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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오타’ 읽는 시간

이기호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

 

 

장성규 張成奎

문학평론가. 평론집 『사막에서 리얼리즘』이 있음. 68life@hanmail.net

 

 

161-문학초점-장성규_fmt글을 쓰다보면 개인의 성실함과는 별도로 ‘어쩔 수 없이’ 오타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간혹 글의 본문보다도 오타가 흥미로울 때가 있다. 오타는 단순하게는 컴퓨터 자판을 잘못 누르거나 어려운 어문 규정을 헷갈려서 나오기도 하지만, 종종 무의식중에 무언가가 글에 튀어나와서, 혹은 텍스트에 모종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에 의해 생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글 중에서도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에는 일종의 오타가 매우 빈번하게 나오기 마련이다. 이야기(story)에다 인과율에 입각한 플롯과 등장인물의 성격과 대상에 대한 핍진한 묘사와 시간 구조 등을 비롯한 담론(discourse)을 덧씌울 때 비로소 소설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본래 이야기의 특정 부분은 소거되기도 하고 혹은 변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거되거나 변용된 부분은 소설에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기 마련이다. 이런 흔적들은 보통 소설의 매끈한 표면을 훼손하기 때문에 마치 오타처럼 보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종종 오타로 쓰인 텍스트의 흔적은 텍스트 표면의 진술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기호(李起昊)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문학과지성사 2013)는 이러한 오타들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먼저 소설집 첫머리에 실린 「행정동」을 보자. 주인공이 하는 일은 오래된 학적부를 전산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전 학적부에 기재되어 있던 혈액형이나 신장, 몸무게, 보증인, 가족 관계, 질병 사항, 병역, 수상 경력, 휴학 기간” 등을 제외하고 “학점과 학위 구분, 입학 연도와 졸업 연도, 주소”만을 데이터화하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정보는 모두 생략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사라졌다 한들, 학적부의 본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20~21면)이다. 그런데 만약 학적부와 같은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다른’ 기록이 의미를 지닌다면?

80년대 중후반은 일반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시기로 인식된다. 민주와 독재의 대립구도가 이 시기를 규정짓는 기본적인 플롯이다. 이 플롯에서 벗어나는 ‘사소한’ 이야기들은 텍스트의 이면에 흔적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삼촌이 가입해 있던 구로동일꾼노동자회”에 대한 이야기가 의식화된 “학출(學出)(「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87면)을 중심으로 기록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삼촌의 “프라이드가 후진되지 않는 이유”(90면) 같은 부차적인 이야기들이 소거된다는 사실이다. 87년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들 속에 삼촌의 작은 이야기는 부재한다. 민주화운동의 내러티브에서 플롯의 완결성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빨치산을 둘러싼 내러티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은 예컨대 “박헌영을 비롯한 이승엽, 설정식, 임화 등”(「이정(而丁)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246면)의 비극에 대한 것으로 한정된다. 여기에 딸의 출산을 접한 “한 명의 배신자”(252면)의 이야기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반제와 통일의 내러티브 속에서 “어디서 감히……”(255면) 이 이야기가 기록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잘 빚어진 소설’이란, 어쩌면 일종의 “매뉴얼”(탄원의 문장」, 192면)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역시 그 “형식과 양식은 따로 정해진 것이 없었으나, 어쨌든 그 또한 하나의 제도로서의 글쓰기”(199~200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타’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명확한 목적과 가시적인 대상과 이를 기준으로 설정된 서술 원리가 주어진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벗어나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사물을 “고유명사”(208면)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매끄러운 텍스트 표면의 발화만큼, 아니 종종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면에 숨겨진, 마치 오타와 같이 읽는 이를 서걱거리게 만드는 이야기의 흔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기호는 텍스트에서 ‘오타’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매우 잘 아는 소설가다. 이미 『최순덕 성령충만기』(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된 초기 작품들을 통해 텍스트를 구성하는 원리 ‘자체’를 마음껏 뒤틀고 새로운 텍스트 형식을 보여준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곳곳에 오타를 새겨두고 있음은, 아니 부러 오타의 형식을 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너무나 많은 ‘웰 메이드’ 서사의 시대에, 우리 문학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오타’가 아닐까? 이 문제를 경유해야 비로소 우리는 ‘김 박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온전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