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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위풍당당』 『단 한 번의 연애』 등이 있음. songsokze@hanmail.net
장편연재 2
투명인간
만수는 나보다 두살 위니까 형은 형이다. 이십대 중반까지도 나는 만수를 부를 때 이름 뒤에 ‘형’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다. 어릴 때는 덩치가 나보다 작았고 머리가 나빴다. 나와 만수 둘 중 하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것처럼 생김새가 달랐고(물론 내 눈에는 만수가 우리집 육남매 누구와도 닮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습관이나 태도, 학습능력 등 여러 면에서 대조를 보였다. 수준이 낮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이 형 같지 않았으니까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러느라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다.
언젠가 우리 둘이 산에서 나물을 캐서 가져왔을 때 할아버지가 그랬다. “우얘 두 형제 년석이 뜯어온 나물이 저희 하나하나를 닮아 뺐구나.” 그때 만수가 들고 있던 건 참당귀였고 내가 들고 있던 건 개당귀였다. 만수가 가져온 참당귀는 맛있는 나물이지만 아주 구하기 힘들고 내가 들고 온 개당귀는 흔하지만 독이 있어서 잘못 먹었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 했다. 결론적으로 할아버지는 나에게 개당귀 같은 독종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 중 한 사람에게는 참당귀가, 또 한 사람에게는 독초인 개당귀가 손에 들리게 된 건 사실 우연이었다. 우리에게는 참당귀와 개당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전에 내가 참당귀를 가지고 오고 형이 개당귀를 들고 온 적도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이 형답지 않아서 형 대접 안한다는 이유 말고는 할아버지에게서 그런 차별을 당할 만한 일이 없었다. 아니다, 형이 워낙 착하고 순진하기 때문에 평범한 내가 독종으로 보인 것이다. 형이 돌대가리고 멍청하니 나는 똑똑하고 영악해 보이는 것이다. 떨어져 있으면 모를 일인데 형제라고 묶여 있으니 남들은 형에게서 선량함을 보고 내게서는 악랄함을 보았다. 그러니 내가 만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조건 내가 만수를 싫어하고 우습게 본 건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둘 말고는 누구도 모르는 계기가 있다.
내가 학교 들어가기 직전 겨울, 동네 형들이 겨울방학 때 계곡의 큰 소(沼)에 스케이트장, 아니 썰매장을 만들었다(당시에는 썰매를 스케이트의 일본식 발음인 ‘수게또’라고 불렀고 실제로 썰매장은 ‘수게또장’으로 불렸다). 읍내 가까운 데는 넓은 논에 물을 대 얼린 뒤에 새끼줄을 둘러쳐 만든 썰매장이 생겨나 있었다. 만국기를 달고 스피커로 팝송, 유행가까지 틀어주면서 스케이트와 썰매 타는 어른,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고등학교 때 보니 그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 노래 가사에 이런 것도 있었다.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영화/선녀처럼 스케이트 타던 영화와/부딪치고 나서 미안하다 말하자/무표정했던 영화/그후 우리는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같이 얘기했죠/우리의 사랑이 움틀 때면 삼월이 오겠죠/그리고 오월이/라라라라라라라’—사월과 오월 「영화를 만나」). 물론 입장료를 받았고 군고구마와 오뎅 같은 것까지 만들어 팔았다. 겨울에는 별 볼 일 없이 놀고먹던 솜사탕, 뻥튀기, 번데기 파는 장수에 야바위꾼까지 몰려들어 장터나 운동회를 연상케 했다.
썰매장이 인기가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스케이트를 타러 여학생이 오기 때문이었다. 그 여학생을 따라 스케이트가 없는 친구들까지 오고 여학생과 그 친구들을 보러 남학생들이 몰려왔다. 결국 스케이트를 타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건전한 이성 교제’에는 목을 맨 청춘 남녀들이 몰려들어 썰매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개운리 계곡의 썰매장은 그걸 모방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개운리 깊은 산골짝의 썰매장까지 찾아올, 찾아온 여학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아무리 눈 쌓인 아름다운 풍경의 숲 속에 여학생 입장료 면제인 스케이트장이 있다 한들 오가는 길이 너무 멀었고 차편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읍내 사는 여학생 중에 개운리 골짜기에 썰매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개운리에 사는 읍내 여학생 또래의 처녀들은 집안일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남자애들이 득시글대는 썰매장에 가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다. 그러니까 여학생, 혹은 여학생 친구들과의 건전한 이성 교제를 염두에 두고 썰매장을 만들자고 최초로 제안한 동네 형이나 그에 동조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가 계곡을 때려막은 뒤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친 형들이나 제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게 당시 개운리에 거주하는 청춘들의 지적 수준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다.
여학생커녕 여자애 하나 볼 수 없는 계곡 썰매장이 개장한 이후 나는 아침이면 무조건 썰매장으로 갔다. 동네 안에는 같이 놀 아이들의 씨가 말랐으므로 남자애들은 걸음마만 할 수 있으면 썰매장으로 향했다. 썰매가 있든 없든 간에. 가서는 미끄럼을 타고 얼음판 위에서 서로를 자빠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썰매도 타고 팽이를 치고 연을 날렸다. 그냥 잔치마당 같은 그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혼자 썰매를 타기엔 너무 어렸고 전용 썰매도 없어서 누가 태워주거나 해야만 탈 수 있었다. 만수는 썰매를 타며 노느라 바빠 내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 역시 만수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때 나는 불장난이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장난에도 난이도와 나이에 따르는 등급이 있다.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뚫고 끈을 매단 뒤 안에 불을 넣어서 빙빙 돌리며 자유롭게 이동하는 불깡통 놀이가 가장 고난도의 고급 불장난이었다. 그건 그런 깡통을 만들 수 있는 나이의 형들만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불깡통을 공중에 던져올리는데 그 때문에 제 머리칼과 옷 속에 불똥이 쏟아져들어가는 불상사를 예방할 수 있어야 했다. 나뭇가지, 풀에 불을 붙여서 들고 다니며 썰매장 주변의 풀이나 억새 같은 데 불을 지르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가장 하급의 불장난에 속했다. 이미 남들이 다 태워먹고 난 뒤여서 재미가 없었다.
보통은 돌을 둥그렇게 쌓아 아궁이를 만들고 그 속에 불을 피우는 방식으로 불장난을 했다. 돌을 얼마나 정교하게 쌓는지, 어떤 나무로 연료를 만들고 오래도록 꺼트리지 않고 불을 지피는지에 따라 각자의 기술과 재능과 성격이 드러났다. 불이 타고 난 뒤에 나오는 숯까지 있으면 최고로 쳤다. 어른들이 진짜로 숯가마에 나무를 넣고 태워서 숯을 만드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면서 살림살이를 흉내 내는 것처럼. 그날도 나는 작은 돌로 나만의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썰매장에서 얼음을 지칠 수 있는 도구는 썰매와 스케이트였다. 개운리 같은 산골에 스케이트가 생겼던 것은 군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파병된 청년들이 받은 목숨 수당을 집으로 송금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부모들은 그 돈을 일단 장롱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다. 그런데 평소에 스케이트 타는 여학생을 사모하던 어떤 철없는 작은 아들이 그 돈을 훔쳐가지고 읍내로 가서 스케이트를 샀다. 무슨 자랑이라고 읍내에서부터 개운리까지 스테인리스 날을 번쩍거리며 스케이트를 목에 걸고 걸어왔다. 그러자 동계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온 스케이트 선수가 공항에서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효과가 개운리의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나타났다. 스케이트가 최신식 낫 같은 유용한 농기구가 아니라 한겨울에 제한된 장소에서나 탈 수 있는 놀이기구라는 것을 부모들이 깨닫기 전까지 그와 비슷한 일이 네댓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어쨌든 썰매장에는 부모의 몽둥이세례에도 몸을 부지하고 그 스케이트를 타는 형들이 몇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합이 벌어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시합은 수십대의 썰매 주자 사이에 벌어졌다.
썰매 시합에 참가한 썰매는 쇠날이 달린 것과 철사로 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만수가 타고 있는 썰매는 백수형이 일부러 대장간까지 가서 사온, 스케이트 날과 비슷한 모양을 한 무쇠날을 장착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단단하고 가벼운 소나무에 대못을 박아 만든 송곳 한 쌍까지 갖추었다. 동네 어느 누구도 아닌 백수형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썰매는 굵은 철사를 바닥에 대고 못을 박아 고정했고 철사조차 없이 나무로만 된 것도 있었다. 개운리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타고 놀 썰매를 만드는 데에 돈을 들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썰매 수십대가 출발하는 곳의 반대편 둔덕에서 불장난에 열중해 있었을 뿐이었다.
썰매에 탄 스무명가량의 선수들은 동네 어귀에 살며 맨 처음 썰매장을 만들자고 제안한 정재호의 출발신호에 따라서 시합을 개시했다. 우승자는 군고구마 세개를 상으로 받게 돼 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승자라는 영예였다. 만수는 저학년이었고 힘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개운리 최고의 공학자이자 과학자인 백수형이 제작해준 썰매와 송곳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속도는 빨랐다. 썰매날이 투트트트특 하는 소리를 내며 얼음 위를 지나가고 난 다음 철사줄을 댄 썰매들이 낑낑거리는 신음을 내며 뒤를 따랐다. 송곳에 찍혀 얼음이 하얗게 가루 져 공중에 날렸다.
오학년 최경재와 이학년 만수가 선두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경재는 외발 썰매를 타고 있었다. 학교의 교사 신축현장에서 철근을 훔쳐서 대장간에 가져다주면 도둑에게 썰매날을 한쌍 만들어주고 남는 쇠는 공임으로 제했는데 경재는 날을 하나씩 달아 두대의 썰매를 만들고 하나는 동생 덕재에게 주었다. 외발 썰매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해 만수 동갑인 덕재는 아직 제대로 타지를 못하고 있었다. 경재는 역시 학교 공사판에서 훔쳐온 각목으로 송곳을 만들기도 했다. 각목 송곳은 손에 쥐기에 너무 두껍고 무거웠다. 그 썰매, 그 송곳을 가지고 경재는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던 중에 한번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경재가 여유있게 우승했을 것이었다. 나는 물론 불장난에 빠져 있었을 뿐 이런 사정을 몰랐다.
만수는 무릎을 꿇고 썰매를 타던 평소의 자세가 아니라 속도를 내기 위해 일어서서 기마자세를 취했다. 썰매는 천리마처럼 힘차게 달렸고 송곳은 채찍처럼 공중을 가르며 얼음을 찍어 속력을 가했다. 오합지졸 같은 다른 썰매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나는 불길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피하려다 썰매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만수가 나를 향해 송곳을 들고 춤을 추듯 하며 뭐라고 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뭐? 뭐?
나는 귀에다 손을 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하지만 만수의 말은 들리지 않고 썰매는 철기병 군단처럼 무섭게 다가들었다. 경재는 입을 꾹 다물고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는데 선두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만수 혼자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왜?
—뭐라고?
얼음이 썰매에 갈리고 눌리고 송곳에 부서지며 차차착 하고 숨가쁜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이들의 입에서는 김이 솟아올랐다.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커졌고 썰매들은 점점 가까이 왔다.
—왜? 왜?
말하는 순간 만수가 나를 덮쳤다. 눈밑이 따끔하더니 순식간에 불로 달군 송곳으로 지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까부터 비키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만수의 송곳 끝에 달린 대못이 내 오른쪽 눈 아래를 정통으로 찔렀다. 조금만 옆으로 갔어도 눈알이 찔렸을 거다, 눈알 속에 뇌가 있는데 거기까지 찔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넌 죽었을 거다, 살아도 애꾸눈을 면치 못했을 거다, 하고 나를 둘러싼 형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피가 펑펑 솟아나왔다. 나는 불붙은 막대기를 든 채 우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비키라니까, 그렇게 말해도 모르고 서 있냐……
만수는 내 얼굴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가 제 눈물을 닦다가 하면서 중얼중얼 말했다. 나는 계속 울고 또 울었다.
—너 있잖아, 집에 가서는 그냥 나뭇가지에 찔렸다고 해. 안 그러면 알지?
상처에서 피가 멎고 나서 만수는 시커먼 주먹을 내 눈에 들이대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수는 상으로 탄 군고구마를 내게 전부 다 주고 보는 앞에서 먹게 했다. 그걸 먹으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었다. 먹지 않으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나는 군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었다. 볼이 맹꽁이처럼 부풀고 목이 미어지고 배가 터지도록 부풀어오르게 먹고 또 먹었다. 내가 만수를 무서워한 것은 그때 한번뿐이었다. 그때의 두려움과 수치심은 만수와 단 둘이 있을 때의 어느 순간에 우연히 되살아나곤 했다. 만에 하나, 그러니까 0.01퍼센트의 확률로. 그외의 시간에 내가 만수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 서기 시작한 지 십년 만에 나는 고향인 M군 M읍 남쪽에 있는 국민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렵게 살았다. 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부르는 교사라면 국가가 신분을 보장하는 교육공무원이고 중산층인데 실상은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수준이었다. 치맛바람이며 촌지라는 것을 보기 힘든 시골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모아 집 장만하고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나마 고향에는 도움을 받을 집안 어른들과 친척이 있고 쌀이며 채소 같은 농산물을 거저 가져다 먹을 수 있어서 살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교육자로서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쳐보자는 의욕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의욕을 꺾는 게 교사에게 부과된 잡무였다. 학업과 관련 없이 시키는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근면저축운동이며 혼분식운동, 독서생활화운동처럼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것도 있었고 송충이 잡아오기, 곡식 이삭 주워오기, 잔디씨 훑어오기, 코스모스 모종 마을길에 심기처럼 지역 특성에 따라 학교장 재량으로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하필 위생관념이 유난스러운 교장이 부임해서 일주일에 한번 교사(校舍)전체 물청소, 사흘에 한번 유리 청소를 하도록 했고 운동장 청소와 공동변소 청소는 각 반이 돌아가면서 매일 하도록 했다.
‘용의검사’라는 것도 수시로 실시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이 트거나 갈라져 있었고 콧물 묻은 소매는 때로 반질반질했다. 손톱은 시커멓고 옷 또한 빨래를 자주 하지 않아 더러웠다. 머리는 기계충으로 허연 분칠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으니 용의검사를 하면 안 걸리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다른 교사들과 의논해서 날이 따뜻해진 날 아이들을 데리고 인근의 냇가나 도랑으로 가서 옷을 벗게 한 뒤 물속으로 밀어넣었다. 때를 벗기기 위해서였다. 평생 처음 온몸을 물에 적신다는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런 중에도 반백년 교사생활에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다. 혼분식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학교에서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흰쌀밥으로 싸오지 못하게 했고 음식점에서도 흰쌀밥을 파는 것이 금지됐다. ‘무미일(無米日)’이라 해서 일주일에 이틀 오전 열한시에서 오후 다섯시까지 쌀이 아닌 밀가루 같은 것으로 만든 음식만 먹도록 법으로 강제하기도 했다. 교장은 읍내 네개 초등학교에서 맨 먼저 혼분식운동 참여율 백 퍼센트에 도달해야 한다고 아침마다 교사들을 닦달해댔다.
점심시간마다 담임교사가 교실로 가서 아이들의 도시락을 일일이 검사했다. 일제히 도시락 뚜껑을 열게 하고 밥에 적절하게 보리와 콩 같은 잡곡이 섞여 있는지 보는데 밥 맨 위만 보리밥으로 살짝 덮어서 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도시락을 뒤집어보라고 하기도 하고 숟가락으로 파보기도 했다. 나는 검사 결과 기준에 미달된 아이들의 손바닥을 회초리로 따끔하게 세대씩 때렸다. 아이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경각심을 돋우는 의미에서 약간의 매질은 교육적 효과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손바닥을 맞은 아이들은 다시는 쌀밥을 싸오지 않았다. 나는 남들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어떤 분야에서도 내가 담임하는 반이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하기를 바랐고 그건 혼분식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반 아이들의 삼분의 일가량이 아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단순히 도시락 싸오는 아이들을 기준으로 혼분식운동 참여율을 따지면 우리 4학년 6반이 제일 먼저 백 퍼센트에 도달했으나 절대적인 수치로는 칠십 퍼센트를 넘을 수가 없었다. 왜 우리 반만 도시락을 못 싸오도록 집이 가난한 아이가 다른 반보다 많은지 알 수 없었다.
신문을 보니 전국에서 서울의 초중고등학교가 제일 먼저 혼분식운동 참여율 백 퍼센트에 도달했다. 서울에서 쌀이 나는 것도, 밀 보리가 생산되는 것도 아니고 서울의 부모들이 가난하지 않거나 바쁘지 않거나 한 것도 아닌데. 교감은 교무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게시판을 세워놓고 학년별 반별로 그래프를 그려서 매일 혼분식운동 참여율을 체크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4학년 전체에서 우리 반만 빼고 참여율 구십 퍼센트를 넘던 날, 동료 교사들이 사환을 시켜 학교 앞 식당에 냄비우동을 제대로 팔팔 끓여 가져다달라고 주문을 하고 있을 때 나는 회초리가 아닌 몽둥이와 도시락을 들고 교실로 갔다. 머리가 팔팔 끓는 기분이었다. 도시락을 싸온 아이든 못 싸온 아이든 한명도 밖에 나갈 수 없다고 선포하고 앞뒤 문을 잠갔다. 유리창까지 닫게 했다.
—혼분식운동은 단순히 쌀에 다른 곡식을 섞어서 먹자는 운동이 아니다. 나라에서 범국민적으로 시행하는 국민성 개조 운동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칠십 퍼센트가 산이다. 벼농사를 지을 논이 부족하지만 이모작을 하면 보리나 쌀보리, 밀을 재배할 수 있다. 어차피 쌀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라는 취지를 가지고 있는 게 혼분식운동이란 말이다. 너희나 너희의 부모가 혼분식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농사를 짓는 너희 부모가 이모작을 하지 않는 것은 게을러서이다. 그런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가지고서는 단군 이래 반만년을 물려온 가난을 면할 수 없다. 보리밥도 못 싸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고구마, 감자를 싸와도 좋다. 보리개떡이라도 싸오라는 말이다. 성의를 보여라, 성의를.
고구마, 감자가 혼식에 속하는지 분식에 속하는지 혼분식운동을 만들어낸 높은 분들이며 교장, 교감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때는 오월 중순이었고 보리도 밀도 나지 않고 고구마, 감자 역시 수확 전이었다. 읍내서 나고 자란 나는 그런저런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아니 알 것까지 없었다. 쌀도 지난가을에 생산한 게 아닌가. 묵은 밀, 보리, 고구마, 감자라고 없겠는가.
도시락을 혼분식운동의 취지에 맞춰 제대로 싸오지 않은 아이들은 전과 같이 손바닥 세대, 도시락을 싸오지 않은 아이들은 손등을 세대씩 때렸다. 회초리가 아닌 몽둥이로였다.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이 뚜껑을 열자 교실 안은 반찬 냄새로 가득찼다.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은 평소처럼 밖에 나가서 공을 차거나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거나 플라타너스 그늘에 앉아 꼬박꼬박 조는 짓을 할 수 없었다. 배에서 아무리 꼬르륵꼬르륵 무서운 소리가 나도 도시락을 싸온 친구가 밥을 먹는 것을 보며 앉아 있어야 했다. 혼분식운동의 취지에 맞는 도시락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봐두어야 했다. 나도 인간일진대 감정이 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흰쌀밥 위에 보리밥을 최대한 얇게 덮어 쌀알은 하나도 보이지 않게 하고 만일에 대비해 달걀 프라이까지 맨 위에 얹어 모범적인 보리밥으로 위장한 내 도시락은 정말 맛이 없었다. 하얀 쌀밥에 기름이 둥둥 뜨는 고깃국을 찾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교실은 밥 먹는 소리 외에는 떠드는 아이들 하나 없이 조용했다.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은 숙제를 해오지 못한 아이들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마철에 바람과 홍수로 쓰러진 모를 보는 것 같았다. 한심하고 갑갑했다.
효과는 다음날 즉각 나타났다. 도시락을 못 싸오던 아이들 가운데 절반이 도시락을 가져왔다. 몇명만 더하면 구십 퍼센트를 넘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아예 백 퍼센트 달성이라고 교장에게 보고할 생각이었다. 그걸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하면 멱살잡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은 아이들에 대한 몽둥이질은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아이가 구운 옥수수를 도시락이라며 가져왔다. 학교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동네인 산촌 개운리에 사는 김만수라는 아이였다. 수건도 아닌 책보 속에 책과 공책, 몽당연필과 함께 구운 옥수수를 그냥 넣어왔다. 양은도시락도 없느냐고 물으니 제 집에는 도시락이 하나밖에 없는데 학생은 셋이나 되어서 자신이 도시락을 가지고 오면 다른 형제가 도시락을 못 싸간다고 대답했다. 옥수수는 찐 것도 아니고 불에 넣어서 구웠는데 바싹 타서 시커멨다. 비쩍 마르고 길쭉한 만수처럼 옥수수도 마르고 비틀어질 듯했다. 그건 지난가을에 수확해 처마 밑에서 말리던 씨옥수수였다. 부모 몰래 가져온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무리 농사에 무지해도 농부는 종자가 든 자루를 끌어안고 굶어죽을지언정 먹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훔쳐간 사람이 자식이라 해도 때려죽이려 들 것이다. 만수는 내가 기가 막혀 웃는 것을 노란 눈동자로 보면서 마주 웃었다.
내가 우리 반의 혼분식운동 참여율이 백 퍼센트라고 보고한 그날, 미국에서 수입한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학교에서 배급하게 되었다고 교장이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무상으로, 좀 사는 집 아이들은 유상으로 빵을 먹게 되었다. 나는 만수의 이름을 무상배급 대상자의 맨 앞자리에 써넣었다.
학교에선 미국에서 왔다는 신품종 옥수수 종자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라고도 했다. 달나라로 유인우주선을 보낼 수 있는 미국의 첨단과학기술로 새로 개량한 품종이었다. 심기만 하면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옥수수가 달리고 알도 쓰잘데기 없는 우리 토종 옥수수의 두배는 되게 굵을 것이라 했다. 나는 교장이 침을 튀기면서 한 말 그대로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읍내 사는 아이들 중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옥수수가 필요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만수를 따로 불러 남는 옥수수 종자 스무알을 모두 주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만수가 어둑할 무렵 집으로 찾아왔다. 저녁상을 잠시 물려놓고 밖으로 나오자 만수는 내게 짚으로 싼 뭔가를 두 손으로 쳐들어 공손히 내밀었다.
—그게 뭐냐?
—달걀입니다.
—달걀을 왜?
—집에서 키우는 암탉이 낳았습니다. 그걸 모아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선생님께 갖다드리라고 하셔서요.
—달걀은 사 먹으면 된다. 너희 집에서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이걸 왜 여기까지 가져온 거냐.
그러니까 만수는 하교를 하고 집에 갔다가 제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다시 왔다는 것이었다. 엎어지면 깨질까 짚으로 달걀 열개를 꽁꽁 싸가지고 이십리 길을 달려왔다.
—할아버지가 사람이 은혜를 알아야 한다, 염치가 있어야 한다고 선생님께 갖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됐다, 너나 먹어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내가 달걀꾸러미를 도로 내밀자 만수는 손을 감추며 잽싸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닭을 드리고 싶지만 암탉은 알을 낳아야 해서요, 선생님. 장닭이 없으면 병아리를 못 깝니다. 아침에 일어날 시간도 모르고요. 그래서 달걀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거 도로 가지고 가면 저는 할아버지한테 맞아 죽습니다.
내가 어이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만수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말했다.
—맞아 죽지 않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만수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짚신보다 약간 더 길쭉한 달걀꾸러미를 들고 한동안 어둠을 향해 서 있었다. 고향의 학부형으로부터 생전 처음 받아보는 진심 어린 촌지였다. 들고 있는 손을 끝없이 부끄럽게 하는.
—아빠, 뭐 해?
아이가 불렀다.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로 날파리가 어지럽게 날아들던 그 저녁을 잊을 수 없었다.
—석수야, 미안하다. 형아가 잘못했다. 형아가 다시는 안 그럴게. 용서해다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신작로 길가에 플라타너스 한그루를 거느린 벽돌건물이 서 있었다. 아이들이 ‘수도’라고 부르는 상수도 가압장으로 우웅우웅 하고 사시사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수도 뒤에서는 읍에 사는 힘 센 아이가 촌에 사는 아이들의 돈을 뺏기도 하고 거지가 잠을 자기도 했으며 아이들이 똥을 누기도 했다. 만수는 바로 그곳에서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파리처럼 싹싹 비비며 나한테 빌었다.
—싫어. 용서 못해. 너는 형아 아니야. 빨리 내 빵 내놔, 내놓으라고.
만수가 처음으로 급식빵을 받는 날이었다. 만수는 한달 전부터 내가 배고프다고 할 때마다 급식빵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달래는 척했다. 사실은 자랑이었다. 급식은 점심시간 전에 수업이 끝나 집에 가는 1, 2학년한테는 안 나왔으니까.
—이제 다섯 밤만 지나면 학교에서 급식빵 나눠주거든. 내가 우리 선생님한테 잘 보여서 일등으로 무상급식 대상자가 됐단 말이다. 급식빵은 노오랗고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속살이 있어. 바깥은 고소한 갈색 껍데기가 싸고 있고 옥수수가루가 잔뜩 묻어 있다고. 그거 받거든 조금도 안 건드리고 그대로 너한테 가지고 올게. 급식빵이 이따만하니까 우리 둘이서 나눠 먹어도 배 터질 거야. 우리 먹고 남으면 옥희도 주자.
나는 도리질을 했다. 옥희는 빵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만수는 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나는 오전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가 만나기로 한 수도까지 가서 바람이 덜 부는 뒤쪽에 앉아서 만수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곳이 수백개의 똥무더기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똥의 본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오래된 똥, 새 똥, 딱딱한 똥, 묽은 똥, 검은 똥, 갈색 똥, 공책에서 찢어낸 종이가 덮인 똥, 책을 찢어 깔고 눈 똥, 겉보리밥 먹고 눈 똥, 죽만 먹고 눈 똥, 죽도 못 먹고 눈 똥, 세상에 나오자마자 폭발하듯 푹 퍼진 설사똥 등등. 내가 견디다 못해 수도 앞으로 뛰쳐나와서 보니 만수가 허리를 구십도로 꺾고 땅을 보며 느리게 느리게 걸어오고 있었다. 배가 고파 다 죽어가게 생겨 그렇다는 것이었다. “니가 나 모르기 빵 처먹고 엉그락 씨우는 기(엄살을 떠는 게)아이라?”고 추궁하자 만수는 이렇게 변명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선생님이 미리 지명해둔 급식당번에게 새로 지급된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가서 급식빵을 타오라고 했다. 만수는 첫번째 급식당번으로 지명받은 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급식빵을 타러 갔다. 빵을 나눠주는 서무실 앞 복도에는 이미 빵을 받으러 온 당번 수십명이 줄을 서 있었다. 처음 맡아보는 신선한 빵 냄새에 만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트럭으로 실어와 나무상자째 내려놓은 빵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 익은 빵의 향긋한 냄새가 허기진 아이들을 몸살 나게 만들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플 지경이 되었고 입속의 침이 다 말라버렸다. 4학년은 학년별 순서에도 가장 늦었고(한창 크느라 배가 제일 고픈 6학년이 먼저이고 5학년이 그다음, 귀여운 3학년이 세번째이며 마지막이 아무것도 아닌 4학년) 만수가 속한 6반은 4학년 중에서도 제일 늦었다. 급식당번이 빵을 타서 반으로 돌아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절반가량 지난 뒤였다. 빵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빵바구니에 덤벼들었다. 돈을 내고 빵을 먹는 읍내 아이들이 더 빨랐다. 도시락을 먼저 먹었으면서도.
—야, 안돼! 줄 서. 줄 안 서면 이름 적을 거다!
반장인 전문수가 소리쳤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문수는 제 몫의 빵을 챙겨서 잽싸게 도망치면서 “야, 나는 인제 모른다. 재구, 만수, 너들이 급식당번인께 책임도 지라카이!” 하고 외쳤다. 같은 무료급식 대상자인 재구는 만수를 버려두고 자신의 빵을 가지고 총탄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 만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구니에는 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 벌어진 아귀다툼에서 바닥에 떨어진 반쪼가리 빵, 별꼴이 된 빵, 별꼴이 반쪽이 된 빵, 가루가 된 빵이 먼지구덩이인 교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때 담임선생이 교실로 들어왔다.
—조선 종자들은 이래서 좋게좋게 해줘가지고는 인간이 안되는 거야. 모조리 주워, 하나도 남김 없이! 남은 부스러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혀로 핥아 먹게 할 거다.
이어 담임교사는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책임을 물어 급식당번에게 먼지 묻은 빵쪼가리를 입에 문 채 복도에서 손을 들고 있게 했다. 벌칙에는 빵조각을 삼키면 안된다는 것도 있었다. 그게 가장 큰 고역이었다. 빵은 입에 들어가면서 침 때문에 녹아서 흥건해졌고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또한 배 속에서는 그 빵부스러기를 내려보내지 않는다고 안달을 하는 듯 끄륵끄륵 시큼한 트림이 넘어왔다. 결국 침의 홍수를 당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 식도를 거쳐 배 속으로 빵조각은 흘러가버렸다. 결국 만수가 빵을 처먹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만수의 허리를 꼬집고 팔을 깨물고 머리칼을 잡아뜯고 배를 때리고 정강이를 발로 찼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맛볼 빵을 혼자 다 처먹고 왔다고. 만수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빌었다.
그날 저녁 만수는 아버지에게도 맞았다. 어린 동생을 속이고 동생 몫의 빵을 가로챈 비겁한 형이니까. 그날 햇감자가 저녁으로 나왔다. 만수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제 몫의 뜨거운 감자를 내게 모두 주어야 했다. 껍질을 벗기고 왕소금에 찍어 먹는 폭신폭신한 감자는 그때까지 내가 먹어본 감자 중에 최고였다. 만수는 엄지손가락이 퉁퉁 붓도록 손만 빨다가 잠이 들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식은 감자를 껍질과 함께 돼지에게 던져주었다.
나는 만수 하면 소부터 생각난다. 워낙 소 같은 친구이기도 하고.
만수는 구멍 난 ‘빤쑤’조차 못 얻어 입고 가랑이 사이에서 딸랑이 소리를 내가며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알았다. 만수 할아버지는 혼자서 물고기도 잡히지 않는 데서 낚시를 하거나 만수네가 이사 오기 전에는 우리 동네에 존재조차 없던 책을 자나깨나 읽고 있는 사람이어서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이 일년에 한두번 밭을 갈 때나 빌려 쓰는 소를 만수네 집에서만 키우고 있어서 만수 할아버지를 어렵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입학해서 ‘동네에 소 한마리 못 키우는 깡촌’에서 온 아이들이 수두룩한 것을 보고 우리 동네는 만수 할아버지 덕분에 창피를 면했다 싶었다.
요즘은 송아지한테 곡물사료를 먹이고 성장호르몬에 여성호르몬까지 투입하면 십오개월 만에 보들보들한 살을 먹을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돼지는 이년은 키우던 것을 아홉달 만에 잡아먹고. 하지만 그 옛날 만수네 소는 풀만 먹고 자랐기 때문에 사년을 키워서야 큰 소가 됐다.
소는 풀 맛을 사람보다 몇백배는 더 예민하게 구별하고 느낀다. 풀만 먹고 살도록 진화했으니 그렇다. 사료를 먹이는 요즘 소들도 풀을 먹이면 사료를 잘 안 먹으려고 해서 축산농가에서는 풀사료 먹이기를 꺼린다. 만수네 소가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소였을 때는 좋아하는 풀만 먹었다. 그러니 만수네 소들은 지금하고는 비교할 수 없게 행복했을 것이다.
만수는 학교에 갔다 오면 소를 끌고 나와서 산골짜기로 데리고 다니며 풀을 뜯게 했다. 하도 순해서 고삐를 잡아끌 필요도 없었다. 사람이 먹을 채소나 곡식이 자라고 있는 밭에는 들어가 먹지 못하도록 입에 새끼줄로 얽은 망을 씌웠는데 이름이 ‘부리망’이라고 했다. 딴 애들이 지게 지고 나무하러 댕길 때 만수는 소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부러웠다. 그때의 부러움이 지금 나로 하여금 산중에서 소를 키우며 살아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만수는 소가 풀을 뜯고 있을 때 피리를 만들어서 불곤 했다. 초봄에는 버들피리, 늦봄에는 보리피리도 불었고 풀피리, 아카시아 잎으로 만든 피리를 불기도 했다. 고등학생이던 백수형이 만수에게 일제 하모니카를 사다준 것은 고향 개운리에서 예술사적 사건이었다. 만수는 피리를 불던 솜씨를 바탕으로 열심히 연습을 한 끝에 몇달 지나지 않아 하모니카를 썩 잘 불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도 부르고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도 부르고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도 불고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도 불었다. 그 반주에 맞춰서 여자애들이 손동작놀이를 하기도 했다. 하모니카 때문에 만수는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좋았다. 남자애들은 만수의 연주며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척했지만 하모니카를 한번 불어보려고 학교에서 올 때 가방을 들어주는 등등으로 만수 부하 노릇을 한 아이들이 스무명도 넘었다. 나도 물론 그랬는데 암만 불어도 소리가 제대로 안 나고 시큼하고 찝찔한 침 냄새만 났다.
어느날 용호네 개가 만수네 소 앞에서 갑자기 왈왈거리고 짖으며 덤벼드는 바람에 만수네 소가 놀라서 뛰어다닌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개 때문에 놀라서 뛰기 시작했지만 그다음에는 자신이 뛰는 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잡으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더 놀라서 미친 듯이 뛰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초식공룡처럼 꼬리를 번쩍 쳐들고 똥을 싸갈기면서 달려가는데, 콩밭이고 밀밭이고 남의 마당이고 가리지 않고 마구 들어가서 밭의 곡식은 뭉개지고 놀란 닭들은 지붕 위로 날고 양은대야고 솥이고 소 뒷발에 채인 것마다 십 미터 밖으로 날아가고 하는데 보통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다들 놀란 소만큼이나 공포와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그고 경계를 했다. 어른들 열명이 나섰어도 흥분해 날뛰는 그 거대한 소를 붙잡을 수도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그때 만수가 하모니카를 불어서 소를 달랬다. 그 바람에 음악 하나로 지옥 같은 세상이 천당처럼 평화롭고 고요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나도 무섭더라. 뿔에 받쳐서 계곡 아래까지 날아갈 줄 알았다. 그래도 뭐든지 해야 될 거 같았어. 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모니카 부는 것뿐이니 그거라도 해볼 수밖에 없었지.
소가 하모니카 소리에 반했는지 뛰는 데 싫증이 나서 혹은 힘이 빠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마구간에 들어가서 되새김질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만수는 제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그전에 만수 아버지는 하모니카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에 무슨 풍각놀음이며, 약장수 흥타령이냐고. 똥 싸고 매화타령 한다고.
6학년이 되었어도 학교 가는 길은 줄어들지 않았다. 동네와 학교 사이의 이십리 길은 막 입학하는 1학년짜리에게든 6학년짜리에게든 공평하게 다리 아프도록 먼 길이었다. 내가 4학년 때 학교 교사가 삼층 건물로 증축되어서 오후반 수업이 없어졌다. 중학교 입시도 폐지되어 6학년들이 캄캄할 때까지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플래시도 가로등도 없이 밤길을 걸어오지 않아도 되었다. 어쨌든 아침마다 같이 학교를 가는 아이들 숫자가 두배로 늘어났다. 아이들 숫자가 늘어난다 해도 이십리 길을 달려가는 동안 배가 꺼지는 속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시골 아이들이 도시 아이들보다 수렵, 채집해 먹는 게 많다고는 해도 영양가는 높지 않았다. 마치 산에 사는 고라니나 꿩, 멧돼지가 죽어라 돌아다녀도 먹을 게 많지 않아 비쩍 말라 있는 것처럼. 물에 사는 붕어, 장어, 메기가 먹을 게 많지 않아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먹는 데 바쳐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산골짜기에서 화전을 일궈 힘들게 농사를 짓고 죽어라고 힘들게 산을 오르내려봐야 비료와 농약을 써서 지은 읍내 논밭에서 나는 농산물에 비하면 반의 반도 가치가 없는 것처럼. 읍내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학교 앞 가게에서 사 먹는 꽈배기 하나가 가지고 있는 열량이 내가 하루종일 따 먹은 산딸기, 오디보다도 많고 또뽑기로 뽑은 장군칼 하나가 삼년 동안 주워 먹은 알밤보다 더 비싼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가니까 등교길은 그런대로 견딜 만한데 오후 늦게 돌아오는 하교길은 멀고도 허기진 길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쉽사리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놀면서 가면 좀 쉽다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저런 놀이도 다 시들해지고 뱃가죽이 등짝에 붙을 때쯤 샘이 나왔다.
사시사철 맑고 찬 물이 끊이지 않고 돌틈에서 샘솟는다고 까막골이라는 지명을 따 ‘까막샘’이었다가 누군가 한자로 ‘감천(甘泉)’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은 후 감로수가 나온다는 전설을 가지게 된 그 샘은 산길과 신작로가 만나는 산자락 바로 아래에 있었다. 샘물 주변 바위들에는 늘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고 한여름에도 그 안에만 들어서면 시원했다. 겨울에는 거센 북풍도 들지 않는 아늑한 자리였다.
내가 6학년이던 어느 가을날 오후, 아이들은 샘에 도착하자마자 또 시합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물을 많이 먹나 하는 내기였다. 우승자가 위대(胃大)한 ‘물보왕’이 되어 패배자들 모두를 부하로 삼고 큰절을 받는 게 마지막이었다. 배가 비어 있을수록 목이 마를수록 샘의 물 내기에서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가 커졌다. 덩치가 크고 고학년일수록 유리할 것 같지만 배 속의 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지만 배 속에 감춰져 있는 위장 크기는 대볼 수도 없었다.
—모두 준비이이이…… 땅!
5학년 최재홍의 구령으로 물 마시기 시합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박을 반으로 잘라 만든 바가지 가득 물을 담아 들이켰다. 우승후보인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경쟁자는 풍선처럼 볼록 솟은 배를 가진 4학년 만수였다. 만수는 뭐든지 먹는 건 잘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먹을 복을 타고난 놈 같았다. 같은 나무 아래서도 도토리며 밤을 더 많이 주웠고 산딸기와 새알을 귀신처럼 찾아내고 같은 논밭에서 개구리도 메뚜기도 남보다 훨씬 많이 잡았다. 도랑 치고 잡은 물고기의 배를 따고 불을 피우고 굽고 끓이는 것도 금방 배웠다. 내가 몇달 뒤 학교를 졸업하면 대장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었다. 아니 그전에라도 내가 시합에 지면 대장 자리에 기어오를 수도 있었다. 만수는 단숨에 두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으윽, 나는 더 못 먹겠다.
세 바가지째를 마신 뒤 헤엄 선수인 영호가 포기했다. 여름에 계곡 큰 소에 송장헤엄을 치면서 동동 떠서 하루종일 놀던, 남생이 같은 놈이었다. 물에서 잘 노는 것과 물을 먹는 건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 말고 여섯이 남았다.
다섯 바가지를 못 먹고 창현, 태현, 병수가 항복을 뜻하는 일본말 “고상!”을 외치고는 나자빠졌다. 셋은 똑같이 절벽 아래로 달려가서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물 마시기 내기에서는 오줌을 못 참는 것도 결격사유다. 만수는 제자리뛰기를 하면서 창자 구석구석에 물을 저장하고 있었다.
—나도 고상. 분하다.
일곱 바가지째에 두명이 물을 끝까지 마시지 못하고 남기는 바람에 기권했다. 물 마시기 내기에서는 토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수처럼 어느정도 천천히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다.
—물에 무슨 뼈다귀라도 있다고 씹고 빨고 그러냐. 치사빤쓰다.
시합에서 탈락한 상호가 만수에게 쏘아붙였다. 만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목 바로 아래까지 고여 있는 물이 솟아오를까봐 그러는 게 분명했다. 이제 나와 만수, 둘만 남았다. 덩치가 가장 크고 학년도 제일 높은데다 아이들의 대장인 나. 머리와 눈만 크고 비쩍 말랐으면서 아프리카의 비아프라 난민 아이처럼 배가 볼록 나온 만수.
열 바가지째. 마침내 만수가 항복했다. 그것만 해도 그때까지 물 마시기 내기가 시작된 이래 처음 도달한 신기록이었다. 힘 빠진 팽이처럼 쓰러져 누워버린 만수의 입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물 말고는 다른 걸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받아서 다시 마셔도 될 정도로 맑았다. 나는 물을 한 바가지 더 떠서 마신 뒤 두 팔을 들고 외쳤다.
—내가 왕이다!
내가 샘을 한바퀴 돌면서 승리의 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왕에게 절을 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땅바닥이 벌떡 일어나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아이고 어지러워라. 얘들아, 나는 죽는다.
물을 갑자기 많이, 예컨대 반말쯤을 마시면 전해질 부족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건 삼십년 뒤였다. 다행스럽게도 십분쯤 뒤 나는 깨어났다. 그사이 구급차가 출동하거나 의사가 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반은 죽었다 살아났다 하면서 크는 거니까. 만수가 나를 지키고 있다가 내 가방을 들고 따라왔다. 만수는 비밀이라면서 제 할아버지가 물 마시는 법을 가르쳐줬다고 했다. 물만 마셔도 배고프지 않고 물을 아무리 마셔도 배가 터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 맹물로 가는 자동차처럼 사람도 물로만 살 수 있다고.
개운리에서 태어난 사람 중 서울 소재의 사년제 대학에 간 사람은 오빠가 처음이었다. 일제 때 부잣집 외동아들로 서울에 유학을 한 적이 있다는 할아버지도 대학생 한 사람에게 학비,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지 잘 몰랐다. 아버지는 개운리 같은 산골짝에서 대학생 하나를 뒷받침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지 계산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집안의 장손으로, 또 어떤 집 아들보다 훌륭하고 똑똑한 자식으로 서울의 명문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오빠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하겠다는 데는 온 가족이 한마음이었다. 우리집이 해바라기 한그루라고 한다면 오빠는 맨 꼭대기에 활짝 피어난 꽃 같았다. 오빠를 위해서 우리집 세 자매들은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에 이어 명희마저 중학교를 못 가게 되니 가슴이 무척 아팠다.
해마다 설날이 다가오면 동네 몇 집에서 돈을 얼마씩 내서 어느 집 돼지를 잡아 나눠 먹곤 했는데 오빠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그해에는 우리집 돼지를 잡았다. 평소 같으면 다리 하나만큼만 우리가 먹고 나머지는 돈으로 환산해서 받을 것인데 그해에는 돈을 받지 않았다. 돼지를 잡던 날 아버지는 도끼로 돼지의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고 목을 찔러 피를 받고 가마솥에 끓인 물을 부어 털을 뽑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고 몸을 해체하는 일을 도맡았다. 만수가 묵묵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며 거들었는데 아버지는 돼지 멱을 따고 피를 받을 때 스테인리스 그릇 그득히 따른 피를 만수에게도 조금 마시게 했다. 만수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코를 막고 피를 마셨다. 피를 마시고 난 뒤 비린내를 가시게 하려고 술에 따라가는 안주처럼 왕소금을 주었다.
원래 돼지 잡는 날은 온 동네가 잔치라도 난 듯 시끌벅적하지만 그날은 진짜 잔치가 벌어졌다. 아이들은 뜰에다 숯불을 피워 돼지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웃집에서 돼지고기 값 대신 가져온 소주를 마신 아버지는 오빠의 대학 합격증을 상 위에 올려놓고 마당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꽹과리를 쳤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그 장단에 맞춰 두 팔을 들어 양쪽으로 흔들며 춤을 추었다. 할아버지도 방문을 열게 하고 몸을 내밀어 마당에서 벌어지는 잔치를 지켜보았다.
—백수는 우리 동네의 자랑일세. 아니 우리 군 전체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딱 두명이 합격했다니까 백수는 우리 고을의 보물이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백수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영특했는가. 이제 백수가 대학 나와서 고시를 패스하면 판검사에 군수, 도지사를 못하겠는가. 이제 이 집에도 햇빛이 훤하게 들걸세.
평소에 그리 사이가 좋지 않던 마을 끝집 재용이 아버지까지 오빠 칭찬을 했다. 어머니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서 아버지가 마시던 좁쌀술을 독째 들어 내놓았다.
설이 지나고 나서야 오빠가 대학에 들어가는 데 치러야 할 비용이 얼마인지 밝혀졌다. 입학금과 책값, 교복값, 한 학기분 하숙비로 황소가 한마리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학기에도 소가 한마리 더 필요하리라는 것이었다. 우리집에는 한번에 송아지를 두마리 낳는 특별한 암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암소도 오빠가 계속 대학에 다닌다면 이삼년 안에 팔아야 한다는 게 누구의 계산으로도 분명했다.
—입학만 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제가 죽어라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든지 고학을 하든지 해서 학비를 책임지겠습니다.
장사꾼이 집에까지 와서 황소를 끌고 가던 날, 오빠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시퍼런 지폐다발을 가방에 챙겨넣고 오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뒤 오빠가 서울로 떠났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가서 오빠는 절을 했다. 할머니는 오빠의 어깨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앙상한 손을 내밀어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장손, 세상 누구보다 귀하고 장한 백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나는 우리 백수가 판검사 군수 되어 남 위에 서는 것을 바라지 않느니라. 네가 가고 싶은 길을 초지일관하여 가되 몸을 잘 보중하거라. 늘 강건하여라.
아버지는 호마이카 밥상을 보자기로 싸서 수레에 싣고 오빠는 책 보따리와 가방을 손에 들었다. 어머니는 이불과 옷을 보따리로 싸서 나와 명희에게 지고 들게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집에 남고 온 식구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읍내까지 전송을 하러 나갔다. 겨울 끄트머리인 개운리 산골짝길에 싸래기눈이 펄펄 날렸다. 아직 새싹을 내밀기 전인 여윈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옥희와 석수는 오빠가 털실을 사다 떠준 벙어리장갑을 끼고 빵모자를 썼다. 나와 명희는 보자기를 머플러처럼 덮어쓰고 어머니는 밭일할 때 쓰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얼마 못 가 남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암소는 터벅터벅 수레를 끌며 허연 입김을 내뿜었다.
—이불 보따리에 가방에 쌀자루에…… 우리 식구 전쟁 나서 피난 떠나는 것 같다.
오빠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명희는 오빠의 손을 꼭 잡고 놓으려 들지 않았다. 만수는 오빠의 새 교복이 신기한지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석수는 읍에서 눈깔사탕을 사준다는 말에 기대에 차 있었다. 아버지는 내내 앞만 보고 있었다.
—백수야, 내 아들아, 잘 가거라. 잘 가거라.
버스 차부에서 어머니는 딱 한마디 그 말만 했다. 그 말에 왜 모두들 울음보가 터졌는지 모르겠다. 오빠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만수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차에 이마를 대고 울고 있었다. 땟국물이 낀 얼굴에 눈물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타고 흘러내렸다. 명희는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흑흑 흐느끼며 울고 어머니는 돌아서서 치마로 눈물을 찍어냈다. 아버지는 수레에 걸터앉아 소고삐를 잡고 공중을 쳐다보며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석수는 사탕을 언제 사줄 건지 걱정하며 잉잉 우는 시늉을 하고 옥희는 앙앙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내 당장 오늘부터 술을 끊겠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벗, 금희에게.
안녕, 나 영숙이야. 안영숙.
고향마을 산중턱에 서 있는 키 큰 미루나무들이 지금쯤 바람에 흔들리고 있겠구나. 그 많은 나뭇잎이 차르르 하고 흔들리는 소리를 듣다보면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생각이 들곤 했지.
그동안 잘 있었니?
내가 개운리를 떠나온 지도 어언 열달이 되어가는구나.
보고 싶은 친구야! 나는 너의 염려 덕분으로 잘 있단다. 내 하루 일과를 소개해주고 싶어.
아침이면 연탄으로 난방이 된 따뜻한 방에서 기상음악에 맞춰서 기분 좋게 일어나. 연탄은 하루저녁에 한번만 갈면, 오케이란다. 매운 연기에 기침을 하면서 아궁이에 불을 때도 아침이면 냉골이 되는 구들장 집하고는 천지차이지. 우리는 회사에서 나눠준 체육복을 입고 보건체조를 한 뒤에 기숙사 식당으로 간단다. 하얀 가운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김이 오르는 밥을 퍼서 맛있는 반찬과 함께 배급을 해줘. 하얀 쌀밥에 기름이 잘잘 흐르고 고깃국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어 밥맛이 늘 꿀맛이란다. 설거지하러 찬물에 손을 담글 필요 없어. 식당에서 다 알아서 하니까.
세수를 하러 공동욕실로 가면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져나오지.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이라서 냄새도 없고 벌레도 전혀 없어.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출근을 하면 수백대의 미싱이 줄 맞춰 놓여 있는 우리의 일터가 나온단다. 우리 공장에서는 섬유원단을 가지고 최신 모드의 고급 의상을 만들어 미국과 구라파 등으로 수출하는데 원단이 얼마나 좋은지 만질 때마다 보드랍고 질긴 게 옷으로 만들면 평생을 입어도 될 것 같단다. 나도 월급을 모아 이 옷을 사서 집에다 보내드리려고 해.
점심시간에 또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면 커피타임이 있어. 모두들 향기로운 커피를 들고 양지쪽에 모여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지. 다시 오후 일과가 시작되면 각자의 미싱 앞에 앉아서 옷을 만들어. 간부 사원들이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조장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 간식시간이 되면 라면이라는 걸 줘. 물이 팔팔 끓는 냄비에 꼬불거리는 국수를 넣고 진한 소고기 국물 맛을 내는 스프를 넣은 음식이야. 처음 그 맛을 보고서는 어찌나 맛있던지 까무러칠 뻔했단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다 비웠어.
근무가 끝나면 우리들의 자유시간이야. 각자 책도 읽고 지금처럼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편지도 써. 나는 통신으로 중학교 과정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이 끝나면 검정고시를 볼 거야. 그러면 시골에서 하루 네시간씩 발에 물집 나게 걸어서 다니던 중학교를 이년 만에도 마칠 수 있는 거지.
그뿐이야? 고등학교 과정도 있어. 회사에서 만들어놓은 산업체 야간고등학교 과정에 입학을 할 수 있단다. 자기만 열심히 하면 야간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낮에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대학도 갈 수 있어. 이렇게 우리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각자 자신의 행복한 인생을 열심히 개척하고 있단다.
보고 싶은 나의 친구, 금희야.
우리에게는 아름답고 찬란한 미래가 있어. 시골구석에 파묻혀서 농사일이나 거들고 나물이나 캐다가 시집을 가면 우리의 미래가 저절로 밝혀지겠니? 그리고 또 아니? 여기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평생의 천정배필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일이 없는 일요일이면 옷을 차려입고 교회에 갔다가 공단 사거리에 있는 음악다방에서 한잔의 커피와 함께 신청곡으로 클리프 리챠아드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잘생긴 청년들이 쪽지를 보내 만나달라고 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란다. 구로수출산업공단, 이곳은 한마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나 다름없단다.
그리운 나의 친구, 금희야.
너도 나만큼 여자 형제가 많은 집에서 맏딸로 태어나 남자 형제들 뒷바라지나 하다가 시집갈 팔자가 아니겠니? 그렇고 그런 시골 농사꾼한테 시집을 가서 죽자고 일만 하고 애들 낳고 기르고 하다가 꼬부랑할머니가 되어서 지나간 세월을 후회하겠지. 그게 네가 원하는 삶일까?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너도 어서 이리로 와서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주어진 이 시대의 행복을 맘껏 누리지 않으련? 자랑스러운 수출역군으로서 나라에 애국하고 열심히 공부해 대학까지 갈 수 있으며 월급을 모아서 시골 부모님한테 옷도 사드리고 가전제품도 사서 보내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니?
사랑하는 나의 친구, 금희야. 너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
너의 영원한 벗, 숙.
1969년 7월 20일,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이후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즈, 버즈 올드린 이 세 사람의 이름은 내게는 영원히 잊히지 않게 되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해 첫발을 디딘 이후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와 같은 우주인이 되어 달은 물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해왕성, 천왕성을 넘어 태양계 밖의 머나먼 우주에까지 가리라고 결심했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남들이 먼저 말하기 전에 손을 들고 “우주비행사입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반장 김철희는 “저는, 대통령입니다”라고 했다가 많은 아이들의 비웃음을 샀다. 반장선거 하던 날 제 어머니가 치마 밑에 감추어온 사탕을 비행기에서 반공삐라 살포하듯 뿌려댄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당선이 된 주제에 대통령이 꿈이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녀석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그때 어른들끼리 하는 말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삼세번 대통령을 해먹기 위해 개헌을 했고 대만처럼 죽을 때까지 총통을 할 거랬으니 내 꿈인 우주비행사보다도 더 황당하고 현실성 없는 장래희망이었다.
박사, 교수, 판사, 의사, 사업가……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딱 하나 이상한, 정말 특이하고 웃기는 장래희망이 있었다. 평소에 눈에 띄지도 않아서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던 존재였던 —아이들은 서열에 따라 반장, 부반장, 분단장, 똥걸레로 나뉘었는데 밑바닥을 기는 똥걸레들 가운데 하나인—김만수는 자기의 장래희망이 ‘버스 운전수’라고 했다.
—운전수? 트럭이나 택시, 자가용 같은 자동차를 모는 운전수 말이냐? 그것도 버스 운전수?
선생님은 만수를 일으켜세운 뒤에 물었다. 만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만수가 왜 하고많은 직업 가운데서 버스 운전수가 되겠다고 했을까?
선생님은 창문을 연 뒤 담배를 피워 물고 말했다. 만수는 엉거주춤 선 채로 대답했다.
—버스를 따라 달리다보면 기분 좋은 냄새가 납니다. 버스에서 나는 연기를 마시면 제가 운전수가 되는 기분이 듭니다.
—오라, 선생님이 자전거 타고 가면서 볼 때마다 허리에 책보 매고 버스 뒤를 붙잡고 따라 뛰는 놈들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네 녀석들이었구나. 이 무식한 놈들아, 위험하니까 절대로 버스 따라 뛰지 마라. 배기가스는 독가스고 많이 마시면 기관지염, 폐결핵 이런 병에 걸린다. 그리고? 그것뿐이야?
선생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아이들은 따라 웃으면서 만수와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만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버스 운전을 하면 자기 가고 싶은 데 공짜로 갈 수 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아는 사람은 공짜로 태워줄 수 있습니다.
—그래,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 만수는? 버스를 운전해 어디로 가서?
—저, 저는 서울에 있는 최고로 유명한 대학교로 가서 그리운 형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형님한테 인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형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닌다고? 무슨 대학?
만수는 형이 다닌다는 대학의 이름을 말했다. 그건 모두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선생님은 이마에 갈매기 계급장처럼 주름을 짓더니 창밖으로 연기가 나는 꽁초를 던졌다. 그리고는 교탁 앞으로 돌아가서 엄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선생님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한참 자라나는 어린이들이라면 우주비행사, 대통령 같은 큰 꿈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버스 운전수라니, 너무 꿈이 작지 않은가 말이야. 버스를 제멋대로 몰고 가서 자기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운전수가 되겠다니, 동기가 매우 한심하다. 선생님은 말이다, 지금 버스 운전수인 사람도 어릴 때의 꿈은 우주비행사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꿈이 우주비행사래도 현실이 냉정해서 버스 운전수밖에 못되는 것이다. 버스 운전수가 장래희망이면 나중에 경운기 운전도 못해. 남대문시장의 지게꾼이나 되지 싶다. 김만수, 자리에 앉아.
나는 장래희망이 버스 운전사라는 아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 아이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들으며 웃기까지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은 냉정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맞았다. 지금 나는 버스를 운전한다.
대학에 입학하니 모든 게 얼떨떨했다. 배지가 달린 군청색 교복을 입고 다니는 건 고등학교와 비슷했다. 물론 사복을 입어도 되었지만 입고 다닐 만한 사복이 내겐 별로 없었다. 서울이 집인 친구들은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통기타를 들고 다니면서 생맥주가 나오는 술집을 출입했다.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 시골집의 소를 팔았으며 하숙집에서 대학을 오가는 게 고작인 나 같은 사람을 그들은 우골탑(牛骨塔)모범생이라고 불렀다. 내게는 그들처럼 풍족한 용돈을 주는 부모도 없었고 연줄도 없었다. 내 경제사정은 고향 겨울의 산짐승처럼 너무도 궁핍했다. 생전 처음으로 여대생과 미팅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신 커피 한잔 값이 내 하루치 식비에 해당했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돈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았다. 첫번째 미팅에서 만난 상대가 이선애였기 때문이다.
—저는 사실 심심산골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땅달이 쓴 『적과 흑』의 쥘리앵 소렐처럼 말이지요. 집에는 늙으신 조부모님, 부모님, 다섯명의 동생들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 아버지는 평생 즐겨오던 술을 끊으셨습니다. 술을 끊는 약이라고 벽에 걸려 있던 소주병에 든 등유를 마셨다가 돌아가실 뻔했다고도 합니다. 저는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에 패스하든지 은행 같은 곳에 취직해야 합니다. 저는 집안의 희망일 뿐 아니라 우리 동네, 아니 우리 군 전체가 주목하는 희망의 별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문학과 음악에 사로잡혀 제 인생을 거기에 던지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저도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을 것 같네요. 이런 저와 만나는 것이 대단히 부담스럽고 힘드실 겁니다. 저는 당장 눈앞에 놓인 커피값도 제 것밖에는 낼 능력이 없습니다.
내 말을 들은 선애는 첫번째 미팅 때만 커피값을 더치페이로 계산하자고 한 이후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내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어느 교수의 자제와 정혼을 해둔 사이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곧바로 결혼에 골인할 거라고도 했다. 우리 둘은 발랄하고 지성적인 청춘 남녀로서 건전한 교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백수씨 같은 산골 동네 출신은 처음 봐요. 그리고 자기처럼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도 못 봤어요. 칸트가 어쩌고 쇼펜하우어가 어쨌네 하고 자기도 잘 모르는 거짓말을 할 뿐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적과 흑』에 나오는 마띨드나 레날 부인처럼 그쪽과 맹목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질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냥 다른 사람들의 위선에 염증이 난 것뿐이야.
그녀는 부잣집 대학생들과 비어홀에도 가고 나이트클럽 데이트도 즐겼다. 하지만 이따금 주말에 몸에 붙는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 내 상대가 되어주었다. 나는 선애 덕분에 나와 비슷한 처지인 다른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하숙집 밖으로 나가 고궁이며 한강, 남산, 팝송이 나오는 무교동의 음악다방 같은 데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집에서 못 먹고 다른 대학생과의 데이트에서도 못 먹는 낙지, 순대 같은 음식을 나와 함께 먹었다. 길을 걸을 때 뻥튀기와 오징어다리를 사서 씹으며 가기도 했다. 그녀는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몇장의 지폐가 든 봉투를 내게 넘겨줌으로써 언제나 내가 계산을 하게끔 했다. 물론 쓰고 남은 잔돈은 그녀를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하숙집에 돌아갈 때의 교통비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어느날 집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될 공부를 하고 있는 오빠가 치다가 버려둔 기타와 기타교본, 악보집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댓가로 자신을 위해 노래를 하나 배워서 불러주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얀 손수건」이라는 노래였다. 여고 일학년 시절 ‘트윈 폴리오’라는 듀엣이 학교에 와서 공연할 때 들은 노래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곡이라고 했다. 가사를 읽어보니 이별의 노래임이 분명했는데 내게는 그 노래가 고향에 두고 온 동생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하숙집에서 두문불출하며 기타와 노래를 공부한 끝에 열흘 만에 기타 반주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타의 마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일컬어지는 기타는 자체로 훌륭한 독주 악기이면서, 팝송이며 가곡 같은 노래를 부를 때 반주를 하는 악기이자 멜로디와 리듬감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어 야유회에 없어서는 안되는 놀이도구였다.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것과 배워야 할 게 늘었다. 쓰리핑거 피킹, 아르페지오, 트레몰로, 해머링 등의 주법에 「아리아느의 축제」 「빗방울연주곡」 「알함브라의 추억」 같은 연주곡, 독주 부분이 현란한 팝송과 포크송의 폭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밤중에 천장에서 오선지 같은 기타의 지판이 나타났고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짚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는 기타에 몇달을 미쳐 있었다. 그녀가 찾아와도 건성으로 대하기까지 했다. 기타 때문에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으므로 대학 들어와서 맞은 첫번째 학기말 시험을 엉망진창으로 치렀다. 낙제를 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걱정과 후회, 될 대로 되라는 심정과 사랑과 노래가 결부된 그 느낌은 거부할 수 없이 달콤했다.
노래를 불러주기로 한 날 나는 그녀와 함께 기타를 들고 대학 캠퍼스로 올라갔다. 잔디밭을 지나 대학 뒤편 인적이 드문 숲 속에 가서 기타를 꺼냈다. 장마가 지나가면서 벤치에는 흙물이 튀었다 마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윳빛 투피스를 입은 선애는 분홍색 꽃잎 무늬가 든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깐 뒤 그 위에 앉았다.
나는 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그건 내가 좋아한 첫번째 팝송이었다.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으로 번역된 「All for the love of a girl」, 자니 하튼이 불렀던.
오늘 나는 너무나 피곤하고 우울해요. 슬프고 마음이 아파요.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지나간 삶은 너무나 달콤했어요. 삶은 하나의 노래였어요. 지금 당신은 떠나가고 나만 남았어요. 나는 어디에다 마음을 맡겨야 할까요. 이 모두 아름다운 소녀의 사랑을 위한 것. 그 사랑은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사랑. 나는 한 소녀와의 사랑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세상의 기쁨을 바칠 수 있는 남자.
나의 모든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수백번을 연습했던 노래라 가사의 내용이 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내용에 따라 음조가 변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불렀던 어떤 노래도 그 노래만큼 정성과 애정을 담고 있지 못했다. 내가 노래에 실은 감정이, 열정과 두려움이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내가 노래를 부르고 나자 그녀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대답했다.
—이제 우리 그만 만나야 할 때가 되었나보네요.
목이 메다 눈물이 솟았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담스러운 존재임을 노래로 증명했다. 아쉬움은 없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어느 때보다 빛나는 인생의 한때를 누렸다. 하지만 이별의 슬픔이 나를 강습해 개처럼 바닥에 쓰러뜨리는 데에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원하던 노래를 불러주었다. 힘없이, 그러나 천천히 오래도록.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위 사라져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노래를 부르는 동안 고향 차부에서 버스를 향해 울며 손을 흔들던 동생 금희, 명희가 보였다. 부르튼 손으로 눈자위의 눈물을 닦던 만수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머니의 품속에서 잠들어 있는 옥희, 그리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뭔가를 조르고 있는 석수. 소를 팔아 학비를 마련해준 아버지. 합격 소식에 웃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나는 당신들의 기대를 저버린 배덕자입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저는 여기서 어느 여대생에게 사랑을 구걸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여대생이 하사한 기타로. 부탁드립니다.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녀가 먼저 떠나갔고 나의 청춘 역시 끝났다. 그걸 느끼는 순간 기타의 6번 줄이 팅, 하고 끊어졌다. 숲의 배수관 앞에는 누군가 오래전에 누고 간 똥이 굳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하기 싫은 일이 농사와 집안일을 도우는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늘 무슨 일이든 하고 있었다. 벼, 밀, 보리, 찹쌀, 콩, 조, 수수, 옥수수, 감자, 고구마 농사를 짓고 배추, 무, 파, 마늘, 호박, 깨, 고추 같은 채소도 심어 가꿨다. 소, 돼지, 닭 같은 가축을 키우자니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빼놓을 수 없이 먹이를 마련해줘야 했다. 소는 풀이 있는 곳에 데리고 나가고 닭은 풀어놓으면 산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제 먹이를 찾아 먹지만 돼지는 먹이를 갖다주어야 했다. 모든 가축 중에서 가장 먹성이 좋고 냄새 나는 돼지가 하필 내 담당이었다.
우리 마을에 돼지를 키우는 집이 몇 집뿐이라 온 마을을 다니면서 구정물을 얻어다 주어야 했다. 날은 춥고 길은 미끄러운데 구정물을 얻으러 양동이를 들고 다니기 싫어서 한끼라도 건너뛰면 돼지들은 목이 터져라 “뀌이욱뀌욱” 울며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했다. “돼지 밥을 안 얻어오면 니 처먹을 밥도 없다”고 한 아버지의 말이 하늘 높은 곳에서 천둥처럼 자나깨나 들려왔다. 만수에게 시키려고 해도 소를 끌고 나가면 날이 저물도록 어디서 뭘 하는지 꼴을 볼 수 없었다. 그대로 만수가 없어졌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절벽에서 떨어지든지 독사에게 물리든지. 작은누나가 구정물 얻으러 갈 때 같이 가주었다.
—나 정말 우리집 싫다. 동네 싫다. 돼지도 싫다. 농사가 원수다. 돼지가 원수다. 우리 농사짓지 말고 돼지 안 키우고 딴 데로 이사 가면 안되나. 읍내로 가면 이런 짓 안해도 되잖아. 작은누나가 이야기 좀 해봐라.
작은누나는 큰누나가 할아버지 방 앞에 곱게 접은 편지를 써두고 서울로 가버리고 난 뒤에 큰 충격을 받아서 말도 잘하지 않았다. 작은누나 또한 산골집을 떠나서 서울로 가고 싶어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족들을 도와 일하는 게 너무 싫어서 학교가 끝나는 것도 싫고 일요일도 싫고 방학도 싫었다. 그런데 만수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소를 끌고 나갈 때도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하고 옥수수나 감자 심으러 갈 때도 싱글벙글하고 나무를 하러 갈 때도 싱글벙글이었다. 그러니 만수가 싫었다. 짜부러진 어깨에, 간장 달인 것 같은 냄새에, 더러운 옷에, 비쩍 마른 몸에, 까치집 같은 머리에, 원숭이같이 깩깩거리는 목소리에, 소처럼 느려터진 걸음걸이까지 다 싫었다.
—북한서 무장공비들이 내려와가지고 대통령 사는 청와대를 습격했단다. 무장공비들이 산줄기를 타고 들어왔는데 그러다 산동네 사는 화전민들이 많이 죽기도 하고 이승복 같은 애들도 입을 찢어 죽이고 했다지. 무장공비들이 화전민들 해놓은 밥을 얻어먹고 하니까 화전민은 다 산에서 쫓아낸다고 읍사무소에서 공무원들이 왔나보더라. 할아버지가 그 사람들 불러 앉혀놓고 개운리 역사가 이백년이 넘었는데 지금 와서 무슨 화전민이냐고 동네 역사하고 집집마다의 족보를 기록한 걸 보여줬단다. 또 우리집 소를 봐라, 동네 이 집 저 집 돼지를 봐라, 어디 떠돌아다니는 화전민이 소 돼지를 키우고 벼농사를 짓느냐고 큰소리를 쳐서 쫓아보냈단다. 그러니까 우리집은 소하고 돼지 때문에 여기에서 안 쫓겨난 거다.
할아버지가 야속했다. 그냥 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했으면 내가 죽도록 하기 싫은 농사일, 돼지 키우는 일을 거들지 않아도 될 게 아닌가. 그렇게 개운리가 좋으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있고 우리만이라도 밖에 내보내주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여기가 싫거든 너도 백수오빠처럼 공부를 잘해 보여라. 그러면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지. 아직 소가 남았잖니.
만수가 소를 열심히 끌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하고 정성을 들이는 게 그 소를 잘 키워가지고 팔아서 그걸 학비로 삼아 서울서 공부하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수는 공부를 못하니까 그럴 일이 없다. 제 반에서 가운데가 될까 말까 한데. 만수는 옛날처럼 시험을 쳐서 가면 중학교에도 떨어졌을 거다. 무시험 뺑뺑이가 됐으니 가는 거지. 대학은 턱도 없고 고등학교도 가기 힘들 거다.
작은누나가 언제부터 그렇게 내 편을 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누가 봐도 만수가 내 상대가 안되게 멍청하다는 건 분명했다. 노예근성을 타고 났는지 줏대가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잘해봤자 중간밖에 안된다.
동네 제일 위쪽에 사는 동희네 집에 가서 구정물을 받아가지고 나니까(평소에는 우습게 알던 양동희, 동수 형제가 구정물 하나 가지고 얼마나 배와 턱주가리를 내밀고 잘난 체했던지, 쥐구멍에 볕들 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새삼 깨달았다) 양동이가 다 찼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누나가 먼저 들고 스무 걸음 가고 다시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내가 스무 걸음을 갔다. 양동이 손잡이인 철사줄 때문에 손바닥에 줄이 파였다. 두 사람이 같이 들고 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둘 다 힘들다. 한 사람이 계속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한 사람은 편하고 한 사람만 힘들면 된다. 그러는 편이 힘들어도 재미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양동이의 구정물이 삼분의 일쯤 쏟아져 있었다. 힘들어서 미끄러지는 척하면서 조금 버렸다. 집에 다 와서 물을 탈 생각이었다. 돼지 새끼가 덜 먹는 게 내가 힘든 것보다는 나으니까.
만수가 쇠죽을 끓이다 말고 불이 붙은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더니 왜 이제 오느냐고 물었다. 작은누나는 구정물에 젖은 치마를 말린다면서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 저는 아궁이 앞에 편하게 앉아서 재미있게 불이나 때다가 힘들게 구정물을 모아오니까 트집이나 잡고, 이게 무슨 형이냐. 만수는 제가 나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시킨 일이 많아서 못 갔다고 했다.
—너도 이제 돼지 구정물을 다 얻어오고 하니까 어른대접 받게 되고, 기분이 좋지?
—멍텅구리, 이게 뭐가 좋으냐? 그렇게 좋으면 네가 해라.
—나는 돼지우리 똥도 치워봤어.
—등신아, 거짓말하지 마라.
나는 양동이를 빙빙 돌리면서 구정물을 뒤집어씌우는 시늉을 했다. 만수가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거기가 하필이면 돼지우리 앞에 쌓여 있는 풀짚가리였다. 부지깽이에 있던 불이 바싹 말라 있던 풀에 옮겨붙었다. 불은 삽시간에 짚가리를 타오르더니 돼지우리와 닭장이 붙어 있는 헛간 지붕으로 날아갔다. 우리는 둘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 서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만수였다. 만수는 내가 들고 있는 양동이를 빼앗으려고 했다. 나중에는 그걸로 물을 떠다 불을 끄려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물론 빼앗기지 않았고 만수에게 구정물을 제대로 덮어씌웠다. 콩나물대가리, 무 껍데기, 배추 줄거리 같은 걸 머리에 얹은 채 구정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게 볼 만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할머니가 뛰어왔다.
—불이야! 불이야!
그제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양동이를 집어던지고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무서웠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서 불을 끈다고 난리를 쳐댔다. 불을 끄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계곡이 백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불은 동네의 마른 풀숲에도 옮겨붙고 숲으로 번졌다. 계곡에서 불난 곳까지 동네 사람들이 죽 늘어서고 집집마다 가지고 온 양동이며 고무통 같은 데다 물을 담아서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건네주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람이 그 물을 퍼부어 불을 껐다. 불이 다른 집에 옮겨붙을까 싶어 미리 물을 축여놓는 게 낫겠다고 해서 소가 들어 있는 마구간과 안채의 지붕에 물이 퍼부어졌다. 마당과 마루가 물바다가 됐고 처마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결국 돼지우리와 닭장이 들어 있던 헛간이 홀랑 다 타버렸다. 닭은 바깥에 있어서 죽지 않았지만 돼지 두마리는 우리에 들어 있다 저희가 싼 똥과 오줌으로 축축해진 배수구에 코를 박은 채 통구이가 되었다.
사람들이 돼지를 어떻게 할까 의논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한번도 보지 못한 소방서 불자동차가 시끄러운 싸이렌 소리를 내며 동네에 들어섰다. 빨간색 불자동차는 우리 동네가 생긴 이래 처음 들어온 것이었다. 읍내 소방서 망루에서 우리 동네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는 화전민이 불을 지르다 산불이 난 줄 알고 출동했다는 것이었다. 산불방지 강조기간인데다가 날씨가 건조해서 작은 연기라도 놓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통구이가 된 돼지와 다 타버린 헛간 말고는 별 피해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헛걸음을 하게 했다고 화를 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삼신할미한테 빌듯 두 손바닥을 비비며 빌었다.
—방화범이 누구냐? 불을 낸 사람 말이다.
소방차를 타고 온 사람 중 제일 높은 사람이 물었다. 나는 불을 낸 게 만수라고 일러주려고 했다. 어머니가 그 사람을 잡아가느냐고 물었다.
—잡아가지야 않지만 벌금은 내야지. 소방차가 이런 산골 촌동네까지 출동하게 만들었으니까. 방화범은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질 거요. 전과자가 되는 거지.
아버지는 이웃집에 있으면서 코끝도 비치지 않았고 어머니는 와들와들 떨었다.
—벌금이 뭡니까? 돈이 없어 못 내면 감옥 가나요?
—그거야 나중에 가서 재판받을 때 계산해봐야 알 일이고. 아, 범인이 누구냐니까!
갑자기 할머니가 작은누나의 등짝을 떠밀어 앞으로 나가게 했다.
—여기 둘째손녀 명희가 불을 냈소. 부지깽이를 들고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붙었소.
거짓말, 거짓말.
—이리 나오라고 하시오!
작은누나는 벌벌 떨면서 소방관 앞으로 갔다. 소방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누나의 이마에 알밤을 먹이면서 “이 문디 가시나, 니가 불냈나? 니 앞으로 시집은 다 갔다. 누가 전과자 딜고 갈라 칼 기가” 했다. 누나는 축축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집애는 얼굴만 이쁘면 상관없어. 식모살이를 해도 시집만 잘 가더라.
소방관과 소방차가 가고 난 뒤에야 숨어 있던 아버지가 나와서 경험해본 사람처럼 말했다. 작은누나는 자기는 이제 어떻게 하느냐, 중학교도 못 갔는데 사회생활까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엉엉 울었다. 불을 낸 건 남자애들인데 왜 여자인 자기한테 죄를 덮어씌우느냐고. 하지만 벌금은 나오지 않았다. 호적에 빨간 줄이 쳐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알 게 뭐냐 말이다.
그날 죽은 돼지 두마리는 동네 사람들이 나눠 먹었다. 피를 뽑지 못해서 고기는 질기고 냄새가 많이 난다고 했다. 원래의 돼지값의 반밖에 받지 못해 아버지는 무척 화가 났다. 덜 익은 돼지고기를 먹고 동네 아이들 중 열명 가까이가 토사곽란에 시달렸다. 그래도 워낙 싸게 먹은 것이라 돈을 돌려달라고 온 사람은 없었다. 내 알 바 아니었다.
읽고 또 읽어 나달나달해진 영숙의 편지가 든 보따리를 품에 안고 버스, 기차, 버스를 갈아타며 구로공단까지 찾아갔을 때 나는 편지 속의 장밋빛 사연이 모두 과장되었거나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공장은 많았다. 공장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기로 하늘은 잿빛이었다. 땅은 수채 물로 젖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쓰레기들이 곳곳에 버려져 있었고, 뭔가를 태우는지 안개 같은 연기와 냄새가 거리를 스멀스멀 기어다녔다. 사람들이 벌레처럼 많았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운 가게 속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가게 안에 들어서는 내게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반기다가 편지를 내밀며 주소를 묻자 퉁명스럽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푸대 종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갑자기 벽에서 문이 열리며 손이 튀어나와서 나를 잡아끌 것 같아 무서웠다. 파출소에 가서 주소를 내밀고 사정을 하자 피곤한 표정의 경찰관이 그나마 영숙이 다닌다는 공장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영숙의 공장은 구로공단에서 손꼽히는 큰 의류 제조업체였다. 거기에는 영숙이 말한 대로 기숙사가 있었고 야간고등학교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처럼 시골에서 무턱대고 상경한 처녀가 그런 공장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연줄이 있어야 했다. 영숙은 외가로 재당숙이 그 공장의 경비관리자였다.
영숙은 내가 기숙사로 찾아가자 당황한 기색으로 내가 진짜로 올 줄 몰랐다고 했다. 그냥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행복한지, 좋은 선택을 했는지. 사실 영숙의 처지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었고 세탁을 제때 하지 못해 소매에 때가 반질반질한 제복 속의 몸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허약해 보였다. 영숙의 편지와 현실 사이에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었다.
결국 나 같은 처지의 오갈 데 없는 무작정 상경 처녀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둘 중 하나였다. 밥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큰 공장에 넣어줄 힘을 가진 사람 집에서 한두해 식모 노릇을 하는 것이 첫번째였다. 영숙은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했을 뿐 나를 자신의 외가 재당숙에게 소개시켜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다음으로는 월급이 있으나 마나 한 작은 가내수공업 공장에 취직을 하고 경력을 쌓다 본인이 열심히 하고 실력이 좋으면 자신에게 맞는 조건으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 자립하는 길이 있었다. 그렇게 성공할 확률은 열에 하나 정도로 아주 낮았다.
이도 저도 아니면 전봇대에 다닥다닥 붙은 전단지의 번호로 연락해 술집이나 다방 같은 데로 빠지는 것이었는데 나이와 생김새만 받쳐준다면 그럴 확률은 십중팔구로 아주 높았다. 나는 거기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영숙이 공장 친구라는 박재희라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해줘서 며칠간은 그곳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대개의 여공들은 하루 2교대, 열두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 재희의 자취방은 한평 반쯤 되는 작은 방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명이 합숙하면서 월세를 분담하고 있었는데 방 안에 있는 비키니 옷장과 책상 겸 화장대를 빼면 세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한 사람은 밤, 두 사람이 낮에 근무하는 바람에 나는 거기서 그들 사이에 끼어 밤잠을 잘 수 있었다. 낮에는 공단을 쏘다니며 전봇대나 담벼락에 붙어 있는 구인광고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오빠를 찾아갈 생각을 했다.
오빠는 여름방학이 되어도 집으로 오지 않았다. 오빠로부터 아무런 말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소를 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빠가 애초에 입학만 시켜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 방학 동안 열심히 학비를 벌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오빠의 하숙집 주소가 없었다. 나는 난생처음 오빠가 다니는 대학에 가서 학적과라는 곳에서 오빠의 주소를 알아냈다. 오빠의 하숙집에 가보니 오빠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숙방은 방학이라 대부분 비어 있었다. 오빠의 옆방에 사는 사람이 요즘 오빠가 건축현장에 나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나는 불을 켜지도 않은 채 줄 끊어진 기타와 함께 호마이카 상 옆에 우두커니 앉아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벽에는 대학생 교복 외에는 변변한 수건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오오, 금희야,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
어두워지고 나서 들어온 오빠는 무척 지쳐 보였다. 생각보다 오빠는 작아 보였다. 어깨는 처졌고 가슴은 짜부러들어 있었다. 방에 보이지 않던 수건은 오빠의 목에 걸려 있었다. 후줄근하게 늘어진 수건에서는 지독한 땀 냄새가 풍겼다. 나는 편지를 써두고 집을 나왔노라고, 구로수출산업공단에서 가장 큰 공장에 취직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일부러 밝게 말했다.
—그래? 정말 잘됐구나. 큰 회사라면 월급은 꼬박꼬박 잘 나오겠지.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월급만큼 중요한 게 없다. 월급은 바로 생명줄이란다. 월급을 잘 모아서 저축도 하고 월부로 책도 사서 읽고 해서 교양 있는 현대 여성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여대생들도 무식한 애들이 너무 많아. 모차르트, 싸르트르, 김소월도 모른다. 그러나 저러나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나는 오다가 빵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더부룩한데, 어쩌나.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해보마.
오빠는 밖에 나가서 주인에게 무슨 말인가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오빠에게 대답을 한 사람의 말 중에 내가 알아들은 말은 하숙비가 밀렸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잠시 뒤에 밥과 콩자반, 콩나물국, 단무지 장아찌가 놓인 쟁반이 하숙집 딸에 의해 날라져왔다. 집에 있으면서도 뭔가 꾸민 흔적이 느껴지는 그녀는 나를 잠깐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보는 듯했다.
—오빠도 같이 드세요. 혼자 먹기가 부끄럽네요.
이상하게 오빠한테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다. 오빠는 그만큼 옛날의 오빠에서 멀게 느껴졌다.
—아니다. 나는 빵을 많이 먹었다니까 그런다. 네가 밥 먹는 사이에 좀 씻고 들어오마.
말을 하고 오빠는 밖으로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하숙집 주인이 마루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누워 수박을 먹으며 텔레비전으로 고등학교 야구중계를 보는 게 보였다. 수돗가에서 오빠가 손발을 씻고 세수를 했으나 주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어쩐지 목이 메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국물을 자꾸 떠넣던 참이었다.
—어어어, 저 학생 왜 저래?
주인집 남자의 목소리에 내다보니 마당에 오빠가 쓰러져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대고 쓰러져 있는 오빠의 모습은 언젠가 아버지가 덫으로 잡아온 고라니 같았다. 고라니의 벌어진 입속에 보이던 이빨처럼 오빠 역시 이를 드러내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거야 원, 한두번도 아니고. 몸이 약한 사람이 공사판에서 일을 하고 피까지 뽑아대니 어떻게 견뎌. 대학 공부를 아무나 하나. 사립대 등록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와서는. 부모는 참 뭘 하는 사람들인지, 한심하네. 주제를 알아야지 말이야.
반바지 모양의 속옷 바람으로 오빠를 떠메고 와서 방에 눕힌 뒤 집주인은 들으라는 듯 말을 하고는 다시 마루로 가서 눕더니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오빠는 차마 집에다 등록금을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어 공사판에 나가는 한편으로 피를 뽑아 팔아 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었다. 피를 뽑고 나면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 크림빵과 우유를 주는데 오빠는 사정을 해서 빵을 두개 받아먹었다. 그렇게 해서 하숙집 저녁을 건너뜀으로써 하숙비를 못 내는 데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난데없이 나타나 저녁밥을 청하는 바람에 그날 오빠의 계산은 어긋나고 체면은 완전히 구겨진 셈이었다. 오빠, 가엾은 우리 오빠. 세상 누구보다 다정하고 마음이 여렸던 분.
—금희야, 공부만 하고 살고 싶은데 그것마저 쉽지는 않구나. 그래도 걱정 마라. 이제 피를 두번만 더 팔면 등록금이 마련이 돼. 일단 등록을 하고 나면 친구들이 가정교사 자리를 알아봐주기로 했다. 이제 두번 남았다. 두번만 팔면 돼. 그러고 나면 모든 게 잘될 거야.
그날 밤 오빠의 손을 잡고 나는 내내 울며 지새웠다. 오빠는 헛소리처럼 잠꼬대처럼 두번, 두번을 외쳤다.
사랑하는 동생 만수에게
지금 그리운 고국의 내 고향 땅 개운리는 한겨울이겠지. 처마에는 고드름이 꽁꽁 얼고 북풍한설 찬바람이 귀를 시리게 만들고 있겠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나무는 충분히 해놨을 거라 믿는다. 저녁 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피어오를 때 네가 석수의 손을 잡고 썰매를 멘 채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려지는구나.
만수야, 형은 지금 고향 땅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사철 더운 나라 월남에 와 있다. 너도 자주 부르던 노래 「맹호는 간다」에 나오는 그 용맹스러운 맹호부대 소속이다. 너도 그 노래는 잘 알고 있겠지.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을 위해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하늘은 아득히 멀더라도 내 마음은 한결같이 고국의 가족들을 생각한단다.
부모님께 편지 한통 보내고 서울서 눈물로 큰절을 올린 뒤 군에 입대한 나는 소정의 엄격한 훈련을 받고 배를 타고 이곳 월남 땅으로 왔다. 동봉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여기는 야자수 잎이 휘날리는 평화로운 마을과 정글, 풍족한 농산물과 과일이 있는 곳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미군이 우리와 함께 주둔하면서 베트콩들을 무찌르고 있단다. 하루빨리 월남이 멸공 통일을 하는 날까지 우리는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만수야!
할아버지, 할머니는 잘 계시느냐. 내가 아침저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께 돌아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릴 때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빌고 또 빌고 있다는 걸 알려드려라. 우리 귀중한 소도 귀여운 닭들도 잘 있겠지. 돼지우리가 타버렸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는 큰누나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다. 여러번 생각해봤지만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 살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일 뿐이다.
만수야, 부디 동생들을 잘 보살펴주어라. 석수는 남자 형제 중 막내라고 귀엽게 커서 좀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할 때가 많지만 근본적으로 착한 아이다. 우리 모두의 귀엽고 소중한 막내 옥희 또한 네가 나인 것처럼, 누나들 몫까지 다해서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
나의 사랑하는 동생 만수야!
내가 사준 하모니카는 아직도 잘 불고 있느냐. 여기서도 좋은 하모니카를 살 수가 있어. 하모니카를 불 때마다 내 고향 개운리, 소를 타고 하모니카를 불며 가던 너를 그린단다. 강철 같은 나의 전우들도 내가 하모니카를 불면 고향 노래를 따라 부르곤 한단다.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저 멀리 여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지’
여기는 아카시아꽃이 피지 않는 정글이지만 순박하고 착한 베트남 아이들의 얼굴, 눈망울을 볼 때마다 너를, 나의 조국을, 내 고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구나.
만수야!
우린 언젠가는 꼭 만날 거다. 만나서 지금의 일을 옛일이라고 웃으면서 추억할 때가 있을 거다. 지금이 아무리 힘들고 견디기 어렵더라도 삶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우리, 절망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너와 내가 되자.
만수야.
너는 집과 고향을 지켜라.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월남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정글을 노려본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할아버님 할머님 그리고 부모님, 이 불효자식의 큰절을 받으십시오. 어떤 말로도 사죄할 길이 없으나 꼭 몸 성히 돌아가서 엎드려 용서를 빌겠습니다. 저는 건강하게 잘 있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 명희와 만수, 석수, 옥희를 잘 부탁드립니다.
졸업식은 6학년 교실 세개를 트고 책상을 치워 임시로 만든 강당에서 열렸다. 졸업생 삼백여명이 들어차고 재학생 대표로 합창단이 참석했다. 학부형들은 강당 밖 복도와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식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음처럼 맑은 겨울 햇빛은 교정을 내리비추고 바람도 거의 없는 따뜻한 날씨였다. 졸업생 가운데 중학교로 진학하는 아이들은 중학생 교복을 입고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입던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하고 벙어리장갑을 끼고 온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일 먼 동네의 아이들이었는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어깨는 유난히 처져 있었다.
풍금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졸업식은 시작되었다. 6학년 때 반장, 부반장 같은 학급 간부를 지낸 아이들 대부분은 성적과 관계없이 군수상, 읍장상, 교육장상, 경찰서장상, 세무서장상, 우체국장상 같은 큰 상을 탔다. 그런 상에는 영어사전이나 만년필 같은 부상이 있어서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성적이 좋으나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돌아간 상은 교장상, 육성회장상 같은 상이었고 부상도 알파벳이 인쇄된 공책이나 주판처럼 값싼 것이었다. 육년 동안 단 한번의 결석도 없는 전학년 개근상 대상자만 해도 전체 졸업생의 삼분의 일 가까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공책 세권밖에 돌아가지 못했다. 일년짜리 개근상은 각자의 반에 돌아가면 따로 수여될 것이라고 했다. 그건 상장만 있었다.
시상이 끝나고 난 뒤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시작되었다.
—이제 여러분은 정든 학교를 떠난다. 어떤 사람은 상급학교로, 어떤 사람은 사회로, 어떤 사람은 가사를 도우고 집안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영원히 우리 학교의 동창으로서 우리 학교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제부터 이 학교는 어미 모(母), 학교 교(校)하여 여러분의 모교가 된다. 지금 여러분 옆에 있는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동기 동창으로서 친구가 될 것이다. 여러분의 선생님은 평생토록 선생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헤어지는 게 아니다. 영원히 추억 속에서 함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재학생 대표의 송사가 시작되었다. 5학년 5반 반장 강재성이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님, 언니, 누나, 형님 여러분.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봄이 오면 노란 병아리처럼 어여쁜 신입생을 맞이하고 손에 손을 잡고 노악사 솔숲과 동천 백사장으로 소풍을 떠났지요.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있던 5월에 우리는 부모님과 스승님의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며 은혜에 감사했고 여름이 되면 산과 강에서 함께 뛰어놀며 심신을 단련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서 최선을 다해 실력을 겨루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지 않았습니까. 언니와 형님들은 언제나 저희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고 저희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할 때마다 이끌어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군의 백일장과 사생대회, 도의 과학경시대회와 체육대회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해오셔서 학교의 영예를 높이셨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님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은 영원히 모교와 저희 동생들의 기억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형님과 언니들이 우리들을 보살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귀여운 동생들을 사랑과 열성으로 보살피겠습니다. 그리고 선배님들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제 형님과 누나, 언니들은 교문을 나서시겠지요. 오늘의 영광스러운 졸업은 새벽을 밝히는 샛별처럼 선배님들의 앞길을 영원히 비출 것입니다. 먼 훗날 다시 만나 서로 얼싸안고 웃으며 인사를 나눌 때까지 언제까지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 큰 세상으로 향하는 형님, 누나, 언니들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영광이 함께하기를 빌며 이 동생들, 길고 힘찬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형님, 언니, 누나,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누군가 써준 게 틀림없는 내용이었지만 재성은 하나 틀리지 않고 꼬박꼬박 다 읽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생들도 누구 하나 눈시울을 붉히지 않는 아이들이 없었다. 전교학생회장이면서 졸업생 대표인 박준국이 답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서자 곳곳에서 흐느낌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놈들아, 누가 죽으러 가기라도 하느냐. 왜 울고 불고 난리들이냐.
호랑이로 소문난 6학년 3반 담임 김종철 선생이 애써 웃으면서 주변 아이들에게 말했지만 그 역시 콧등이 벌게진 지 오래였다. 바깥에 서 있는 학부형들도 눈가를 훔치는 사람이 많았다. 답사가 시작되었다.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자랑스러운 아우들. 오늘 저희는 육년 동안 철없고 어린 우리를 받아들여 키워주고 안아준 정든 학교를 떠납니다.
졸업생들 가운데 여학생들이 먼저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준국은 잠깐 고개를 들어 여학생들이 있는 곳을 향해 참아달라는 듯 눈길을 보냈지만 곧 답사 원고로 눈을 돌렸다.
—돌이켜보면 육년 전 우리는 얼마나 어리고 약하고 보잘것없었는지요. 그런 저희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보살피느라 애쓰셨던 여러 선생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저희가 바쁜 집안일, 농사일을 거들지 못하고 공부를 한다며 학교로 나설 때, 그래 우리는 못 배웠지만 너희는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시며 등을 떠다미시던 부모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들은 굶으시면서도 우리에게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주셨지요. 소풍이며 운동회 때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주시며 사이다 사 먹으라, 과자 사 먹으라고 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저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무한한 사랑과 염원으로 오늘 저희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장내는 이미 울음바다였다. 준국은 작정이라도 한 듯 멈추지 않고 읽어내려갔다.
—봄이면 우리는 때를 씻기 위해 선생님들의 인솔로 오리떼처럼 냇가로 몰려나갔지요. 씻으라는 몸은 씻지 않고 물장구를 치고 수제비를 뜨며 선생님들께 걱정을 끼쳐드렸지요. 방과 후에도 집으로 가지 않고 공을 차다가 유리창을 깨도 선생님들은 너그럽게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유리창을 누가 끼워넣었는지 저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여름이면 선생님들이 가지 말라는 철교며 계곡으로 가서 담력 시합을 하고 깊은 물에서 거북이처럼 헤엄을 쳤습니다. 가을이면 송충이를 잡고 잔디씨를 훑고 벼이삭을 주워오고 메뚜기를 빈 도시락통에 잡아오는 숙제를 하면서 저희는 자연과 농사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다른 세상, 다른 학교에서는 좀처럼 겪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열거하자 장내에는 눈물과 함께 웃음소리도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우리는 이제 교문을 나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게 됩니다. 졸업생 여러분, 우리 중 누군가는 집으로 가서 가사를 돕고 농사를 거들겠지만,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배우러 상급학교에 가겠지만 오늘 여기를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똑같겠지요. 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졸업식이 될 겁니다. 아, 지난 육년 동안 우리는 서로 얼마나 즐겁게 뛰어놀았던가요.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쉬는 시간이면 양지쪽에 나가 장난을 하고 점심시간이면 음악에 맞춰 포크댄스를 추었지요. 추운 겨울이 되면 학교는 우리를 얼지 않게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어디가 아프면 치료해주고 배고파하면 먹여주고 목말라하면 물을 줬지요. 학교는 우리를 키워주고 안아주고 사람이 되라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아우들아, 이제 우리가 너희를 떠나가지만……
마침내 준국도 목이 메어 답사를 더 읽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양 졸업식장이 소리 내 우는 소리로 떠나갈 듯 시끄러워졌다. 여자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남자아이들은 벽을 치며 울었다. 어떤 아이는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면서 울기도 하고 누워서 우는 아이도 있었다. 창을 향해 돌아서서 조용하게 우는 아이도 있었고 목놓아 통곡하는 아이도 있었다. 교사들도 울고 학부형들도 울었다. 줄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서 있던 재학생들은 처음에는 다소간 혼란스러워하다가 모두 우는 분위기가 되자 합창을 하듯 높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울다 지쳐 바닥에 쓰러진 아이들이 속출했다. 도저히 더이상 답사를 더 읽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자 교장은 준국에게 내려오라고 지시했다. 준국은 울면서 단하로 와서 아이들과 어깨를 걸고 둥글게 모여 서서 울었다. 그렇게 각자의 인생에 다시 없을 눈물의 졸업식은 지나갔다.
만수는 전학년 정근상과 일년 개근상을 받았다. 상장 두장과 졸업장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념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꽃다발을 받지도 않았고 읍내의 중국집에서 청요리를 먹지도 못했다. 그의 부모는 졸업식에 오지 못했다. 이별과 슬픔의 졸업식이 지나갔지만 만수에게는 희망과 설렘이 있었다. 중학생이 입는 검은 교복, 교복에 달린 금속단추의 반짝임이 만수의 설렘을 생산하는 발전소였다.
사랑하는 동생 금희에게
많이 놀랐으리라 생각한다. 네가 다녀가고 난 뒤 일주일 만에 나는 입대를 결심했다. 친구와 선후배들이 이미 월남에 많이 가 있고 그들이 보내주는 편지와 사연으로 월남이 어떤 곳인지, 방송과 신문 등 언론을 통해 연일 전해지는 승전보로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를 여러 모로 생각하고 판단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우리집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없는 정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지.
인편으로 미싱을 한대 보냈다. 지금쯤 받아보았으리라 믿는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월남에 자원파병 상신을 하고 나서 받는 월급은 공무원 월급하고 비슷하다. 이 돈을 잘 모으면 복학해서 학자금으로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앞으로 농토를 사드리는 능력 있는 파월 동기들도 있지만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미싱을 한대 사 보내는 것뿐이구나.
보내준 미싱을 가지고 주변에서 일거리를 찾아보면 삯바느질에서부터 재봉일까지 맡아서 우선 먹고사는 데는 큰 도움이 될 게다. 수백대의 재봉틀이 한꺼번에 돌아가는 공장에서 각성제 사 먹어가며 야근해 번 돈을 꼬박꼬박 고향집에 부치는 갸륵한 여공들이 네 주변에 많이 있을 것이다. 너 또한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 내가 보낸 미싱으로 그들보다 좀더 나은 환경에서 건강을 지켜가며 넉넉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면 네 동생들을 서울로 데려와서 공부를 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파월기간은 대체로 일년이면 끝나기 때문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전역하면 서로 힘을 합쳐서 동생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별다른 교전이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서로 성한 몸으로 재회하여 얼싸안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는 미군들처럼 야전에 나가면 C레이션을 받아서 고기를 먹는다. 깡통을 따서 파인애플 주스도 물처럼 마시고 있지. 정글에서 매복근무를 하다가 부대로 귀환하면 차가운 캔맥주로 파티가 벌어지고 이따금 고국에서 일선 위문공연단이 와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가장 큰 낙은 고향, 고국에서 온 편지를 읽는 것인데 지금까지 집에서 편지가 세통이 왔다. 편지의 내용을 보니 모두 무고하신 모양이다. 가족들의 가장 큰 근심은 사전에 상의도 없이 자원해서 이국으로 떠나온 나에 관한 것이지.
여긴 정말 물건이 산더미처럼 많다. 일제 녹음기 세트와 냉장고, 믹서기, 커피 포트가 수두룩하다. 누구는 미군 막사에 들어가 커피, 주스, 우유, 칠면조 고기, 스파게티, 버터, 치즈, 감자튀김, 야채볶음, 잼, 각설탕, 미트볼, 햄, 소시지, 완두 쏘스, 청어조림, 달걀 프라이, 비프 스테이크, 프라이드 치킨을 배가 터지게 먹었다고 한다. 나 대신 미싱을 배달해준 고마운 분은 서울 청량리역 앞 캬바레에서 제비로 한 시절 날렸다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나는 명문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여대생들과 클래식 음악을 듣고 맥줏집에서 인생을 논하다 뜻한 바가 있어서 자원입대한 걸로 되어 있지. 정글에서 보초를 서면서 지루함을 잊기 위해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수십 수백번 서로 지어내고 들어주고 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부대 앞의 초목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러 나간다. 일은 아주 쉽다. 요 얼마 동안 미군들이 가지고 온 엄청난 장비들로 베트콩의 은신처이자 이동로, 보급로인 정글을 밀어버리고 트랙터로 평평하게 들판을 만들어놨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들판에서 다시는 초목이 자라지 않게끔 미군들이 준 제초제 농약을 살포하는 일이다. 이 농약은 첨단과학의 결정체라고 하는데 전우 가운데 농사를 짓다 온 친구들은 이런 게 자신들의 집에 진작에 있었더라면 농사는 진짜 거저먹기였을 거라고 감탄하곤 한다. 농사는 애초에 잡초와의 싸움인데 이 농약은 아예 식물을 이파리에서 뿌리까지 누렇게 말려 죽이는, 그야말로 발본색원의 초강력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 약은 독하기는 해도 모기약처럼 인체에는 피해가 없다고 한다. 예전에 어릴 때 DDT를 뿌렸을 때처럼 가려움증 정도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얼마만 지나면 참전기장과 함께 무공훈장을 받고 나 역시 귀국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 금희야. 세상 누구보다 어여쁜 내 동생 금희야.
우리 금방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하늘의 기둥이 무너졌다. 세상이 끝났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살아 이런 참척(慘慽)을 겪는단 말인가. 오호라, 백수야 백수야, 내 너를 잃고 어이 살아가랴.
남아로 태어나 학문을 닦고 세상을 바꾸는 것도 좋다만 그저 산골의 무지렁이로 살더라도 평온하게 오래오래 살라고 내가 네 이름을 그리 지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읍에서 개운리까지는 절반이 자갈밭 산길이라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기가 힘들다고 며칠에 한번이나 오던 우체부가 웬일로 편지를 전하러 제시간에 왔더라. 머뭇머뭇 꺼내놓은 편지에 적힌 네 이름을 보고 월남에서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줄 알고 잠시 기뻐한 그 어리석음이 뼈에 사무치는구나. 머나먼 땅 월남에서 일년 동안 용감하게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명령을 받아놓고 너는 왜 쓰러져 누웠으며 이국 땅 고혼이 되었는가. 전사가 아니라 병사(病死)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원인불명의 열로 인한 전신쇠약, 풍토병이 의심된다니 일년 동안 멀쩡하던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더냐.
너에게는 아무런 흠도 없었다. 너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심신에 가족이 너 때문에 무엇을 희생할까 염려해 혼자 힘으로 입신하려는 의지로 뭉쳐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강건하던 네가 왜 이국에서 풍토병으로 죽는단 말이냐.
군인이라면 전장에서 총검으로 생사를 결하고 눈먼 포탄에 혹 사지가 결딴이 나는 수가 있다. 전우를 구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초인적인 힘으로 적탄 앞에 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렇게 죽어간 많은 병사들, 장군도 장교도 아니고 이름 없는 수많은 소모품으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진 존재라고 한다면 억울한 중에도 이해를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젊고 건강한 네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다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병원에서 죽었다고 명예로운 죽음으로도 치지 않는 병사라는 걸 어찌 믿으란 말이냐.
너의 불쌍한 부모를 어찌하느냐. 너의 가련한 아우들을 어찌하느냐. 짐승과 초목들도 호곡하는구나. 비바람도 슬프게 흐느끼는구나. 온 식구들이 울고 온 집안의 생명이 울고 온 마을이 울고 땅이 울었다.
아, 하늘이시여, 어찌 늙은 내게 이런 참혹한 슬픔을 주시나이까. 어서 나를 데려가소서. 나를 죽이소서. 내 뼈를 꺾어 바수고 불로 남김없이 태워 재를 만들고 지옥의 바람에 날리소서. 나를 죽이소서. 제발 나를 죽이고 우리 모두의 백수를, 귀하디 귀한 금강석을 돌려주소서.
안녕하십니까. 고엽제 피해자 가족 준비모임입니다. 오늘은 고엽제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베트남전쟁 기간 중 미국은 베트콩의 은둔지와 무기 비밀수송로로 이용되어온 정글을 제거하고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 또 베트콩 경작지의 농작물 제거를 위해 1962년에서 1971년까지 330만 헥타르가 넘는 면적에 고엽제를 살포했습니다. 이는 베트남 전 경작지의 15퍼센트, 전 삼림의 30퍼센트에 해당합니다. 고엽제는 미 재향군인회 추산 약 8360만 리터,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 추산 9100만 킬로그램이 살포되었습니다. 고엽제를 지상에서 사람이 직접 뿌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미군은 헬기 등을 통한 공중살포를 훨씬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일부는 인간의 손에 의해 직접 가루 형태로 구석구석 효과적으로 뿌려졌으니 그 인간 중에 상당수가 한국군이었습니다.
고엽제를 대표하는 것이 미국의 몬산토 사에서 생산한 ‘에이전트 오렌지’로 미국산 고엽제 전체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고엽제가 담겨져 있는 드럼통에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오렌지 색깔의 띠를 둘렀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고엽제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인 다이옥신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다이옥신은 치사량이 0.15그램인 청산가리(시안화칼륨)의 일만 배, 비소의 삼천 배에 이르는 독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이옥신 80그램을 식수원에 희석하면 인구 팔백만의 도시를 죽음의 도시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이옥신은 잘 분해되지도 않을뿐더러 용해도 되지 않아서 아무리 적은 양이 흡수되었다 해도 몸속에 축적되어 각종 암, 신경계 손상, 기형유발, 독성 유전 등의 치명적인 후유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에게는 고엽제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주의사항이나 지시가 별달리 전달되지 않았던 까닭에 일부 병사들은 미군이 고엽제를 공중살포할 때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 하여 고엽제가 쏟아지는 곳을 쫓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더 맞으려 했습니다. 부대 주변에서 제초작업을 하는 병사들은 고엽제 가루를 철모에 담아서 맨손으로 뿌리기도 하고 고엽제가 살포된 정글에 흐르는 물을 수통에 담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이옥신이 눈, 코, 입, 피부 등을 통해 온몸에 축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베트남 국민 약 사백만명이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에 노출됐고 기형아 출산이 급증하는 등 부작용이 속속 보고되었습니다. 세계의 비난이 집중됨에 따라 1969년 11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앞으로 미국은 어떤 종류의 세균전도 포기하며 현재 저장된 모든 생물학무기를 파괴하고 인간을 살상하는 화학무기도 선제사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한편 이날 미 정부관계자는 보충설명을 통해 ‘현재 미국이 초원을 태워 적을 수색하는 일과 농작물을 말라비틀어지게 하여 적의 식량공급을 막기 위해 대량으로 사용하는 제초용 약품은 제네바의정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참전국 장병들은 원인 모르는 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978년경부터 미국에서는 엄청난 사회적 문제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인 모를 질병이 고엽제의 후유증인 것으로 판단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의 3개국 월남전 참전 환자 24만명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고 손해배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연방법원은 2억4천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습니다. 독재정권하에 있는 한국에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소송 참가와 언론 보도를 금지해 환자들 대부분이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원인도 모르는 ‘베트남 풍토병’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왜 자기가 죽어가는지 몰랐고 병원에서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살아보려는 본능 때문에 병원을 찾아 전전하며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전우들 중 몇명은 더이상 가족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세계평화 수호와 국가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수만의 참전군인들은 고엽제라는 맹수가 제 모습을 철저히 숨긴 채 먹이가 먹음직스럽게 자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누리는 즐거움이 뭔지 알았을 무렵, 고엽제는 그들의 인생을 덮고 있던 한겹 허술한 거죽을 갈갈이 찢어발기고 바깥으로 뛰쳐나와 당사자뿐 아니라 온 가족을 인정사정없이 덮쳤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술 한잔을 마신 적이 없었다. 한 방울의 알코올조차 할아버지에게는 소화시킬 수 없는 독이었다. 그런데 오빠의 죽음을 전해준 우체부가 저녁에 다시 집으로 왔다. 늘 병석에 누워 있다시피 하던 할아버지가 소주 됫병을 벽에 걸어두고 있는 동네 어귀 이재호네 집에까지 가서 그 집 소주를 얻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전해주러 온 것이었다. 온 식구가 울고 있는 중에도 누군가는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야 했다. 만수를 데리고 일어섰다. 할아버지를 양쪽에서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할아버지는 “백수야, 백수야, 이제 네 부모를 어찌 하느냐, 불쌍한 어린 동기들을 어찌하느냐, 내 어찌 사느냐” 하며 우셨다. 집으로 들어서서 방에 눕혀드리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만수를 앞에 불러 앉혔다.
—이제는 네가 이 집안의 기둥이다.
할아버지는 만수의 머리통을 끌어 당신의 주름투성이 이마에 만수의 이마를 맞댔다.
—네가 형을 대신하여 집안을 지켜야 한다. 비 새는 천장과 같은 네 부모를 떠받치고 수숫대 담벼락과 같은 형제를 이끌어줘야 한다. 형이 없는 빈자리를 채울 사람은 오로지 만수, 너뿐이다. 내 말을 알겠느냐.
만수는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뭇가지처럼 엉성하고 비쩍 마른 몸에 믿고 의지할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다 같이 부축을 하고 왔건만 여자인 나는 그저 우는 일밖에 없는 것같이 여겨졌다. 기분이 이상해서 돌아보니 석수가 어두운 마당 한켠에 주먹을 쥔 채 서 있었다.
기둥이 부러지고 쓰러져가는 일밖에 남지 않은 집구석에 새 기둥이 무슨 소용이며 천장은 뭐고 바닥은 뭔가. 남자들은 이해하기 힘든 종족들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울었다.
대학에 다니던 형이 월남에 갔다가 한줌 재가 되어 돌아온 이후 우리집은 납덩이 같은 침묵에 둘러싸였다. 형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금기시되었다. 월남이나 군인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늘로 가고 없는 형은 우리 육남매 중 유일하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었고 남아 있는 우리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서로를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병환이 심해져서 하루종일 자리에 누워 있기만 했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간호하는 데 모든 힘을 쏟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일만 했고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자나깨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달랐다.
형이 죽고 난 뒤 옥희는 2학년, 나는 5학년, 만수는 중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저녁에는 어두워져도 불을 켜지 않았다. 석유를 사오곤 하던 형이 생각나서인지 아버지가 불을 켜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말없이 저녁을 먹은 우리는 숙제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아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각자 웅크리고 누워 바람 소리 같은 한숨과 신음을 내뿜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하면 뭘 하나. 형은 공부를 잘했다. 아는 것도 많았다. 물어보면 모르는 게 없었다. 효도를 하면 뭘 하나. 형은 어떤 집에서도 부러워하던 효자였고 모범적인 아들이고 모범적인 손자였다. 글을 잘 쓰면 뭘 하나. 형은 국민학교 때부터 백일장에 나가서 빠짐없이 상을 타왔다. 어디에 가든 일기를 썼고 편지도 잘 썼다. 실험도 잘했고 호기심도 많았다. 동생들한테 잘해주면 뭘 하나. 형은 누나나 만수, 옥희한테 그럴 수 없이 다정하고 살뜰하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었다. 글이며 노래, 바둑, 한글을 가르쳐주고 하모니카를 사주고 책을 읽게 했다. 나무 이름, 풀 이름, 별자리를 가르쳐주었다. 형제들을 대표해 아버지한테도 할 말을 했다. 우리의 우상이 되었다. 마침내 밤하늘에 올라가 영원히 변치 않고 빛나는 별이 되어버렸다.
형은 툭하면 꿈에 나타났다. 형은 교복을 입고 혼자 베트콩 일개 연대를 무찌르고 무공훈장을 탔다. 고시에 패스해서 판사가 되었고 나를 한심한 놈이라고 판결했다. 부모님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아느냐면서 그 기대를 배신하면 감옥에 처넣고 굶겨 죽일 것이라고 했다. 형은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면서 삐라를 뿌렸다. 금빛 삐라가 공중에서 날아내리는 것을 보고 수천명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뛰어갔다. 형은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갔다. 알약을 보여주면서 한알만 먹으면 일주일 동안 굶어도 된다고 했다. 형을 볼 때마다 약이 올랐다.
점점 집이 싫어졌다. 집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게 무섭고 싫었다. 내가 날이 이슥하도록 늦게까지 밖에서 놀다 가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관심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충일 하루 전에 선생님이 6・25나 월남에서 전사한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삼분의 일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휴일인 현충일 오전 열시에 기념식을 한다고 해서 학교에 가야 했다. 학교에 모인 뒤 읍내 제일 높은 산에 세워진 충혼탑 앞으로 줄을 맞춰 걸어갔다. 싸이렌 소리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만수였다. 창피했다. 동생이라고 할까봐 겁이 났다. 그날부터 집에 갈 때 만수와 같이 가지 않았다. 동네에서 놀 때도 만수가 보이면 혼자 떨어져나왔다.
가을이 왔다. 신품종으로 보급된 키 작은 통일벼가 베어진 논을 가로질러 학교에 갔다. 일반 벼보다 일찍 수확하는 통일벼는 밥맛이 없었다. 벼줄기는 끈기가 없고 짧아 새끼를 꼬는 데도 지붕을 이는 데도 쓸모가 없어 고작 아궁이에 연료로나 쓸 수 있었다. 거기다가 흉년이 들어서 괜히 심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통일벼만 수매를 해주고 통일벼를 심는 농가에만 대출을 해준다고 하니 통일벼를 심을 수밖에 없었다. 산골짜기에 있는 우리 동네 논은 물이 차서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개발된 통일벼 품종은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통일벼 심은 논에 들일 화학비료와 농약 또한 비싸서 살 수도 없었다. 결국 통일벼를 심지 않아서 정부의 지원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느날 조회에서 교장선생님이 엄숙한 얼굴로 ‘민족 중흥과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하기 위해 10월유신이 실시되면서 유신헌법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투표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투표권이 있는 어른들은 무조건 투표를 하게 해야 하고 그게 국민의 의무이며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투표일에 투표를 하도록 독려하는 포스터를 만드는 것도 우리이고 그 포스터를 붙일 사람이 우리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4학년 이상 각 반에서 분단장 이상 간부들이 운동장에 집합했다. 교장선생님이 오늘 내로 한 동네도 빠짐없이 각 반에서 만든 포스터를 붙이라고 지시했다. 선생님들이 포스터를 붙일 때 쓰는 못과 망치를 받아왔다. 우리반 담임선생님은 자전거 짐받이에 포스터를 묶고 아이들을 향해 자전거 뒤를 따라서 뛰어오라고 했다.
가까운 동네부터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동네에 사는 아이에게 포스터를 붙이고 누가 그걸 떼거나 찢지는 않는지 잘 지키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신고를 하라고도 했다.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남고 다른 아이들은 자기 동네가 나올 때까지 선생님의 자전거를 따라 뛰었다. 그렇게 많은 동네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도 많았다. 배가 고파오고 다리도 아프고 바람은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지 않을 만큼 세게 불었다. 개운리로 접어드는 산길 입구까지 왔을 때 선생님과 나 둘만 남았다.
—네 동네가 여기서 한 십리는 더 가야 되지? 거기 아직 전기도 안 들어오는 동네가 맞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쿨룩쿨룩 기침을 하다가 내게 포스터를 내밀었다.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네가 이걸 가지고 가서 동네에 붙여라. 누가 물으면 내가 너희 동네까지 갔다고 꼭 대답해야 한다. 안 그러면 네가 졸업할 때까지 매일 손바닥을 백대씩 때리겠다.
나는 물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포스터를 접어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동네에서 놀다가 어두워진 뒤 집에 간 일은 많았으나 십리 산길을 땅거미가 내릴 때 혼자 가는 건 처음이었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호랑이나 늑대가 나오나 싶어 깜짝깜짝 놀랐다. 무서움 때문에 힘든 것도 잊고 계속 산길을 뛰었다. 동네가 가까워오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안심이 됐다. 그때 산에서 누군가 수숫단과 나뭇가지를 지게에 싣고 내려오는 게 보였다. 만수였다. 반갑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
만수가 물었다. 대답도 하기 싫었지만 나는 학급 부반장이고 만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모르는 것 같아서 ‘10월유신 찬반투표에 투표하는 사람이 애국자이고 이 포스터를 두고 무슨 짓을 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일러주면서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만수는 포스터를 받아들고 펴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내 책가방을 지게에 얹으라고 했다.
집으로 들어서자 캄캄한 방 안에서 식구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작은누나가 상 앞에 앉아 있고 어머니는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뭐 하고 놀다 이렇게 늦게 와?
작은누나가 묻길래 나는 만수를 가리켰다. 상 앞에 다가가 앉자 만수가 내 책가방과 포스터를 들고 왔다. 할아버지가 물었다.
—네 손에 들린 거, 그게 뭐냐?
만수는 내가 가르쳐준 대로 10월유신 개헌투표에 반드시 참가해 투표를 하라는 취지에서 학교에서 붙이는 포스터라고 했다.
—투표는 국민된 자의 타고난 권리다. 투표를 하고 안하고는 각자의 판단에 따르면 되는 일이다. 왜 국민과 역사 앞에 부끄러운 짓을 하며 왜놈들 법을 빼닮은 개헌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라고 강요를 하는 것이냐.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을 시켜서 이따위 짓을 하고 있으니 국가 지도자요, 대통령이라는 자가 한심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구나. 젊은 목숨들을 남의 나라 전쟁에 팔아먹은 걸로 부족해 이제는 종신 독재권력을 탐해?
나는 대통령을 욕하는 할아버지를 경찰서에 신고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숨을 죽였다. 만수는 언제부터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걸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너희도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구나. 너희 나이가 몇이냐.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더냐. 백수가 있었으면 절대로……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숟가락을 집어던지더니 벌떡 일어섰다. 곰처럼 거친 발소리를 내며 나간 아버지는 발로 문을 걷어차 닫으면서 “씨부랄 거, 술 가져와, 술!” 하고 외쳤다. 할머니가 일어서려는 할아버지의 팔을 부여잡고 말렸다. 할아버지는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허연 수염이 힘없이 흔들렸다.
—저런 고이헌!
밖에서 아버지가 그동안 술을 담지 않아서 술이 없다는 어머니에게 “망해처먹을 집구석, 불 확 싸지르기 전에 술 가져오라고!” 하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옥희가 이이잉 하고 울기 시작했다. 만수도 주먹으로 눈을 훔치고 있었다.
—이런 데 애들 놔뒀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쉰 뒤에 말했다.
—소를 팔아라. 땅을 팔아라.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아서 여기를 떠나거라. 모두. 가거라.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