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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세현 『정세현의 통일토크』, 서해문집 2013

냉전이 준 교훈은 헛되지 않다

 

 

김연철 金鍊鐵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dootakim@daum.net

 

 

161-촌평-김연철_fmt남북관계가 날씨만큼이나 답답하다. 오해와 편견이 넘치고, 철학과 전략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주 오래전의 믿음과 가치들이 부활하고 있다. 휴전협정을 맺은 지 60년이 되었지만, 전쟁은 차갑게 재연되고 있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지난 60년의 세월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길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를 우리는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세현(丁世鉉) 전 통일부 장관은 재미있는 강연으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입담이 좋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론과 현장경험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를 설명할 때, 기능주의 이론이 어떻게 국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는지, 국가연합이라는 영어표현을 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Confederation’이 아니라, 공동체 개념으로 많이 쓰는 ‘Commonwealth’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지(그 이유는 북한이 연방제의 영어표현으로 confederation을 선점했기 때문) 등의 깨알 같은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줄 전문가는 흔치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쟁점들을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저자가 갖고 있다는 점이다. 풍부한 사례는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생생하고 설득력이 있다. 1970년대에 국토통일원에 들어갔고, 김영삼정부 때는 청와대 통일비서관, 김대중정부에서는 통일부 차관과 장관을 거쳤다. 또한 노무현정부의 초대 통일부 장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남북관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거시적인 역사가 개인의 미시적인 경험과 만나면서 입체성을 가진다. 몇몇 장면은 현재 정세에 주는 울림이 적지 않다.

첫째는 김영삼정부 당시 4자회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1996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클린턴(B. Clinton) 대통령이 제주도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4자회담을 제안했다. 남북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제안이 가능했을까? 클린턴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뒤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려 했다. 한・미관계는 최악이었고, 국내에선 총선을 앞둔 상황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발을 잡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제안이 필요했다. 이 책에는 당시 이 제안을 둘러싼 정부 내 갈등과 대립 과정도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것은 진지한 고민이 생략된 즉흥적 제안이었다. 당연히 성과는 없었다. 저자는 이후 한국정부의 제한된 입지를 보면서, “미국을 업고, 남북관계를 소재로 국내정치를 하려다보니, 별 망신을 다 당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새겨들어야 할 구절이다.

둘째,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 추진과정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일부의 사람들은 2000년의 615남북정상회담을 예정된 운명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1998년 김대중정부가 출범했을 때, 남북관계는 상호불신과 적대적 대립의 구조 위에 서 있었다. 저자가 회담대표로 참여했단 차관급 회담의 과정을 봐도 마찬가지다. 대화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김대중정부의 철학과 의지, 그리고 정책 결정과정의 유능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9811월 금강산 관광선이 출항할 때의 상황이나, 미국의 페리보고서 작성과정에서 한국정부의 역할 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등장했던 2001년 이후 어려운 국제환경에서 어떻게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 즉 평화회랑을 만들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북한에 쌀을 지원하면서, 쌀 포대에 ‘대한민국’이라고 크게 써놓는 과정에서도 협상의 기술이 발휘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셋째, 노무현정부의 대북정책 추진과정은 안타깝게 그려진다. 왜 정상회담은 임기 막바지인 2007년말에나 이뤄졌을까? 임기 첫해인 2003년의 잘못된 정책 선택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밑정책을 통해서 남북 특사교환을 합의해놓고 그것을 파기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고, 다른 하나는 대북송금 특검이다. 저자는 참여정부 임기 초 남북관계가 불신을 쌓아가는 정책결정 과정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성찰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1부가 역사를 다루었다면, 2부는 통일문제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통일비용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면서, 통일을 ‘들어가는 밑천보다 훨씬 큰 이문이 들어오는 장사’라고 표현하거나 이른바 ‘퍼주기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남북 경제협력이 갖는 장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흐름을 서술한 부분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 대북정책을 둘러싼 이념적 대립은 여전하다. 오히려 일부 정치세력의 정략적 필요에 의해 조장되는 경향도 있다. 퍼주기론이 대표적이다. 경제협력의 댓가가 핵무기로 돌아왔다는 밑도 끝도 없는 선전논리도 반복된다. 논리적으로 한두 단계만 짚어도 이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이데올로기인지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세차례의 핵실험을 했고, 그중 두번은 바로 이명박정부 때의 일이다. 퍼줘서 핵개발 했다고 하더니, 안 퍼쥐서 뭐가 달라졌는가? 핵문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남북관계는 고속 후진했을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독일의 사례를 보라. 분단현실의 극복은 이념을 넘어서는 시대적 과제다. 여전히 냉전현실에서 정체성의 자양분을 찾는 한국 보수진영,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저자가 햇볕정책을 설명하면서 예를 든 유실수론도 참고할 만하다. 감나무 같은 유실수에서 과실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15년은 기다려야 한다. 접촉을 통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대착오적인 냉전세력이 공들여 쌓은 평화탑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린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흔들거리고 있다. 올바른 대북정책이란 무엇인가? 남북관계는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 그래서 평화가 넘치는 통일의 길로 우리는 갈 수 있을까? 흔들거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아주 오랜 냉전의 시간을 거치면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