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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이구 엮음 『한낙원 과학소설 선집』,현대문학 2013
21세기에 재조명되는 한국 과학소설의 선구자
박상준 朴相俊
서울SF아카이브 대표 sfarchive@naver.com
한낙원(韓樂源, 1924~2007)은 과학소설 작가로서는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출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50년대말부터 90년대까지 계속 작품을 발표했고, 『금성탐험대』 같은 몇몇 대표작들은 출판사를 바꾸어가며 20여년 동안 꾸준히 신간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그의 활동영역은 과학소설 중에서도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창작이었으며 그밖에 번역이나 교양과학 관련 저술도 적지 않게 남겼다.
과학소설은 흔히 어린이・청소년 시기의 독서경험에서 하나의 통과의례로 여겨지기도 한다. 로봇, 우주여행, 외계인, 시간여행, 미래사회 등 현실에서 벗어난 설정들을 접하고 거기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면서 과학소설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소설이 판타지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지만, 두 장르 사이의 명확한 차이가 무엇인지는 성인이 되어서도 대부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그저 막연하게 과학소설은 말 그대로 과학기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소재나 설정이 나오는 이야기, 그리고 판타지는 마법과 초자연적인 내용이라는 정도로만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의 작가 아서 클라크Arthur Clarke가 말했듯이 “고도로 발달된 기술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
한낙원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판타지와는 분명히 다른, ‘과학소설’을 읽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독자들은 대부분 유년기부터 전래동화 같은 판타지 서사들로 독서경험을 쌓아오던 어린이였다. 그런데 한낙원의 이야기들은 판타지의 세계관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과학기술의 계몽과 그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현실 세계의 긍정적 전망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지니고 있었다. 동시대에 만화나 번역소설, 만화영화 등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SF작품들이 많아 이 낯선 장르를 인식하는 데 영향을 주었겠지만, 한낙원은 창작 과학소설 영역에서 확고하게 중심을 잡고 ‘한국형 과학소설’이라는 독자적인 모델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우리나라의 과학소설은 1990년대 전까지는 성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단행본 출판시장에서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시피 했다. 유의미하게 언급할 수 있는 작품이라곤 몇년에 한번 나오곤 했던 창작 및 번역물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작품의 출간 사실 자체에서 의의를 찾는 수준이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많은 독자를 만났던 것은 아마도 1987년에 복거일(卜鉅一)이 발표한 『비명을 찾아서』가 처음일 것이다. 이 작품도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소설이 아니라 주류문학의 성과물로서 수용되었지만, 사실 복거일 자신도 밝혔듯이 이 책이 활용한 ‘대체역사’라는 기법은 과학소설의 여러 하위갈래 중 하나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과학소설 역사에서 한낙원은 1990년대까지 창작 과학소설 분야를 혼자 지켜오다시피 한 인물이다. 이따금씩 몇몇 작가들이 인상적인 장・단편을 발표하곤 했지만,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진 못했고 그저 이 분야의 연구자들 아니면 극소수 팬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올 뿐이다. 그에 반해 한낙원은 비록 어린이・청소년 대상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많은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해왔던 것이다.
이번에 나온 『한낙원 과학소설 선집』은 ‘한국문학의 재발견’이라는 이름으로 펴낸 작고문인선집 씨리즈 중 한권으로 출간된 것이다. 600면에 가까운 이 책에는 한낙원 작가의 중・단편 5편과 장편 3편이 수록되었다. 특히 장편 「잃어버린 소년」은 1959~60년 『연합신문』에 연재되던 당시 함께 실렸던 신동헌(申東憲) 화백의 삽화까지 그대로 옮겼다. 또다른 장편 「금성탐험대」는 1960년대초 잡지 『학원』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전체 21장 중에서 1~5장을 수록했는데, 이 작품은 소련 우주선에 한국인이 탑승한다는 설정으로 냉전시대던 당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바 있다. 1960년대 미국의 TV 연속극인 「스타트렉(Star Trek)」이 당시 미국에서는 금기시되었던 백인과 흑인의 키스 장면을 처음 내보냈던 것처럼, 과학소설은 종종 당대의 사회문화적 금기에 도전하는 유용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 책의 진가는 작품들과 함께 담긴 부속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작가 개인의 사진과 작품 발표 당시의 신문과 잡지 지면, 단행본 표지, 육필 원고지 등 수십컷의 그림이 있고, 과학소설뿐 아니라 방송극과 수필, 과학저술 등 미출간작까지 포함한 거의 모든 집필 기록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그에 더해서 아동문학평론가 김이구(金二求)의 해설과 관련 연구목록도 있어서 사실상 한낙원 연구를 위한 거의 모든 자료가 집대성된 책이다.
50권이 넘는 ‘작고문인선집’ 씨리즈에서 주류문학계의 작품이 아닌 것은 김내성(金來成)의 ‘탐정 번안소설’ 『진주탑』과 한낙원의 책뿐이다. 새삼 대중 장르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과학기술의 발전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주류문학과 과학소설의 경계가 갈수록 흐릿해져가는 추세가 여기에도 반영된 것이라고 보고 싶다. 요즈음 어린이・청소년 문학에서 과학소설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런 경향은 지금의 어린이・청소년이 그전 세대와는 달리 역동적인 과학기술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첫 세대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여러가지 IT기기를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접하고 이용하며 자란다. 물론 주변 생활환경에서도 첨단 과학기술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과학기술은 계속해서 빠르게 업그레이드되며 진화하고, 어린 세대는 그런 양상에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이런 점은 문화사적인 측면을 넘어 인류학에서까지 주목할 일로서, 요즘 세대의 어린이・청소년은 과학소설을 수용하는 태도 역시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조만간 더 심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겠지만, 아무튼 2013년에 한낙원 선집이 출간된 것은 이런 맥락도 일정 부분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작가 생전에 활동 당시의 상황에 대한 구술 녹취를 기획하고 수락까지 얻었다가 2007년초 녹취를 불과 한두 주 앞두고 타계 소식을 접했던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이번에 출간된 『한낙원 과학소설 선집』은 나의 그런 아쉬움을 위무하는 선물과 같은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