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2013년 6월 13일 열린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에서는 권여선(소설가) 박형준(시인) 정홍수 한기욱(문학평론가)을 제31회 신동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신동엽문학상은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3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며, 시・소설・평론 부문에서 2인에게 수상한다. 심사위원회는 추천위원(창비의 시와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이 올린 아래 10권의 작품을 놓고 심사를 진행했다.
김성규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백상웅 『거인을 보았다』,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조인호 『방독면』(이상 시), 천명관 『나의 삼촌 브루스 리』, 김유진 『여름』, 정소현 『실수하는 인간』, 김성중 『개그맨』,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이상 소설).
심사위위원들은 7월 18일 모임에서 이상의 10권을 검토하면서 김성규 시집, 박준 시집, 조인호 시집, 천명관 장편소설, 김유진 소설집, 조해진 장편소설로 대상을 압축하고 장시간 토론을 펼쳤다. 그 결과 오래 묵은 심상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현실적 긴장을 늦추지 않은 박준 시집과 우리 시대 고통에 감응하는 한편 치열한 자기성찰을 밀고나간 조해진 장편소설을 제31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권여선(權汝宣) 소설가
시 부문 수상자를 선정하는 데 다소의 진통이 따랐다. 김성규의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는 비극적이고 묵시록적인 알레고리로 현실을 묵직하게 일깨우는 장점이 있었고,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절제와 압축으로 내면의 심층에 고요히 닻을 드리우는 매력이 있었다. 두 시인이 펼쳐 보인 진경을 놓고 우월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읽기로 했다. 나는 박준의 시를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우리 시를 읽으면서 무엇에 그토록 목이 말랐는지를 알게 되었다. 마음을 애틋하게 어루만지고 그윽하게 흔들어주는 무엇, 그것을 일단 느끼고 나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황홀한 무엇이 박준의 시에 있었다. 김성규의 시를 놓게 만든 것은, 그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출현하는 이미지들을 더 힘차게 깎아내고 갱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박준에게 축하를, 김성규에게 믿음을 보낸다.
소설 부문에서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가는 김유진과 조해진이었다. 김유진의 단편집 『여름』을 읽으면서, 스치듯 모호하게 비의적으로 환기되는 참혹한 정서에 매혹되었다. 조해진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으면서, 탈북인 이야기를 이렇듯 잔잔하고 애틋하게 쓸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시적으로 구성된 김유진의 단편들은 때로 지나치게 조각나 있었다. 파편적이어서 아름답지만 파편적이어서 폐쇄적이었다. 조해진의 장편에도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이거나 작위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이방을 떠도는 탈북인의 운명에 대해 놀랄 만큼 차분한 공감을 자아내는 넉넉한 품과 세심한 결이 그런 단점을 잊게 했다. 조해진은 올올이 살아 있는 반성의 문체와 서럽도록 몽환적인 여로를 결합해, 소설에서 보편성이 어떻게 획득되는지를 설득력있게 입증해냈다. 조해진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김유진에게 안타까운 격려를 전한다.
박형준(朴瑩浚) 시인
박준의 시들은 상처받은 쪽은 시인이 분명한데 읽고 나면 그것이 나의 상처인 듯하여 오히려 시인에게서 내가 위로받고 있는 듯한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서시 「인천 반달」만 해도 그렇다.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재봉일을 하고 있는”,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아주 비슷할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만 봐도 그는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양보하여 오히려 타인에게서 자신이 위로받는 세상과의 공명 능력을 탁월하게 소유한 타고난 서정시인임을 알 수 있다. 박정만 시인의 ‘미인’ 시편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슬픔이 오히려 자랑이 되는’ 그의 ‘미인’의 메타포 역시 대단한 서정의 힘을 발휘한다. 박준은 서정의 맥을 이으면서도 한 가지가 아니라 다른 가지로 뻗어나갈 때 또다른 서정의 창공이 활짝 열릴 수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 시가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성규의 시들은 읽는 내내 아팠다. 그의 서정은 잿빛 서정이다. 세상에 회의하면서도 그 회의의 갈피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희망을 통해 자신의 생과 시대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몸짓에서 슬픔과 동시에 의지를 느꼈다. 그의 시들은 대부분 알레고리로 씌어지는데, 그것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세상이 남긴 재와 파편들의 시적 서사이다. 그는 천국까지 불어닥치는 지상의 재와 먼지를 한차례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뒤로 떠밀리면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를 닮았다. 구원의 가능성은 지상에서 천국으로까지 날리는 이 세계의 통증인 재와 먼지의 파편더미를 그렇게 슬픈 알레고리로 엮어가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사나운 폭풍에 날아다니는 그의 사랑과 슬픔이 맑고 밝은 하늘을 열기 위한 의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냥갑 같은 방공호 속에서/한 개비의 성냥개비”로 세상을 바꾸어내는, 그러나 그 갸녀린 성냥개비의 언어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인병사 조인호, 생의 섬광 속에서 반짝이는 몽상을 감미로운 침묵과 이야기로 유연하게 풀어내는 서대경, 지나간 과거 속에서 뜨거운 삶의 노동과 서정을 결합하는 백상웅의 시편 역시 오래 마음에 남았음을 밝혀둔다. 다섯명의 젊은 시인들은 서정, 알레고리, 전위, 몽상 등으로 우리 시단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조해진의 소설은 이야기를 엮어가는 솜씨와 그 이야기 밑에 작가의 사유를 새겨넣는 진중함이 어우러져 수상작으로 선택하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탈북 난민의 유랑의 길을 짚어가면서 타자의 절망에 연민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란 끊임없이 세계에 질문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형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진정성 있는 서사로 보여준다.
김유진의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문체는 저문 강물에 수없이 반짝이는 햇살이 엮어낸 물무늬같이 시적이어서, 소설로 쓴 시를 읽는 듯했다. 이야기 곁에 여백을 숨겨놓는 솜씨라든지 긴장감 넘치는 미문의 탄력은, 가히 시인보다 더 시인 같은 소설가로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표현되지 않은 미묘한 긴장과 탄력은 소설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표현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시인은 감추지만 소설가는 그 모든 것을 끈질기게 이야기로 잡아내어야 하는 숙명을 수락한, 그리하여 작가는 비천할 수 있는 데까지 비천함의 성실에 이른 자라는 생각도 든다.
정홍수(鄭弘樹) 문학평론가
소설 부문 심사는 쉽게 끝났다. 한 심사위원이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를 수상작으로 강하게 추천했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김유진이 『여름』에서 의식의 점묘화처럼 그려놓은 섬세하고 특별한 세상의 풍경을 두고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처음의 결정을 바꿀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나는 실존적 회의와 불안을 내려놓지 않으면서 우리 시대의 고통에 감응하고자 한 조해진 소설의 간곡함에 신동엽문학상의 ‘조금은’ 뒤늦은 지지와 격려가 주어지는 데 기쁘게 동의했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 탈북 청년의 생사를 건 행로를 중심에 두고 우리 시대의 고통스런 현실을 탐문한다. 그런데 작가는 단순히 로기완이라는 탈북 청년의 고통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재현과 공감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윤리의 자리를 다양한 지점에서 묻고 있다. 가령 로기완의 일기를 읽으며 그 지난한 시간에 다가서려던 작중화자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로의 어깨를 잡아주던 브로커의 그 손은 따뜻했을까. 로에게 순간적인 위로라도 주긴 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은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다.” 이 상상의 한계를 수락하는 이면에 손쉬운 연민이나 공감의 포즈와 싸우는 ‘나’의 치열한 자기성찰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로기완의 일기를 따라가며 로기완의 시간을 다시 쓰는 ‘나’의 작업이 한 탈북인의 행로에 대한 사실적 보고를 넘어 ‘나’의 자기치유의 시간과 섬세하게 겹치는 지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예사롭지 않은 성취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수술 과정에서 잃게 된 윤주의 오른쪽 귀를 세상의 아픔을 듣는 ‘나’의 귀로 보존하려는 환각의 결의는 아마도 작가 조해진의 그것이기도 할 것이다. 수상을 축하한다.
김유진의 소설집 『여름』에 대해서는 부기가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소설집 앞에 실린 세 작품을 연이어 읽고 났을 때 찾아온, “구름 사이로 들이치”는 듯한 “희미한 빛”의 미미하지만 투명하고 청량한 존재감은 잊기 힘든 문학적 감흥을 주었다. 늘어진 듯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의 리듬을 감각화하는 가운데 나누기 힘든 상처의 풍경을 희미한 서사의 표면에 점멸하듯 흩뿌리는 작가의 섬세한 의식과 언어는 단편미학의 성취로 손색이 없다 싶었다. 다만 김유진이 예리하게 부각하는 고독과 단절의 시간에 일정한 추상의 위험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은 남았다. 김유진식 상처의 풍경이 그 특유의 모호함의 미덕을 잃지 않는 가운데 우리 시대의 현실 안에서 조금 더 팽팽하게 긴장하며 부풀어오르길 기대해본다.
박준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으며 여러차례 시인의 생년을 찾아보았다. 그만큼 오래 묵고 삭힌 듯한 심상(心象)의 언어가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어떤 회고적 경사나 재귀적 환원에 빠지지 않는 강렬한 현실적 긴장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는 이(“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고민이라고 했다”)와 시의 화자는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이인데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어졌다. “인천 반달”은 그때부터 자주 눈에 비치기 시작했는데 “반은 희고/반은 밝았다”(「인천 반달)」). 이런 반달이 어찌 낡은 서정의 답습이랴. ‘수간(手簡)’이라는 단어가 “인천 반달”에 화인처럼 새겨져 있다. ‘미인’은 이 뭉근하게 앓고 있는 시집의 창(窓)과 같은 존재인데 시인은 그 미인의 얼굴에 드는 햇빛을 혼자 만지지 않는다. 「파주」에서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아버지의 그 “붉은” 얼굴처럼 이 아픈 시집에는 이상하게 환한 “볕”이 곳곳에 숨어 있다. 너무 이른 숙성이 염려될 정도로 경이롭다. 수상을 축하한다.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김유진의 소설집 『여름』은 새로운 감수성의 목소리와 화법을 보여준다. 일상적 삶의 윤곽이 균열하는 가운데 그 틈새로 언뜻언뜻 출몰하는 기억과 낯선 감각의 편린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플롯 중심의 서사 대신 단절적인 시공간의 장면들이 부조리하게 이어지며, 불투명한 주체의 목소리와 몽환적 감각세계가 감지된다. 이를테면 재현과 인과율 이전의 삶을 순전하게 감각하고자 하는 언어실험이 행해지는 현장이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소설이 여전히 감당해야 할 과제, 가령 세상과 타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한 소설적 탐색이 아직 구체화된 것 같지는 않다.
조해진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지만, 처음에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탈북인’이라는 소재에 흔히 요구되는 사회적 맥락을 생략하고 그 존재적인 차원에 집중하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탁월한 공감의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한편 ‘탈북인’ 문제를 개별 존재의 차원에서 너무 감성적으로 다룬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조해진의 섬세한 공감과 탐문의 언어가 지닌 미덕을 새삼 실감하거니와 ‘탈북인’에 대한 그 특유의 소설화 방식 역시 나름으로 뜻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소설의 화자가 탈북인 로기완을 만나러 가는 길은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과 관계맺음에 대한 여러 겹의 성찰을 요구하는 험난한 내면 여행이기도 한 것이다.
시 부문에서는 조인호의 『방독면』, 김성규의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그리고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주목했다. 조인호의 시들은 마치 ‘부스트업’한 엔진 같은 강성 언어에다 시대의 금기를 조롱하는 불온한 상상력으로 단박 눈에 띈다. ‘시적 자율성’이라는 안온한 세계를 박차고 나온 듯한 그의 거침없는 시들에서 가능성과 열정은 확인할 수 있되 그 지향성을 좀더 지켜보고 싶다. 김성규의 시들에는 가난과 재난이 맞물려 폐허화되는 세계를 직시하고자 하는 투철함 한편으로 가족과 고향을 돌아보는 전통적 서정이 병존한다. 그의 시들은 두루미가 “목구멍에 걸린/바늘을 토해내려/날개를/터는 소리”처럼 합리적인 메시지를 형성하지 못하지만 그 때문에 더 안타까워지는 역설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의 알레고리적 어법에는 언어가 시인의 신실한 마음의 높이만큼 활짝 피어오르지 못해 형이상학적 사유가 대신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다.
박준의 시들은 우리 시대 서정을 빼어나게 노래한다. 불편한 세상 속 시인이 실감하는 삶과 죽음의 리듬, 슬픔과 아름다움의 질감이 시편 곳곳에서 묻어난다. 흔히 낡았다고 치부되는 전통적인 서정시 형식으로 이런 조화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게 우연이 아닌 것은 뛰어난 서정시란 마음과 언어의 동시적 수행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실감하겠기 때문이다. 화자와 세상 사이를 잇는 ‘미인’이라는 인물의 창조라든지 서정과 서사를 자유자재로 결합하는 언어운용과 같은 형식상의 새로운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심사위원들과의 토론을 거친 뒤,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와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수상자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수상소감
설핏 즐거운 것들이
박준 朴濬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했다. 2008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지난겨울 저는 별일 없이 살았습니다. 눈이 오면 눈을 밟았고 바람이 불면 추웠고 날이 풀리는 낮에는 볕을 맞았습니다. 그게 일이라면 일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톱 밑이 검어지는 날들이었습니다.
요즘도 저는 삶의 거처를 뒤집는 일보다는 아름다운 것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저와 제가 쓰는 시는 그리 멀리 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난함과 정처 없음에서도 설핏 즐거운 것들이 비칠 거라 믿습니다.
처음 시를 읽고 쓰던 서대문의 한 도서관이 생각납니다. 도서관 자리는 오래전 화장터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1970년 고양 벽제로 이전될 때까지 40년 넘게 있었던 터라 아직도 마을 어른들은 도서관 주변을 화장터라 부릅니다. 당시 그곳에는 이른 아침부터 서울 곳곳의 죽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영구차 뒤로 검은 승용차가 이어지는 부유한 죽음부터 전통 상여의 행렬, 심지어는 리어카나 지게에 시신을 지고 오는 가난한 죽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도 못 본 저의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죽음의 형식을 얻었습니다.
시를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어쩌면 시는 탄생보다는 죽음에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당신의 슬픔이나 우리가 함께 보낸 여름, 아버지의 붉은 목울대나 꿈속 들판에 떨어진 미인의 긴 머리카락 같은 것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시의 형식이 새삼 고마워집니다.
신동엽 시인과 앞서 수상한 선연한 빛의 선배님들을 생각합니다. 저도 어서 좋은 삶을 살아서 좋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맨몸 채, 뙤약볕 아래/서해바다로 들어가던/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신동엽 「보리밭)」) 같은 정신과 언어를 부릴 수 있을 즈음 저 또한 서늘해져도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상소감
문학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으로
조해진 趙海珍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와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이 있다.
이른 아침 당선 전화를 받고, 한동안 저는 제가 달콤한 꿈을 꾼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에게도 수상 소식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배송된 『신동엽 시전집』을 받아들고 나서야 그 전화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순수하게 기뻤습니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주 부끄러움을 느끼던 시절에 쓴 작품입니다. 그건 허상이거나 부풀려진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느껴지고 만져지는 고통이었습니다. 소설이 완성되어 출간되고 또 누군가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차감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책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던 한 시절을 소설 쓰기와 지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 외에는 별다른 작가적 자산이 없는 제가 문학뿐 아니라 삶에서도 큰 산과도 같은 신동엽 시인의 이름으로 상을 받아도 되는 건지, 솔직히 기쁨만큼 걱정도 큽니다. 자학적인 고통에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삶에 대한 고민으로 한편 한편 오직 글을 쓰면서 저만의 세계를 완성해가겠다는 말씀으로 이 황홀한 순간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야기로밖에는 전해지지 않는 위로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어떤 문장은 체온보다 따뜻하고 바람처럼 투명하다는 것도 믿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지만 저는 문학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들 중 한명으로 남을 것이고, 언제까지고 그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