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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이형 尹異形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이 있음. janejones@naver.com
윈, 캠프 루비
플레이리스트가 또 한바퀴 돌았다. 홀을 채운 사내들의 왁자한 목소리 사이로 귀에 익은 전주가 작은 사탕처럼 구르며 퍼져나갔다. 저 노래. 위스키를 다섯잔이나 들이켠 건 아마도 저것 때문일 거라고 진우는 생각했다.
그 곡은 한세기 전쯤 지구에서 히트한 팝을 마구잡이식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섞어놓은 선곡 한가운데 끼어 있었다. 진우의 부모의 부모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나노봇이 여배우들의 얼굴에 얼어붙은 아름다움을 무차별 폭격하기도 전에 고전적인 방식으로 촬영된 할리우드 청춘영화에 삽입된 곡이었다. 고등학교 이야기였던 것 말고는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고, 눈부시게 젊은 한쌍의 남녀가 파티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주위 청춘들의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근사한 댄스를 선보이던 장면만 어제 본 것처럼 선명했다. 이제는 천국에서 춤추고 있을 여배우의 이름은 엠마 왓슨, 함께 스텝을 밟던 남자 배우의 이름은 이즈라 밀러. 그 장면에 흐르던 노래였다. 분명히 찾아 기억했던 곡목과 밴드 이름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 밴드의 오리지널 앨범을 찾아 듣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젊은 시절에 해보려던 숱한 일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계획은 수첩 한귀퉁이 낙서로만 짧게 남았고 진우는 결국 그들의 앨범을 들어보지 못한 채 지구를 떠났다.
진우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린이 앉아 있던 자리에 선뜻 와 앉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요. 샐러드를 몇입 먹은 린이 그렇게 말하고는 언제나 쓰고 다니는 낡고 검은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숙소로 올라가버린 게 몇시간 전이었다. 요리 담당인 재니스와 메이메이를 제외하면 죄 남자뿐인 회식자리였으니 쏟아지는 시선과 질문을 받아내는 일도 부담이었겠으나 그게 전부였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후에 있었던 보고회의에서 J&L재단 이사장이 던진 질문이 진우의 머릿속을 빙빙 돌며 두통을 자아냈다. 그런데, 다른가? 저들에게 사지가, 머리처럼 생긴 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 일을 어렵게 만드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 거요. 외형상 우리와 조금이라도 가까우면 연민이나 측은함이 커지는지, 난 그냥 그게 궁금해서 말이지.
그 질문은 린을 향한 것이었다. ‘외계생명학개론’ 첫 수업시간에 토의 주제로 나올 법한 그 가치중립적인 질문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 사실 린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진우 역시 이사장이 묻기 한참 전, 캠프 루비에 도착해 첫 브리핑을 받던 순간부터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맞닥뜨려온 생명체들은 물론 진우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어떤 종족은 가장자리를 따라 못처럼 생긴 촉수가 달렸다는 점이 다를 뿐 아이들 장난감인 프리스비를 꼭 닮은 생김새였는데(진우로서는 도저히 다른 비유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날면서 셋씩 겹쳐 짝을 짓고 후대를 생산했다. 반투명한 정육면체 몸 안에 검은 젤리 모양의 뇌수를 지닌 수륙양생 종족도 있었다. 그들은 일생 동안 물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살다가 때가 되면 육지와 바다의 경계로 올라와 자신들의 몸을 벽돌처럼 쌓음으로써 후손들이 살아갈 도시의 일부를 이루고 생을 마감했다. 어떤 종족은 그저 허공을 부유하는 가느다랗고 시커먼 그을음처럼 보였다. 어떻게도 인간과 연결짓기는 어려워 보이는 그 존재들을 접하자마자 그들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작업이 반복되는 동안 진우는 드레이크 방정식을 처음 배웠던 초등학교 때부터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서 자라난 기대와 희망, 경이로운 것에 대한 존중이 가슴속에서 재로 변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마침내 기대의 마지막 부스러기 하나가 까맣게 사그라들어 낯선 대기에 실려갔을 때 진우는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우주의 모든 비밀을 창조한 신의 존재가 실은 주유소 앞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싸구려 비닐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춰줄 어떤 차폐물도 없는 넓고 낯설고 황량한 땅이었다.
진우는 신의 그 처연한 마지막 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류에게 먼저 접촉해올 외계 생명체가 인류보다 우월한 문명을 지녔으리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우주로 뻗어나간 인류가 먼저 발견한 그들이 지구보다 낮은 문명 단계를 지나고 있으리라는 가정에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벌을 받고 싶었다. 자신을 포함한 개발현장의 모든 인간이 그들이 성배처럼 내뿜는 빛에 의해 곤죽이 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어쩌면 그러기 위해 지구를 떠나왔는지도 몰랐다. 허나 그토록 쉽고 간단하게 지구산 쇳덩이에 밀려 무력하게 쫓겨나는 생명들이라니. 별들 사이를 순회하며 혹여나 어떤 생명체가 부당한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지, 무례한 침입자가 행성 주인의 땅을 허가 없이 갈아엎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징계하는 인도적인 지성체는 우주 적응 프로그램 이틀째, 무중력 적응실 허공에 방금 먹은 점심과 함께 진우가 방울방울 토해내버린 유년기의 예쁘장한 동화로만 남았다.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진우의 상상 속에 살던 그런 지성체는 없거나, 너무 멀리 있거나, 그도 아니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너무 고매하고 형이상학적이어서 지구가 벌이는 방대한 토건사업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튀는 흙과 부서지는 바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냥 화염방사기로 둥지를 밀어버리는 게 어떻소. 그 편이 훨씬 간단할 텐데? 진우는 그렇게 묻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나 자신과 비슷하게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그 사내, 멱살을 잡아올리면 허공에서 몇번 허우적거리다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을 듯한 왜소한 체구의 이사장 앞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압도되었다. 여러 행성을 다녀봤으나 행성의 소유주를 직접 대면한 건 처음이었다. 옛 인류와는 별로 상관없는 삶을 살며 우주를 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자신과 같았으나 그 사내에겐 마치 단단하게 뭉쳐진 광석처럼 주위의 모든 산만함을 제압하는 눈빛이 있었다. 윈프레드 멘데스는 겨우 스물네살의 나이에 주얼 앤 라이프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고, 회사 재정이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당시만 해도 비웃는 사람이 많았던 초광속추진기 개발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여 몇몇 주요 기술을 독점계약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는 이제 지구의 보석 재벌을 넘어 자신의 이름을 딴 윈, 프레드, 멘데스를 비롯해 총 여섯개 행성에서 진행 중인 개발작업에 절반 이상의 돈을 대는 걸어다니는 거대 자본이었다. 정작 질문을 받은 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대답했을 뿐이다. 아뇨, 어떻게 생겼든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연민이 뭐죠?
평소라면 곧바로 그녀를 따라가 잠드는 것까지 확인했을 테지만 그날 진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심해서도 자포자기해서도 아니었다. 해묵은 자기모순을 확인했다는 자각 속에서 그는 그저 조금 흐트러지고 싶었다. 그야말로 비효율적인 밤이었다.
라인 3팀인가 4팀의 팀장을 맡고 있다는 아이슬란드 출신 남자는 알고 보니 타고난 술꾼이었다. 두툼한 손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집게로 얼음을 잔에 담고 꿀 빛깔의 술을 따를 때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잔을 살짝 흔들어 진우에게 내밀었다. 뭐라고 한 거죠? 진우가 묻자 불콰해진 얼굴의 그는 느린 영어로 대답했다. 꿈 없이 깊은 잠에 들기를. 우리 어머니가 잠자기 전에 늘 해주시던 기도예요. 그는 부스럼이 올라온 팔을 습관적으로 긁었다. 이곳의 많은 사람처럼 그도 포자 알러지로 고생하고 있었다. 작업복 허리띠를 조금 늦춘 그가 스테이크를 썰어 포크에 찍어서는 마치 아이에게 하듯 진우의 입에 가져다 댔다. 먹어요. 마셔요. 푹 자요. 꿈 없이. 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서 수염이 듬성듬성 난 그의 턱이 움직이며 빚어내는 짧은 명령문이 시키는 대로 진우는 술을 받아마시고 고기를 씹어 삼켰다. 술에서는 평생 위스키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한 방향제 같은 맛이 났고 돼지고기 안심 맛이 나게 할 목적으로 소스를 과도하게 쏟아부은 합성육 스테이크는 너무 질겼다. 모두가 억지스럽게 옛날을 상기시키는 조잡하고 얕은 맛이었다. 그러나 홀을 가득 채운 수백명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진우 또한 어느새 그 음식들이 빚어내는 싸구려 향기에 휘감겨 팔과 다리가 나른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테이블 끝에 앉은 남자가 잔에 고개를 거의 처박다시피 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옆 테이블에서는 하키와 축구 얘기가 한창이었고 한쪽 뺨이 알러지로 붉게 부어오른 남자는 대화의 흐름에는 아랑곳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내가 옛날에 길에 버려진 고양이를 세마리나 주워다 길렀단 말이야. 이름? 맞춰봐. 돈, 권력, 명성. 마지막 놈은 여자라고 붙이려다 관뒀지.
유령들이로군. 우린 모두 유령들이야. 마치 바로 어제 지구에서 건너온 듯, 이제 그곳에 돌아가도 자신들이 알던 것들은 이미 죽어 사라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힘을 얻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우는 ‘근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섬뜩함에 현기증을 느꼈다.
아이슬란드 사내가 술을 한잔 더 따르더니 몸을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파트너. 그녀, 괜찮나요? 신나게 떠들어대던 옆자리 남자들이 일순 조용해지며 그들의 눈길이 진우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그녀의 친척이라던데 정말이에요? 이번에는 옆 테이블 사람들까지 고개를 돌렸다. 그럴 만도 했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인 철거작업이었다. 몇달간 지루하게 이어지던 작업의 끝에 긴장을 풀라고 마련된 오랜만의, 그리고 진우와 린이 도착한 뒤로는 처음 있는 회식자리였다. 사람도 됩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당신 마음도 읽어요? 아이슬란드는 정상적인 호기심과 성욕을 지닌 홀 안의 모든 사내를 대변해 묻고 있었다. 피부색과 나이와 출신국과 살아온 배경은 제각각이나 궁금한 것은 비슷할 캠프 루비 소속 피고용자들의 얼굴을 진우는 흐릿한 눈으로 훑었다. 그들이 악몽을 꾸지 않도록 최후의 궂은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은 손톱만큼의 우월감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실상은 그들과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처지, 행성에서 또다른 행성으로 두마리 나방처럼 날아다니며 주어진 일을 할 뿐인 계약직 노동자에 불과했음에도 린은 어디서나 신비에 휩싸인 여신이었고 진우는 어린 여신을 모시는 수수께끼의 그림자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녀는…… 대답하려다 진우는 멈칫했다.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 한참 지나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일어서는 진우의 뒤통수에 여기저기서 불만과 탄식, 야유가 섞인 웃음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청결한 침대시트를 마주하고서야 취기가 조금 가셨다. 샤워를 하려다 정신이 들어 진우는 린의 방문을 두드렸다. 몇번을 노크했으나 대답이 없어 비상용 카드로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린의 PDA에는 진우의 호출기록이 몇시간 전부터 미확인상태로 남아 있었다. 진우는 자신을 타이르며 린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외부로 통하는 출입문은 모두 꼼꼼히 통제되었고 린의 카드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코드가 없었다. 연락 없이 멀리, 말하자면 뛰쳐나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린은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정말 그럴까? 몇벌의 옷가지와 들춰보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진 캠프 루비의 공식 홍보용 팸플릿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린의 방은 진우의 방과 똑같았다. 실용만을 의도해 최소한으로 꾸려진 그 순백색 방에 앉아 있자니 자신과 린이 함께 보낸 시간 또한 방과 함께 사용하라고 받은 일회용품처럼 느껴졌다.
진우는 문득 어떤 단어를 떠올렸다. 모든 공식 문서에 그는 린의 보호자로 표시되었다. 보호하는 사람. 그녀의 정신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얘기를 들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 그러나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그녀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나. 린은 기계가 만들어준 부모가 실은 가상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충격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 대해 일종의 존경심을 품었는데, 그것은 선정을 펼치다 명예롭게 퇴임한 전직 대통령에게 성실한 시민이 품는 일반적인 호의와 비슷했다. 진짜 부모로 말하자면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조차 린은 알지 못했다. 진우는 괴로워하는 그녀의 어깨를 안으며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넌 혼자였고 너무 어렸어, 따위의 흔해빠진 대사를 중얼거릴 기회도 없었는데, 우선 그녀는 좀처럼 괴로움을 토로하지 않았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잘못과 잘못이 아닌 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일반적인 상식과 크게 달랐다. 이를테면 행성 클라리스의 캠프 토파즈에서 아침식사 시간인 아침 여덟시보다 한시간 일찍 텅 빈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훌쩍훌쩍 울었으나, 파도 위에 합성 콜라를 쏟아부으며 죽어 떠오른 울머버그 유충 한떼가 이끼처럼 흔들리는 광경을 보면서는 재미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거나 유추하지 못했고 그것을 요구받는 순간이 오면 모자를 눌러쓰고 침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어쩌면 린의 정신에 있어 무너져내린다는 표현은 보통 사람의 경우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며 사람이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감정의 교류나 대화가 그녀에게는 외려 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 보통 열다섯살 소녀 같은 부분이 조금도 없으리라는 가정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우는 다만 그녀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을 뿐이었다.
방문이 조용히 열린 건 그대로 한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괜찮아요? 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렇게 물은 건 린이었다. 잠이 안 와서 운동 좀 하고, 샤워하고 왔어요. 물기 어린 긴 머리카락이 린의 새하얀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손에는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합성우유가 담긴 플라스틱 컵이 들려 있었다. 운동?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안 왔니? 응. 린이 짧게 대답하고는 배고픈 사람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썸바디 좀 줄래요?
그게, 필요해? 진우는 바보처럼 물었다.
응. 두알, 아니 세알만 줘요.
세알?
응.
왜?
린이 대답 대신 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한알 이상은 안돼.
진우가 약을 건네자 린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우유 한모금과 함께 삼켰다. 자신의 방을 낯선 듯 잠시 둘러보던 린은 우유를 불어가며 끝까지 마신 다음 트레이닝복을 벗기 시작했다.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는 것 외에 진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진우가 겨우 내뱉었다. 새하얀 속옷 차림이 된 린이 그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난…… 나, 피곤해요. 너무 열심히 달렸나봐.
괜찮은 거야?
좀 안아주지 않을래요?
린이 웃고는 진우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뜨거웠고, 차갑게 젖은 머리카락은 도자기로 만든 풍경처럼 흔들리고 있어 진우가 안은 팔에 조금만 힘을 넣으면 찰그랑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린의 손이 무방비하게 드러난 진우의 쇄골을 쓰다듬고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갔다. 휘감았다. 감싸 쥐었다. 랩 댄스. 음악 없이. 클럽 루신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미처 거절할 겨를도 없이 진우에게 다가와 안겨들며 추었던 그 춤이었다. 어린 짐승처럼 파고드는 그녀에게 반응해 자신의 몸 일부도 하릴없이 뜨거워지는 것을 깨닫자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보호한다는 꿈. 다치지 않게 해주겠다는 꿈. 돕는다는 꿈. 누군가를, 구한다는 꿈.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그저 꿈이었다. 깨끗이 부서지는 대신 잊힌 채 천천히 숨이 멎어버린 꿈들.
난 하지 않았어. 그 아이는 가끔씩 내게, 요구했어. 그랬지만, 그래도, 난 하지 않았어. 그 아이는 내 환자였고, 내게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이었으니까. 실패한 과거 말고는 먹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자들이 둘러앉아 그럼에도 자신 역시 한때는 순수했노라는 열변을 토해내며 이어가는 자위의 향연. 그 비린내 나는 후일담의 환영 속에서 유치한 대사를 중얼거리는 진우 자신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옆에 있던 환영 속 누군가가 그를 툭 치며 웃었다. 에이, 형씨, 웃기지 마쇼. 어떤 상담사가 열다섯살 여자애한테 날마다 그런 약을 주는데? 가족? 어떤 아버지가 딸한테 그런 일을 시키냐고?
푹 자요. 꿈 없이. 그러나 신경안정제에 취해 이완되기 시작한 린의 몸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동안 진우의 정신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 또렷함은 점점 좁고 가늘어지더니 하나의 멜로디가 되어 머릿속을 떠돌았다. 또다시 그 노래였다.
어떤 오후. 젖은 붓으로 칠한 것처럼 이리저리 번져 디테일이 지워진 얼굴들. 남자와 여자. 옛 동료들.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거실에서 엠마 왓슨이 나오는 그 오래된 영화를 함께 본 후 그들은 가볍게 저녁을 먹고 차와 술을 마셨다. 많이 웃었고 많이 떠들어댔다. 영화 속 장면을 흉내 내 우스꽝스러운 춤도 추었다. 그들이 도우려 했으나 그전에 목숨을 끊고 만 사람들 얘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위도, 얼어붙은 수도도, 끊긴 전기도, 부서진 집의 잔해도, 이리저리 기워붙인 이불과 함성과 기도와 울음과 움켜쥔 주먹과 계속되던 노래도, 아늑한 거실 식탁의 화제 근처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대화의 끝에 누군가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왜 안 오지? 올 때가 한참 지났잖아. 우리가 이렇게 기다리는데. 누구? 누가 또 오기로 했었어? 멍한 얼굴로 그렇게 물은 건 진우였다.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기억 속 누군가가 중성적인 음성으로 웃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웃음뿐이었다. 안긴 채 잠든 린을 침대에 눕히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진우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기 전에 썸바디 한알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두알을 더 입에 넣고 삼켰다. 이제 내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수학공식을 암기하는 사람처럼 몇번이고 그 사실을 곱씹었다.
그들은 그이고 그녀인 동시에 그들이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녀를 감지하고, 찾아내고, 데려갔다가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몇번이나. 그 모두를 그녀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일부를 보았을 때 린은 자신이 폭발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일종의 저격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쏠 대상의 역사가 보이거나 들린 적이 없었다. 이상을 감지한 린의 정신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저지하려 했다.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그들의 뇌 속을 휘저어댔다. 역부족이었다. 더 많은 것이 들어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단수의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안에 다른 모든 존재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물었다.
왜
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행성 크기만 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대답을 찾아 그녀 안을 훑었다. 시간이 흘렀고 린의 얼굴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붉어졌다.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하자 그들은 다른 것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벌이는 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린의 종족이 그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계획이었다.
우선 그들은 고요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먹고 씹고 움직여야 하는 한계투성이 형태를 벗어나 더 낮은 곳으로, 더 넓고 유순하며 자유로운 존재로. 그리고 종국에는 조용히 무(無)와 하나가 될 계획이었다. 순교를 닮은 소멸. 그것은 그들에게 영예이자 환희였다. 이 고귀한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다름 아닌 그들의 둥지, 그 안에 단단하게 다져진 시간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들은 보금자리를 옮기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혹은, 그들은 다른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고 자신도 사라질 수 있었다.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다른 존재를 해한다는 측면에서 거기에는 어떤 기쁨도 고요함도 없었다. 그건 복수였다. 학살이었다. 퇴행이었다. 절멸이었다. 자살이었다. 모두가 그들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으나 자신들이 생래적으로 견딜 수 없는 추함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필요악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그녀의 대답에 달려 있었다. 린은 그 사실을 직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린은 아래로, 안전한 곳으로 내려갔다.
더 아래로.
여기.
이제 됐어.
모든 것이 사라졌고,
다시 시작되었다:
맵고 따갑고 아픈 것. 생각만으로 눈물이 배어날 듯한 것.
그렇지만 엄마가 그것을 원한다. 입에 넣고 불을 붙이길 원한다. 내뿜기를 원한다. 맵고 뜨겁고 따가운 것을. 엄마가 너무도 강렬하게 원한다. 엄마 마음속엔 온통 그것뿐이다. 그래서 장난감을 내려놓는다. 일어선다. 다른 곳을 보는 엄마 앞을 지나쳐, 옷방으로 걸어간다. 옷장을 열고 아랫서랍의 낡은 옷들 틈에서 그것을 꺼낸다. 엄마가 아빠 몰래 숨겨놓은 것. 내가 그걸 엄마에게 줄 것이다. 한손에 들고, 엄마에게 간다. 그것을 등 뒤로 감춘 채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응, 왜, 아가? 엄마가 묻는다.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그냥 엄마의 손을 잡아끈다. 영문을 모른 채 엄마가 따라 일어선다. 베란다로 이어지는 창문 앞까지 가서 창문을 연다. 그리고 엄마의 손에, 등 뒤에 감춘 그것을 가만히 밀어넣는다. 여기. 엄마는 여기 서서 행복해지고 싶어했다. 하루 종일 이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엄마가 행복해지는 걸 볼 수 있다.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었다. 엄마가 웃지 않는다. 고마워, 우리 아가, 하며 안아주지 않는다. 지금이 밤이 아니라서 그런가. 내가 잠들어 있어야 하는데 아니어서 그런가. 엄마는 입을 벌리고 내가 쥐어준 것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다. 무너져내린다. 운다. 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렇게 꺽꺽 소리를 내며 운다.
린의 눈꺼풀이 꿈과 함께 흔들렸다. 그러나 깨지는 않았다. 피아노줄을 타고 슬며시 내려와 배우들 틈에 섞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꿈속의 역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며 관찰하는 린 자신의 인격이 꿈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이제는 우주 어디서나 처방전 없이 유통되는 썸바디는 본래는 그 이름에서 짐작되듯 무력한 사람들의 심신에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환각을 제공하는 수면제 겸 신경안정제로 개발된 약이었다. 클럽에서 일하던 열세살 때부터 린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목적으로 그것을 먹었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누군가가 되는 꿈. 하지만 썸바디가 린을 데려가는 곳은 언제나 같았고, 언제나 린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곳엔 날아다니는 포자와 금빛으로 부글거리는 바다가 아니라 어둡고 과묵한 색조의 건물들이 있었다. 손님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얼굴의 어른이, 기계가 아니라 엄마와 아버지의 손길이 있었다. 린은 두돌이 채 못된 남자 아기였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같은 생김새, 같은 사고체계. 그 일은 쉬웠다. 특히 물기가 많은 엄마의 마음을 읽는 일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는 사내아기 특유의 감각과 함께 기분 좋게 시작된 꿈은 그러나 엄마에게 담배를 가져다주는 대목에 이르면 한없이 가늘어지며 린을 각성상태로 밀어내려 했다. 늘 린 자신의 인격이 끼어들고 마는 것은 그래서였다. 왜일까. 칠해서는 안되는 빛깔을 눈두덩과 입술에 칠한 것도 아닌데. 지갑을 뒤지려고 손님의 술에 약을 부은 것도 아닌데. 아기가 된 린의 행동은 엄마를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죄책감으로, 그 일을 알게 된 아빠의 마음을 엄마에 대한 분노로 터질 듯하게 만들어놓았다.
꿈은 그 시점부터 거추장스러운 추진체를 떼어버린 것처럼 어지러운 속도로 날아갔다. 린은 어느순간 아기가 아니라 소년이었고, 복도마다 과일과 꽃 그림이 그려진 낡은 건물의 작은 방에 앉아 지루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 앞에 차례로 와 앉는 사람들의 마음을 린은 책처럼 꼼꼼히 읽었다. 선생님과 의사선생님, 검은 옷을 입은 수녀님과 푸근한 웃음을 지닌 스님. 모두가 원하는 것은 같았다. 소년이 다른 보통 소년들처럼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나 린은 그들의 마음속에 깃발처럼 내걸린 그 바람이 아니라 그 뒤에서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 것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어떤 것은 이미지였고, 어떤 것은 소리였으나 그것들은 대체로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었다. 거칠게 언어로 옮긴다면 그것은 이런 문장에 가까웠다. 나는 결국 이 아이를 구할 수 없을 거야. 그것을 알아차린 린이 다리를 떨면서 킥킥 웃으면 그들은 놀라거나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다음 장면. 소년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당황한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손수건을 건네주며 물었다. 왜 그러니? 어디가 아파? 엄마가 보고 싶어? 다음달에 만날 수 있다고 아빠가 그랬잖니. 소년이 보고 있는 것은 길 건너편에 있는 가게 앞 게임기에 매달린 한무리의 자기 또래 사내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조악한 화면에 푝푝 소리를 내며 떠오르는 동물들을 디지털 망치와 몽둥이와 장검으로 때리고 베어 쓰러뜨리고 있었다. 린은 소년의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아이들의 마음을, 소년들 특유의 호승심과 장난기와 잔인함으로 끈끈하게 다져진 한 덩어리의 우애를 읽었고, 그것을 사무치도록 부러워하는 소년의 마음을 읽었다.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정결한 마음과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교육자나 멘토가 아니라 친구였다.
다음 장면에서 소년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년 앞에 앉은 중후한 얼굴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경찰이나 범죄수사연구소 쪽에 들어가 일한다면 의외로 쉽게 말문이 트일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사람과 만나는 일이 필요하기도 하고,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어쨌거나 흔치 않은 능력이니까요.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랬다. 더럽고 추한 것들을 빨아들이며 사느니 당분간 벙어리로 사는 게 낫겠구먼. 돈이 얼마나 들든 고쳐놓고 말겠어. 할머니의 마음은 이랬다. 내 아들은 잘못이 없어. 어미 같지 않은 그 계집이 모든 걸 망쳐놓은 거야. 그들이 완강하게 고개를 젓자 그들 앞에 종이 한장이 내밀어졌다. 한 단계 높은 전문 치료기관으로 소년을 옮기는 데 필요한 동의서였다. 그곳에 이미 가본 린은 소년의 팔을 움직여 그 종이를 빼앗으려 했으나 온몸이 마비된 듯 말을 듣지 않았다. 문득 창에 비친 얼굴을 보니 그것은 소년이 아니라 지친 얼굴의 진우였다.
그래서 린은 잠들기 전에 하려던 말을 소리치려 했다. 난 봤어요. 아주 큰 일이 일어날 거예요…… 그러나 그전에 린은 그의 몸에서 거칠게 뜯겨나와 의식이 지배하는 높은 영역으로, 더 높은 영역으로 밀려올라갔다. 거기,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몇시간 전의 기억이 기다렸다는 듯 린을 집어삼켰다. 린은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물방울보다 더 작은 조각들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외우주(外宇宙) 진출이라는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는 현실이 되면서 그때까지 미처 싹트지 못하고 땅에 묻혀 있던 오래되고 진부한 비극을 남김없이 발아시켜 무서운 속도로 생장하게 만들었다. 길과 골목, 거리와 도시의 차원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풍경이 다른 창조주의 작업대에 올라간 것처럼 한꺼번에 변형되기 시작했다. 빛의 속도라는, 옛 인류가 절대적이라 여기던 한계치가 무너지자 태양계는 순식간에 좁은 손바닥이 되어버렸다. 인간이 새롭게 손에 넣은 속도로는 명왕성도 너무 가까웠다. 몇번의 실험 후 뉴스를 통해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고 토론이 이어졌다. 지구에서 목표 행성까지의 거리에 비해 추진기가 낼 수 있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이 출발점과 도착점, 그리고 그 사이 수많은 지점에 동시에 존재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토론이었다. 그런 속도를 더 멀리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낭비라고들 했다. 결국 외우주가 열렸고 인류의 다음 보금자리가 될 줄 알았던 달과 화성은 전진기지가 되었으며 인간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속도와 시간대를 살아가기 시작했다. 속도를 가진 인간은 영원을 향해 갔다. 진우는 그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누군들 그런 미친 꿈이 그토록 빨리 지구에 내려앉을 거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그가 떠나올 때 동네에는 몇푼의 동전을 모으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폐지를 주우며 돌아다니다 굶어죽는 노인이 지천이었고, 사람들이 투쟁할 때 입는 조끼는 여전히 그 모양으로 촌스러워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었다.
도시의 절반이 몇주 만에 밀려나가고 그 자리에 산만 한 크기의 기지 건설이 시작되는 것을 동영상으로 보던 날은 마침 진우가 일년간 상담을 진행해오던 한 해고노동자 가족이 함께 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기도 했다. 왜? 초등학생이 된 그 집 아들이 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쓴 글을 함께 읽으며 세 식구 모두 오랜만에 푸근한 웃음을 지었던 게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다음 주 희망찾기 모꼬지에 꼭 참가하겠다고 했고, 회비에 얹어 수고한다는 의미로 귤 한봉지까지 진우의 손에 들려준 그들이었는데.
진우는 장례식에 가려고 옷을 챙기다 그 화면을 보았고, 자신에게 물었다. 무엇을 생각할 수 있지? 생각이란 게 뭐지? 준다는 건? 뭘 주지? 줘서 뭘 하게? 아니, 내가 아니라 저게 나한테 줄 수 있는 건 뭐지?
그는 닫힌 사무실 문과 흩어진 동료들의 연락처를 보며 묻다가 걷다가 묻다가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건 우주에서 먹는다는 튜브에 담긴 젤리 형태의 음식이었다. 진우는 그런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기이한 식욕이 위장을 조였고 그는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결국, 그도 영원으로 향하는 속도에 섞여들었다.
일단 적응이 되자 네이븐에서의 생활은 순조로웠다. 하루를 꼬박 굶으며 쉬지 않고 일해도 아직 돕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강박 대신 진우는 자신의 클리닉에 오는 이들을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만큼만 돕는다는 새로운 원칙을 마음에 들이고 일했다. 가벼운 우주멀미 정도의 공황을 앓는 비행사부터 개척행성에서 기계와의 협업에 적응하지 못해 찾아오는 이주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했고 간혹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끝에 지구를 떠올리는 날도 있었다. 시시각각 사람을 짓누르던 그 대기를, 어떤 사람들의 피를 투명해질 때까지 정화해 만든 물을, 무엇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끝간 데 없는 그 무력감을. 그러나 그가 알던 지구는 어차피 이제 없었다. 어쩌면…… 좋은 곳이 돼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오직 현재만을 사는 법을 배우려 노력했다.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으로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달이 세개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잠도 따라 늘어 가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표나지 않을 정도로 졸기도 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우리 곁의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을 뿐이지. 오래전 그의 동료 한명이 스스로를 위로하듯 던진 말이 졸음 속으로 끼어들었다. 죄책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다른 것을 주어야 해.
시간이 흐르고 우주복지사라는 낯선 직함을 단 사람들이 찾아와 새 일자리를 제안했을 때 진우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음식, 새로운 편의시설, 그리고 자신이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빛깔들을 떠올렸다. 마치 지구의 봉급생활자가 모르는 도시 낯선 호텔의 깨끗한 린넨 베개와 시트가 주는 완벽한 익명성을 동경하는 것처럼.
엘레스는 지구인에 의해 가장 먼저 개척된 행성 중 하나였고 그런 행성답게 개발의 가시적인 부분에서는 광적인 관심을, 이주민의 복지나 인권처럼 지엽적이고 이차적인 부분에서는 무지와 원칙 없는 졸속행정에서 비롯된 갖가지 시행착오를 껴안은 채 자전과 공전을 계속해왔다. 기계들이 초기 테라포밍을 끝내자 가족과 지인을 떠나 외따로 이주해온 노동자들이 도착했고 작업이 장기화됨에 따라 그들을 위해 세분화된 편의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 린의 아버지는 그 노동자 중 한명이었고, 어머니는 지구에서 갖가지 채무증서와 신체포기각서를 피해다니는 생활을 하다 이주선에 오른 사람으로 엘레스의 편의시설 중 하나인 클럽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클럽에 들렀을 때는 마침 엘레스에서의 작업계약이 끝난 시점이었고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다른 행성으로 향했으며 당시 우주를 떠돌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대개 그렇듯 행방이 묘연해졌다. 뒤늦게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된 린의 어머니는 직장에서 해고된 뒤 고민과 수소문 끝에 엘레스의 연구기관 중 하나에 찾아가 꼭 일년만 아이를 위탁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분만을 했다. 그녀는 아이에게 미래를 되찾아주기 위해 다른 일을 찾는 대신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과 의무가 사라지고 없을 지구로 돌아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문제의 성장기(成長器)라는 기계는 세대 우주선에 장착될 계획으로 개발된 후 시험가동을 기다리며 다른 부속장치와 함께 엘레스의 기지에 보관 중이었다. 그것은 수정란에 영양을 공급해 태아로 키워낸 후 인공분만까지를 맡는 기존의 인공자궁 기능에 더해 인간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뇌에 직접 공급하는 방식으로 일정한 나이까지 아이를 성장시키는 기능까지 갖춘 형태였고 린은 그 신기술의 공식적인, 그러나 비밀에 부쳐진 첫 수혜자가 되었다.
그 안에선지 밖에선지 무언가가 잘못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모든 게 잘못된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사람들을 돕는 일을 쭉 하셨던 걸로 압니다. 그 소녀가 조금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환락가라는 단어에 잠깐 멈칫했고 소녀에게 동양인 피가 섞였다는 이야기에는 조금 끌리기도 했지만 그 장소와 그녀라는 대상은 그 자신이 선택한 사항이 아니었으므로 진우는 그저 하달된 지시에 반응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성체가 아니야.
아밋은 다짐하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둠 속이라 방 안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그러자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오르며 시간이 되감기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흩어졌다. 분필 자국이 지워졌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토마토수프처럼 퍼진 피가 누운 아버지의 머리를 향해 스르르 모여들었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아버지가 훌쩍 날아가 5미터쯤 떨어진 곳에 사뿐히 착지했다. 노란색 씨트로엥 한대가 굉음을 내며 뒤로 날아갔다. 아버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치며 차들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밀려가고 또 밀려가다가 집으로 빨려들어갔다. 문이 쾅 닫혔다. 아버지의 턱에 매달려 있던 침줄기가 입으로 스며들었다. 빽빽 울어대던 둘째가 입을 다물었다. 바닥에 놓인 과자가 펄쩍 뛰어올라 아이의 손으로 파고들었다. 깨진 접시가 도로 붙더니 아내의 손으로 날아갔다. 아내가 접시를 찬장에 던져넣었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오르더니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버지가 바지를 주워입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밤이 오고 갔다. 알츠하이머가 아버지의 정신에서 떨어져 나갔다. 첫째가 아밋의 다리를 놓고 방으로 빨려들어가며 웃었다. 아내가 아침식사를 프라이팬에 부으며 웃었다. 불이 꺼졌다.
그때 아밋은 방 안에서 잠든 아내와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듯 중얼거렸었다. 모든 게 잘될 거야. 아무 문제도 없어. 하지만 그 말을 왜 낮의 밝은 평온 속에서가 아니라, 누구도 들어서는 안되는 불경스러운 말처럼 어둠 속에서 혼자 되뇌어야 했을까.
아밋은 불을 켰다. 길잡이 소녀가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몇주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식사 때나 복도에서 몇번인가 몸을 부딪혔을 때조차도 그는 그녀가 말을, 그러니까 죄송합니다,라거나 실례, 같은 기본적인 말조차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성장기 속에서 자라나 환락가에서 생활했다고 했던가. 아밋은 물리적으로는 특이해 보이나 화학적 성분으로 보면 자신의 고국에서 어떤 소녀들이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구한 삶을 살아왔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침내 기회의 끈을 붙잡는 데 성공한 소녀의 얼굴을 미묘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끈의 끝에 있는 것이 꼭 원하던 모양새는 아니라 한들. 어쨌거나 누구도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문명의 흔적은 없습니다. 왜 굳이 이족보행을 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예요.”
로봇파리들이 찍어온 영상은 어둡고 단조로우며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화면의 조도를 높이고 섬유질과 포자 알갱이를 지워내야 했다. 각각의 화면은 방이었고, 그 안에는 그들이 붉은이(Reddish)라고 부르는 생명체가 앉거나 서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체구의 크기나 실루엣만 본다면 아밋이 어린 시절 마을에서 사람만큼이나 숱하게 보고 자란 원숭이와 비슷했으나, 눈도 코도 귀도 없이 단지 주름처럼 생긴 입만이 (뚫렸다기보다는) 오므려 붙은 얼굴과 털 없이 나무껍질마냥 거칠거칠한 피부로 덮인 붉은 몸이 클로즈업될 때면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기가 어려웠다. 아버지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속 신에게 반항하던 추한 악마들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버지를. 편의상 파리라고 불릴 뿐 소금 알갱이보다도 작은 기계 곤충들이 둥지로 날아들어 흩어진 다음 촬영을 시작하는 것을 붉은이들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껏해야 몇몇이 등이나 머리에 달라붙은 놈들을 철썩, 쳐서 날려버렸을 뿐이다. 화면 속에서 몇은 근처의 습지에서 주워온 작은 버섯을 먹었고 몇은 그것을 쌓아올렸다. 또 몇몇은 한데 모여 그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천장이 충분히 높았고 공간도 여유로운 편이었으나 도구나 조형물이라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사실은 그들이 작업을 시작한 뒤로 이족보행을 그만두고 네발로 기는 개체가 늘었다는 점이었다. 밖으로 나오는 개체의 수도 급격히 줄었고 대부분이 둥지 안에 머물면서 최소한의 생명활동만 하고 있었다.
“계단 모양으로 자라나는 석류버섯 위에서 살았다면 영양을 공급받기가 더 쉬웠겠지만 이들은 버섯을 타고 오르지 않아요. 땅에 붙어 자라는 조그만 버섯을 따거나 석류버섯에서 떨어져나온 팡이실과 갓의 일부를 주워 섭취할 뿐이죠.”
마치 인간들이 와서 거대한 붉은 성곽처럼 자라난 그 버섯을 다 베어낼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외계생명체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들을 양 치듯 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해야 하는 길잡이 소녀의 얼굴을 보며 아밋은 자신이 그녀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최초로 말을 배울 때부터 곁에 있어주었고 밤마다 라마야나에 나오는 모험담을 지친 기색 없이 들려주었으며 그 모든 친근한 눈빛과 몸짓과 웃음과 체취로 그를 지켜주었던 아버지는 도시생활 반년 만에 아밋이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상처받은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아밋의 아내를 밀쳐내 다치게 하거나 집 바로 앞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황망한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가 싶더니 이내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문제는 알츠하이머와 함께 시작된 게 아니었다. 이전부터, 고향의 좁고 불결한 두칸짜리 방에 녹아들어 있던 아버지를 끄집어내 신식 화장실과 반짝이는 주방이 딸린 도시의 아파트로 옮기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었을까? 그는 아버지처럼 시골 마을에서 염소 잔등이나 쓰다듬고 채소나 내다팔며 생활의 곤궁을 잊기 위해 설탕 범벅인 과자를 이가 다 삭도록 씹어대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우주가 열리면서 획기적으로 분야가 넓어지기 시작한 생물학 연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아이들을 도시의 학교에 보내야 했으며 결혼할 때 한 아내와의 약속도 지켜야 했다. 그는 상심한 아버지를 정성껏 돌봤다. 그 마음을 읽고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부서져내리자 그는 물론 파편들을 도로 붙이려 허튼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작은 가루로 변하더니 그의 눈물에 달라붙어 볼썽사납게 뭉쳤고 목구멍을 막아 숨쉬기 어렵게 했다. 자신의 생전에 아내가 다시는 아이들을 볼 수 없게 하리라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그는 짐을 꾸려 우주로 향했다. 마치 자신은 아버지와 달리 발밑에 깔린 흙의 성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별들에게 항변하기라도 하듯.
자신이 그토록 차갑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그러나 지구를 잊고 싶어 선택한 이 까마득히 멀고 낯선 행성의 축축한 흙 위에서 그는 어째선지 이번에도 무언가를 원래의 장소에서 파내 옮기는 일에 힘을 보태게 되었고, 흙처럼 붉은 몸에 주름 같은 입을 지닌 괴물들의 느른한 움직임은 하나하나가 모두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을 떠오르게 했다.
아밋은 불을 껐다. 스크린에 조금 전에 보았던 것들과 비슷한 어두운 화면이 펼쳐졌다. 방 한가운데에 다른 붉은이보다 좀더 큰 체구를 한 개체의 머리가 보였고 그 주위를 작은 개체들이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성별이나 생식활동이 관찰된 바 없으니 편의상의 명칭이지만요.” 아밋은 설명했다. “둥지의 모든 개체가 여왕을 보호하고 먹이를 그녀의 방으로 실어 나르며 위협이 없을 때에도 수시로 그 방을 유지 보수하는 행동을 반복합니다. 이들이 만약 집단지능을 넘어서는 의사소통 수단, 즉 우리에게는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언어나 명령체계도 갖고 있다면 이 개체가 그 열쇠를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지구의 벌과 개미로부터 유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 허무맹랑한 가정은 아닐 겁니다.”
그는 둥지의 전체 구조도를 화면에 불러내 여왕이 머무르는 방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다시 불을 켰을 때 소녀는 졸음에 겨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밋은 하품을 했다. 이제 마지막 일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몫이었다. 설령 지성체라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며칠 뒤면 붉은이들은 시야 밖으로 밀려나고 둥지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지구인의 시설이 들어설 것이며 채굴한 레일룸을 에너지원으로 바꾸는 작업이 계속될 것이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시간을 되감는 일은 어둠이 선사하는 환상 속에서나 가능하며 우리는 어떤 곳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술 취한 운전자가 모는 씨트로엥을 중앙선 너머로 날려보내 아버지의 몸을 허공에 솟구치게 한 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도 그 신의 뜻일 것이다. 아밋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익숙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방을 나설 때 소녀의 곁에 앉은 상담사가 그녀의 낡은 모자를 고쳐 씌워주는 광경을 보며 이상한 질투가 자신을 사로잡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예요. 좌표 243, 82, 6, 96지점. 원래의 둥지에서 서쪽으로 8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죠. 기후나 토지 조건도 비슷하고, 이들이 살던 습지와 정확히 같은 구성은 아니지만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버섯이 여러 종류 자라고 있어요.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영양분을 제공해줄 작은 곤충도 여러 종류 있죠. 새 둥지를 만들고 살아가기엔 무리가 없을 거라는 게 우리의 판단이에요.”
동기화 담당자가 설명했다. 진우는 손을 뻗어 린의 손을 잡으려다 그만두었다. 린은 침대에 누운 채 묵묵히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 정찰기를 타고 둘러보신 적이 있죠? 남자가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한번 더 가볼 수 있어요. 오늘 오후에라도. 린은 고개를 저었다. 몇개의 이미지와 정확한 좌표, 그리고 5분에서 10분 사이의 동기화 작업이면 충분했다. 린의 뇌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진우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매번 기계처럼 정확하게 외계 종족을 지시받은 곳으로 데려갔다. 생명체가 새 좌표에 도착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확인되면 진우와 린의 임무는 끝났고 그들은 다음 행성으로 가는 수송기에 태워졌다. 생명체가 새 보금자리를 만들고 제대로 적응하는지, 혼란에 빠지거나 이상행동을 보여 주위 생태계를 교란시키거나 최악의 경우 절멸하지 않는지 상상하는 것은 진우의 몫이었고, 일이 끝나면 린이 이틀이나 사흘쯤 탈진한 상태가 돼버리는 까닭에 그런 종류의 상상력이 오래 지속될 여지도 사실 많지는 않았다.
“이제 이 장소를 당신의 뇌로 옮길 거예요.”
좋은 꿈을 꾸길, 하는 표정으로 남자가 말했고 그를 보조하는 직원이 물 한잔과 알약 몇개를 가져왔다. 몸을 일으켜 그것을 삼킨 린의 이마에 여러개의 전극이 부착되는 것을 보며 진우는 8킬로미터라는 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다지 날카로워 보이지 않는 발톱과 멀리 이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가느다란 사지를 지닌 붉은 생명체들이 물과 음식의 공급 없이 홀린 듯 기고 달리며 가야 하는 낯선 8킬로미터 대신, 뜬눈으로 꿈을 꾸며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선, 들리지 않는 피리 소리로 그들과 이어져 있어야 하는 린의 8킬로미터를 생각하려 애썼다.
기계가 전자음을 뱉어내 동기화 작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눈을 뜬 린이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다. 필요한 게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따뜻한 우유를 달라고 했다. 귀한 음식이라도 되듯 우유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그녀의 입술과 부스스한 머리를 보며 진우는 그러나 불편한 질문이 다시 자신의 뱃속을 훑고 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정말로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일, 거부할 수 없는 세계의 거대한 흐름에 불과할까? 이 소녀의 머리에 이런 것을 집어넣고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이? 한 생명을 곁에서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다른 생명체들의 정신을 조작하고 망가뜨리는 일이? 이 아이는 나를 만난 뒤로 쏟아지는 조명과 귀를 찢는 음악 속에서 술과 약에 취해 지내던 그날들보다 조금은 나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진우는 알 길이 없었다. 린은 말이 없는 소녀였다. 어느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쥐를 닮은 엘레스의 포유동물 한 무리가 도로를 가로질러가는 것을 보다가 그들을 죽여버린 일을 담담히 고백하던 그날 이후로 그녀는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고 진우는 섣불리 질문을 꺼내들 수가 없었다. 그날의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였다.
계속 웃음이 나왔어요. 그날 밤에는요.
왜?
규칙을 어기면서 내 몸을 더듬고 추가비용도 내지 않은 손님 때문에요. 내가 계속 웃었더니 그 손님이 나한테 미쳤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나를 때려서 내 눈에 멍이 들었어요. 난 그 손님 얼굴에 침을 뱉었죠. 침이 초록색이었으면 보기 좋았을 텐데.
그랬구나.
길에 아무도 없었어요. 나만 웃긴 꼬락서니였고, 나만 웃고 있었죠. 그래서 다른 뭔가도 웃긴 모양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 생각을 하면서 우연히 그 동물들을 봤을 때 그 일이 일어났어요. 무리 맨 앞에 있던 동물이 쓰러져서 땅에 떨어졌어요. 파이 반죽처럼 납작하게요. 그러자 무리 전체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길 위에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어요. 마치 이런 일을 당하느니 다 같이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듯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요.
그래서 어떻게 했니?
다 죽어버리라고 생각했어요.
왜?
그냥요. 시끄럽잖아요. 그리고 내가 그대로 둬도 그 꼴로는 어차피 차에 치어 죽을 거잖아요.
그랬구나.
그랬더니 정말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기분이 어땠니?
기분?
응.
내가 기대한 것만큼 웃기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더 웃기게 만들고 싶었죠. 그 동물들의 뼈한테 등을 뚫고 나오라고 명령했어요. 그랬더니 그대로 됐어요.
놀라거나 미안하지는 않았니?
왜요?
죽었으니까.
그러면 미안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 알겠구나.
아저씨.
린이 눈앞에서 그를 불러 과거에서 끄집어냈다.
왜?
오늘, 이제부터는 자유시간이죠?
응.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니?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린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창문을 닫고 책상에 놓여 있던 티슈를 한장 뽑아 코를 풀었다. 온화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붉은 포자 하나가 아쉽다는 듯 그가 닫아버린 창문 유리를 타고 미끄러져내렸다. 데인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포자 몇개를 조심스럽게 붙잡아 휴지통에 넣었다. 마치 여자애들 같단 말이야. 그는 얼굴을 조금 붉힌 뒤 재채기를 했다.
행성 윈의 버섯이 날리는 포자는 그가 지구에서 본 민들레 홀씨를 닮았으나 더 길고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하며 한올 한올 빛깔이 다른 섬세한 솜털을 달고 있었다. 대기의 흐름에 따라 둥실 떠올랐다가 춤추듯 허공에서 턴을 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추락하듯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그것들 하나하나는 데인의 눈에 선홍빛 튜튜를 입은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사실 그 이미지는 그가 한동안 달고 살았던 행성개척 시뮬레이션 게임의 화면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버섯 소녀를 붙잡아 시장에 내다팔아 상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고, 땅에 심어 농장을 꾸려갈 수 있었으며, 인간의 생활을 가르쳐 결혼할 수 있었고, 원한다면 그 자신이 버섯으로 변해 그녀와 함께 균류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데인이 가장 자주 선택하는 것은 마지막 옵션이었다. 그가 구멍난 과목들을 재수강해 제대로 대학을 마치고 자신의 회사를 이어받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방문을 두들겨댈 때마다 그는 헬멧을 쓴 채 지금껏 일궈낸 행성의 모든 문명을 버리고 버섯으로 변해 갓을 흔들어대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수동적인 반항을 일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제법 이름난 컨설팅 회사의 대표로 그의 회사가 새로 론칭한 ‘이너프’ 프로그램은 우주시대에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동기를 부여하고 갱생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기치하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추종자를 양산하는 중이었다. 데인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사이비종교 교주의 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안아주며 당신은 충분해요, 그리고 더 충분해질 수 있어요!를 속삭이기 위해 세계를 떠돌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캠퍼스에서 만난 어떤 혜택 받은 집안의 자제들처럼 ‘다른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삶’이라는 구호를 외쳐대며 채식을 하고 인디언 텐트에서 뜨개질과 물물교환을 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 양극단의 삶은 똑같이 공허했고 우주라는 단어가 가져온 혼돈은 자신을 포함한 몇세대가 통제하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변하는 세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한동안 충격과 불안 속에서 헤맬 것이며 자신들이 느끼는 공허를 지구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집단 광기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분열증을 양심의 증거로 착각하며 살아갈 것이었다. 당분간은 삶 대신 삶의 부서진 조각 같은 어지러운 시간이 지구를 유성처럼 강타할 것이고 그나마 적응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지독한 숙취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악몽으로 느껴지는 나날이 이어질 것이었다. 데인이 원하는 것은 그 조각 중 하나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대신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그 일이 가능한 시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버섯이 많은 행성을 찾아냈다.
집을 나서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주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에게 그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영원히 반복되는 배드 엔딩과도 같았다. 오래전부터 알코올에 찌들어 살다가 지금은 재활원에 누워 이어폰으로 아버지의 강의를 듣고 있는 어머니는 조금 달랐다.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재활원에 들르지 않았다. 우주라는 거대한 선택지 앞에서 이제 인간은 모두 혼자였고 데인 주위의 모든 인간이 그 정도 무게를 지닌 선택은 감당하며 각자의 삶을 결정해가고 있었다.
그는 캠프 루비에서 시작한 말단 행정직 생활에 만족했다. 일은 많지 않았고 쉬는 시간에는 요정과 기사 들이 나오는 오래된 책을 놀림 받지 않고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윈의 하늘을 떠다니는 버섯 포자가 게임에서처럼 소녀로 변해 눈앞에 내려앉으며 미소짓는 대신 심한 비염과 가려움만 선사하기는 했어도 말이다.
데인은 단말기 앞에 앉아 주말 동안 캠프 곳곳을 촬영한 폐쇄회로 영상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화면에서 손을 멈췄다. 회식이 있던 금요일 밤 C구역의 출입구 근처에서 촬영된 그 영상에는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쓴 길잡이 소녀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아름답기는 했으나 데인이 환상을 품기에는 너무 비범한 소녀였다. 몇번 마주친 적은 있었고 말을 걸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차갑고 생기 없어 보이는 표정이 그를 위축시켰다. 그녀는 출입구 쪽으로 몇걸음 걸어가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그의 잘못된 선택에 실망해 무(無)로 돌아가버린 버섯 소녀들처럼.
옆에 있던 젊은 남자의 팔꿈치가 린의 옆구리를 찌르다시피 밀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과했다. 앞에 서 있던 아이 엄마가 뒤로 밀려나며 린의 발을 밟았다. 그녀가 사과할 때 그녀 볼의 홍조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조그만 침방울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만드는 미세한 움직임이, 그녀 아이의 천진한 눈빛이 린에게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환호와 박수와 함성 속에서 린은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찾아야 하는 대답은 거기 없었다. 린은 그들이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세계에는 클럽과 마찬가지로 규칙이 있었다. 타인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규칙.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린은 감시자가 보지 않을 때도 그 규칙을 지키며 사람들이 왜 필요 이상으로 다행스러워 하는지, 타인의 웃음이 어째서 자신에게도 기쁨인지, 남이 행복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왜 종종 그토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린, 행복해? 진우는 술에 취해 자신이 말을 한다는 것도 모른 채 긴 이야기를 중얼거리다가 끝에 그렇게 묻곤 했다. 고작 나 같은 사람이. 네 곁에. 미안해. 그는 불안해 보였고 린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퍼레이드는 삼바댄서 복장을 하고 배꼽에 버섯 모양의 피어싱을 해넣은 여자들과 캠프 루비 유니폼을 만화적으로 바꿔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남자들이 쌍을 이뤄 춤을 추면서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린은 인파 속을 빠져나와 놀이기구 쪽으로 걸었다. 제각기 다른 중력을 적용한 벽면 여러개로 사람을 허공에 솟구쳤다 떨어지게 하는 점프대나 장비 없이 산소발생 젤만을 몸에 바르고 호수 밑바닥까지 잠수했다 돌아오는 체험장 앞의 줄은 몇시간 전보다 많이 줄어 있었으나 린은 그곳을 그냥 지나쳤다. 날거나 헤엄치는 일은 수없이 해보았고 그녀는 그때마다 고도의 몰입과 긴장 상태가 주는 타는 듯한 피로감 사이로 낯선 감정이 바늘처럼 자신을 따끔따끔 찔러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이 단지 기계로부터 받은 좌표를 발사하는 기계의 일부라는 쾌감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때로는 다른 누구도, 진우조차도 그 특별한 작업을 대신해줄 수도, 그 경험의 본질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자각이었다. 린은 종종 외계종족들을 다른 곳으로 몰고 가는 대신 그들의 뇌를 태우거나 망가뜨려버리고 싶은 원초적 충동이 작업 중에 이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힘겹게 제어했다. 규칙이었으니까. 사람들은 그 생명체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만족하는 것 같았으나 린은 그들의 마음과 접촉하는 순간 그들이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우유가 질렸니? 이젠 커피구나.
그녀를 따라 회전하는 커피잔 모양의 놀이기구에 오르며 진우가 말했다. 린은 애매하게 웃는 입모양을 했다. 안전수칙을 알려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벨이 울리자 그들을 태운 잔이 다른 십여개의 커피잔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부로 보이는 노인 한쌍을 빼면 탑승객은 그들뿐이었다. 린은 진우와 함께 돌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우도 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다정했고 정겨운 주름살이 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빈 커피잔 속으로 스며들며 함께 돌았다. 누군가 내게 사랑할 사람을 찾아주지 않겠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며 난 조금씩 죽어가고 있어요. 린은 커피잔 손잡이를 붙잡았다. 8킬로미터.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그만큼만 가면 된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워졌고, 그래서
다시 내려갔다:
치료는 소년이 열일곱살 때 완료되었다. 언어를 구사하는 보통의 소년이 되면서 그의 능력은 멎었다. 생생하게 펄떡이며 헤엄쳐 들어오던 날것의 이미지와 소리 대신 언어라는 건조한 번역기가 들어선 소년의 내면이 린에게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특별하지 않았고 둔해진 그의 마음속에서는 누군가와 이어져 있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욕망, 그럼에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슬픔, 그리고 분노에 찬 어떤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너는 나를 전혀 이해 못해. 이해할 생각, 있기는 한 거야?
소년이 다시 특별해진 것은 스물세살 때 어느 극장의 매표소 앞에서 소녀를 만나면서였다. 그 소녀는 목에 쇠사슬을 감고 누워 있는 노인들이 찍힌 사진을 붙여놓은 팻말에 매달리듯 서 있었다. 그 극장이 들어선 자리에 살다가 집과 가게가 철거되어 길 위로 밀려난 이들이었다. 팻말에 적힌 내용이 소년의 눈에 들어오기 전에 그녀의 마음이 소년의 안으로 와락,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미친, 웃기는 일이야 웃기는 일이라고 내가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자격이 없어 그래 이 건물 때문에 사람들이 집을 잃었지만 그들은 지금도 길에서 자고 길에서 밥을 먹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런다고 미친, 나는 그들이 아니고 그들이 될 수도 없고 그냥 가만히 있자니 자꾸만 그 할머니들 얼굴이 생각나서 여기까지 왔지만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런 나를 이런 당신을 사실 우린 모두 같잖아요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들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나가는 하루가 없잖아요 왜 우리는 이렇게 이상하게 살 수밖에 없지? 사실은 영화라는 걸 본 지도 정말 오래됐고 저쪽에서 경비원이 자꾸 쳐다보는데 HH 무비 나도 보고 싶은데 머리와 손가락으로 직접 느끼는 거라면 내게도 대사가 들릴 텐데 왜 썼나 왜 이렇게 썼나 다른 사람한테 써달라고 할 걸 피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니었어 미친, 피가 뭔지도 모르면서 쇠사슬을 몸에 아니 쇠사슬이란 걸 한번 만져본 적도 없으면서 미친, 전쟁이, 배가 고파 할머니가 맞았다고 점심을 먹고 나올 걸 내가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팔이 아프고 사람들이 쳐다볼 때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고 아래층에 동물용품 가게가 있던데 피피한테 줄 사료를 사야 되고
린은 그토록 혼란스러운 마음에 닿아본 적이 없었고 최초의 충격에서 회복된 소년이 바로 그 혼란 때문에 그녀에게 이끌리기 시작한 것을 알고 놀랐다. 팻말을 내려놓은 소녀가 매표소 줄 뒤에 가서 서자 소년은 그녀를 따라갔고 그녀가 자신의 복잡한 감정에 골몰해 무심코 매표소 직원에게 해보인 수화 손짓을 보고 그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부터 소년은 소녀를 따라다녔다. 소녀는 여러곳의 투쟁현장을 돌며 생활하고 있었고 지방에 가는 일이 잦았다. 소년에게는 어색하고 긴 모험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그 일이 다시 시작됐다는 놀라움과 절박한 심정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 다음에는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자신이 언어를 배운 것처럼 어쩌면 그녀도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그뒤에는 그녀를 투쟁현장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떼어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그녀를 계속 따라갔다. 소년에게는 소녀가 매달리는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아무 성과 없이 그녀를 더 슬프게만 만드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남들 때문에 우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마음은 그녀에게서 그로 일방통행처럼 전해질 뿐 그녀는 그를 듣지 못했다. 그녀에게 자신을 전하려면 소년은 글을 써야 했다. 문장을, 종이 위에. 이 경우에는 그것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자신이 읽은 과거의 다른 마음들이 가르쳐준 문장,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어를 그는 몇번이나 쓰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네가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그들은 몰라. 그러니 네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걸 그만둬. 그걸 아는 건 나야.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그럼에도 얼마나 많이 너를 너로 만드는지. 난 알아. 그런데, 사람은 다르게 살 수 있어. 좀 이상하지만 그럴 수 있어. 난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단 말이야. 이 바보야. 그는 그렇게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 문장들은 소년의 마음속에만 머물렀다.
왜
그는 그 문장들을 쓰는 대신 멀리서 소녀를 바라보며 뒤쫓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 수줍고 느리며 성과가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를 향해 갔다.
음악이 바뀌어 있었다. 커피잔들이 멎었다.
아저씨. 잔에서 내린 린이 입을 열었다.
응? 진우가 그녀를 보았다.
왜 그랬어요? 린이 물었다.
맙소사. 죽은 건가요?
그런 것 같아.
이, 이걸 어쩌죠?
어쩌긴, 파내서 캠프로 가져가야지.
여기 좀 보세요. 뭐가 자라, 자라났어. 이걸…… 뭐라고 하죠? 이런 거 보신 적 있어요?
없어. 그러니까 얼른 파내.
팀장이 짧게 말했고 그 일을 대신할 다른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라울은 평소처럼 옙, 실시! 하고 소리치며 앞으로 튀어나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마스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주춤주춤 장갑을 끼고 삽을 쥐었다. 젖은 흙에 삽을 찔러넣고 떠내자 반쯤 묻혀 있던 생명체의 상반신이 앞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더니 이내 고꾸라지며 그의 발 위로 쓰러졌다. 라울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지만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해변에 온통 돈이 깔려 있는데 그걸 그냥 주워오는 일도 못해? 또 그만두겠다고? 이 양반아, 불알 두쪽이 부끄럽지도 않아? 아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몹쓸 년. 돼지 같은 년. 그렇게 자신 있음 네년이 해봐.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면 처먹은 걸 그 자리에서 죄다 토해내고 말걸! 그는 이틀에 한번 꼴로 벽을 주먹으로 쳐대며 소리질렀고 밤에는 저 계집이 죽어버린다면 정말이지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잠들곤 했다. 그러자 그의 뜻대로 되었다. 아내는 어느날 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늦은 저녁을 차려주고 잔소리를 해대다가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기침은 구토로 변했고 토사물에 목이 막힌 아내는 그가 채 구급차를 부르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부검 결과 아내의 위장은 그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세균에 감염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그런 것을 다시 만지기는 싫었다. 라울은 욕지기를 참으며 그것을 간신히 끄집어내 흙무더기 위에 올려놓았다. 식은땀이 배어났다. 사방에서 신음과 한숨이 터져나왔다. 팀장이 성호를 긋는 게 보였다. 붉은이의 상반신은 체액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바짝 말라 비틀어지고 수많은 조그만 버섯들로 뒤덮여 있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아래쪽은 더 희한했는데, 달려 있어야 할 두 다리가 보이지 않았고 하반신 전체가 불그죽죽하고 둥근 덩어리로 감싸여 물컹거렸다. 덩어리 아래쪽에서 자라난 붉고 구불구불한 뿌리를 똑바로 펴자 사람의 팔만 한 길이가 되었다. 땅을 받친 채 굳어 있던 앞다리 여기저기에서 자라난 것도 다른 것일 수 없었다. 뿌리였다.
식물로 변하는 짐승도 있던가?
신부님, 말씀해주세요. 사람이 간혹 짐승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악마가 그런 일을 시키나요? 제가 그렇게 됐던 걸까요? 그래서 마음으로 아내를 살해한 걸까요?
신부는 그에게 기도와 충분한 잠, 따뜻한 음식을 권했다. 그러나 고해성사와 보속을 마친 뒤에도 라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들을 만지고 수습한 건 그였지 아내가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기 전 그들이 알려준 장소에 들러 꼼꼼히 살균샤워를 했고 그러고도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아 자비를 들여 일회용 작업복과 장화와 장갑을 사다 썼다. 라울의 마을에서 같이 작업하던 수십명의 사내들과 그 가족은 탈 없이 멀쩡했다. 오직 그만이 신의 저주를 한몸에 받은 것 같았다. 물론 기이하게 머리가 부풀어오른 채 해변에 죽어 늘어진 물고기와 바닷새의 사체를 처음 봤을 때 천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그것들을 눈에 띄지 않게 수거해오라는 제안을 들으며 뒤가 켕긴 건 사실이었다. 궂은일이긴 했으나 보수가 그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었어. 그건 공공연한 비밀이자 마을 전체의 사업이었다고! 그는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마음 맨 아래쪽에 자리한 선량하고 순박한 본성과는 별개로 라울은 다혈질에 중증 정도의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답게 충동에 사로잡혀 행동하다 일을 망치는 경향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욱하는 감정이 치밀 때마다 누르지 못하고 직장을 때려치웠고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또다른 직장을 찾아나서곤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구한 일은 관광객을 데리고 도시의 빈민가를 돌며 설명을 해주는 가이드였다. 집 위에 집 옆에 집 위에 또 집. 판잣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그런 형태의 산동네가 없는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국 사람의 가난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고, 마을이 아름답다는 말을 던지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이번에 라울의 신경을 긁은 건 그 셔터 소리였고 긁힌 신경의 끝에 딸려나온 건 이상하게 과열된 정의감이었으며 거기에 기름을 부어 폭발시킨 건 그 빈민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동네에서 보낸 자신의 유년에 대한 애증 섞인 기억이었다. 산동네 중간쯤의 언덕에 있는 고아원에서 찍지 말라는 당부에도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찍어대던 한 여자 관광객과 그는 결국 싸움을 시작했고 종내는 손찌검까지 하고 말았다. 티셔츠 사고 기부 좀 했으면 다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 여자 블로그에 전시되려고 그 애들이 거기서 한뎃잠을 자는 줄 알아? 또 한번 직장을 잃은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렇게 열변을 토해냈다.
그는 계속 그렇게 살았다. 고지서가 밀리고 더이상 도시의 집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울증이 쌓인 아내와 함께 처갓집으로 내려와 얹혀살기 시작했다. 여러번 순위가 밀려 언제 개발이 시작될지 알 수 없는, 마을 전체가 버려진 정어리 통조림을 연상시키는 바닷가 깡촌이었다.
그 일은 거기서 아침저녁으로 장인 장모에게 무능하다는 말을 들으며 지내다 겨우 잡은 기회이자 사내구실을 할 첫번째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가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그는 억울했다. 그 돈으로 인생을 뒤집는 데 성공하면 정말이지…… 아내에게도 잘해주려 했었다. 라울은 하루도 쉬지 않고 밀려드는 파도와 오염된 바다의 냄새, 그 속에 죽은 듯 살아 헤엄치는 모든 병든 것들, 앞으로도 평생 보고 살아야 할 아내의 무덤이 지겨웠다.
우주라는 단어가 들어간 구인광고를 보았을 때 그는 처음에 우주비행사를 연상했다. 그러니까 우주복을 입고 생명선에 매달려 까맣고 텅 빈 공간을 떠다니는, 아이들의 상상 속 그 단순한 이미지 말이다. 그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무균질 공간에서 그런 옷을 입고 일하고 싶었다. 광고에는 학력이나 국적 제한도 없었다. 특전으로 우주시민권 부여, 게다가 추후 해당 행성의 부동산 임대시 혜택이라. 그는 이번에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도시에서 온 그 사람들이 어떤 조직에 속해 무슨 일을 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것처럼 그는 자신이 우주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따져보기에는 상상력이 부족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망뿐이었다.
버섯으로 변한 것 같네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 팀장이 재채기를 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지.
이제 들어서 옮기게. 비처럼 내리기 시작한 포자들 속에서 라울이 대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려 했을 때 팀장이 그에게 명령했다.
그날 밤은 린과 함께한 뒤로 진우가 지나온 다른 어떤 밤과도 달랐다. 그 밤은 린의 이런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왜 나랑 하지 않았죠?
진우는 그 질문에 얻어맞았고 한참 뒤에야 린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왜 한번도 나랑 하지 않았어요? 내내 그러고 싶었으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우는 그녀가 포기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다, 치, 게 될까봐서?
그녀는 무언가를 확신하지 못한 듯 음절 하나하나를 떼어가며 물었다. 마치 진우의 얼굴에 띄엄띄엄 적힌 글자를 읽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다치면, 왜 안되는데요?
뭐?
아저씨는 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다치면 안되느냐고요. 왜 사라지면 안되죠?
무엇이?
그들.
붉은이들?
응.
사라져?
네. 그렇게 돼요. 내가 어떻게 해도요.
누가 너에게 그렇게 말한 거니?
아뇨.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니?
내 생각이 아니에요. 그들이…… 아저씨가 그러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응.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아니라니까요. 아저씨가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잖아요.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이건 옳지 않다고.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그런데 왜 내게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뿐이니까? 그런데 잘못이라고 말하면 내가 다칠까 봐? ……내가 엘레스로 돌아가게 될까봐서요?
……그래.
그러면 아저씨는 슬픈가요?
그래.
왜 슬퍼요?
진우는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애를 썼다. 이런 경우 그가 보통 취하는 방식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니. 네가. 너는, 다르잖아. 그런데…… 그는 그렇게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었고, 그녀는 대답했다. 긴 대답이었다. 그는 다시 얻어맞았고, 다시 물었으며, 대답을 들었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는 힘겹게 하나의 대답을 만들었다.
그날 밤이 다른 밤과 달랐던 건 그 특별한 질문과 대답들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 벗어나고 싶어한 질문들과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처음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원하던 일을 했다.
그는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하늘이 붉었다. 크고 작은 포자가 윈의 대기를 촘촘하게 채우고 있었다. 너무 많았으므로 모두가 보호복을 입어야 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선홍빛 솜털들이 밀려들었다. 오늘 일정, 꼭 해야 합니까? 거의 다 버섯으로 변하고 얼마 남지도 않았다던데 그냥 철거에 들어가도 되지 않나요?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여왕이 남았다잖아. 자네가 호텔로 모시고 룸서비스까지 해드릴 건가? 다른 누군가가 핀잔을 주자 모두가 두려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죽일 수 있습니까? 핀잔을 준 남자는 아침에 그렇게 물은 사람이었다.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형식적인 작업이고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린은 설명을 하려다 그만두었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린의 몸에 백팩처럼 생긴 작은 기계가 부착되었고 짧은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지시받은 대로 조작기의 버튼을 눌렀고 공중을 10미터쯤 날았다가 제자리에 내려앉았다.
형편없는 솜씨로 면도한 얼굴처럼 거칠게 난도질당한 석류버섯 잔해 사이에 둥지가 서 있었다. 그들의 둥지는 화면에서 본,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원기둥 모양의 작은 탑과는 달랐다. 더 크고 높고 붉었으며 구멍마다 피처럼 새빨간 버섯들이 자라 있었다. 군데군데 검붉은 얼룩 모양의 반점들이 생긴 탑 전체를 엉겨붙은 팡이실과 포자 무더기가 휘감고 있어 마치 부패가 반쯤 진행된 동물의 사체를 땅에서 꺼내놓은 것처럼 보였다.
백마리쯤 돼 보이는 붉은이가 둥지를 울타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린은 이동의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몸을 대지에 심어 고정한 채 천천히 식물로 변해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원래 몸은 반쯤 남아 있었다. 앞다리로 보이는 것이 아직 있었으나 머리는 넓고 납작하게 펼쳐지며 쳐들려 갓으로 변한 상태였고 몸 전체가 버섯투성이였다. 옅은 바람이 불자 입이었던 곳에 매달려 있던 포자들이 조각난 언어처럼 뜯겨 나와 허공으로 날렸다가 땅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럼 시작하죠. 남자가 말했다. 린은 헬멧 창을 내렸다. 산소가 유입되는 것을 확인한 뒤 버튼을 누르고 날아올랐다. 보호복과 헬멧 차림으로 린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린은 그 가운데 어딘가 있을 진우를 생각하며 나선 모양으로 둥지 주위를 선회하면서 올라갔다.
진우는 자신이 비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인가부터 투쟁현장에 나오지 않게 된 소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놓아버렸기 때문에. 그녀가 더이상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위해 일한다고 믿었지만 자신은 진심도 신념도 없이 그저 주입된 것을 고스란히 받아 어딘가에 되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잊기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종종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참고하는 것 같았다. 린은 진우의 마음속을 맴도는 그 대답들을 읽었다. 그러나 그 대답들을 이어붙여 그녀 자신의 대답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것들은 너무 무겁고 어려웠다.
둥지 맨 꼭대기, 여왕의 방 근처에서 린은 멈췄다. 자극을 송신합니다. 헬멧이 말했고 둔한 충격이 린의 머리를 휘감았다. 한차례 울렁거리는 느낌이 지나갔고 다음 순간 린은 떠밀리듯 그들과 이어졌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고,
왜
그들이 물었다. 이제 그들은 둥지에만 있지 않았다. 하늘에, 흙 속에, 물 위에, 물속에,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예전만큼 많지는 않았다. 사라지기, 시작했어? 린은 꿈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싸웠다.
모르겠어.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모르겠어. 당신들이 왜 사라지면 안되는 건지. 사람들이 왜 당신들이 사라지길 바라는지. 왜 그 일을 그만두지 않는지. 당신들이 왜 그걸 추하다고 여기는지. 그리고 그러면서 왜 결국 사라지려고 하는 건지. 당신들이 사라지는 게 왜 미안해해야 하는 일인지. 이걸 그만두면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꽤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다른 질문도 없었다. 린은 두려웠다. 그러나 허공을 돌며 정신을 집중했다. 움직인다. 린은 느꼈다. 그녀가, 그가, 그들이 내려가고 있었다.
당신들이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왜 나인지. 나는 몰라. 알려고 해봤지만 모르겠어. 알겠어? 모르겠다고. 난 내가 모른다는 것만 알아.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야. 내 안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지 않아. 내 머릿속에 있는 건 한 사람뿐이야. 이유는 모르지만 난 그 사람에게밖에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
여왕이 나왔습니다. 헬멧이 속삭였다. 린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둥지 입구에 작은 점 크기의 그녀가, 그가, 그들의 몸이 보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둥지를 둘러싸고 지키는 종족 구성원 사이를 누비며 천천히 네발로 걸어다녔다. 여왕이라 불리는 개체가 보였고 수십마리의 다른 개체가 아이처럼 그녀에게 붙어 움직였다.
그리고 견딜 수가 없어. 내가 그 여자애를 닮았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보고 있는 게 나인지 그 여자애인지 알 수 없어서 견딜 수가 없어. 나였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나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오랫동안 누군가와 같이 있어본 적이 없었고 난 그걸 그만두고 싶지 않아.
움직입니다!
여왕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다른 개체들도 한 방향으로 뭉치며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간다. 달린다. 그들은 사람들과 버섯들 사이를 헤치고 습지의 끝 쪽으로 가고 있었다. 반대 방향이었다.
왜?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로 가서 죽이려고? 죽으려고? 린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들을 따라 날았다. 마음으로 그들을 보며 외쳤다. 하지 마. 알겠어? 이 사람을 내게서 빼앗아가지 마. 싫단 말이야. 당신들도 알잖아. 당신들도 오랫동안 같이 있었잖아. 그러지 마.
린, 서쪽입니다. 동쪽이 아니에요.
헬멧이 당황한 목소리로 뱉어냈다. 자극을 재전송하겠습니다.
충격이 다시 그녀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즈즈, 소리와 함께 바늘 무더기 같은 통증이 관자놀이를 찔러댔다. 아팠다. 아프구나, 린은 생각했다. 아픈 건 이런 거구나. 이런 느낌. 이런 소리. 이런 냄새. 이런 빛. 꿈이 아니야. 하늘이 울컥거렸다. 그녀는 그들과 이어진 단단한 끈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를 악물고 그들을 향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쏘았다.
사라지게 하지 마. 이 바보들아. 사라지지…… 마. 가! 가서 살아. 어디든.
그 순간 거센 바람이 린의 몸을 들이받았다. 수많은 포자들이 쏟아져 나와 아우성치며 남아 있던 윈의 하늘과 땅 사이 모든 곳을 덮었다.
그렇게 긴 8킬로미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