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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장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후마니타스 2013
안철수식 진보적 자유주의의 교과서
백기철 白奇哲
한겨레 논설위원 kcbaek@hani.co.kr
최장집(崔章集)의 정당민주주의론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그의 분석이 너무 거시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균열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당구조를 혁신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강력하다. 질곡에 빠진 한국정치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 그림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다만 현실정치의 차원으로 들어서면 정당개혁의 주체가 진보정당인지 개혁정당인지,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개혁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등 애매한 구석들이 많았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은 최장집이 이런 의문에 답을 해가는 과정에 놓인 소품이다. 르뽀와 칼럼 성격을 합한 가벼운 형식의 글인데, 가벼이만 볼 수 없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노학자가 소외받은 이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구체성에 대한 단서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노동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김대중・노무현 두 민주정부가 얼마나 서민 삶을 피폐하게 했는지를 조목조목 짚는다. “불행하게도 민주정부들은 우리 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141면)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두개의 1기 민주정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자, 언젠가 도래할 2기 민주정부를 위한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철수(安哲秀) 무소속 의원이 지난 3월 귀국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면서 이 책은 급작스레 한국정치의 한복판으로 진입했다. 대선 때까지만 해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안철수와 최장집은 이후 현실정치의 동맹군이 되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최장집이 안철수의 싱크탱크 ‘내일’의 이사장으로 영입되면서 안철수식 새 정치, 즉 안철수식 진보적 자유주의의 텍스트가 됐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서 최장집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구체적으로 언명하진 않았다. 대선을 앞둔 시점인 탓에 진보성을 갖춘 민주정부의 조건에 집중한다. 저자는 대선에 앞서 치러진 총선에서의 야권 패배 원인을 빈약한 진보성으로 진단한다. “19대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축을 불러들여 야권연합을 성사시켰지만 기대했던 승리를 얻을 수 없었으며, 사회경제적 소외 세력의 소리는 대표되지 못했고 노동문제 역시 주요 이슈에서 배제됐다는 점일 것이다.”(148면) 이런 진단에 따르면 대선 역시 “개혁 사안들을 야당이 실천할 능력과 진지함이 있는지를 점점 더 중시하기 시작”(같은 곳)한 유권자로부터 야당이 외면당한 결과다.
안철수와 최장집의 결합은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화두를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제기했다. 최장집은 이미 다른 책에서 자유주의의 진보성을 논했다. “만약 진보가 (…) 권력과 사회경제적 자원에 있어 약자와 소외자들의 권익을 증진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자신의 위치에서 실제로 그렇게 행위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한국의 현실에서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념에 가깝다.”(「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최태욱 엮음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폴리테이아 2011, 106면)
최장집이 안철수 신당의 이념으로 내놓은 진보적 자유주의는 쉽게 말해, 민주주의 차원에선 개인의 기본권을 최대한 중시하고, 사회경제적 차원에서는 시장경제의 틀 위에서 국가가 개입해 분배와 복지를 강화하고 노동을 포섭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최장집은 ‘내일’ 발족식 발제문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하는 까닭은, 개인 자유와 인권, 법의 지배와 제한정부는 (…) 오늘의 민주주의의 조건에서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고, 신자유주의 과도함이 몰고온 오늘날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경제민주화의 의제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현실에서 진보적 자유주의가 갖는 강점은 ‘대중 친화성’과 ‘중도성’이다. 최태욱(崔兌旭)은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내세울지라도 그것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추진되는 것이라면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사회민주주의의 경우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앞의 편서 서문, 6면)라고 말했다. 이념지형이 편협한 우리 현실에서 급진적 정책노선이라 하더라도 진보적 자유주의의 외피를 쓸 경우 대중 친화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진보적 자유주의가 중도적이라는 것은 실제 정책노선이 매우 가변적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철수와 최장집의 진보적 자유주의 실험의 미래는 그저 몇가지 단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최대 난관은 정당건설의 경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신당 추진그룹엔 사회경제적 소외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은 없고 안철수란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몇몇 인텔리만이 포진하고 있다. 안철수의 리더십도 의문시된다. 대선 전과 이후의 안철수가 많이 변했다는 것은 그가 아직도 숙성 중인 정치인이란 얘기다. 3~4년 더 공부해서 한 나라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수 있다. 대선 뒤 야권성향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 은연중 ‘박원순 대세론’이 퍼져 있는 것은 안철수의 불투명한 리더십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최장집이 지적한 대로 “당내 주요 계파간 힘의 교착상태와 리더십 부재는 주요정당으로 집합행위를 할 수 있는 어떤 동력도 창출해내기 어려운”(‘내일’ 발제문) 민주당의 지리멸렬한 상황과 기존 진보정당 노선의 실질적 파탄은 안철수에게 이전의 제3세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최장집의 정당민주주의론이 구체성이 부족하다고 비판받는 것은 유럽 정당들이 밟아온 이상적 경로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현실의 각종 변수들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장집의 정치학에서 ‘효순・미순’이나 ‘촛불’은 과잉 참여로 인한 소모적인 ‘운동의 정치’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로 지금도 민주주의가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거나 퇴행을 억제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된다. 어쩌면 “우리에겐 정당과 사회운동이 모두 필요”(김정한 「최장집의 민주화 기획 비판」, 김정환 엮음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소명출판 2013, 390면)한지도 모른다. 현실은 정당만으로 바꾸기 어렵고, 운동만으로는 더더욱 어렵다. 정당의 정치와 운동・시민의 정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변증법적으로 가야 한다. 물론 지금은 최장집의 말처럼 정당의 정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 절박하다.
최장집의 정당민주주의론이 이상적이어서 강력하듯, 안철수의 새 정치 역시 구차한 현실정치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강력한 힘을 갖는다. 하지만 안철수 역시 현실정치를 바꿀 구체성의 문제에선 의문투성이다. 현실정치를 밖에서 비판하는 것과 안에서 바꾸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현실정치에서 유의미한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 이는 안철수와 최장집이 함께 풀어야 할 공통의 과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