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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신예작가 5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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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金希鮮

1972년 강원 춘천 출생. 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biflowers@hanmail.net

 

 

 

라면의 황제

 

 

한때 라면이라는 음식이 있었다. 그것은 기름에 튀겨 건조시킨 국수를 스프와 함께 끓이거나 혹은 그냥 뜨거운 물만 부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즉석식품이었다. 물론 듣기론 지금도 극빈국 어디에선가는 이 괴상한 인스턴트식품이 필수 식량의 하나로 유통되고 있다고 하지만, 세계보건기구는 그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전성기에 라면은 연간 약 천억개 이상이 소비되던, 그야말로 지구상 최고의 인기식품이었다. 200719일, 『뉴욕타임즈』가 라면을 처음 만든 대만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의 죽음을 추모하며, “뜨거운 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라면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한 음식”이라고 치켜세운 적이 있다는 것만 봐도, 라면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2010년 아이티를 강타한 대지진 당시 난민에게 제공된 음식도 라면이었다. 세계적 구호단체인 해피월드 홈페이지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홍보 동영상에선 자신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난민이라고 소개한 한 아이티 여성(메리, 27세, 세 아이의 엄마)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지급되었던 다른 구호식량보다 훨씬 낫습니다. 면과 함께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컵라면을 들어 보였고, 삽시간에 갈라진 땅이 자신의 아이들을 삼켜버렸다고 외치며 흐느꼈다. 어쨌든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적어도 선진국에선 말이다) 라면이란 식품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것은 아마도 2005년 즈음이었던 듯하다. 그해에 라면은 ‘지상의 간편식품’이라는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드디어 우주로 진출했으며, 한동안, 그러니까 아직 라면 유해론이 완전한 대세로 자리잡기 전인 2015년 중반까지 우주비행사의 필수식량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정도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김기수씨 역시 2005년 즈음 생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때 그는, 비록 대형서점은 아니지만 꽤 큰 규모의 동네서점에서 자신의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열었으며(자서전 겸 식당 홍보책자였던 그 책의 제목은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이었다), 주요 일간지는 아니지만 『식품음료신문』을 비롯한 몇몇 군소 신문사에서 그것을 취재해가기도 했다. 게다가 그해에 그는 라면이 우주로 진출하는 역사적 장면을 목격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물론 인스턴트 라면이 우주로 진출했는지 어쨌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2005년에 김기수씨는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영광을 얻었다. 어느 조그만 케이블 방송사가 새로 만든(그러나 시청률 부진으로 약 이년 뒤 폐지된) 기인과 달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빛바랜 화면 속에서, 김기수씨는 라면 그릇을 들고 환하게(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저 찡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들 하지만) 웃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자서전인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을 구비하고 있는 도서관은 어디에도 없다. 라면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그 책 역시 똑같은 운명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도 없을 정도니 서점엔 당연히 없다. 서점 직원들은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이요? 처음 들어보는군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들은 그게 식품에 관한 책인지 아니면 일종의 요리책인지 되묻고는 도서 검색용 컴퓨터에 다시 한번 제목을 입력해본다. 혹시 무척이나 열성적인 직원이 있다면, 그가 조용히 서고로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한참 뒤 그 직원은 먼지가 잔뜩 덮인 책 한권을 들고 빠르게 걸어온다. “이걸 찾는 건가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그러나,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인 경우가 태반이다. 하긴, 둘 중 어떤 책이 먼저 나왔고, 어떤 책이 먼저 잊혀졌는지 따져보는 것조차 불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만약 정말로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서점이나 도서관 대신 차라리 폐지수집상을 방문하는 게 나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W시(김기수씨가 말년을 보낸 곳) 인근에 위치한 오래된 폐지수집상 한구석에서 파쇄되길 기다리고 있는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 한권쯤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팔리지 않은 채 출판사(당연히 자비출판 전문 업체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김기수씨는 그 책을 자기 돈으로 찍어냈던 것이다) 창고에 쌓여 있던 그 수많은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들은, 어느날 회사가 부도로 문을 닫음과 동시에 폐지수집상으로 넘어가는 신세가 됐다. 평소 책이라곤 단 한줄도 읽지 않던 폐지수집상 주인은, 그러나 겉표지에 먹음직스러운 라면 한 그릇이 선명하게 인쇄된 그 기이한 책에 단번에 매료됐다. 그는 그립고도 아쉬운 마음으로 책들을 바라봤고, 파쇄기에 집어넣기 전 몇권을 빼서 컨테이너 박스 안에 마련된 휴게실 선반에 진열했다. 나중에 그가 더이상 폐지수집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아들(이인호, 23세)이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았고 휴게실도 새로이 정리했다. 그는 라면 그림이 그려진 화려한 장정의 책 몇권이 놓여 있던 선반을 치우고 거기에 벽걸이 텔레비전을 달았다. 폐지수집상의 아들이 그 책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건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뒤의 일이 될 것이었다.

 

W시에서 좀 떨어진 어떤 황량한 공원묘지에 김기수씨의 묘비가 있다. 라면은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건재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라면동호회 회원들이 해마다 그의 기일이면 이곳에 들러 꽃을 놓고 간다. 사실 그들은 라면을 먹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라면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그 음식을 먹어본 적 있다는 엄청나게 나이 많은 노인(허삼식, 연령미상)이 동호회의 자문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건 진짜 최고의 음식이었어. 아마 자네들은 상상도 못하겠지, 그 따뜻한 국물 맛을.”

어쨌거나, 그들이 꽃을 두고 간 묘비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기수

1957-2013

27년간 오직 라면만 먹은 자, 여기 잠들다

 

*

 

라면 유해론은 20세기 후반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름에 튀겨 건조시킨 면과 각종 첨가물이 들어간 스프가 수만가지 질병을 비롯하여 우울증이나 폭력 같은 심각한 정신질환까지 유발한다는 연구결과가 줄을 이었으며(신기하게도 그런 문건들의 결론은 하나같이 똑같았는데—라면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그 원초적인 문장은 라면 애호가들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라면을 먹어야 했던 이들에게도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급기야는 현대사회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의 주범으로 라면이 지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경제전문가들은 “일인당 라면 소비량이 많은 지역일수록 거주자의 월평균소득이 감소한다”는 보고서를 내세워 빈곤의 기저에 라면이 있음을 지적했고, 교육 관계자들은 “어린 시절 라면 소비량과 명문대 진학률은 반비례한다”는 컨설팅 업체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학교 주변 300미터 이내의 라면가게를 모두 추방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보도됐다. 사악한 의도를 가진 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한 이슬람 청년(이븐 바투타, 25세, 출신국 미상)이 모 신문사의 마라톤대회(종이신문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와 함께 신문사 역시 없어졌지만, 기이하게도 신문사의 이름을 딴 달리기대회만은 계속 남아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며칠 전 인천공항에서 체포됐는데, 그의 가방 속엔 사제폭탄을 만들려고 한 게 분명해 뵈는 한국산 압력밥솥 하나와 라면 스무 봉지가 꽉꽉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븐 바투타는 폭탄을 만들 의도가 없었다고 항변했으며, 라면이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아니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정보국 직원들은, 머나먼(그러나 어딘지는 제대로 알 수 없고,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던) 엄청나게 가난한 어느 나라의 십대들이 한쪽 어깨에 구소련에서 쓰다 버린 구식 소총을 멘 채, 쓰러져가는 담벼락에 기대어 컵라면을 먹고 있는 영상을 보여주며 자백을 강요했다. 영상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븐 바투타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건 온 세계를 놀라게 한 테러 미수 사건이었고, 라면이 악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로 자리 잡았다.

결국 어느날부턴가 라면은 죄와 타락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대도시를 빠르게 걷던 시민들은 문득 편의점 유리창 너머를 쳐다봤고, 그 안에 쭈그리고 앉아 라면을 먹고 있는 추레한 차림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잠재적인 범죄자였으며(아무 생각 없이 후루룩 마셔버린 국물 속의 유해물질이 뇌에 침투하여 반사회성과 폭력성을 부추길 게 확실했으니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해치는 인간들(그러다가 종국엔 각종 성인병에 걸림으로써 공공의료보험의 재정악화를 앞당기는 데 기여할 것이므로)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에 반론을 제기한 이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바보야, 문제는 라면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또한, 만약 정말로 라면이 세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면, 라면이 아직 없던 시절 이 지구 전체를 휘감았던 폭력과 우울의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느냐고도 질문했다. 거기에 합세하여, 얼큰한 국물 맛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라면 애호가들과, 개인은 각자 자신이 먹을 음식을 선택할 자유가 있으며 국가는 그런 것에 간섭해선 안된다고 믿는 약간의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라면이 아닌 다른 음식은 먹을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던 일부 청소년들과 독거노인층이 한데 뭉쳐 라면 유해론에 반대하는 기이한 한 팀을 이루었던 것이다(이들이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온라인상에 만들었던 사적 모임이 후일 라면동호회의 근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즈음부터 인류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대신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탐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만약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면 그의 영혼 역시 세상에서 가장 고결할 것임을, 그리고 그의 지능이나 그의 미래, 그밖의 모든 것 역시 완전무결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대형마트의 식료품 코너가 새로운 명상의 장소로 급부상했는데, 그곳에선 남녀노소를 불문한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당근이나 브로콜리 같은 걸 손에 든 채 웰빙(well-being)에 대한 한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곤 했기 때문이다.

 

W시 외곽 공원묘지에서 편히 잠자고 있던 김기수씨를 세상으로 다시 불러낸 건, 당연히 라면동호회였다. 소수의 박해받는 무리들이 언제나 그러했듯 라면동호회 회원들의 결속력은 엄청났는데, 그런 끈끈한 유대감과 세상에 대한 투쟁정신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선 구심점이 되어줄 (전설적이고도 영웅적인) 인물이 필요하다는 게 제34차 총회에서의 결의사항이었다. 그리고 혹시 이미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안건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바로 폐지수집상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인호군()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 오후, 폐지를 반쯤 실은 트럭을 공터 한구석에 세워둔 뒤 예의 그 컨테이너 박스 휴게실로 들어온 인호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세상엔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예를 들자면 라면금지법안의 통과 같은 것들. 라면은, 그보다 더 오랜 과거에 아편이나 담배가 겪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맞아야 했다. 이제 라면은 어디에도 없었고, 하다못해 집 뒷마당에 솥을 걸고 면을 튀긴 뒤 직접 만든 가루스프를 넣고 끓여 먹는 행위조차 단속 대상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공무원시험은 없어지지 않았고, 기이하게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시험에 응시하고 있었다. 인호군 역시 응시자 중 하나였는데, 그날도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비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탔고, 그다음엔 스프링이 망가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아니, 막 켜려는 찰나였다. 밥상으로 쓰는 테이블의 한쪽 다리를 받치고 있는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을 발견한 것은 말이다. “평소라면 책엔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겁니다. 너무 바빠서 책 같은 건 읽을 겨를이 없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낮엔 아버지 대신 폐지를 정리하고 밤엔 시험공부를 하는데 도대체 언제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어요. 우울한데다 허기지기까지 했는데, 마침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떠올랐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표지의 라면 사진이었다. 붉은 주황빛을 띠는 국물 속에 꼬불꼬불한 면이 들어 있고, 그 위엔 대파와 계란 노른자가 얹혀 있어서 그런지 색감의 대비마저 뛰어났다. “라면? 라면이라…… 난 오래전 그 용어를 꽤 자주 들어봤단 걸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선지, 그리고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더군요. 하지만 무척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전 그 단어가 왜 그리도 낯익은 건지 알게 됐어요. 그렇습니다. 그건 바로 저희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이었습니다.”

인호군의 아버지는 라면공장의 마지막 직원이었다. 그런데 라면이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라면회사들 역시 대거 문을 닫아야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라면회사들은 새로운 업종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국가의 강력한 지원이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그 와중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긴 했지만, 그건 일종의 필요악이나 마찬가지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선 아주 적은 수의 어느정도의 불행은 불가피한 법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인호군의 아버지는 곧 새로운 업종으로 전환될 공장 앞에서 새로운 일에 종사하게 될 남은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며 터덜터덜 걸어나와야 했다. 인호군의 아버지가 그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한 뒤 W시 외곽에 정착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겪은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인호군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조용히 자취를 감춰준 것이 그 구구절절한 사연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그는 천성이 선량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은 너무나 공평하여 열심히 땀 흘려 일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보란 듯이 잘살 수 있을 거라는 순수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인호군의 아버지 역시 라면이 사라지기 직전의 과도기에 길을 걷다가 슬쩍 편의점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혀를 쯧쯧 차면서, 옆에서 같이 걷던 어린 인호군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대낮부터 라면이나 먹고 있는 한심한 꼴이라니. 우리 젊을 땐 저러지 않았어. 암, 얼마나 부지런했다고.”

어쨌든 뒤늦게 모든 걸 기억해낸 인호군은, 이제는 요양원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는 아버지에게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을 보여주며, 이 책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오래전 라면공장에서 일했던 시절을 잊지 못해 가지고 있는 거냐고도 물었고, 혹시 이 책에 나오는 라면가게 주인 김기수씨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는지도 물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아버지, 라면을 기억하세요? 도대체 어떤 맛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는 책의 중간쯤을 펼쳐 보였는데, 그 페이지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인호군은 거기에 밑줄을 두번이나 그어둔 상태였다).

 

이런 극한의 추위도/라면 한 그릇이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

 

물론 나중에 인호군은 그 문장이 김기수씨의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어느 영화의 대사 한마디를 비슷하게 베낀 것임을 알게 됐다(원작 영화에서 극한의 추위를 이기게 해주는 건 닭튀김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가 라면동호회의 가장 열성적인 회원이 된 데에는, 김기수씨의 저 문장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버지는 저의 모든 물음에, 그저 천장만 계속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진짜로 라면을 먹으면 저 엄청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땐 아주 잠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실제로 그날은 무척이나 추웠습니다. 밖엔 눈보라가 치고 있었고, 먹어보진 못했지만 정말이지 라면 한 그릇만 있다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것 같은 그런 날이었어요.”

 

*

 

김기수씨는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 분야의 기네스북 신기록을 수립할 뻔한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에서 그렇게 밝히기도 했지만, 인호군이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어느 오래된 신문(한국식음료협회의 기관지 형식으로 일주일에 한번 발행되던 『식품음료신문』을 말한다)의 부고에도 김기수씨는 그렇게 소개되어 있었다. 여하튼 인호군은 그 부고를 프린트하여 새로 마련한 스크랩북에 풀로 붙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한국라면협회 W시 지회 부회장인 김기수씨가 향년 57세로 별세했다.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 분야의 챔피언’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 직전 눈을 감아 더욱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는 고인은, 라면가게 주인으로 살아온 생애를 담담히 회고한 책인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의 저자이기도 하다.”

부고를 읽은 뒤에도 별다른 이유 없이 식품음료신문 홈페이지를 배회하다가, 그 신문에 오래전 연재됐던 「대한민국 식음료 오십년사」라는 특별기획 시리즈를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해, 인호군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필연이었죠. 뭔가에 홀린 듯 클릭을 거듭하다가 결국 그 기사에 도달하게 된 거니까요. 그래서 전, 죽은 김기수씨가 날 그리로 이끌어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대한민국 식음료 오십년사」엔,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의 저자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잔뜩(이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꽤 많이) 실려 있었다. 비록 완벽하게 마무리된 연재도 아니었고, 중반쯤엔 갑자기 중단되더니 그후엔 황급히 다른 시리즈로 대체된 흔적이 역력했지만 말이다.

 

사실 인호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리고 앞으로 알 길도 없겠지만, 그 연재물은 오래전 식품음료신문에서 일했던 한 신입기자의 회심의 역작 같은 것이었다. 입사한 뒤 주로 인물동정란의 부고기사나 써왔던 그가(김기수씨의 부고 역시 그 신입기자가 작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그는, 라면만 27년간 먹었다는 분식집 주인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처음으로 특별기획 시리즈를 하나 맡게 됐을 때 얼마나 의욕에 차 있었을지는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러나 갓 대학을 졸업한데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둥의 말들이 진짜인 줄 알고 살아온 순진한 젊은이가 「대한민국 식음료 오십년사」라는 시리즈를 기획한 편집장의 깊은 속내까지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현대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각종 과자와 빵, 밀가루, 혹은 설탕이나 조미료 등을 생산함으로써 국가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주요 식품회사 창업주들의 전기를 연재하고자 했던 최초의 기획 의도는, 신입기자가 시리즈를 맡은 즈음부터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어느날부턴가 거기엔, 편집장이 기대했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감동적인 재현 대신, 듣도 보도 못한 식음료계 종사자의 숨은 사연 같은 것들이 실재와 허구의 기묘한 경계선상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정독하는 이가 거의 없던데다, 하다못해 식음료업계 관계자들마저도 배달받는 즉시 착착 접어서 냄비받침 따위로나 쓰던 신문이었기에, 그 신입기자는 꽤 오랫동안 마음대로 글을 쓸 자유를 누렸다. 서너달쯤 지난 어느날 문득 궁금해진 편집장이 굳이 그 페이지를 찾아서 펼쳐보기 전까진 말이다. 설탕 대용품 같은 걸 만들어 팔기 시작해서 이제는 한국경제 전반을 이끄는 위치에까지 오른 어느 회장의 입지전적 스토리가 실려 있어야 할 코너에 난생처음 보는 라면가게 주인의 얼굴이 게재되어 있는 걸 본 편집장은 미친 듯이 화를 냈다. 그는, 평생 라면만 먹다가 죽은 식당주인의 얘기 같은 게 왜 「대한민국 식음료 오십년사」에서 다뤄져야 하냐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게 아니고요, 편집장님. 전 그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라면만 27년간 먹었다는 한 사람의 진실 말이에요. 하긴,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식음료 사반세기사 정도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나 기자는 더이상 해명을 계속하지 못했다. 편집장이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나가라고 소릴 질렀기 때문이다. 결국 그 신입기자는 쫓겨났는데, 그가 맡았던 「대한민국 식음료 오십년사」 역시 중단된 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개편되어 새로이 연재되었음은 물론이다.

 

여하튼 인호군은, 그 오래된 기사들(시리즈 중 김기수씨를 다룬 부분은 총 3회에 해당했다. 편집장 때문에 실리지 못했던 마지막 원고가 하나 더 있다는 걸, 그는 한참 뒤에나 알게 된다)을 프린트한 뒤 잘 정리했고, 그런 다음엔 스크랩북에 하나하나 꼼꼼하게 붙였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라면동호회 제34차 총회가 열리는 비밀의 장소(라고 하기엔 좀 평범한 대로변 지하의 술집이었지만)를 향해 출발했다.

 

스크랩 1. 기네스북 월드레코드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김기수씨는 정확히 30세가 되던 해 가을부터 라면을 먹었다. 즉 그가 시장 안쪽 골목에 처음으로 분식집을 내던 1986년부터였는데, 증언에 의하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했던 식사 역시 계란과 파를 듬뿍 넣어 끓인 라면이었으니, 김기수씨가 라면만 먹으며 버텨온 세월은 장장 27년에 달한다는 어마어마한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가 그동안 정말 라면으로만 하루 세끼를 해결했는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독특한 식생활을 증명할 만한 어떠한 객관적인 기록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네스북 한국지부에서 나온 심사위원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분식집을 나서야 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당시 김기수씨가 27년간 라면만 먹으며 살아왔다는 증거로 내놓은 건 스물일곱권의 금전출납부뿐이었다. 김기수씨는 검은 양복 차림에 구형 디지털카메라를 목에 건 심사위원 앞에서 그 낡고 오래된 금전출납부를 한장씩 넘겨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거기에 하루의 매상 및 지출과 함께 매일의 식사 내역과 그에 따른 간략한 소감을 꼼꼼히 기록해왔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자료로는 신기록 인증이 힘들겠군요”라며 심사위원이 난색을 표명하자, 김기수씨가 더욱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내놓은 것은 한권의 책이었다. 겉표지에 계란과 파가 듬뿍 얹힌 라면 사진이 조악하리만치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는 그 책의 제목은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이었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그게 얼마 전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했고, 그중 일부를 꼭 읽어주고 싶다고도 했다. 그걸 들으면 자기가 정말로 27년간 라면만을 먹어왔다는 걸 믿지 않을 수 없을 거라며 자신있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럼,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라면가게 주인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언젠가 구청 문화강좌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옛날에 융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분은 아무튼 무척 훌륭한 교수였다는데, 만약 두가지 일이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거기엔 분명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운명적 관계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다. 그때 강의를 들으며, 난 기쁨에 겨워 무릎을 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 소리에 강사가 깜짝 놀라 내 쪽을 쳐다봤을 정도니 말이다. 그렇다. 그날 나는, 내가 왜 어릴 때부터 라면을 그리도 많이 먹어야 했는지(밥보다 라면을 먹은 날이 훨씬 많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왜 라면가게를 차렸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왜 이렇게 열심히,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 분야의 신기록 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내가 1957825일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듣던 심사위원이, 1957825일이 대체 무슨 날이냐고 묻자, 김기수씨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모르십니까? 그날 일본에선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한국에선 제가 태어났지요.” 그러면서 김기수씨는, 도대체 여기에 왜 다른 증거들이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며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일단 런던에 있는 기네스북 본사에 문의해봐야 한다고 말해줬는데, 어찌나 실망스런 표정을 짓던지 제 가슴이 다 아파오더군요.” 이렇게 말하며 심사위원은 정말로 슬프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면가게에 다녀온 당일 저녁 저는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앉아 메일을 썼습니다. 카메라로 찍어온 금전출납부 사진을 일일이 첨부했고, 이런 경우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 분야의 신기록 인정이 가능한지 문의했지요. 물론 김기수씨가 태어난 날짜가 1957825일이고, 그래서 그게 그의 운명이라는 둥, 뭐 그런 얘기들은 당연히 하지 않았어요. 해봤자 비웃음만 살 테니까요. 답변이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분야는 그리 인기 있는 게 아니거든요. 도대체 요즘 세상에 누가 라면 같은 거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게다가 김기수씨에겐 강력한 라이벌도 있었습니다. 그쪽은 비록 김기수씨보다 한달 늦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지만, 객관적인 증거자료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죠.(그는 경쟁자인 H의 박모 노인이 내놓은 것은 동네 가게에서 2611개월간 라면을 구입해온 영수증 묶음이라는 사실도 알려줬다.) 실은 이런 식의 신기록에 대한 조사가 우리에겐 가장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가령 세상에서 손톱이 가장 긴 사람이라든가 한번에 햄버거를 가장 많이 먹은 사람 같은 항목은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이 가능하거든요. 하지만 신청자 본인이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뭔가를 해왔다고 주장하는 경우엔 난감하기 그지없어요. 증거랍시고 보여주는 자료들도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든다고나 할까요. 박모 노인만 해도, 그 영수증 묶음이 삼시 라면만 먹었다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질 순 없는 거거든요. 결국 이런 케이스엔 심사위원인 우리의 주관적 판단이 십분 개입하게 됩니다. 여하튼, 본사의 답변을 기다리는 도중에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 당장 확답이 온다 해도, 김기수씨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상 타이틀은 자동적으로 라이벌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에요.” 기네스북 한국지부 심사위원이라는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고, 그런 다음엔 신기록 신청자는 점점 늘어나는데 직원은 여전히 자기 혼자라는 둥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하긴, 요즘엔 어디나 다 그렇겠지만요.” 그러면서 그는 비좁고 지저분한데다 각종 서류더미로 뒤덮인 사무실을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은, 김기수씨가 27년간 라면만 먹어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김기수씨도 여기 기록되고 싶었겠지요. 기네스북 월드레코드사에서 매년 발행되는 800쪽짜리 책 어딘가에 공식적으로 이름이 실리는 사람들이 어디 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기사를 스크랩하며 인호군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조사한 바로는, 실제로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만들어진 날은 김기수씨가 알고 있던 1957825일이 아니라 그 다음해인 1958825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일본의 이케다라는 소도시에서, 안도 모모후쿠가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김기수씨의 착각에 대해 조용히 넘어가기로 한다. “중요한 건 실제로 27년간 라면을 먹었다는 사실 아닌가요? 그게 본질이니까요. 나머지는 뭐,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크랩 2. 세상의 모든 영수증

 

김기수씨와 그 라이벌인 박모 노인이 2005년 「세상에 저런 일도」라는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흥미 위주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인 그 프로그램에서, 박모 노인과 김기수씨는 제35회 방송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미원 없인 못 사는 할머니’와 그에 이어진 기나긴 보험광고 끝에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어쨌든 거기서 리포터는,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하루 세끼 라면만 드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먼저 대답한 사람은 박모 노인이었다. 그는 한동안 먼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어느날 갑자기 밥을 못 먹게 됐어. 아마 1986년부터였을 거야. 그래 맞아. 아시안게임 어쩌고 하던 때니까, 확실해. 어느날 저녁 아홉시 뉴스를 봤는데,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밥이라곤 한 숟갈도 못 뜨게 됐지.” 그런 증세가 그날 본 뉴스 내용과 관계가 있느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노인은 또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도 잘 몰라. 그게 그러니까…… 우루과이에서 무슨 협상이 시작된다는 뉴스였는데, 내가 우루과이가 어딘지 아나? 하여튼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싶어 병원엘 가도 아무 이상도 없다고만 하니 답답할 따름이었지. 가을이라 추수도 해야 하는데 그러고 몸져누워만 있으니까 보다 못한 마누라가 읍내에 가서 라면을 사왔어. 거 왜, 옛날엔 그걸 다들 삼천만의 영양식이라고 했잖아. 허, 그런데 신기하게도 냄비에 든 라면을 보니 입맛이 돌더라고. 그날, 앉은 자리에서 한 그릇 다 먹고 국물까지 후루룩 마셨지. 그런 다음엔 털고 일어나서 추수도 무사히 마쳤고. 그래, 그때부터였어. 라면만 먹기 시작한 게 말이야.” 그러면서 노인은 마당 뒤편의 창고로 리포터를 데리고 갔다. 문이 열리자, 창고 한쪽 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라면박스들이 보였다. “할아버지, 이 정도면 전쟁이 나도 걱정 없겠는데요?” 리포터의 호들갑스러운 질문에 박모 노인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년 전 겨울 폭설이 내린 적이 있는데 그때 읍내에 나갈 수 없어서 라면을 구하느라 고생했다는 얘길 덧붙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방송에서도 김기수씨는 한결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왜 날아가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라면을 왜 먹느냐고 한다면, 그저 제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면은 맛도 좋은데다 몸에도 좋습니다. 게다가 조리가 간편하여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지요. 따라서 저는, 라면이야말로 바쁜 현대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음식이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필수적인 식량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김이 펄펄 나는 라면 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 보이며 활짝 웃는 것이었다.

(원래 『식품음료신문』의 신입기자는 여기에 이런 문장들을 덧붙였었다. “문득 휴대폰 벨이 울렸다. 잠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그때 난 인터넷에서 겨우 찾아낸 김기수씨와 박모 노인의 영상을 시청 중이었는데—전화를 받으며 보니, 그렇게 정지된 화면 속에선 라면가게 주인의 얼굴이 좀 달라보였다. 뭐랄까. 찡그린 것 같다고나 할까. 나는 그 정지화면을 아주 오래도록 들여다본 뒤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는 원고를 보내기 전 그 부분을 삭제했다. 그는 기자였지 소설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 분야의 신기록 타이틀은 박모 노인에게 돌아갔다. 김기수씨가 죽은 뒤로도 매일 삼시세끼 라면만 먹은데다, 영수증 역시 꾸준히 모았기 때문이다. 천수를 누린 노인이 죽기 얼마 전, 이제는 좀 늙어버린 기네스북 한국지부 심사위원이 여전히 그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를 목에 건 채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심사위원의 손엔 신기록 인증서와 그해 발행된 856쪽짜리 기네스북 한권이 들려 있었다. 노인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책 623쪽에 실린 자신의 이름을 쓰다듬었다. “이러려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라고 말할 땐 목이 메기까지 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노인이 영수증을 모은 것은 기네스북 도전을 위한 게 아니었다. “장인어른은 원래 그렇게 꼼꼼한 분이셨습니다. 이걸 보세요.” 장례식장에서 박모 노인의 맏사위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가 내놓은 것은, 노인이 살아생전에 목숨처럼 아꼈다는 커다란 마분지 상자였다. 그 안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모두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거기엔 노인이 팔십 평생 모아온 각종 영수증들이 연도별, 용도별, 발행처별, 계절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주 노릇을 하고 있던 사위는, 그의 장인이 아주 오래전 어느날 영수증을 잃어버려서 수도요금을 두번 낸 뒤로 이렇게 모든 영수증을 모으는 버릇이 생겼다며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고, 그런 다음 상자를 조심스레 관 옆에 내려놓았다.

 

스크랩 3.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

 

어느 교수 겸 방송인이 진행하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하지만 않았어도 김기수씨가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거라는 게, 당시 그를 아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의견이었다. 그는 과량의 수면제를 라면에 녹여 먹은 뒤 잠자듯 숨을 거뒀다. 경찰은 김기수씨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결론지었으나,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주방보조이자 라면가게의 유일한 종업원이었던 허삼식은 그가 결코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다만, 너무 피곤해서 한숨 푹 자려다가 그만 실수로 치사량의 약을 먹은 게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또다른 지인들은, 하긴 산전수전 다 겪은 김기수씨가 겨우 그깟 일 하나 때문에(방송출연 당시 겪은 일) 수면제를 삼켰을 리가 없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김기수씨는 빠르게 잊혀졌다. 사실 지방소도시 라면가게 주인이 어떤 이유로 죽었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주인이 갑자기 죽어버린 뒤 텅 비어 있던 라면가게는, 그로부터 몇년 후 재래시장이 현대적인 종합쇼핑몰로 재개발될 때 헐리는 수순을 맞이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날, 그러니까 그 오래된 단층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나왔던 날, 멀리서 누군가가 “안돼, 잠깐만!”이라고 외치며 허겁지겁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이런 일에 흔히 따라붙는 철거 반대 시위자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보니 그는 시위대치곤 너무 나이가 많아 보였고 무엇보다도 혼자인 게 확실했다. 주변에서 팔짱을 끼고 그 사태를 지켜본 몇몇 시장상인들에 의하면, 뒤늦게 나타나 “제발 들어가게 해주시오”라고 애원한 그 남자는 예전의 주방보조 허삼식이었다. 얼굴이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 결국 그 늙어버린 주방보조는 아주 잠깐 동안 철거 직전의 라면가게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전기가 끊긴 지 오래되어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식당 안에서 망연자실한 듯 서 있었고, 그런 다음엔 녹슨 철제 의자와 테이블 다리를 손으로 쓸어봤으며, 마지막으로 먼지가 뽀얗게 덮인 카운터로 천천히 다가갔다고 한다. 그러고는 그때까지도 거기 쌓여 있던 스물일곱권의 금전출납부와 표지가 다 닳아버린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을 챙겨, 들고 온 마분지 상자에 소중히 담더라는 것이다. 이후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좀 엇갈리는데, 어떤 이들은 그가 철거반원들에게 “그럼, 수고들 하시오”라는 인사를 남기고 처음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가 별다른 인사 없이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리며 원래 나타났던 방향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다시 토크쇼 얘기로 돌아가자면, 원래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모 대학 겸임교수였던 그 방송인은 2000년대 들어 급증한 식생활 관련 프로그램에 잠깐씩 얼굴을 내밀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약간의 학술적인 멘트만을 남긴 뒤 금세 화면에서 사라지던 그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한 종합편성채널이 주도하던 라면추방운동에 동참하면서부터였다. 거기서 그는 피디와 함께 라면의 주 소비층이 몰려 있다는 도시 빈민가를 매주 탐사했다. 거의 모든 방송에서 언제나 똑같은 결론을 유도해냈음에도 불구하고(프로그램 말미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엄숙하고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명심하십시오. 라면은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탐사고발프로그램은 회를 거듭할수록 인기를 더해갔다. 하긴, 확실히 그 방송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는데, 만약 라면만 없어진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도 다 사라질 거라는 희망 섞인 믿음을 매회 심어주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유명해진 식품영양학자 겸 방송인은 나중에 모 방송사의 식생활 집중 토크쇼의 단독 진행자가 되는데, 김기수씨는 죽기 얼마 전 바로 그 쇼의 첫번째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애 두번째 텔레비전 출연을 앞두고 잔뜩 흥분한 라면가게 주인이 한껏 멋을 낸 차림으로 방송국 정문을 들어설 때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닥칠 비극적인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막상 녹화가 시작되었을 때, 진행자는 날카롭고 비판적이면서도 단호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연달아 던져댔고(아직까지 남아 있는 동영상을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그 앞에서 김기수씨는 그저 이마의 땀만 닦으며 무릎에 놓인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을 접었다 폈다 할 뿐이었다(결국 방송이 끝나갈 즈음, 그 책의 표지는 완전히 닳아버리고 만다).

여기서 라면 유해론자였던 교수 겸 방송인과 27년간 라면만 먹으며 살아온 분식집 주인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김기수씨가 약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 그런 다음 방송 내내 만지작거리던 자신의 유일무이한 저서를 옆구리에 낀 채 스태프들과 청중 사이로 천천히 걸어나가더라는 것 정도만 밝혀두면 되지 않을까.

 

*

 

편집장에게 해고된 신입기자는 오랜 뒤에, 독특한 시각으로 지방의 숨겨진 역사를 재조명한 저서 ‘W3부작’으로 이름을 알렸다. 유명해진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학계의 비주류로 자리잡는 데 성공하긴 했다는 거다. 그는 네번째 책을 쓰기 위하여 당시에 사회문제화되어 있던 라면동호회를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도 그 기이한 지하조직(그들이 집 뒷마당이나 베란다 한구석에 검은 무쇠솥을 걸고 직접 라면을 제조해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극한의 추위도 라면 한 그릇이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가 그 조직의 모토라고 했는데, 또 어떤 이들은 김기수씨가 자서전의 맨 마지막에 썼던 말인 “나는 끓였고 사람들은 먹었다”가 그들의 진짜 모토라고 우기기도 했다. 여하튼 워낙에 베일에 싸인 조직이다보니 뭐 하나 제대로 알려진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라면을 만들어 먹자는 반정부적이고 위험한 발상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이젠 사회의 어떤 징후 같은 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의 리더가 W시 출신이라는 풍문이 전직 기자인 향토사학자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점조직으로 되어 있다는 라면동호회에 천신만고 끝에 가입했고, 그다음엔 엄청나게 열심히 활동함으로써 운영진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비밀을 내어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그건 바로 연재가 중단되어 싣지 못했던, 「대한민국 식음료 오십년사」의 마지막 원고였다) 조직의 리더가 된 인호군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 둘은 인호군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던(그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다고 했다. 그는 공무원시험 같은 건 애당초 포기했다며 피식 웃었으나 테이블엔 아직도 각종 문제집들이 쌓여 있었다) W시 외곽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만남을 가졌다. 여러가지 이야기 끝에 그 향토사학자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은 왜 하필이면 김기수씨를 동호회의 구심점으로 택했습니까? 실제로 신기록을 수립한 사람은 박모 노인인데 말입니다.” 그러자 인호군은 사학자에게 커피믹스를 탄 종이컵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역시 처음엔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김기수씨로 하느냐, 박모 노인으로 하느냐를 두고 말이에요. 개중엔 그런 영웅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이 왜 굳이 필요하냐며 아예 반대한 사람도 있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죽은 김기수씨에겐 박모 노인에겐 없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라면이 곧 운명인 자 특유의 그 느낌……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리에겐 바로 그런 이미지가 필요했던 겁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면서 인호군이 꺼내 보여준 것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흰색 티셔츠였다. “김기수씨의 캐리커처예요. 앞으로 라면동호회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겁니다. 어떻습니까, 원한다면 한장 드릴 수도 있어요.” 향토사학자는 그 티셔츠의 프린트를 의아하다는 듯 한참동안 들여다봤다. 그가 알고 있던 자서전 표지 안쪽의 사진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건……?” “그래요, 사실 그건 우리 동호회 멤버 중 하나의 얼굴이에요. 아무래도 실제 사진보단 이쪽이 훨씬 잘 어울리니까요. 하지만 그게 또 뭔 상관입니까? 중요한 건 김기수씨가 라면만 27년간 먹은,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사실 아니겠어요?”

취재가 끝난 뒤 향토사학자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발을 벗고 자동차 열쇠를 탁자에 올려놓은 다음에야 그는, 인호군에게 약속한 원고를 건네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김기수씨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는 한 만두가게 노인과의 인터뷰를 기록한 글이었는데, 당시 그는 특히나 다음과 같이 끝낸 마지막 문단에 애착을 가졌었다(사실 그 문단이 너무 마음에 들어, 연재가 중단된 것을 더욱 슬퍼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연신 찜통에서 만두를 꺼내 유리장 앞에 진열하고 있었다. 나는 김기수씨가 죽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만두를 먹었고,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며 넌지시 물었다. “예전에 김기수씨가 여기서 장사를 할 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끼 라면만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왜 그랬던 건지, 혹시 짐작 가는 이유 같은 건 없으세요?” 거대한 밀대로 반죽을 밀던 노인은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이유? 아니,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라면가게를 하니까 하루 세끼 라면만 먹은 거지. 난 지금도 하루 세끼 만두만 먹는다고.” 그러면서 노인은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는 듯 혀를 찼다. 만두값을 치른 뒤 가게 밖으로 나온 나는 어두침침한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찜통에선 여전히 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뒷주머니에 꽂고 있던 그 종이뭉치를 책상 아래 둔 마분지 상자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인호군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약속했던 원고를 주겠다고 말할까도 생각했지만, 곧 머리를 흔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향토사학자는 인호군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라면동호회 본부(알고 보니 그 컨테이너 박스였다)가 경찰의 급습을 받아 와해됐다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어쨌든 거기서 경찰은 몇개의 솥과 식용유 두통, 그리고 밀가루 서너 포대 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라면이 사라졌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라면은 그후로도 언제까지나 명맥을 이어갔고(지금도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이면 어딘가에서 라면 끓이는 냄새가 지표를 뚫고 피어올라 지나가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지 않은가) 김기수씨의 기일엔 매년 꽃이 놓였다. 물론 어쩌다가 간혹 놓이지 않는 해도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