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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강렬도의 미학과 장편소설
들뢰즈 문학론의 잠재력에 관하여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역서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헤겔, 아이티, 보편사』 『바그너는 위험한가』 등이, 최근의 글로는 「죽음과 죽음욕동의 담론들—프로이트, 라캉, 하이데거」가 있음. shkim@swu.ac.kr
1. 이론의 영토성
질 들뢰즈(Gille Deleuze)가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타계한 1995년 전후일 것이다.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앞선 시점에 우리의 담론장에 진입한 푸꼬, 데리다, 라깡과 더불어 들뢰즈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전반에 거의 대중적이라 할 만한 인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 들뢰즈의 주요 저작 대부분이 번역되었고, ‘유목주의’나 ‘노마드’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도주’냐 ‘탈주’냐, ‘판’이냐 ‘구도’냐 하는 번역어 논쟁이 있었다. 지금은 어떨까? 들뢰즈에게 영감을 받은 이들과 다시 그들에게 영감을 받은 이들의 활동은 더 폭넓고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들뢰즈에 관한 새 책이 계속 등장하고, ‘기계’ ‘리좀(뿌리줄기)’ ‘도주선(탈주선)’ ‘되기’ ‘탈영토화’ 같은 표현이 어디선가 줄기차게 들려온다. 이를 보면 들뢰즈의 이론은 그사이 세를 확장해왔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제 들뢰즈는 들뢰즈주의자들이 둘러친 경계 바깥으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느낌이다. 탈영토화 이론의 영토화라고나 할까?
이론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그 자기충족적이고 자기지시적인 성격이 강화되는 경향을 ‘이론의 영토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생소한 개념들이 더이상 쑥스러워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무한복제를 시작할 때, 또는 이론이 현실의 구체적 상황이나 다른 이론과의 대결보다 내부적 논쟁을 더 흥미로워 할 때는 영토화를 의심할 만하다. 개념의 사용이 불가피하듯 이론의 영토화는 얼마간 불가피하다. 그 주요 추진체가 다름 아닌 학적 엄밀성의 추구와 정서적 투신(둘 다 이론의 발전에 긴요하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영토화의 극단에 이론의 정신착란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때 이론은 황홀한 동어반복의 행위가 된다. 자기 모양대로 창조된 현실을 자기 모양에 따라 설명하는 데서 자기의 존재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위험이고, 들뢰즈주의뿐 아니라 라깡주의 같은 다른 이론도 경계해야 마땅한 위험이다. 이를 환기하는 것이 현재 들뢰즈를 지적・실천적 원천으로 삼고 있는 많은 이들의 진정성을 폄훼하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 덕분에 바로 이 글도 가능해진 것이다. 이 글에서 염원하는 바는 들뢰즈가 더 풍요롭게, 더 열린 광장에서, 더 많은 이질적 이론들과 ‘접속’되는 가운데 논의되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 이론의 탈영토화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탈영토화가 이론의 대중화나 실천적 활용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탈영토화, 또는 도주는 들뢰즈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체계로 하여금 도주하게 하는 것”1)이기도 한데, 우리의 경우에는 이론이 자신의 잠재력을 해방하여 자신의 현재적 한계, 즉 해석적 동일성의 체계를 넘어섬을 뜻할 것이다.
이런 염원을 바탕에 깔고 이 글이 실제로 하려는 바는 들뢰즈의 미학과 문학론이 지닌 잠재력, 즉 여러가지 미학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들뢰즈 미학이나 문학론의 충실한 재현도, 그 난점과 공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도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우선 들뢰즈 미학의 일반적 특징과 그 함의를 제시해보고, 다음으로 카프카론을 중심으로 그의 소설 미학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2. 강렬도 미학
예술과 문학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고 여러 저작에 산포되어 있다. 때로는 이 저작들 간에 분명한 이념적・개념적 연속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영미문학의 우월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대화』(Dialogues, 1977) 제2장의 일부 대목은 들뢰즈와 가따리(Félix Guattari)의 공저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 이하 『카프카』)의 축약판처럼 읽힌다. 『카프카』와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 사이에도 널따란 공통지대가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논평들이 미학적으로 서로 다른 곳을 향하는 듯이 보일 때도 있다. 그가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에서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작품을 두고 펼치는 시뮬라크르와 ‘표면’의 담론은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에서 니체의 ‘징후학’을 매개로 전개하는 ‘힘’의 담론과 얼마나 다른가. 범박하게 말해 전자가 포스트모던한 ‘깊이 없음’이나 ‘무근거’의 미학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좀더 모더니즘적인 ‘깊이’의 미학을 지시하는 듯하다. 물론 이 ‘깊이’의 미학은 본질의 재현을 추구하는 또다른 ‘깊이’의 미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들뢰즈에서 ‘깊이’—힘, 잠재태, 감각, 강렬도적인 개체화2), 그밖의 용어들로 지칭될 수 있는 내용—의 예술적 ‘표현’은 실재의 재현이나 재인(再認, recognition)이 아니라 그 발생적 전개로 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3)
예술적 표현을 실재의 발생적 전개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표현을 실재에 대해 그저 이차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 실재적이며 현재적인 사건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예술적 표현은 현재진행형의 강렬도적 사건인바, 이 사건 안에서 잠재태는 현행의 체계와 질서에 대립하는 힘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예술작품을 다른 존재자의 변용(affection)의 원인으로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잠재태는 현실적이지 않지만 실재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앞서 대립했던 ‘깊이’와 ‘깊이 없음’의 차이는 모호해질 수 있다. 미학에서 ‘깊이’란 일반적으로 형상(형식, 외연)과 그것이 지시하는 내용(내포) 사이의 거리를 가리킬 것이다. ‘깊이’가 성립할 때 현재적인 강렬도적 사건은 형상에 의해 재현된다기보다 우회적으로 지시된다.4) 하지만 사건이 형상을 극도로 왜곡하거나 폭파시킬 경우 그런 우회적 지시의 기능마저 붕괴된다. 형상과 내용의 거리는 사라지거나 극소화된다. 재현하는 형상 대신 어떤 것도 모방하지 않고 모방되지도 않는 강렬도 및 특이성들(singularities)의 세계가 들어선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미학을 ‘강렬도 미학’으로 통칭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모더니즘적이냐 포스트모더니즘적이냐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혹은 그 두 종류의 (그리고 그밖의) 미적 정향을 모두 수용하면서 예술의 현재성을 조명하는 것이야말로 강렬도 미학의 한가지 강점이랄 수 있다. 물론 들뢰즈가 강렬도적 사건의 비형식성 또는 반형식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국내외의 들뢰즈 해석자들 역시 형식의 해체에 역점을 두고 그의 미학을 설명함으로써 들뢰즈의 ‘탈근대성’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형식’의 의미를 따져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는 길게 논할 만한 쟁점이지만 여기서는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문학과 삶」이라는 글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글쓰기란 확실히 체험이라는 질료에 (표현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곰브로비치(Witold Gombrowicz)가 말하고 또 실천했듯이 문학은 형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 또는 미완의 것을 향한다. 글쓰기는 되기의 문제이며, 언제나 미완이고, 언제나 형성되는 와중에 있는바, 그것은 여하한 체험이나 체험 가능한 것이라는 질료를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 즉 체험 가능한 것과 체험된 것 모두를 가로지르는 ‘삶’의 도정(a passage of Life)이다.5)
이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진술에서 들뢰즈는 글쓰기를 질료와 형식의 인과론에서 빼내온다. 글쓰기는 질료가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질료와 형식을 동시에 넘어서서 특이성의 지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되기는 하나의 형식(동일시, 모방, 미메시스)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근방역(近方域), 식별 불가능성 또는 미분화(未分化)의 지대(the zone of proximity, indiscernibility, or indifferentiation)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 예견되지도 선재(先在)하지도 않는 존재, 하나의 형식 속에서 결정되는 대신 무리 가운데서 특이화된(singularized) 존재다.”6) 여기서 형식이 글쓰기의 원인7)이 아닌 것은 외연이 강렬도의 원인이 아니고 자아가 강렬도적인 개체화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다. 형식, 외연, 자아는 오히려 강렬도적 사건으로부터 출현하며 그것에 의해 붕괴되기도 한다.
강렬도, 다시 말해 순수 차이가 동일성으로서의 형식에 전복적임은 물론이다. 들뢰즈가 강렬도적 차이를 감각의 문제, 정확히 말해 “감각 불가능한 것이자 동시에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8)의 문제로 제기하기 때문에 기표를 특권화하는 이론들에 적대적인 것도 사실이다.9) 그런데 여기서 두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들뢰즈가 형식의 원인적 지위를 부정한다고 해서 형식의 필연성을 부정한다고 볼 이유는 없다. 물질적 개체에서나 글쓰기에서나 강렬도적 사건은 형식을 전제한다. “정신착란”으로서의 문학10)도, 그것이 문학인 한, 의미연쇄의 완전한 파괴 위에 성립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자유’가 아닌 ‘도주’에 대해 말하는 이유다. 둘째, 들뢰즈가 “동일시, 모방, 미메시스”와 동렬에 놓은 형식은 주체화의 형식인데, 이런 의미의 형식이 문학작품, 특히 장편소설의 형식까지 포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뒤에 다시 다루겠지만, 장편소설에서 형식은 들뢰즈가 ‘배치’(配置, agencement/assemblage)라고 부르는 것에 더 연관되어 있을 듯하다(물론 배치가 형식은 아니다). 이 ‘배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토 없는 배치, 영토성이 없는, 온갖 종류의 책략을 포함하는 재영토화가 없는 배치는 없다. 그러나 탈영토화의 첨점(尖點)이 없는 배치, 그것을 새로운 창조나 아니면 죽음으로 이끄는 도주선이 없는 배치가 과연 있겠는가?”11) 이를 참조할 때 예술의 형식이란 단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공격 자체의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강렬도적인 형식, 차이의 형식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영토성과 탈영토화 사이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이데올로기와 정서12) 사이의 길항의 형식일 것이다.
사실 형상이나 형식이 해체되거나 심하게 뭉개져야만 현재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화』에서 들뢰즈가 도주의 예시로 드는 작가들 가운데 하디(Thomas Hardy), 멜빌(Herman Melville), 로런스(D. H. Lawrence) 등은 서사형식을 실험하기는 했지만 파괴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경우다. 심지어 이들은 리얼리즘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거기에 모더니즘적인 충동을 용해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가 암시하고 있는 미학적 가능성들을 모두 충실히 따라가지는 않은 셈이다. 그의 카프카론이나 프루스뜨론, 또는 「바틀비」론이 ‘언어의 도주’에 집중하는 대신 “체험 가능한 것과 체험된 것 모두를 가로지르는 ‘삶’의 도정”을 더 깊이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형식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형식이 “‘삶’의 도정”을 어떻게 굴절시키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탐구했다면?
이는 들뢰즈의 비평적 글쓰기에서 아쉬운 대목이지만, 그의 풍요로운 통찰과 암시들을 더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에게 과제로 남았다. 강렬도 미학을 구성하는 그의 통찰을 한가지만 더 살펴보자. 바로 문학의 비인칭성(impersonality)에 관한 것으로, 이는 앞서 언급한 ‘식별 불가능성’이나 ‘특이성’의 지대와 연관된다. “문학은 (…) 외관상의 개인들 아래에서 비인칭의 힘을 발견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한다. 비인칭은 일반성이 아니라 최상의 특이성이다. (…) 우리에게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빼앗는 어떤 3인칭(블랑쇼의 ‘중성적인 것’)이 우리 안에 태어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문학은 시작된다.”13) 들뢰즈에게 문학은 ‘3인칭’의 문제다. 사회적 주체로서‘나’와 ‘너’가 하는 말, 또는 작가와 인물의 말이 문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빌릴 뿐인 어떤 ‘3인칭’이 하는 말, 그것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이것이 문학이다. 여기서 ‘3인칭’은 ‘비인칭’이라는 다른 표현을 볼 때나 블랑쇼의 ‘중성적인 것’(le neutre)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나 ‘그녀’조차도 아닐 것이다. 성을 따질 수 없는 것, 어떤 동일성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 인간적 주체가 아니며 ‘존재’조차 아닌 것, 차라리 순수한 과정, 종착지를 설정해놓지 않은 과정—요컨대 ‘삶의 도정’. 여기에 신비주의가 끼어들 틈은 없다. ‘삶의 도정’, 강렬도적 사건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그것은 구체적 시공간 속의 사건일 뿐 아니라, 한 개인 안에 집합적으로 존재하는 감각들 사이의, 그리고 그 감각들과 다른 존재의 감각들 사이의 ‘조우’에서 비롯되는 집단적・관계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비인칭성(몰인격성)은 소설가 로런스가 말한 바 있는 ‘그것’(IT)의 비인칭성을 닮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경이로운 선택자나 결정자가 아니다. ‘그것’(IT)이 우리를 대신해 선택하고 우리를 대신해 결정한다. (…) 우리가 근원에 맞닿아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그것’이 우리를 몰아가고 우리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것에〕 복종하는 한에서만 자유롭다.”14) 로런스에게 문학적 진리는 작가가 숱한 ‘거짓말’을 통해 오묘하게도 ‘그것’을 드러낼 때 생겨난다. ‘그것’은 결코 의식이 직접 접근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들뢰즈가 ‘진리’의 개념에서 로런스와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그것의 (그리고 ‘그것’의) 과정적・비실정적 성격에 대한 생각은 공유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공히 전통 형이상학을 불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3. 소수문학의 정치성과 배치의 미학
강렬도의 미학이 카프카의 소설언어와 만난 순간 저 유명한 ‘소수문학론’이 탄생한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카프카』는 일차적으로 카프카 문학의 특수성을 밝히는 비평적 작업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문학의 정치’에 관한 선구적 입론이자 ‘배치’ 개념을 중심으로 장편소설의 미학을 논하는 독창적 장르론으로도 읽을 수 있다. 저자들이 카프카를 제대로 이해했느냐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15) 이 글은 소수문학의 정치성과 장편소설론에 집중한다.
프라하의 유대인 사회에서 자란 카프카는 체코어도, 히브리어도, 이디시어도 아닌 독일어로 글을 썼는데, 프라하의 독일어는 체코어와 이디시어의 영향을 받아 굴절된 언어였다. 들뢰즈/가따리는 이런 특수성이 카프카를 ‘언어의 탈영토화’로 이끌었다고 본다. 저자들에 따르면 그의 문학은 지시하지도, 은유하지도 않는 언어, 의미가 중화된(사라진) 언어, (「변신」의 주인공이 내는 소리 같은) “생생한 표현적 질료”로서의 언어를 선보인다.16) 카프카는 언어의 의미적이거나 기표적인 사용 대신 “순전히 강렬도적인(intensive) 사용”을 택하는데, 프라하의 독일어를 그 빈곤하고 건조한 상태 그대로 취해서 의미가 탈각되고 강렬도만 남는 지경으로 탈영토화를 밀고 나아간다.17) 들뢰즈/가따리의 글에서 이 같은 언어의 ‘강렬도적’ 사용은 그 ‘소수적’(mineur/minor) 사용으로도 불리며, 이를 구현한 문학은 ‘소수문학’이라 불린다. 소수문학은 소수언어(또는 방언)를 사용하거나 소수민족의 삶을 반영하는 데 그 본질이 있지 않다. 그것은 표현의 수단이나 주체나 소재의 문제가 아니고 표현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카프카의 관심은 “그 자신의 언어를—그것이 유일한 언어이고, 다수적(major)이거나 지금까지 다수적이었던 언어라고 가정할 때—소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18) 다시 말해 그것은 “다수적 언어의 소수적 사용을 발명하는” 것, “이 언어를 소수화하는(minorize)” 것이다.19)
소수문학은 카프카의 프라하나 조이스・베케트의 아일랜드 같은 특수 환경에서만 가능한가? 들뢰즈/가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문화적・언어적 특수상황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소수성’을 문학 일반의 특성처럼 제시한다. 「문학과 삶」에서 “언어에 대한 문학의 효과”는 이렇게 기술된다. “문학은 언어의 내부에 일종의 외국어를 펼쳐놓는데, 이는 (…) 언어의 다른 것-되기, 이 다수적 언어의 소수화다.”20) 『카프카』에서 소수성은 문학 자체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자 혁명적이거나 민중적인 문학의 핵심으로까지 묘사된다. “‘소수적’이란 이제 특정 문학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또는 기성의) 문학으로 불리는 것의 심장부에 있는, 모든 문학의 혁명적 조건을 가리킨다. (…) 다수적 언어의 소수적 실행을 그 내부로부터 수립할 가능성만이 민중문학, 주변문학 등등을 규정할 수 있게 해준다.”21)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수적이지 않은 혁명문학은 없다.
그런데 이런 유사정치적 담론은 오히려 소수문학의 정치성을 미심쩍은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들뢰즈/가따리의 ‘혁명’은 순전히 언어 내적이거나 문학 내적인 사건이 아닌가? 그들은 언어적 실험의 의의를 과장하거나, 혹은 그런 실험이 동반되지 않은 혁명적 문학이나 민중문학의 의의를 축소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사실 잘못 제기된 것이다. 탐구의 대상인 언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관계를 자명한 듯이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두가지다. 첫째,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느 정도로든 ‘다수적 언어의 소수적 사용’을 동반하지 않는 혁명적 문학이나 민중문학이 있는가? 혹은 그런 ‘다수적’ 문학을 혁명적(민중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둘째, 이념이나 정서에서 혁명적이지 않으면서 언어에서 소수적인 문학은 없는가? 언어적 소수성과 협의의 정치적 보수성은 결합할 수 없는가?
첫번째 질문에 우리는 단호한 부정으로 답해야 한다. 소수적이지 않은 혁명적(민중적) 문학은 없다. 혁명적(민중적) 문학이 모두 카프카의 소설처럼 씌어졌거나 그래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다수적 언어, 즉 지배문화가 배어 있는 언어 안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발명하고 이를 통해 욕망의 싸움을 벌이지 않는 문학은 궁극적으로 혁명적(민중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역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가지 경우를 생각해보자. (i) 혁명적(민중적) 문학은 발전의 초기 국면에 지배계급의 언어를 광범위하게 가져다 쓰지만 거기서 의미의 이탈, 문법 파괴, 양식상의 변형이 일어나는 한 그 문학은 소수적인 것으로 규정된다.22) (ii) 패러디와 아이러니의 대가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예시하듯이 19세기 서구 리얼리즘 소설도 다수의(multiple) ‘언어들’은 물론, ‘다수적 언어의 소수적 사용’을 폭넓게 보여준다. (iii) 혁명적(민중적) 문학이 완숙의 경지를 넘어 자기복제를 시작할 때 그 소수성은 사라진다. 1934년의 작가동맹 제1차 대회 이후 쏘비에뜨 러시아의 공식 미학이 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언어의 ‘다수적 사용’에 익숙해진 ‘혁명문학’은 더이상 혁명적이지 않다. 결국 소수문학은 이데아가 아니라 다양한 모양과 수준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실존이다.
두번째 질문, 보수적 이념이나 정서와 결합한 소수문학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우리는 분명한 긍정으로 답해야 한다. 이것은 언어와 욕망, 언어와 사회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답변이 아니다. 카프카에게 언표행위(enunciation)가 “언제나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하나의 미시정치학, 모든 상황을 문제 삼는 욕망의 정치학”23)이었는지는 따로 밝힐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언표행위에 세계에 대한 근본적 태도가 연루되어 있음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언표행위가 모든 것의 집결지라거나 모든 것의 궁극적 심급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수적 언어의 소수적 사용’에는 기성체제와의 불화가 함축되겠지만, 그 불화에 언제나 발화자의 모든 욕망과 이념과 정서가 녹아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개인의 감각은 집합적인데,24) 그 집합은 종종 그 내부에서 모순적이다. 언표행위의 급진성, 즉 지배적 약호(코드)나 기표를 해체하고 언어를 의미와 주체가 사라지는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로 몰아가는 행위는 지배의 물적 체제에 대한 몰이해나 심지어 선호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의식과 욕망이 모순된다기보다 두가지 욕망이 모순을 일으키며 공존하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들뢰즈와 가따리 자신도 욕망과 법 각각의 두가지 상태—선분(線分, segment)25)에 포획된 욕망과 선 전체에 걸쳐 탈주하는 욕망, 초월적・편집증적인 법과 그것의 배치를 해체하는, “정의처럼 기능하는” 내재적・정신분열적인 법—가 한데 뒤섞여서, 역사가 더 진전되기 전에는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을 구별해낼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말한다.26) 혁명적이면서도 이미 관료적이거나 파시즘적인 요소를 지닌 운동을 염두에 둔 말이지만, 언표행위에 연루된 욕망과 실천상의 욕망이 다르거나, 또는 언표행위 자체에 상이한 방향의 두 욕망이 연루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가령 해체의 욕망이 급진정치 진영의 언어—그것이 그 진영 내부에서 ‘다수화’되었다는 전제하에—만을 선택적으로 향할 때 글쓰기는 ‘보수적 소수문학’이 될 수 있다. 또 기표나 형식을 무력화하거나 과잉생산을 통해 그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에 온 힘을 쏟는 글쓰기는 그 자체로 편집증적 욕망에 사로잡힌 것일 가능성이 많다.
요컨대 소수적이지 않은 혁명적(민중적) 문학은 없지만 혁명적(민중적)이지 않은 소수문학은 있다는 것이다. 소수성은 혁명적(민중적) 문학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는 들뢰즈/가따리가 제시한 ‘다수적 언어의 소수화’, 다시 말해 언어의 탈영토화의 의의를 인정하되 그것을 ‘전술’이 아닌 ‘전략’의 차원으로 승격시키는 일은 경계해야 함을 의미한다.27) 소수화가 진정으로 혁명문학, 민중문학, 프롤레타리아문학, 주변문학 등을 공통으로 규정하는 핵심요소가 되려면 그것이 글쓰기의 더 큰 ‘전략’ 안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의 논의에서 소수문학의 정치성은 분명하게 정의되지 못했다. 우리가 파악한 것은 소수문학이 언어의 탈영토화를 통해 의미와 연관된 기성의 욕망의 배치를 뒤흔들고, 이를 매개로 집단적 삶이나 현실정치와의 연관성을 획득한다는 것 정도이다. 여기에 제시된 언어-욕망-정치의 연속성은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가 말하는 ‘문학의 정치’와 흡사한데, 주지하듯이 후자에서는 욕망의 배치 대신 ‘감지 가능한 것의 분배(혹은 분유分有)’28) 개념이 등장한다. 랑씨에르에게 문학의 정치는 무엇보다 의미화체계로서의 언어적・감각적 위계를 부수고 세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문학적 무정부주의를 뜻한다.29)
그러나 이런 무정부주의적 기능을 파괴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위계의 와해는 종종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공유하는 집단의 도래와 맞물려 있으며, 랑씨에르가 의도하는 ‘정치적인’ 문학은 그 도래할 공동체와 적극적으로—즉 창조적으로—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기존의 것에 비해 더 선하거나 성숙한 집단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우리는 들뢰즈/가따리의 ‘소수문학’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들에게도 문학, 적어도 장편소설은 도래할 공동체의 ‘표현’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대단히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표현적 재현’ 또는 ‘선취적 재현’이 성립할 여지가 생겨난다. 이 논의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앞서 언급했던 ‘배치’다.
들뢰즈/가따리는 배치를 “장편소설의 최상의 대상”으로 보면서 장편소설에서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배치”가 지니는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30) 이들이 개념화하는 배치의 특징을 몇가지 들어보자. 첫째, 배치는 일원적이다. 배치는 언표행위의 배치이자 욕망의 기계적(machinique/machinic) 배치31)인데, 이는 정신과 물질, 또는 의식과 무의식처럼 이원화되어 있지 않다. “기계적 배치로서 욕망의 사회적 배치가 아닌 것은 없으며, 욕망의 사회적 배치로서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가 아닌 것은 없다.”32) 둘째, 배치의 속성은 양면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선분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탈영토화의 첨점”을 지니고 “내재성의 무제한적인 장 위로 연장되거나 그것을 관통한다.”33) 그리하여 배치는 항상 ‘해체’(démontage/dismantling)의 계기를 지니는데, 카프카 소설에서 배치는 “그것이 기계와 재현에 초래하는 해체를 통해서만 작동한다.”34) 셋째, 배치는 언제나 집합적이다. 언표행위나 욕망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동질적 집단에 귀속된다는 말도 아니다. “모든 배치는 집합적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이므로, 실로 모든 욕망은 민중의 일, 또는 대중의 일, 분자적인 일(a molecular affair)인 것이 사실이다.”35) 다른 언표들과 더불어서만 의미를 지니는—바흐찐(M. M. Bakhtin)의 맥락에서 ‘대화적’인—개인의 언표, 그리고 타인의 욕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생겨나고 작동하는 개인의 욕망은 “민중의 일,” 즉 사회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또한 “분자적인 일”인 개인의 욕망과 그 욕망이 관통하는 언표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즉 주체화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36)
욕망이 ‘분자적’이라면 집합적인 배치는 현행성만이 아니라 잠재성의 층위도 포괄하는 셈이다. 장편소설 특유의 ‘해체’의 방법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층위에서다. 들뢰즈/가따리에 따르면 카프카가 구사하는 “능동적 해체의 방법”은 “사회적 장을 이미 가로지르고 있는 운동 전체를 연장하는 데, 가속화하는 데 있다. 그것은 아직 현행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실재적인 잠재성(virtuality) 속에서 작동한다. 배치는 (…) 탈약호화와 탈영토화 속에서, 그리고 이 탈약호화와 탈영토화의 소설적 가속화 속에서 나타난다.”37) 여기서 ‘가속화’의 효과는 현상하지 않지만 잠재적으로 이미 당대의 배치를 구성하고 있는 미래의 집단적 요소를 포착하는 데 있다(카프카에게 그것은 파시즘, 스딸린주의, 아메리카주의 등이었다). 이 가속화 속에서 한 개인의 언표가 잠재적 공동체를 표현할 때 문학은 비로소 “앞서가는 시계”이자 “민중의 관심사”라는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게 된다. “하나의 언표는 언표행위의 집단적 조건을 앞서가는 독신자(bachelor)에 의해 ‘취해질’ 때 문학적이다. (…) 현행적 독신자와 잠재적 공동체—양자는 모두 실재적인데—는 하나의 집합적 배치의 구성요소들이다.”38)
이런 소설적 가속화의 담론과, 소설은 운동하는 현실의 본질적・전형적 재현 속에서 미래를 선취한다고 보는 루카치(György Lukács)나 블로흐(Ernst Bloch)의 리얼리즘론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물론 두 담론이 꼭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카치의 ‘당파성’과 블로흐의 ‘유토피아적 기능’ 또는 ‘선현’(先現, Vorschein)은 그 나름으로 배치에 내재하는 잠재성으로서의 미래적인 힘과 소설의 관계를 밝히는 개념이지만, 여전히 잠재성을 포함한 실재를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본다’는 시각적 패러다임을 함축하고 있다.39) 이에 비해 ‘소설적 가속화’는 발생적 전개로서의 ‘표현’의 패러다임을 함축한다.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잠재적 공동체를 ‘발명’한다. “문학으로서, 글쓰기로서의 건강함은 어떤 사라진 민중(a people who are missing)을 발명하는 데 있다. (…) (중부 유럽을 위해) 카프카는, 그리고 (미국을 위해) 멜빌은 문학을 소수적 민중의, 또는 모든 소수적 민중들의 집단적 언표행위로서 제시하는바, 이 민중들은 그 작가 안에서만 그리고 그를 통해서만 자신의 표현을 얻는다.”40)
그러나 ‘표현’이 순전한 창조는 아니다. 소설이 벌이는 ‘가속화’의 실험이 문자 그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불과하다면 소설은 표현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사실 반영이냐 창조냐 하는 이분법은 여기서 무용하다. 소설이 표현하는 잠재적 공동체는 모든 현행적 ‘기계들’과 더불어 구체적인 집합적 배치의 일부를 구성하며, 한편 소설이 하나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소설 자체가 배치의 일부인 한에서 그러하다. 소설은 실재의 일부인 잠재성의 연장이다. 소설적 언표들이 주관적 상상이 아니라 실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실재의 연장이지 반복이 아니라는 사실, 바로 여기에 ‘표현적 재현’의 가능성이 있다. 이 가능성 안에서 강렬도의 미학은 재현과 창조적 사유의 일치를 주장해온 존재리얼리즘의 미학41)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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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illes Deleuze and Claire Parnet, Dialogues, trans.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Columbia UP 1987) 36면. 이 글에서 들뢰즈로부터의 모든 인용은 영어 번역본에 기초했으며, 프랑스어에서 옮긴 우리말 판본이 있을 경우 그것을 참조했으나 최종적 표현은 영어본을 기준으로 필자가 결정했다. (들뢰즈 저작의 영어본과 우리말본 사이에는 종종 적잖은 차이가 발견되는데 매번 프랑스어본을 찾아 대조해보지는 않았다.) 들뢰즈의 용어 뒤에는 필요한 경우에 한해 영어를 병기하되 프랑스어를 쓸 경우에는 “agencement/assemblage”처럼 프랑스어/영어를 동시에 병기했다.
2) 강렬도(intensité/intensity)의 장 속에서 성립하는 개체화에 대해서는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 UP 1994) 151~53, 246~54면 등 (우리말은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335~38, 523~39면 등) 참조. 이 책은 이후 DR로 약칭함. 강렬도 자체에 대해서는 여기서 약간의 부언이 필요하겠다. 강렬도는 힘(force)의 개념을 함축하는데 이 힘은 본래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차이를 가리킨다. “강렬도는 감지 가능한 것(the sensible)의 이유가 되는 한에서의 차이의 형식이다. 모든 강렬도는 변별적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차이다”(DR 222). 존재가 차이로서 사유되는 한 강렬도는 존재의 본질을 이루며, 사유가 차이의 사유인 한 사유를 촉발하는 것 역시 강렬도이다. “우리에게 사유가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강렬도를 통해서이다”(DR 144). 들뢰즈의 철학에서 강렬도는 실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3) 두말할 필요 없이 이는 스피노자의 ‘표현’ 개념에 의거한다. 그런데 ‘재현’이 실재(또는 실체)의 본질의 재현인 한 그것은 이미 경험한 것의 ‘재인’과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재현’과 ‘표현’의 차이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들뢰즈의 공공연한 반재현주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학이 재현의 이념과 반드시 배치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현과 재인을 무작정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와 재현의 관계는 뒤에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들뢰즈에서 ‘힘의 미학’ 또는 ‘정서(affect)의 미학’을 추출해내면서 이를 (재인과 구별되지 않는) 재현의 미학에 대립시키는 논의로 다음 두편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Ronald Bogue, “Gilles Deleuze: The Aesthetics of Force,” Deleuze: A Critical Reader, ed. Paul Patton (Cambridge, MA: Blackwell 1996) 257~69면; Simon O’Sullivan, “The Aesthetics of Affect: Thinking Art Beyond Representation,” Angelaki 6.3 (2001), 125~35면.
4) 여기서 ‘깊이’의 개념이 미학적 통념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깊이는 존재의 강렬도이고 그 역도 참이다”라고 보는 들뢰즈의 관점에서 그리 멀지는 않다. DR 231면.
5) Gilles Deleuze, “Literature and Life,” Essays Critical and Clinical, trans. Daniel W. Smith and Michael A. Greco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97) 1면. 이 책은 이후 ECC로 약칭함. 여기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삶’의 도정”으로 제시된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 “‘삶’의 도정”에 연관된 “가로지르는”(traverses)이란 표현이 초월이 아닌 관통을 함축하는 한, 들뢰즈는 문학과 경험적 현실(또는 그에 기초한 상상)의 관련성을 무조건 부인하기보다 나름의 방식으로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앞의 글 1면.
7) 주지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처럼 형식도 하나의 사물이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원인으로 본다.
8) DR 230면.
9)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와 데리다의 차이를 거론한 예로 O’Sullivan 27면과 서동욱 「들뢰즈의 문학론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프루스트론과 카프카론을 중심으로」, 『철학과 현상학 연구』(한국현상학회 편) 38 (2008), 115~16면 참조. 오썰리번은 ‘해체’의 작업이 결국 사건으로서의 예술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서동욱은 들뢰즈의 ‘표현적 언어’ 개념이 비분절적 소리의 전복적인 기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언어를 기본적으로 ‘분절’ 또는 ‘기의 없는 기표’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데리다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10) ECC 4면.
11) Dialogues 72면.
12) 여기서 ‘정서’는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feeling’을 옮긴 것인데, 이 용어는 사실상 ‘정서’ ‘감각’ ‘감정’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정서에 대한 윌리엄스의 역사주의적 접근은 강렬도 미학의 발전에 디딤돌이 될 수 있는데, 들뢰즈에게도 역사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서와 이데올로기의 변증법에 대한 윌리엄스의 생각은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P 1977) 128~35면 참조.
13) ECC 3면. ‘개인들’은 ‘persons’를, ‘비인칭’은 ‘an impersonal’을 옮긴 말이다.
14) D. H. Lawrence,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Harmondsworth: Penguin 1971) 13면.
15) 카프카의 ‘작은 문학’(kleine Literatur) 개념에 관한 까자노바(Pascale Casanova)와 들뢰즈/가따리의 상이한 이해에 대해서는 진은영 「문학의 아나크로니즘: ‘작은’ 문학과 ‘소수’ 문학을 중심으로」, 『인문논총』(서울대 인문학연구원 편) 67 (2012), 273~97면 참조. 진은영은 까자노바가 펼치는 세계문학론의 맹점과 들뢰즈/가따리 문학론의 실천적 의의를 동시에 탁월하게 밝혀낸다.
16)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Kafka: Toward a Minor Literature, trans. Dana Polan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86) 21면. 이후 Kafka로 약칭함.
17) 앞의 책 19면. 들뢰즈/가따리는 카프카의 방식을 언어의 탈영토화가 취할 수 있는 두가지 방향 중 하나로 보는데, 다른 하나는 언어를 인위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들은 후자의 예로 조이스(James Joyce)를, 전자(카프카 방식)의 다른 예로 베케트(Samuel Beckett)를 든다.
18) 앞의 책 26면.
19) “He Stuttered,” ECC 109면.
20) ECC 5면.
21) Kafka 18면.
22) 윌리엄스가 19세기 영국 노동계급의 예를 들어 설명하듯이 새로운 계급의 부상과 그 진정한 문화적 표현 사이에는 시차가 있고 문화 자체 내에도 발전의 불균등성이 있다. 신생계급의 문학은 비교적 뒤늦게 발전하는데, 이는 문학이 기성의 언어와 형식을 발전의 모태로 삼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줄곧 지배문화에 의한 통합의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Marxism and Literature 124~25면 참조.
23) Kafka 42면.
24) 하디의 작중인물들에 대해 들뢰즈는 말한다. “그들 각각은 그런 〔강렬도적 감각들의〕 집합, 다발, 가변적 감각들의 블록이다(each is such a collection, a packet, a bloc of variable sensations)” Dialogues 40면.
25) ‘선분’은 말 그대로 선을 나눠놓은 것으로, 들뢰즈와 가따리에 따르면 “선분적 동물”인 인간은 상층계급/하층계급, 남/녀처럼 “이항적으로 선분화”되거나, 나의 일/동네의 일/도시의 일/나라의 일/세계의 일처럼 점점 커지는 원들 속에서 “원형적으로 선분화”되거나, 또는 개인이 차례로 겪어나가는 가족/학교/군대/직장처럼 “선형적으로 선분화”된다. 이처럼 “선분성”(segmentarity)은 인간의 삶에 내속한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87) 208면 이하 참조.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에서 김재인은 ‘선분’과 ‘선분성’을 각기 ‘절편’과 ‘절편성’으로 옮긴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2』, 김재인 옮김, 새물결 1996, 397면 이하 참조.
26) Kafka 59~60면 참조.
27) 플랜트는 “약호화와 안정성이 유용할 수 있을 때조차 그것을 주도면밀하게 회피할 위험성, 들뢰즈와 가따리의 유목적인 전술이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대처하는 가치있는 일시적 전술이 되는 대신 전략으로 승격되어 규제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Sadie Plant, “Nomads and Revolutionaries,” Journal of British Society for Phenomenology 24.1 (1993), 99면.
28) partage du sensible. 영어권에서는 여기서의 ‘partage’를 ‘distribution’(분배) 외에 ‘partition’(분할)으로 옮기기도 하는데, ‘partage’는 어휘의 원뜻도 그렇지만 특히 랑씨에르의 맥락에서 ‘sharing’(공유)의 의미까지 포괄한다.
29) 랑씨에르의 ‘문학의 정치’는 그간 동명의 저서를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되면서 그 민주주의적-평등주의적 논리가 부각된 바 있다. 이 논리의 연장이면서 그의 문학론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는 말이 ‘문학적 무정부주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문학에 관한 글은 아니지만 그의 무정부주의적 발상을 이해하는 데에 “무-질서의 조직”(the organization of dis-order)으로서의 공산주의를 논한 「공산주의 없는 공산주의자들?」(“Communists Without Communism?”, The Idea of Communism, ed. Costas Douzinas and Slavoj Žižek, London: Verso 2010, 167~77면)이 참조가 될 만하다.
30) Kafka 38, 48, 81면 등 참조.
31) ‘욕망의 기계적 배치’란 생산의 힘들이나 의지들이 서로 접속되어 체계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근대의 ‘기계적’(mécanique/mechanical) 제도와 사고방식에 대한 혐오가 체질화된 작가나 비평가에게 들뢰즈/가따리의 저작에서 종종 만나는 ‘기계’라는 표현은 좀처럼 소화되지 않는 껄끄러운 용어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일성의 사유’를 배척하는 들뢰즈와 가따리 역시 근대 기계주의를 혐오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들이 재개념화한 ‘기계’는 단적으로 말해 ‘흐름을 절단하는 체계’를 뜻하는데, 이 ‘절단’은 이항적인 것의 접속에 의해 이뤄진다. 다시 말해 하나의 기계는 관계 속에 위치하며 관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되는바, 관계(접속)의 변화는 기계 자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결합하여 ‘기계들의 기계’를 만들고 이는 더 큰 기계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데, 결합의 대상은 곧잘 변하고 해체의 가능성은 상존하므로 이 거대 기계에서 꼭 전체주의를 상상할 필요는 없다. ‘기계들의 기계’나 ‘기계적 배치’는 이른바 영토성을 지니지만, (이 글의 본문에서 곧바로 언급하듯이) 동시에 ‘탈영토화의 선들’이 그 위를 가로질러간다고 들뢰즈/가따리는 보고 있다.
32) Kafka 82면. 들뢰즈/가따리의 구도에 따를 때 이 기계-언표-욕망의 스피노자적 일원성은 장편소설에서 펼치는 세계의 특징이자 또한 그 소설의 실재적(표현적) 지위를 밝혀주는 원리이기도 하다.
33) 앞의 책 85~86면.
34) 앞의 책 48면.
35) Dialogues 96면.
36) 이런 면에서 ‘배치’는 맑스주의에서 발전시켜온 개념으로서의 ‘구조’와 다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든, ‘토대와 상부구조’든, ‘담론구성체’든, 모든 ‘구조’는 자기 재생산과 지속, 그리고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결정의 관념을 내포한다. 맑스주의의 헤겔적 전통에서 구조는 내재적 모순에 따라 스스로를 전개하는 주체이자 전체다. 알뛰쎄르(Louis Althusser)가 맑스주의에 도입한 구조적 인과성의 개념(부분은 전체의 효과일 뿐 아니라 그 원인이다)은 이런 구조-전체의 관념을 전복하기보다 오히려 거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게서 주체적 실천의 효과는 다름아닌 구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배치’는 유기적 구조도, 자기지양적 구조도, ‘중층결정’의 구조도 아니며, 주체(실천)와 구조(결정)의 ‘변증법적 관계’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배치, 또는 (‘기계들의 기계들’이 작동하는) ‘배치들의 배치’가 그 나름대로 ‘전체’의 관념을 내포한다면, 이 ‘전체’는 들뢰즈가 휘트먼(Walter Whitman)을 참조하면서 말한바, “전체화될 수 없는 파편들” 사이의 “선재하지 않는 관계”(nonpreexisting relations), 또는 “가변적 관계들의 망(web)”에 가깝다. (“Whitman,” ECC 56~60면 참조.) 여기서 두가지 문제에 관한 판단은 유보하기로 하자. 첫째, 맑스주의적인 ‘구조’ ‘전체’ 그리고 ‘필연’의 관념은 들뢰즈의 ‘배치’ 개념과 절대적으로 양립 불가능한가? 가령 전자가 후자 안에 배치(配置)될 수는 없는가? 둘째, 미학적 범주로서의 ‘총체성’이 ‘배치’ 개념에 의거해서 재구성될 수는 없는가?
37) Kafka 48면.
38) Kafka 84면.
39) 블로흐의 ‘선현’ 개념에 내재하는 객관주의에 대한 간략한 논의로 졸고 「유토피아주의에서 반반(反反)유토피아주의로: 세계화, 제임슨, 박민규」, 『안과밖』(영미문학연구회 편) 31 (2011년 하반기), 36면 참조.
40) ECC 4면. 진은영은 소설의 이런 과업을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기존의 정체성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신 현실의 양자택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체화의 과정을 수행하는 아나크로닉한 활동 속에서 도래할 민중이 구성된다.” (진은영, 291면)
41) ‘존재리얼리즘’이라는 신조어로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루카치 등의 통찰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재현을 (인식의 문제를 포함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존재의 문제로서 제기해온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다. 강렬도 미학과 이 입장을 연결시킨 것은 후자 역시 문학예술이 어떤 잠재적 실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새롭게 이룩하는 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물론 더 따지고 들어가면 양자의 차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가령 ‘영토성’의 사실주의적 재현과 ‘탈영토화의 가속화’가 얼마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지, 소설적 성취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잠재성이나 탈영토화의 개념이 얼마나 유용한지 등의 문제에서 양자의 입장이 일치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양자의 소통 가능성을 제기하는 선에서 논의를 멈추려 한다. 이 글의 논의와 연관될 법한 백낙청의 글로는 여러편 가운데 특히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창간호 (1996년 하반기), 270~308면을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