hope,” in M. Parker (Ed.), Utopia and Organisation, Oxford: Blackwell 2002, 189~216면.

7) D. Morris, “Communities: Building Authority, Responsibility, Capacity,” in J. Mander, & E. Goldsmith (eds.), The Case Against the Global Economy: And for a Turn Towards the Local, San Francisco: Sierra Club Books 1996, 434~45면.

8) R. Morrison, We Build the Road We Travel: Mondragon, a Cooperative Social System, Santa Cruz: New Society Publishers 1991.

9) K. Kassman, Envisioning Ecotopia: The US Green Movement and the Politics of Radical Social Change, London: Praeger 1997.

10) H. Norberg-Hodge, “Shifting Direction from Global Dependence to Local Interdependence,” in J. Mander, & E. Goldsmith (eds.), 앞의 책 393~406면.

11) S. Kumar, “Gandhis Swadeshi: The Economics of Permanence,” in J. Gray (ed.), False Dawn: The Delusions of Global Capitalism, San Francisco: Sierra Club Books 1998, 418~24면.

12) J. Dodge, “Living by Life: Some Bioregional Theory and Practice,” in V. Andruss, C. Plant, J. Plant & E. Wright (eds.), Home! A Bioregional Reader, Philadelphia: New Society Publishers 1990, 5~12면.

13) N. Johanisova, Living in the Cracks, Bideford, Devon: Green Books 2005.

14) D. Imhoff,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in J. Mander, & E. Goldsmith (eds.), The Case Against the Global Economy: And for a Turn towards the Local, San Francisco: Sierra Club Books 1996, 425~33면.

15) B. Mollison, “Strategies for an alternative nation.” in V. Andruss, C. Plant, J. Plant, & E. Wright (eds.), 앞의 책 149~52면.

16) L. Arthur, M. Scott Cato, T. Keenoy, & R. Smith, “Developing an Operational Definition of the Social Economy,” Journal of Cooperative Studies 36(3), 2003, 163~89면.

17) T. Fitzpatrick & C. Caldwell, “Towards a Theory of Ecosocial Welfare: Radical Reformism and Local Exchanges and Trading Systems(LETS),” Environmental Politics 10(2), 2001, 43~67면.

18) S. Meeker-Lowry, “Community Money: The Potential of Local Currency,” in J. Mander, & E. Goldsmith (eds.), 앞의 책 446~59면.

19) L. Panitch, & C. Leys (eds.), 앞의 책 187~205면.

20) T. Prugh, R. Constanza & H. Daley, The Local Politics of Global Sustainability, Washington, DC: Island Press 2000.

21) J. OConnor, Natural Causes: Essays in Ecological Marxism, New York: Guilford Press 1998.

22) K. Taylor, The Political Ideas of the Utopian Socialists, London: Frank Cass 1982.

23) D. Harvey, Spaces of Hop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0.

24) T. Trainer, “Where are we, where do we want to be, how do we get there? Democracy and Nature, 6(2), 267-286.

25) L. Sargisson, Utopian Bodies and the Politics of Transgression, London: Routledge 2000.

26) E. Swyngedouw, “Neither Global nor Local: ‘Globalisationand the Politics of Scale,” in K. Cox (ed.), Spaces of Globalisation: Reasserting the Power of the Local, New York: Guilford Press 1997.

27) N. Carter, “Worker Coops and Green Political Theory,” in B. Doherty & M. de Geus (eds.), Democracy and Green Political Thought, London: Routledge 1996, 56~74면.

28) T. Fotopoulos, Towards an Inclusive Democracy: The Crisis of the Growth Economy and the Need for a New Liberatory Project, London: Cassell 1997.

29) M. De Geus, Ecological Utopias: Envisioning the Sustainable Society, Utrecht: the Netherlands, International Books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