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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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봉 千瑞鳳

1971년 서울 출생.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서봉氏의 가방』이 있음. zzim1000@hanmail.net

 

 

 

K의 부엌

 

 

이제, 불행한 식탁에 대하여 쓰자 가슴에서 울던 오랜 동물에 대하여 말하자

 

가령 상어의 입속 같은 식욕과 공복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박쥐의 밤들

 

들개의 허기와 늪처럼 흡입하는 아귀, 그 비늘 돋는 얼굴에 대하여 말하자

 

하여 병()의 딱딱한 틈에서 다시 푸른 순()을 발음하는 잡식성의 문명에 대하여

 

말을 가둔 열등한 감자와 그 기저의 방에 묻힌 다복한 주검에 대하여 말하자

 

기어이 모든 숨을 도려내고야 말, 아름다운 칼들 붐비는 K의 부엌으로 가자

 

딱딱하게 굳어 기괴한 신탁의 소리를 내고야 말 혀에 대하여 마침내 말하자

 

간이나 허파 따위를 담고 보글보글, 쉼 없이 끓는 냄비 속 레퀴엠에 대하여

 

고백하자, 우리가 요리하고 싶던 오른손, 침묵이 끊어내고 싶던 침묵에 대하여

 

 

 

닫히지 않는 골목*

 

 

골목의 지도**

골목의 지도**

 

性 가족공장 _ Memory

 

내 슬픔의 가장 안쪽에 성 가족공장이 있다

아침이면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 도로 쪽으로 걸어나갔고

도로로 나간 아이들은 누구도 되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 죽은 이복동생을 닮아서

공장의 굴뚝이 조금씩 자라나고 어느새 굴뚝은

이 골목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성 가족공장 공장장인 삼촌의 서른번째 기일이다

잡설을 불러 저녁 식탁에 앉으면 밥상 위엔

삼촌의 수염 같은 분진들이 조용히 내려앉곤 했다

 

 

우울 상점 _ Continuity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로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상점으로 들어서면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울 사세요

-우울 한개만 사세요, 아저씨

-그래 아이야, 내가 여기 있는 우울을 모두 사마

-정말인가요, 이게…… 꿈은 아닐 테죠……

-그래, 그러니 이제 한번 웃어보렴

-그런데 이 많은 우울을 다 무엇에 쓰시게요?

-너는 이 우울을 모두 팔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

-더 재미있는 우울을 구하러 갈 것입니다,라고 아이가 답하더라

 

 

모스크바의 여름 _ Romance

 

춤출까? 차라리 욕을 하지, 애인은 나를 잊었을까 글쎄, 나더러 영혼이 없대 덜컹거리는 위장을 따라 술집에서 여관으로 여관에서 궁전으로 철길을 놓는 밤 한없이 수은주가 내려가는 다리 위에서, 홀로 복된 뜨레빠끄를 추고 싶구나 고단한 행자의 해살(解煞)과 피리 소리는 닮아서 네 입술은 뾰족지붕처럼 위태롭다 5촉짜리 전구의 연애, 혀를 닮은 우리의 기차, 노래는 하지 말자, 무서우니까 우리의 불구는 광장처럼 드넓었고, 갑상선을 앓듯 그해 여름은 하체가 짧았다

 

 

9 _ Schism

 

약에 취해 손가락 부푼다 하필 오늘 폭설 내려 다리는 형편없다 길어진다 휘어지고 있다 알 수 없는 것들은 제법 알 수 없다 기차는 9가 아니다 간혹 불멸의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슬프지 않다 폭설을 뚫고 기차가 간다 의미 없지만 기차의 불빛 따라 걷는다 휘어진 다리가 꼬이고 몸 젖는다 때로는 의미없음이 의미있었기에 오늘 머리카락이 철사처럼 구부러지고 다정한 기차는 여러번 물결로 출렁거렸다 이 밤에 기차가 달려가고 하필 폭설 따라 걷는다 다리는 점점 길어져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부풀어 오르다가 9는 폭발할 것만 같다 기차는 9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붉은 빛 충혈된 눈 위로 하얗게 하얗게 비늘 흩어진다 형편없는 의미의 기차가, 내 입속으로 눈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한여름의 카니발 _ Quotidian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면

깨진 유리창 틈 낮말의 새와 밤말의 쥐가 있다

쿵쿵거리는 침묵 때문에

아래층의 뭉크가 절규한다

빈 방마다 바람이 가득 들어차고

으스스한 빗물이 눈물이 천장으로부터 뚝뚝,

거실의 발목이 부풀어오른다

안방에는 피 칠갑의 주인이 자고 있다 자고 있는

나를 내가 내려다보고 있다

새의 발자국 같은 붉은 족적을 찍어대며

마라가 온 집을 뛰어다녔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면

 

 

어린이집에서 춤을 _ Ensemble

 

공포 가득한 램프처럼 아이들의 눈이 붉게 빛났다

오래 고여 있던 냄새는 뚜렷하지 않은 생각과 닮았다

진지한 농담들은 냉동고 안에서 꽁꽁 굳어 있고

이것은 변질되어가는 나의 뇌()와 다르지 않다

 

보관되지 않는 슬픔은 스무살 이후로 없단다

더이상 앞을 볼 필요가 없는 맹어(盲魚)처럼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다만 느낀다고 수증기의 말씀이 새고 있다

 

고장나도 좋을 불행의 춤을 추어라 아이들아

서로에게 들킨다면 기침소리에도 뼈가 부러질 그런 춤,

소매가 향냄새를 풍기며 파랗게 타오른다

오늘 우리의 춤은 무엇도 상징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아

 

 

T _ Trauma

 

우리가 어렸을 때 나무 밑동만큼이나 작았을 때 하늘은 귀여웠지만 당신의 숨은 겨울 가오리연처럼 멀고 가늘었다 석달 열흘 정도는 거뜬히 울 것 같던 검은색 로터리 전화기는 고장난 걸까 수화기 들어올려볼 때 무언가 함께 끌려올라오던, 덜컥거리던 그것이 내 몫이겠거니 했던 순한 착각을 다 타버리고 밑동만 남은 나무들의 겨울산에 와서 보았다 울음도 질책도 없이 언제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바닥들, 위로 열명(列)하듯 비가 내렸다 당신의 발목은 아직도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다

 

 

녹번동 142번지 _ Fixation

 

주황색 공중전화 말고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던 곳

 

정육점 도마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성 가족공장의 노래

 

초록(草綠)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곳

 

연탄가스 마시고 죽은 앞집 수진이가 아직도 아홉살인,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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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목에는 출구가 없다. 삐에로로 분장한 악마도, 공중 부양하는 눈알도, 한때 나보다 사랑했던 당신도 없다. 그러나 골목은 당연히 없는 것들이 없어서 있지 말아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가령 살아 있는 죽음이나 죽어 있는 삶들, 시와 삶이 구분되지 않기를 기도하던 시절을 지나 끝내 시와 삶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버린 골목에서 나는 피로한 한마리 곰처럼 서향의 붉은 집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슬프게도 내 안에 들여놓았던 당신이나 당신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 어느 순간엔 다 무의미해진다. 어떤 찰나를 지나면 선이나 악은 추억처럼 멀다. 곰의 원형은 정말 곰인가. 골목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골목인가. 내가, 당신이, 정말 거기 있기는 했을까?

**지도와 관계된 몇개의 소단락들은 지면 관계상 생략. 제2시집에서 계속.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