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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제임스 차일스 『인간이 초대한 대형참사』 수린재 2008
대형사고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찾아라
김명진 金明振
성공회대 강사, 시민과학쎈터 운영위원 walker71@empal.com
기술적 인공물과 관련된 대형사고는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건축물 붕괴, 항공기 추락, 여객선 침몰, 대형화재 등으로 인한 대규모 인명피해 사례들이 종종 언론지상을 장식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사고에 대한 인식은 아직 해묵은‘인재(人災)’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형사고와 관련된 기술 그 자체는 문제가 없으며 그것을 다루는 인간과 조직이 언제나 문제라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대형사고가 생길 때마다 거기 개입한 모종의‘비리’나 치명적인 사람의‘실수’를 찾아‘상 줄 놈’과‘벌 줄 놈’을 가리는 희생양 찾기에 몰두하는 결과를 낳게 되며, 정작 그런 사고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좀더 깊은 의미에 대해 성찰할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제임스 차일스(James R. Chiles)가 쓴 『인간이 초대한 대형참사』(Inviting Disaster, 황현덕·홍창미 옮김)의 번역 출간은 그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단 반갑다. 미국의 저명잡지들에 오랫동안 기고해온 기술평론가이자 역사가인 차일스는 이 책에서 지난 100여년 동안 일어난 50여건의 대형참사를 사례로 들어, 대형 기술사고의 본질과 원인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으되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고 있는 수많은 대형사고의 경과에 대해 상세한 기술적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챌린저호 폭발사고, 인도의 보팔 참사, 아폴로1호 화재, 아폴로13호 사고 등은 물론이고,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사고들(해양석유시추선 오션 레인저호 침몰, 영국의 거대비행선 R101의 추락 등)에 대해서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실감나는 설명을 전해들을 수 있다(아쉽게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아주 소략하게만 다뤄졌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실제 일어난 사고 외에 거의 사고가 날 뻔한‘니어 미스’(near miss)의 사례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사례들을 통해 어떤 경우에 사고가 나고 어떤 경우에 이를 피할 수 있는지 모종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저자의 의도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어떤 것일까? 이 책의 분석에 따르면, 대형사고는 프로젝트가 최종 마감시한에 쫓길 때(3장), 충분한 테스트가 진행되지 않았을 때(4장), 현장인력이 고도의 피로와 스트레스로 한계상황에 도달했을 때(7장), 미리 나타난 사고의 징후를 무시했을 때(8장) 종종 일어난다. 따라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사고예방을 최우선으로 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설계단계부터 안전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하급자가 문제를 발견했을 때 보복의 두려움 없이 이를 상급자에게 보고할 수 있게 장려하며, 안전관리를 담당하는 전문인력을 두고,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될 때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씨스템을 뜯어고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본문에도 언급된 일명‘고신뢰성 조직’(high reliability organization) 이론과 일맥상통하며, 분명 경청할 만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114면).
그러나 이 책의 논의에는 중대한 한계도 있다. 대형사고의 기술적 세부사항에 논의가 매몰된 나머지,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맥락은 축소되거나 아예 생략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가령 1967년에 일어난 아폴로1호 화재사고는 냉전시기의 치열한 미-소 우주경쟁과 1960년대말까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케네디의 선언이 NASA에 가한 엄청난 압박에서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6장에서는 이런 맥락을 빠뜨린 채, 순수한 산소의 위험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이 문제의 전부인 양 기술하고 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 역시 마찬가지이다. 3장에서는 하청업체인 모튼 시어콜(Morton Thiokol)의 엔지니어 라저 보졸리(Roger Boisjoly)의 정당한 문제제기를‘묵살’한 것을 사고의 주된 원인이라 밝히고 있지만, 이런 설명에는 기술적 불확실성에 관한 논의는 물론이고 좀더 거시적인 맥락에 대한 설명도 빠져 있다. 우주왕복선은 아폴로계획 이후 우주개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고 예산이 삭감되던 시점에 시작된 비용절감형 차세대 우주선이었고, 그런만큼 프로젝트 유지를 위해 과장되고 부풀려진 기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1981년부터 시작된 우주왕복선의 실제 운용은 애초의 기대에 훨씬 못 미쳤고, 그런 현실에 대한 조바심이 부분적으로 대형참사에 원인을 제공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울러 이 책에서 다루는 대형사고들의 이질적 성격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다분히 일상적이고 충분히 예방 가능했던 사고와 사회학자 찰스 페로우(Charles Perrow)가 일명‘정상사고’(normal accident)라고 명명했던, 복잡하고‘단단하게 결합’된 기술씨스템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질 수밖에 없는 사고를 뒤섞어놓아 서술의 초점이 흐려졌다. 이 둘은 그 성격이 다른만큼 상이한 대응을 요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앞서 제시한 저자의 처방으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처럼 본질적으로 위험한 기술을 과연 우리 사회가 용인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좀더 깊은 숙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간단히 지적하고 싶다. 이 책의 번역은 썩 잘된 편은 못된다. 원문과 대조해보면 번역과정에서 임의로 삭제하거나 누락한 문장과 문단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며, 번역이 다소 거칠어 기술적 세부사항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rod’(막대)를 시종일관‘롯드’라고 옮기는 등 기묘한 번역어들이 눈에 띈다. 번역본에는 또 9·11테러 이후 출간된 페이퍼백판(2002)에 저자가 새롭게 덧붙인 서문과 원서에 수록된 참고문헌 목록도 모두 빠져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점들은 앞으로 개정판이 나올 때 시정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