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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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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2005년 문학수첩작가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이 있음. oblako@hanmail.net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1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정말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을 생각합니까? 목이 참 길고, 키가 껑충하니 크고, 무중력 공간인 듯 천천히 움직이는 그 동물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각합니까? 가령 샤프펜슬이라든가 부처님 같은 것을? 또는 그 동물이 한가로이 거니는 아프리카의 초원이나 동물원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곳을 생각합니까? 대학 캠퍼스라든가 박물관 같은?

그럴 리가.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기린에 대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죠. 이제부터 기린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라고요.

나는 대체로 정확한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귀는 정확하게 내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기린이 아닙니까? 그 기린은 산책 중일지도 모르고, 배가 고파 아카시아의 잎사귀를 베어 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암컷의 등에 올라타고 교미 중일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긴 목을 칼처럼 휘두르며 다른 기린과 싸우고 있는지도.

물론 나는 그 기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건 순수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당신의 기린이니까요.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명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우스운가요?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나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내 말이 거짓말이라 해도, 그건 진심을 다한 거짓말입니다. 전력을 다한 거짓말입니다. 지금 아름다운 기린 한마리가 당신의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 기린은 하늘하늘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증거입니다. 그 기린은 지금 어디까지 갔습니까? 멀리 사라지고 있습니까? 긴 목을 돌려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거기 황혼이 지고 있나요?

그래요. 그것이 나의 운명입니다.

 

 

2

 

나는 언제부터 그런 이야기에 탐닉한 것일까요?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에 말입니다. 초등학교 때 파출소에 가서 “저는 담임선생님이 내 짝을 만지고 더듬는 걸 보지 못했어요”라고 말했을 때부터였을까요? 젊은 경찰관 아저씨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날 오후부터……?

그래요. 그건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봄날, 방과 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란도셀을 멘 채 학교 앞 파출소의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얼굴이 희멀겋고 의협심이 넘쳐 보이는 경찰관 아저씨가 앉아 있더군요.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린 의경이었고, 인생의 역경이라는 것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게 틀림없는, 그런 청년이었습니다만.

그는 철제책상에 앉아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학교와 반과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학교와 반과 담임선생님의 이름과…… 모든 것을요. 내 짝은 예쁘고 착한데다가 장학사님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경찰관 아저씨가 묻는데 감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 말입니다.

아저씨가 내 말을 적어가는 동안, 나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하얀 구름이 떠 있었어요. 다시 보면 전혀 그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아무것도 닮지 않은, 그저 구름일 뿐인, 단순한 구름이었습니다. 이상하게 그 흰빛이 기억에 오래 남더군요.

내가 파출소를 찾아간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담임선생님이 교실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장과 싸우고 그만뒀다, 무슨 교내 스캔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자살했다, 그런 소문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이들은 사라진 담임을 여전히 ‘반()대머리’라고 불렀고(“반대머리 어디 갔냐?”는 식으로), 나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생활기록부에는 언제나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됨’이라고 쓰여 있었지요. 품행이 방정하다는 건 어딘지 안 좋은 표현 같았습니다. 방정맞은 아이라는 뜻인가?—생각하곤 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말하더군요. 엄마가 일찍 죽고 아버지와 둘이서 살아온 탓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뒷자리 까까머리도, 동네 방앗간 할머니도, 심지어 오락실 아줌마가 기르는 개새끼까지 말입니다. 그래요. 그건 확실히 방정맞은 말입니다. 품행도 언행도 방정맞은 자들의 수군거림입니다. 왜 남의 집 가정사를 시시콜콜 들먹인단 말입니까?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만,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맹목적인 증오심을 가진 아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달랐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라니, 적의라니, 애들이 아직 어려서 그렇구나. 아버지가 없다면 자기들도 없었을 텐데……

 

 

3

 

그 시절, 아버지는 귀가한 뒤 언제나 구석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녁 먹을 때 외에는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고독한 남자였어요. 인생에 대해 별다른 욕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말이 없고, 여자도 만나지 않고, 고기도 먹을 줄 모르고, 술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식물성 인간이랄까요. 욕망이라든가 의욕 같은 것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나에게조차 별 관심이 없었을 정도니까요. 유일한 낙은 담배였습니다. 담배만은 미친 사람처럼 피워댔지요. 세상의 모든 식물들을 다 태워 없앨 것처럼 말이죠. 승려를 그만둔 뒤부터 그랬다고 했습니다.

승려요? 아, 스님, 스님 말입니다. 머리를 빡빡 밀고 회색 두루마기를 걸친, 바로 그 스님이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명문대학을 중퇴하고 한때 출가를 했던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로서는 이해가 잘 안됩니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게 내 아버지라니,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찰의 전도유망한 승려였다고 하더군요. 여자를 만나 나를 낳고 환속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세속을 떠났다가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자 때문에 말이죠. 아버지는 해탈보다 사랑을 택한 것일까요? 온 우주를 깨닫고 자신이라는 지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겨우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이 중요했던 것일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우주니 해탈이니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사실 사랑이란 건 애써서 가보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까? 무지개나 구름 같은 것 말입니다. 너무나 선명하면서도, 선명하기 때문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 심장을 쥐어뜯게 만들다가도,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보면 그게 뭔지 도무지 아리송해지는……

그 여자는, 제 어머니 말입니다만, 금방 사라졌습니다. 원래 몸이 약했고, 폐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절에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봄날처럼 밝고 환한 여자였다고 하더군요. 우울해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해주기까지 했다니까요. 대체 누가 아픈 사람인지 모를 정도였다고 아버지는 회고했습니다. 그런 건 천성이자 일종의 능력이지. 주위의 공기조차 갓 핀 산수유처럼 신선해졌으니까……라고도 했습니다. 그토록 화사한 사람이 폐에 구멍이 뚫려 있다니, 호흡곤란을 겪어야 하다니,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힘들어 해야 하다니……

그 여자가 나를 낳은 뒤 거짓말처럼 문득 사라지더라는 것은 아버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 여자는, 네 어머니 말이다만,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으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것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건, 어린 나 역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조용히 저잣거리로 돌아왔습니다. 늙은 어미의 집에, 내 할머니 말입니다만, 나를 맡겨둔 채 일을 나갔습니다. 공사장을 쫓아다니기도 했고, 도배 시다바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들이었죠. 아버지는 언젠가 말했습니다. 이 일들이 좋다. 이 일들은 단지 그것 자체일 뿐이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진실도 필요 없다.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그것이 좋다……

아버지는 점점 외로운 사내가 되어갔습니다. 친구도 없었고 취미도 없었습니다. 단지 담배만을 피울 뿐이라는 듯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듯이, 그렇게 담배를 피워댈 뿐이었습니다. 나를 구석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도 방안에 가득 배어 있는 그 냄새 때문이었죠.

하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의아했습니다. 담배연기로 가득한 방에서 밤마다 틱틱, 소리가 났으니까요. 뭔가 기계를 두드리는 소리였어요.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무선신호를 보내는 소리일까? 모스부호를 밤하늘로 날려보내는 걸까? 외계인에게 보내는 신호? 그게 아니라면…… 어린 나는 온갖 상상을 다 했습니다. 「수사반장」 같은 드라마의 영향인지도 모르지만, 내 상상은 점점 한쪽으로 흘러갔습니다. 뇌가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비밀이란 건 이상한 방식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더군요.

그리고 그날이 왔습니다.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이 드는 날이 있지 않습니까? 멀쩡하던 문이 삐걱거리고, 수도꼭지에서 녹물이 나오고, 유리컵에 실금이 가 있는 그런 날 말입니다. 그런 날에는 반드시 라디오가 고장 나고, 칼에 손을 베고, 고양이가 유독 눈에 자주 뜨이지요.

평소와 달리 아버지는 귀가한 뒤에도 구석방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습니다.

왜 그랬느냐?

아버지는 바닥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물끄러미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지요.

왜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했느냐?

차분한 목소리였습니다. 궁금해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그게 담임선생님 얘기라는 것을 말이죠. 나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보지 못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을 뿐이라고요. 아버지는 짧은 침묵 후에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습니다.

그게 그거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그거라니요. 어떻게 그게 그것이라는 말입니까? 그게 그것이라면, 대체 우리는 왜 말 같은 것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부반장의 지갑을 훔친 건 내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담임은 내 뺨을 때렸습니다. 나는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도 담임은 내가 지갑을 훔친 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나의 운명입니다. 나는 그 운명을 따라 파출소로 갔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담임선생님이 내 짝을 만지고 더듬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뿐입니다.

아버지는 마당의 사철나무 가지를 꺾어와 내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힘이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아픈 것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어린 마음에도 그게 때리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소리를 지르자 종아리가 정말 아파왔습니다. 불에 덴 것처럼 종아리가 뜨겁고, 따갑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찔끔 눈물까지 흐르더군요. 눈물은 슬픔을 부르는 법이지요. 슬픔은 또 우물처럼 스스로 차오르는 법입니다. 나는 어느 순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번 터진 울음은 또다른 울음을 불러왔습니다. 나의 울음은 거의 통곡에 가까워졌습니다. 내 몸에 이토록 많은 물이 저장되어 있다니…… 그런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아버지는 매질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을 열어 말했습니다.

선생님한테 혼이 났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

그게 아버지의 간단명료한 결론이었습니다. 훌쩍이는 나를 좁은 마루에 버려두고 아버지는 담배연기 가득한 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나는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종아리를 걷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어요. 늦저녁의 황혼이 마루로 가만히 스며들더군요. 황혼은 매 맞은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맞은 자리가 발갛게 젖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걸 위로해주는 게 황혼의 임무라는 듯이 말입니다.

다음날 나는 다시 파출소로 갔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얼굴이 말간 그 경찰관 아저씨를 찾아간 것이죠. 이번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진짜 거짓말을 했습니다. 참말을 하면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그게 어린 나의 깨달음이었으니까요. 나는 아버지가 수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숫자가 가득 적힌 종이와 삐라들을 증거물로 건넸습니다. 밤마다 틱틱,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어른 필체를 흉내 내서 종이에 빽빽하게 숫자를 적어넣은 것은 나였고, 삐라 역시 산에서 주워온 것이었습니다만, 틱틱거리는 소리만은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정말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까요. 아버지는 대학 때 포섭을 당했고, 불교계에 잠입했으며, 정체가 드러나기 직전 환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환속 뒤 막노동이나 도배 일을 하며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는 방앗간 할머니와 오락실 아줌마한테 들은 것입니다.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는 보름 후 피폐해진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달쯤은 자리보전을 해야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어요. 언행이 방정한 사람들은 수군거렸지요. 오락실의 개새끼까지 떠드는 것 같았습니다. 전쟁 때 월북했다는 할아버지 이야기…… 대규모 지식인 간첩단의 일원이라는 신문기사…… 그동안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신문에 칼럼 같은 것을 쓰기도 했다는 얘기까지……

아아, 나는 두려워졌습니다.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나의 입은 무서운 진실만을 말했던 것입니다.

 

 

4

 

과묵했던 아버지는 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깊은 물속을 유영하는 심해어가 떠오를 지경이었으니까요. 심해어에게는 눈이 없는지, 아버지는 나를 아예 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후 저에게는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이상하지 않다면 이상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입만 열면 기묘하게도 거짓말이 튀어나왔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 거짓말이 튀어나온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숙제를 하지도 않았는데 숙제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여쁜 새 담임선생님은 내 공책을 검사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갑니다. 온화한 미소를 띤 채로 말이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선생님이 돌려준 공책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푸른색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텅 빈 공책 한가운데 말입니다.

그뿐입니까. 오십원짜리 동전을 몇개 훔쳤다가 오락실 아줌마에게 들킵니다. 아줌마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 순간, 이건 거스름돈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방금 아줌마가 천원짜리를 받아 동전통에 넣지 않았느냐, 아줌마가 잔돈을 내게 건네주지 않았느냐고 외칩니다. 아줌마의 미간이 일그러집니다. 실랑이 끝에 동전통을 확인합니다. 그러면 천원짜리 지폐가 보란 듯이 아줌마의 알루미늄 동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오락실 개새끼가 미친 듯이 짖어대는 바람에 기분이 나빠지긴 했습니다만.

그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내 어여쁜 짝의 고급 펜텔 샤프가 사라졌습니다. 반대머리 담임이 어루만지지 않은, 장학사님의 딸인, 바로 그 짝 말입니다. 나는 그애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을 겁니다. 거짓말이라고는 한번도 해본 일이 없을 것 같은 하얀 얼굴의 소녀였으니까요. 동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공주 같았어요. 우리 반 아이들은 그애를 백설공주라고 불렀습니다.

백설공주, 나의 백설공주…… 맹세코 나는 그애의 펜텔 샤프 같은 것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공주의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제일 오래 머무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공주의 따스한 체온이 가장 깊이 배어 있는 물건, 그게 그 앙증맞은 샤프였을 뿐입니다. 공주는 그 고급 샤프를 잃어버리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참으로 아끼던 물건이었으니까요.

그때 우리 반에는 일곱 난쟁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백설공주의 난쟁이들입니다. 모두들 내 어여쁜 짝을 좋아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지요. 나는 난쟁이들 가운데 가장 잘생긴 부반장의 이름을 공책에 적어서 조용히 백설공주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얘가 훔쳐갔어.

울고 있던 공주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잘생긴 부반장 녀석에게로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초등학생 소녀답게 아주 호전적인 눈빛을 띠고 말이죠. 공주는 표독스럽게 소리쳤습니다.

너지!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부반장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예의 그 펜텔 샤프를, 백설공주의 체온이 밴 바로 그 빨간색 샤프를, 슬그머니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니겠습니까. 미안. 난 그냥 네가 오래 쥐고 있던 거라서…… 그렇게 소심하게 중얼거리면서 말입니다. 나의 공주는 경멸을 담은 눈빛으로 그 난쟁이를 쏘아보다가 샤프를 낚아채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난쟁이 쪽에서 들려온 건 물론입니다.

미안해, 정말로……

아아, 정말이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요. 나는…… 나는…… 내 입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내 입을 말입니다. ‘나는 거짓말쟁이다’라고 선언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거짓말쟁이다’라니. 참 이상한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거짓말쟁이라면, 그는 진실을 말한 것이므로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됩니다. 그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거짓말을 한 셈이 됩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더이상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없고, 거짓말쟁이가 안될 수도 없는 이상한 상황에……

아아, 골치가 아파오는군요. 그만둡시다. 이런 말장난을 하느니 차라리 진실한 거짓말쟁이가 돼버리는 게 나을 테니까요. 나는 거짓말쟁이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쪽이 나을 테니까요.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없고, 되지 않을 수도 없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 궁지에 몰릴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요. 그것이 나의 운명입니다.

 

 

5

 

이제 그 운명에 대해 말할 차례군요.

아시다시피 나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동물원도 아니고, 아프리카의 초원도 아니고, 바로 박물관입니다. 시간을 보존하는 공간, 아니 진실을 보존하는 공간 말입니다. 고독하지만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산이니 평판이니 출세니 하는 세속적인 욕심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요. 진실이 태어나는 곳, 아니 그것 자체가 진실인 공간이니까요.

내가 일하는 곳은 소규모 대학 박물관에 불과하기 때문에 소장품이 많지는 않습니다. 급여도 형편없어요. 그래도 나는 불평 없이 관리인 일을 해왔습니다. 벌써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관람객 수가 하루 다 합해봐야 십여명이 채 안되니까요. 초등학생들이 단체관람 올 때를 빼면 적막한 공기가 내내 고여 있습니다. 어둡고 은은한 조명, 청결한 실내, 푹신한 소파…… 시간은 그런 곳에 머무는 법입니다. 시간이 거처하는 유일한 곳, 시간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유일한 장소, 그게 박물관이니까요.

박물관의 밤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긴 밤을 고요히 보내는 유물들의 황홀한 풍경을 떠올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말씀드리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생활입니다. 깊은 어둠 속의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박물관의 어둠이라는 건 부드럽고 부드러운 초콜릿에 가깝습니다. 몸을 담그고 있으면 소리 없이 녹아갈 것 같은 검고 불투명한 용액 말입니다. 모든 것이 그곳에 존재했다가 그곳에서 사라지지요. 그게 시간이라는 것의 임무라고 해도 좋습니다. 초콜릿처럼 달콤하냐구요? 글쎄요. 자기 몸이 녹아가는 기분이 달콤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박물관 관리인이란 그런 침묵의 용액 속을 말없이 걸어다니는 사람입니다. 관람객이 모두 떠난 심야에 마지막으로 순찰을 하는 사람입니다. 시간의 문을 잠그는 사람입니다. 고여 있는 시간을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보호하는 사람이지요.

물론 사소한 문제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대학 박물관이란 곳은 또 이런 곳이기도 하니까요. 고인 시간과 적막이 주인인 곳이면서, 연인들의 페로몬 향기가 흘러드는 곳 말입니다. 젊고 풋내 나는 캠퍼스 커플들이 찾아듭니다. 어린 연인들은 팔짱을 낀 채 인적 없는 박물관 전시실을 천천히 돌아보지요. 유물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건 동선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곧 외진 곳의 어두침침한 소파에 앉게 마련이죠. 그러고는 서로 껴안고,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고, 깊은 곳에 손을 넣고…… 별짓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백년 된 불상이 가만히 바라보는 앞에서 말이죠.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년의 영혼을 담은 유물 앞에서, 금방 죽어 문드러지고 썩어갈 육신이 하는 짓을 상상해보십시오. 이미 좀비에 가까운 것들이 말입니다. 잠시 살아 있을 뿐인 시체가 말입니다. 서로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고…… 아아, 혐오스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그래요. 아버지라면 물론 다르게 말하겠지요. 아버지는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작은 마당에 황혼이 내리던 어느 저녁, 부쩍 잦은 병치레를 하던 아버지가 불현듯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에게 얘기하는 것인지 황혼에게 얘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뭔가 말하려고 아버지를 보았는데,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어요. 좀 기괴한 비유입니다만, 그건 해탈한 간첩의 표정에 가까웠습니다……

 

 

6

 

아버지가 세상을 뜬 것은 내가 서울 근교의 작은 대학에 입학한 뒤였습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서너갑씩 태운 담배와 늦게 배운 술이 아버지의 몸을 잠식해갔습니다.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어머니의 병을 반복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아버지의 폐는 이미 아무런 기능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몸이 무섭게 말라갔어요.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는 담배를 끊지 않았습니다. 변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이었어요. 하긴, 뭐가 달라질 수 있었겠습니까? 죽음이 아버지의 고독한 인생을 곧 수납해갈 거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나는 무기력한 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연명했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청춘의 열정이라든가 의욕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동아리 활동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없었으며, 학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때 막 생긴 피씨방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냈습니다.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이었달까요.

그런 나를 구원한 것은 뜻밖에도 공주였습니다. 그 백설공주 말입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하던 우리는 우연찮게—정말이지 우연찮게— 학교 근처의 피씨방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거짓말처럼 말이죠.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들 중 수도권 외곽에 위치한 그 소규모 대학에서, 그것도 피씨방에서 재회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무지개, 그 구름바다에 말입니다. 그녀는 변한 것이 없었어요. 장학사였던 아버지는 세상을 떴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의 공주였습니다. 표정이나 성격, 말투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공주는 초등학교 때와 키가 똑같았고 얼굴이나 몸집도 거의 변하지 않았더군요. 남들은 대단한 동안(童顔)이라고 부러워했지만 실은 좀 기이해 보일 정도였어요. 어떤 이는 질병을 의심했을 정도니까요.

공주는 대학생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화장을 진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나와 여인숙에 갔을 때조차 새벽마다 화장실로 사라질 정도였어요. 옆에 누워 성기를 드러내고 밤을 보냈는데도, 아침이 오기 전에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민낯의 공주는 나이와 얼굴이 맞지 않아 어딘지 균형이 어긋난 인상이었어요. 마치 나이 어린 노파라든가 늙은 초등학생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그녀는 여전히 예전과 같은 공주였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공주의 주위에는 난쟁이들이 없었습니다. 난쟁이들을 잃고 스스로 난쟁이가 된 공주 같았어요. 예전과 똑같기 때문에 달라지다니, 좀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만.

‘사랑해’라고, 나는 자주 말했습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랑해’라고 말했고, 잊을 만하면 ‘사랑해’라고 말했으며, 밤에 통화할 때도 ‘사랑해’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왜였을까요? 나는 더이상 펜텔 샤프 같은 데 관심이 없었고, 잘생긴 부반장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으며, 공주 앞에서 선생에게 도둑으로 몰려도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해’라고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입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한다고 했던가요. ‘사랑해’라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사랑의 마음이 되살아났습니다. 내 심장 어딘가에 숨어 있던 열기가 뜨거운 샘물처럼 솟아났습니다. 그러니 잊을 만하면 ‘사랑해’라고 말할 수밖에요. 불안을 느끼면 ‘사랑해’라고 외칠 수밖에요. 아아, 공주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다시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주로 교내 음악실에 틀어박혔습니다. 커다란 스피커로 클래식을 틀어주는 곳이었어요. 어두컴컴한 음악실에는 연인들이 많았습니다. 코를 고는 학생도 있었지만 그건 견딜 수 있었어요. 음악를 듣느냐 마느냐는 취향의 문제니까요. 내가 견디지 못한 건 실은 음악 자체였습니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같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체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화려하고 다채로운 음들이 허공에 가득할 뿐입니다. 11악장의 현란한 화사함, 2악장의 깊고 깊은 슬픔, 22악장의 우아함,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게 다 무어란 말입니까. 허공과 같은 것이…… 허공 자체인 것이…… 왜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울린단 말입니까.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바로 음악 자체였습니다.

그녀와 나는 교내 박물관으로 데이트 장소를 옮겼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고요한 곳입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천천히 유물을 구경합니다. 워낙 빈약한 컬렉션이기 때문에 전시물을 돌아보는 데는 삼십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박물관이라고 하다니, 조금은 한심한 기분이 들 수밖에요.

할 수 없이 우리는 구석자리의 소파에 앉습니다. 인적은 드물고 조명은 적당히 어둡고 주위는 고요합니다. 그 무렵 CCTV라는 게 처음 설치된 모양이지만, 그나마도 입구 쪽만 비추고 있었어요. 그러니 서로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고, 깊은 곳에 손을 넣고…… 그럴 수밖에요. 수백년 된 불상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그때는 우리의 사랑이 또다른 운명을 맞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박물관 소파에 앉아 여느 때처럼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던 오후였어요. 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무언가가 우리를 바라보는 듯했기 때문이었죠. 처음엔 관리인 아저씨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아니었어요. 이건 뭐지? 분명 어떤 시선이 우리의 몸을 훑고 있었습니다. 강렬한 시선이었어요. 타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나는 공주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천천히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불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데려가곤 했던 사찰의 불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느낌의…… 불상이었습니다. 종교니 부처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개뿔도 모릅니다만, 모르기 때문에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사찰의 불상들은 따분했습니다. 이건 대웅전이고, 대웅전에는 불상이 있어야 하니까, 하는 식으로 앉아 있달까요.

하지만 그 불상은 달랐습니다.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걸 뜨겁게 주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어요. 어지러움 같은 것이, 어떤 의식의 혼란 같은 것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체온이 올라갔습니다.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백설공주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 타는 듯한 시선 때문이었어요. 나는 불상의 뜨거운 시선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스땅달이라는 작가가 그랬다던가요. 무슨 박물관에서 르네쌍스 시대의 그림 한점을 봤을 때라고 했습니다. 정신이 멍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영혼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체험을 겪은 게 말입니다. ‘베아뜨리체 첸치’라는 그림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런 종류의 무슨 증후군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베아뜨리체에게 홀린 스땅달처럼, 나는 그 불상에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7

 

다시 말합니다만, 독특하고 아름다운 불상이었어요. 아시겠습니까?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불상이었습니다. 백설공주를 소파에 버려둔 채 나는 불상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부처가 눈을 감고 어떤 짐승 위에 결가부좌로 올라타 있었습니다. 93.5센티미터 높이의 고려시대 목조 비로자나불이라는 설명이 아크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던 그 뜨거운 시선은 부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처가 아니라, 부처가 타고 있는 짐승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그것은 바로…… 기린이었습니다. 동양의 상서로운 동물 말입니다. 뿔이 하나 달린 영물 말입니다. 사슴의 몸에 말의 발굽과 갈기를 지녔지요. 소의 꼬리를 갖고 있습니다. 온몸이 오색찬란한 비늘로 덮여 있고, 화사한 빛깔의 털이 흩날립니다. 기린은…… 기린은 아름다운 동물입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비로자나가 아니라 비로자나가 타고 있는 바로 그 동물이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린불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 불상은 박물관의 유일한 국보급 문화재라고 하더군요. 말씀드렸듯 작은 박물관이었고 소장품은 형편없었습니다. 그 불상이 박물관의 존재이유였던 셈입니다. 가장 값비싼 유물이자 박물관의 자랑이기도 했지요. 총장이 외부의 귀빈을 데려와 관람시키곤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마다 총장의 얼굴에 떠오르던 흐뭇한 표정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문헌을 찾아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만, 기린을 탄 부처상은 대단히 드물다더군요. 보살이나 동자가 탄 것은 간혹 있습니다만…… 둔황석굴에 기린을 탄 관음상이 있으나 그것 역시 부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독특한 구도인 셈이지요. 게다가 기린의 모습이 특이했습니다. 부처는 어두운 빛깔에 오래된 목조불상 특유의 은은함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기린만은 어쩐 일인지 금방 도료를 칠한 듯 화사하고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상서로운 동물답지 않게 매서운 눈과 강인한 외뿔, 도드라지게 커다란 성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수십만마리의 정자를 허공에 흩뿌릴 기세랄까요.

수많은 학자들이 그 기린불에 대해 논문을 썼다더군요. 대개의 해석은 기린의 상서로운 기운으로 부처의 자비를 세상에 널리 퍼뜨린다는 식이었습니다. 하품이 나오는 얘기지요. 개중에는 부처가 해탈을, 기린은 세속을 뜻한다고 설명한 사람도 있었다지요. 각각 영원성과 육체성을 상징한다는 헛소리도 있었는데, 어떤 학자는 이 기린이 예수의 발밑에 깔린 뱀처럼 묘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가 호된 비난을 들어야 했다더군요. 왜 동양의 영물을 서양의 사악한 상징에 빗대느냐는 얘기였습니다.

아무려나, 그런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기린불이, 나에게는 나의 기린불이 있는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내게 황홀경을 안겨준 것은 기린의 의미 따위가 아닙니다. 기린 자체입니다. 거기 그렇게 서서 나를 바라보던, 그 자체로서의 기린 말입니다.

나는 거의 매일 박물관에 나가 그 동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혼자였습니다. 공주와는 곧 헤어졌으니까요. 사랑이란 바흐의 음악과 비슷하다고 했던가요? 음악이 사라지면, 이 세계는 순식간에 전혀 다른 허공을 가진 세계로 돌변해버립니다.

누가 먼저 이별을 선언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한 것만은 또렷이 생각나는군요. 황혼이 내리던 교정에서였어요. 벤치에 앉은 공주가 먼 곳에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초등학생 여자애의 목소리로 말이죠.

난 아직도 오리지널 펜텔만 써. 종류별로 갖춰두고서. 그때도 난 이미 여러자루를 갖고 있었으니까.

공주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흔해져버렸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 샤프를 쓰지. 너조차도. 심지어 그게 펜텔이라는 의식도 없이……

발그레한 황혼이 그녀의 옆모습에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공주가 미친 건 아닌가 생각했어요. 샤프펜슬 같은 것을 아직도 머릿속에 두고 있다니 말이죠.

그게 공주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음악이 사라진 허공에 버려진 것입니다.

 

 

8

 

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바로 그 박물관에 취직했습니다. 박물관장이던 교수님을 열심히 쫓아다닌 덕분이었습니다. 임시직이었고 수위 일이었습니다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습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기린을 매일 바라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취미도 갖지 않았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육식도 즐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담배만은 예외였습니다만.

나는 늘 정해진 옷을 입었고, 소박한 식사를 했으며, 특별히 만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옷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건 아버지의 기일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니던 사찰에 가서 혼자 조용히 불공을 드리고 오는 것이지요. 그렇게 원룸 전셋집과 박물관만을 오가면서 훌쩍 십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토록 단조로운 생활을 십년이 넘도록 해온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말입니다.

엉뚱한 얘기입니다만, 최근 이상한 뉴스들이 많이 눈에 뜨이지 않던가요? 웬 노숙자가 국보급 문화재에 불을 지르지를 않나, 수십억대 고미술품이 위작이라지를 않나…… 문화재 가운데 진품이 아닌 것이 많다는 소문이 신문 방송에 끈질기게 오르내렸습니다. 신라시대 여래입상이 가짜라는 둥, 목조관음불이 중국에서 수입된 모조품이라는 둥, 안견에서 불교미술까지 진위가 의심스러운 유물이 많다는 둥, 그런 소문 말입니다.

나는 그런 얘기에 관심이 없었어요. 나의 기린이 논란에 휘말리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누군가 문화재청과 대학당국에 기린불이 가짜라고 투서를 넣었다고 하더군요. 진짜는 이미 일제 때 반출되었다는 허황된 주장이었습니다. 박물관 측과 사학과 교수들은 그 주장을 무시했습니다. 이미 정밀한 감식을 거쳤기 때문에 위작논란은 말도 안된다고 일축했습니다. 기린불이 가짜라면 박물관의 존재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박물관의 존재근거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간 그 불상에 대해 논문을 쓴 교수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수백억의 가치가 있다며 지역신문에 특집기사가 실린 적도 있는데, 신문사는 또 뭐가 되겠습니까? 기린불을 관람한 관람객은 뭐가 되고, 내외 귀빈에게 그 유물을 소개하던 총장의 자랑스러운 미소는 뭐가 된단 말입니까?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그 귀빈을 안내하고, 기린불의 자리를 세심하게 청소하고, 실내온도를 신중하게 조절하고, 매일 그것의 안위를 확인해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체 그 사람은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아아, 그만둡시다. 흥분해봐야 소용없으니까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대학당국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기린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문지상에 몇번 기사가 났다는 이유로, 진리의 상아탑인 대학에 위작으로 의심되는 작품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학계의 성명서 한장 때문에, 그들은 기린불의 진위조사에 착수하겠다는 기자회견까지 열었던 것입니다. 곧 조사위원회가 꾸려질 것이고, 탄소측정을 비롯한 각종 첨단 감식기술을 활용해 진품여부를 가리겠다고 하더군요.

탄소측정이라니요. 탄소 따위가 기린의 운명을 결정한다니요. 도대체 누가 진짜와 가짜를 나눌 권리를 그들에게 주었습니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밤마다 기린의 타는 듯한 아름다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9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일요일 밤이었어요.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갑작스레 날이 추워진 탓인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지요. 나는 보일러도 켜지 않은 방바닥에 누워 원룸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이 드는. 멀쩡하던 문이 삐걱거리고, 텔레비전이 고장 나고, 칼에 손을 베고, 길 건너편에 검은 고양이가 앉아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날 말입니다.

다음날이면 위원회에서 방문조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근무 때 입는 회색 제복이었어요. 가슴에는 내 이름과 대학명이 적혀 있지요. 그 깊은 밤에 나는 박물관으로 갔습니다. 휴일이었기 때문에 교정에도 박물관 주변에도 인적은 없었습니다. 나는 열쇠로 정문을 따고 들어갔습니다. CCTV가 나를 찍도록 말입니다. 왜였을까요? CCTV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까지 지었던 것은. 그 검은 어둠 속에서 말입니다.

나는 박물관 내부를 거닐었습니다. 옛 추억이 아련히 내 영혼을 사로잡더군요. 백설공주는 잘 살고 있을까? 아직도 난쟁이를 잃은 공주일까? 그녀는 내가 왜 차갑게 변해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하긴, 나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걸 그녀가 어떻게?

나는 백설공주와 키스하던 소파에 앉았습니다. 따스한 시간이 고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린불이 보이더군요. 나는 기린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았습니다. 초콜릿처럼 어둡고 짙은 시간이 우리 사이를 흘러갔습니다. 지난 십여년이 하루하루 떠올랐습니다. 손전등을 들고 타박타박 거닐던, 고요하고 평화롭고 적막한, 그 밤의 순례들이 말입니다. 초콜릿처럼 녹아버린 그 무수한 시간이 말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명료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 말입니다. 그래요. 나는 기린의 말을 들었고 기린은 나의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는 막힘이 없었습니다. 나는 확신했습니다. 전문가라는 자들이 탄소연대측정법이니 뭐니 난리를 피운들, 기린의 저 타는 듯한 눈빛을 지울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저 시선의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진실이란 그렇게 연약한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습니다. 연기를 들이마셨습니다. 달디달았어요. 갓 핀 산수유가 된 듯 신선한 느낌이었지요. 건강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는 속물들이, 이미 좀비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혐오스러웠습니다. 차라리 누가 먼저 연기나 구름이 되는지 내기하는 게 나을 자들이 말입니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기린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진열창의 실리콘을 제거하고 강화유리를 떼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십여분 정도였습니다. 나는 준비해간 휘발유통을 손에 들었습니다. 부처의 머리 위에서 통을 서서히 기울였습니다. 비로자나의 머리부터 기린의 발굽까지, 휘발유가 서서히 흘러내렸습니다. 어떤 기분일까요? 휘발유를 뒤집어쓴 부처의 마음이란?

나는 물끄러미 기린의 눈을 마주보았습니다. 슬픈 눈빛이었어요. 기린의 성기는 고요히 쭈그러져 있었습니다. 더이상 고민할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기린불 위에 떨어뜨렸습니다. 담배는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낙하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붉은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훅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목조불상은 잘 탔습니다. 미친 듯이 잘 탔습니다.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말이죠. 기린의 발끝에 불이 붙고, 발목이 타오르고, 성기가 타오르고, 화사한 느낌의 몸뚱어리가 타오르고, 뜨거운 눈동자와 단 하나뿐인 뿔이 타올랐습니다. 세상에 없는 상상동물의 몸이 타올랐습니다. 하나의 물질인 몸이 타올랐습니다. 불길은 비로자나까지도 순식간에 삼켜버렸습니다……

아아, 나의 기린, 나의 베아뜨리체, 나의 공주, 나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마도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규라고 해도 좋았겠지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기린의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이었을까요? 품행이 방정한 자들에 대한 증오였을까요?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환멸일 리가 없습니다. 증오일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었을 뿐입니다. 진실만을 말하는…… 나의 운명 말입니다.

 

 

10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당신의 선처를 바라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누가 나보다 더 그 기린을 사랑했다는 말입니까? 학자들입니까? 대학 총장입니까? 당신입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내가 어린 시절 만났던 그 경찰관과 비슷하게 생겼군요.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하얀 손가락에, 얼굴은 희멀겋고, 책임감이 넘쳐 보입니다. 혹시 당신은 그때의 그 경찰관이 아닙니까? 자유와 정의를 지킨다고 착각하는 의경 말입니다.

뭐라구요? 또 얘기해야 합니까? 그건 이미 확실히 말하지 않았나요? CCTV를 확인해보세요. 당신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탄소니 CCTV니 하는 것들 말입니다. 화재경보가 미친 듯이 울리는 불구덩이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게 누굽니까? 내가 아닙니까? 기린불의 잔해가 발견되지 않은 게 내 책임인가요? 내가 그걸 어디에 팔아먹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돈 따위를 벌려고?

아아, 당신은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차라리 바흐의 음악이 어디로 사라졌느냐고 물으십시오. 어제의 구름이 어디로 사라졌느냐고 물으십시오. CCTV 화면 속에 내리는 빗방울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느냐고 물으십시오.

……그만둡시다. 나는 당신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그 기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으니까요. 그래요. 그 기린은 사슴의 몸을 갖고 있을 겁니다. 말의 발굽과 갈기를 지녔겠지요. 소의 꼬리를 가졌고요. 온몸이 오색찬란한 비늘로 덮여 있습니다. 바로 그 짐승입니다. 외뿔을 곧추세운 동물 말입니다. 슬픈 눈을 가진 동물이지요. 그 동물은 지금 어느 구름 아래를 유유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지금 막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거기 황혼이 지고 있나요? 그런데 그것은……

정말 기린입니까?

이제 당신이 내게 대답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