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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역사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서중석 徐重錫

성균관대 명예교수,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저서로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전2권) 『조봉암과 1950년대』(전2권)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등이 있음.

 

박준형 朴俊炯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한국근대사. 주요 논문으로 「1890년대 후반 한국 언론의 ‘자주독립’과 한청관계의 재정립」 「청일전쟁 발발 이후 동아시아 각지에서의 청국인 규제규칙의 제정과 시행」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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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형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을 계기로 이 문제가 한국사회에 제기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 연구 및 교육 현황을 돌아보면서 앞날을 전망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서중석 선생님을 모시고 주로 제가 질문을 드리면서 대화를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세대를 뛰어넘어 진솔하면서도 깊은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중석 반갑습니다. 우리 학계가 안타깝게도 서양사, 동양사 전공자가 한국 근현대사를 잘 몰라요. 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자기 부분만 주로 아는 경우가 많고요. 다른 사람의 연구나 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한데, 이번 참에 많은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한국사 교과서 논란과 역사전쟁의 서막

 

박준형 최근 그간의 한국사 교과서의 관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이른바 우익 교과서가 집필돼 큰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우선은 이 사안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매체에서는 이번 일을 두고 “역사전쟁의 서막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지금의 논란과는 별개로 이후의 우익 교과서가 더 많은 준비를 거쳐 나올 것이라는 전망 때문입니다.

 徐重錫 성균관대 명예교수,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저서로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전2권) 『조봉암과 1950년대』(전2권)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등이 있음.

徐重錫 성균관대 명예교수,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저서로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전2권) 『조봉암과 1950년대』(전2권)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등이 있음.

서중석 2001년에 일본 후쇼샤(扶桑社) 판 역사교과서가 나왔을 때 위험한 역사교과서로 논란이 많았는데, 2005년의 개정판이나 그 이후 교과서의 경우 여전히 문제는 심각하지만 겉모습은 조금 달라졌다는 평을 받기는 했지요. 후쇼샤 교과서가 달라진 데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 국내외의 맹렬한 비판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불필요하게 주변국, 특히 한국과 크게 다툴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점이 약간은 작용을 했어요. 둘째로, 책을 만드는 데 돈이 엄청 많이 드는데 팔리지 않으면 더이상 출판이 불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나온 교학사 교과서는 문제가 너무 심각해요.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현대사는 틀린 것, 잘못 서술한 것, 부정확한 서술이 아주 많고, 중언부언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에다가 치졸한 반소반공(反蘇反共) 서술이 중복되어 과도하게 들어갔어요. 민주주의, 나라사랑, 인권, 평화와 시민의식 함양이라는 역사교육의 목적에 크게 배치되고 있어 대단히 위험한 교과서일 뿐 아니라, 수준이 너무 떨어져 교과서로 부적당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잖아요. 또 후쇼샤 교과서가 친일파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고 일본군 성노예를 부당하게 취급한 것처럼 교학사 교과서도 그러한 면이 있는데, 어떻게 한국 학생에게 가르칠 교과서가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와 입장을 같이 할 수 있느냐는 지적도 받고 있습니다.

박준형 그렇다면 해당 교과서의 부실함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교과서의 등장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전선’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역사전쟁은 국가가 개입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는 게 특이점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학계 내부의 논쟁이 아니라, 정권이 동북아역사재단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같은 한국사 관련 정부기관을 친정부, 친자본 세력으로 채워놓고 있고요. 광화문 앞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세워 정부의 인식을 대변하는 듯한 전시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노조권한까지도 박탈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정부가 직접 개입하고 있는 거지요. 국사교육 문제에 국한하자면, 교육 자체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서중석 박교수 말씀대로 역사전쟁의 서막이라고 할 정도인데, 우리 미래가 아주 불길하고 암담합니다. 6월항쟁 직후부터 보수언론 중심으로 현대사 교육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해방 50주년, 정부수립 50주년 같은 것을 맞을 때마다 이승만(李承晩) 살리기, 박정희(朴正熙) 키우기 등을 통해서 수구냉전이데올로기 논리를 표출했죠. 그러다가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권력이 전반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에 이르렀어요. 특히 이번에는 여당 국회의원 수십명이 모여 한국식 극우사관을 옹호하는 주장을 폈어요. 일본에서 역사왜곡이 일부 교과서나 극우이념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민당의 대다수를 포함해 야당 일부가 이에 가담하고, 또 일본 국민의 지지까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건데요. 이걸 우리나라 정치인이 흉내 내려고 하고, 더 나아가 ‘종북’ 논란 같은 선동적인 주장을 폄으로써 인기를 얻으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듭니다. 2008년에는 경제 관련 이익단체들이 경제문제 잘못 썼다, 군인들은 안보문제 잘못 썼다는 식으로 상당한 압력을 넣었고 극우세력이 재판도 거는 일도 잇따라 일어났어요. 극우 언론인이나 예전 특수기관 출신들이 권력의 지원을 받으며 각급 학교 학생이나 교육계, 사회 각계 사람들에게 소위 현대사 강연을 했는데, 그런 이들이 무슨 주장을 하고 나섰는지는 너무나 뻔하잖아요. 그리고는 그해 광복절 즈음해서 정치인까지 가세한 ‘건국절’ 소동이 벌어졌고, 가을이 되니까 공권력을 동원해 사용중인 교과서를 다시 고치라고 압박하고, 교과서를 바꾸라고 했잖아요. 어떤 역사교과서를 사용하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받은 압박이 심각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무슨 박물관을 짓는다거나, 이승만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는 등의 주장을 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역사교과서를 직접 내버린 거예요. 그걸 일부 보수언론이 적극 지원하고 있고.

박준형 보수정권으로 바뀌고 나서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그 이전까지는 국정교과서였지 않습니까. 당시의 교육보다 지금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서중석 무엇이 더 심각하다고 하긴 어렵고 국정교과서는 그것대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부수립 이후 6월항쟁 때까지는 정부가 교육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안된다 싶은 것은 교육을 시키지 않았어요. 일방적인 이데올로기 선전, 홍보의 측면이 상당히 강했죠. 사실은 현대사를 축소시키고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고 연구도 못하게 했어요.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어놨던 것이죠. 해방 후에 친일파 문제가 굉장히 논란이 컸는데 반민특위가 해체된 이후로는 거론조차 되지 못했어요. 4월혁명이 나고 모든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지만 친일파 문제는 예외였습니다. 6월항쟁 이후부터 가능해진 거예요. 그래서 박정희의 일본군 시절 이름이 뭐였는지도 한국인이 거의 모르다시피 했습니다. 김일성(金日成) 가짜설은 백퍼센트 믿었고요. 이런 식의 사회였어요. 또 민간인학살 문제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벌어졌던 규모의 학살은 세계에서도 흔치 않아요. 우리 역사에서도 근대사까지 통틀어 봐도 이렇게 큰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나이 먹은 세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내 나이 이하 사람들은 몰랐어요. 교육에서 이런 문제가 전혀 다뤄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6월항쟁 이후부터 자료도 많이 생기게 되고 현대사 연구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과거에 배웠던 것들이 너무 잘못된 것이었다는 방향으로 흘러가니 기득권세력이 당황한 거예요. 예전과는 달라서 이제는 권력이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 보수언론이 우선 앞장을 선 셈이죠. 김영삼정부부터 노무현정부까지는 권력이 거기에 야합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던 건데, 그 뒤로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권력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아무튼 지금은 현대사에 대한 진실과 사실이 여러 책이나 일부 교과서에도 상당히 담겨져 있는 거예요. 저쪽에선 그걸 두려워하지만.

 

진보적 역사학계 내부의 사정은

 

朴俊炯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한국근대사. 주요 논문으로 「1890년대 후반 한국 언론의 ‘자주독립’과 한청관계의 재정립」 「청일전쟁 발발 이후 동아시아 각지에서의 청국인 규제규칙의 제정과 시행」 등이 있음.

朴俊炯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한국근대사. 주요 논문으로 「1890년대 후반 한국 언론의 ‘자주독립’과 한청관계의 재정립」 「청일전쟁 발발 이후 동아시아 각지에서의 청국인 규제규칙의 제정과 시행」 등이 있음.

박준형 전선의 한편에서 국가의 개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영익(柳永益) 교수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됐을 때 한국역사연구회에서 내정철회를 요구하기도 했고, 교학사 교과서가 나온 이후에도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국사 관련 학회들 내에서도 조금씩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를 맞이해서, 말하자면 전선이 이렇게 형성됐기 때문에 한쪽에 모여서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서중석 지금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는 진보적인 한국사 단체들은 대개 6월항쟁 전후 시기에 있었던 학술운동이 조직화되는 과정에서 연구소나 학회가 된 것이죠. 멀리 올라간다면 독립운동 세력이라고 할까, 반일세력이 가졌던 생각과 비슷한 점이 있고, 해방 후 진보세력이 걸어온 길과 겹치는 측면이 있는데, 지금 세대는 또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제가 몸담고 있는 역사문제연구소만 해도 50, 60대가 창립멤버예요. 그런데 우리와 그 바로 아래 세대는 많이 다른 것 같고, 지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달라요. 어쨌든 요즘 와서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상당한 다양성이 있다, 1980년대나 90년대에 비해서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념문제를 떠나서 사실 위주로 보려는 면이 있는데, 반면에 비판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면도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럼에도 일치하는 것이 있다고 봐요. 예컨대 인류가 지향하는 길, 자유나 민주주의, 인권, 평화 같은 것을 확대하는 것, 또 압제를 반대하고 민중의 생활이나 의식에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전향적이에요. 남북문제와 동아시아문제를 일치시켜가면서 화해협력, 나아가서는 통일이라든가 동북아협력기구를 만드는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지금 뉴라이트나 극우 쪽과는 대립전선이 확연하지요.

박준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회들이기 때문에 각 단체들 간의 입장차, 또 그 내부에서의 세대차 등에도 불구하고 서로 합일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대차와 관련된 얘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역사왜곡 문제에 있어서 진보진영의 무능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서중석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비판해서 좀 곤란합니다만, 나는 그 점을 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80년대 학술운동을 포함해서 민주화운동 세력이 현대사를 신주단지나 여의봉처럼 다루는 느낌이랄까요. 80년대에는 권력이나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데 현대사를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하더라고요. 그 가운데는 너무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중심으로 엄격하게 비판해가는 게 더 중요한데도요. 물론 그 정열, 적극적인 의지는 상당히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보수언론이 역사전쟁을 크게 확대시켜갈 때부터는 진보세력이 공부를 안하고 진보언론도 잘 대응을 못하는 것 같았어요.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몇가지 핵심 논리가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진보언론이 적절하게 지적해서 허구성을 낱낱이 폭로해내기가 쉬웠을 거라고 봐요. 저쪽이 주장하는 내용이 50~70년대의 낡은 것이고 또 엉터리가 아주 많거든요.

박준형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서중석 이승만 건국론이라든가 친일파 청산이라든가 여러가지가 있죠. 보수세력의 큰 약점, 반공세력의 큰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저들이 그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포장하면서 현대사를 설명하려고 하는가에 적절히 대응해야 하는데…… 가령, 90년대 중반부터 일부 언론이 ‘이승만 키우기’를 계속해왔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 다들 묵묵히 가만히만 있어요. 나는 『역사비평』을 통해서 한다고 해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안하더라고.(웃음)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합니까. 사실 나는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학계에 불만이 있어요. 80년대 중반 전후로는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대사에 열심히 매달려서 역사학계보다 더 앞장서 나갔어요. 그런데 90년대 들어와서 상황이 달라지니까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거의 희석됐더라고요.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실증적인 주장이 아니라 공식적인 일반적 주장만 반복하는 거예요. 그거 갖고는 안 먹힙니다. 보수언론이 콧방귀만 뀌죠.

박준형 그 원인은 도대체 어디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서중석 이게 아주 뿌리 깊습니다. 예전에 나는 현대사 강의의 첫 시간을 ‘왜 현대사는 연구되고 강의되지 못했는가’에 할애했어요. 극우반공독재로 인해 자료를 보지 못한 면도 있지만, 그것과 함께 내가 빼놓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회과학, 인문과학 하는 사람들이 우리 역사, 우리 문화를 너무 소홀히 했다는 점이에요. 물론 우리나라는 학문 연구 역사가 짧아요. 대부분의 영역이 50년대 중반 이후, 더 정확히는 70년대 이후에야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수입학문적인, 이식학문적인 성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미로부터 많이 배워야 한다고들 하죠. 물론 이런 얘기는 틀림없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항상 거기에 머물 수는 없지 않느냐.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를 폭넓게 이해하고 그 깊이를 심화해가는 게 인문사회과학의 본령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 대한 것을 너무 소홀히 했어요.

박준형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 어떤 함의를 지니는 건가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서중석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 특히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군사독재 시절의 그 많은 사람들, 모두 감옥 가는 걸 마다하지 않고 참 열렬하게 싸웠잖아요.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자신이 싸웠던 시기의 사회를 제대로 연구해서 일반대중에게 보급하려는 노력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일제시대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오랫동안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던 것도 당사자들이 자기 역사를 쓴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해방 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운동이 단절돼요. 앞세대를 부정하면서 뒷세대가 자기만이 최고라는 식의 운동논리를 펴요. 80년대가 70년대를 부정하는 거고 90년대는 80년대를 부정합니다. 한국에서는 자신을 이해하는 학문문화가 꽃피우지 못한다는 게 큰 문제인데, 나는 그 책임을 극우반공세력에게만 돌려서는 안된다고 늘 강조해요. 그건 우리가 분단의 원인을 외세에만 돌려서는 안된다는 논리와 같아요.

 

실증이 사라진 이념논쟁으론 곤란

 

박준형 우리 역사와 사회현실에 대한 연구 부족이 결국 지적 식민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학문적 구조를 만들어서, 끊임없는 자기부정, 이때의 자기 또한 이식의 결과이겠지만요, 어쨌든 그를 통해서밖에 자기의 주장을 전개할 수 없었던 진보진영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듯합니다. 그 점에선 요즘 탈근대 논의 또한 반성할 지점이 있겠습니다. 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그전에 우리는 과연 근대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든 적이 있는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진보진영을 비판하실 때 또 하나 강조하시는 점이 실증연구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증이라는 것에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검찰에서 국정원 심리전단이 올린 트윗이나 리트윗 글을 5만여건 새로 밝혀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에 대한 새누리당의 반박논리라는 게 5만여건 중에서 3천건의 오류가 있다면서 5만건 자체의 신뢰성 문제를 제기하는 식입니다. 사실 이런 양상은 난징대학살을 둘러싸고도 중국에서는 희생자 수가 30만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일본에서는 20만 이하 혹은 수천이라고 맞서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쪽도 실증을 얘기하고 저쪽도 실증을 얘기하면서 그 실증이라는 것이 오히려 최초의 논점을 흐려버리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실증을 한다고 했을 때 오히려 사실 자체보다는 거기에 접근하는 연구자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중석 나를 가르쳤던 예전의 역사학자들은 지독할 정도로 실증을 중시했어요. 보수든 진보든 논리나 이념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 일관된 주장이었죠. 나 자신은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참여와 연구를 병행한다는 입장이 확고하게 서 있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현실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렇다고 해도 나는 우리 선생님들이 실증을 중요시하셨던 것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증보다 이념에 기대는 경향이 있어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전반기까지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이 한국사회를 뒤흔들어놓았죠. 이때 논쟁에 참여한 분들이 과연 거기 나오는 근현대사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당시 알려져 있는 일반적 지식을 토대로 해서 자기 논리를 펴나갔던 거예요. 다분히 추상적인 것이죠. 국독자(국가독점자본주의)니 뭐니, 도대체가 지금 젊은 세대가 보면 옛날에 희한한 일이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 텐데.(웃음) 이 논쟁이 한번 죽으니까 다시는 힘을 못 펴잖아요. 나는 그게 실증이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보수적인 사람들 가운데도 현대사에 대해 실증적으로 좋은 연구를 해놨다면 거기서도 배울 게 많이 있죠. 그런데 대개는 일종의 논리나 이념을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돼서는 안됩니다. 절대적으로 사실 중심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 학문세계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박준형 뉴라이트의 중심에 서 있는 안병직(安秉直) 교수의 최근 인터뷰를 보니까, 사구체 논쟁 당시 식반론(식민지반봉건론)을 주장하던 자신이 보수로 전향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이론의 허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식반론에 따르면 70년대말에 한국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했어야 하는데 80년대에 들어서도 오히려 호황을 맞이했다는 거죠. 이렇게 과도한 이론이나 이념을 비판하고 실증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진보진영 비판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요.

서중석 말하기에 좀 뭣하지만 그분이 실증적으로 써놓은 것은 몇개 안됩니다. 나머지는 사구체 식으로, 이념적으로 써놓은 게 많아요. 예컨대 1930년대 일제에 의한 경제개발이 1960, 70년대 박정희의 경제개발과 직결된다, 깊은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 가운데를 메우는 게 없어요. 30년대가 뭔지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안되어 있고요. 동시에 박정희의 경제개발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안되어 있다고 봐요. 일방적인 주장을 하면서 ‘팩트를 중시해야 한다’ 이런 논리를 펴더라고요. 이러니까 이것 참……(웃음)

박준형 실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서중석 네, 나는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일부 뉴라이트와 관련 있는 낙성대연구소의 몇분은 일제시기 연구에 상당히 실증적이더라고요. 진보 쪽은 허수열(許粹烈), 정태헌(鄭泰憲) 교수 같은 이들이 실증적이잖아요. 난 실증적인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논문을 열심히 읽어야죠.

 

다시 살아나는 박정희 향수의 배경에는

 

박준형 뉴라이트와 우익교과서 서술자들은 기존의 역사서술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비판합니다. 이 ‘자학사관’이란 말은 사실 그들이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980년대 독일의 역사수정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일본의 우익이 표절하고 또 한국의 우익이 재차 표절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공통된 얘기 중 하나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면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역사를 자학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인데, 그들이 말하는 긍정적 역사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난 1026일에 있었던 박정희 추모식에서 흥미로운 말들이 많이 나왔는데요, ‘아버지 대통령 각하’라는 호칭도 등장하고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도 20일에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축사에서 새마을운동의 내용과 실천방식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미래지향적인 시민의식 개혁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길 기대한다는 식의 발언을 했고요. 이를 볼 때 그들이 말하는 긍정의 핵심 중 하나가 박정희 대통령과 그 시대에 대한 평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박정희만큼 평가가 갈리는 사람도 없을 텐데, 산업화와 민주화 두가지 측면에서 특히 그렇겠지요. 그런데 이런 대립된 평가가 고착화되면서 우익이 전선의 한편을 차지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주는 면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기여한 부분이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가 세운 나름의 공적이라는 것도 인정해줌으로써 박정희 향수 같은 것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의 공()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다만 성장의 공을 박정희가 독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게 선생님의 입장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박정희 향수 현상에 대한 이해를 포함해 박정희 시대의 평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방법이랄 게 있을까요?

서중석 박정희 18년이 우리 현대사의 중간토막인데, 이렇게 장기간에 걸친 중요시기에 경제 발전이 안되었다면 그것이 이상하지 않을까요. 4월혁명으로 우리 사회가 크게 변화하고 일어나려는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쿠데타정권이 등장하거든요. 이승만정권 12년은 사실상 상당한 어려움을 안고 있었어요. 이승만의 능력을 떠나서 과연 그 시기에 제대로 일을 하기가 쉬웠겠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이런 얘기도 많이 합니다. 박정희를 1950년대에 갖다놔봐라, 그 시기에 뭘 할 수 있었겠느냐, 오히려 박정희의 일본식 군인정신을 가지고는 문제를 망칠 수 있다. 또 한편 오늘날에 박정희를 갖다놓으면 우리 경제와 정치를 얼마나 잘못되게 이끌어갈 것이냐, 정말 끔찍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요컨대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해서 박정희를 평가해야 합니다. 박정희를 평가할 때 항상 제일 부각되는 게 경제발전이에요. 나는 사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정신문화, 정치문화, 사회현상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박정희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늘 주장하지만, 논점이 너무 복잡해질 수 있으니 경제발전에 초점을 맞춰 얘기해보죠.

일본이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통해 1970년대 초반 들어 2차대전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어버렸는데, 여기에 일본의 무슨 수상이 잘해서 그렇게 됐다는 얘기는 안합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그야말로 놀라운 발전을 했지만, 에르하르트(L. Erhard)가 10년 동안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는 하더라도 그에게 그 공을 독점시키지는 않거든요. 대만이 61년에서 83년까지 한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장 제스(蔣介石)나 그의 아들 장 징궈(蔣經國) 때문에 경제가 발전했다는 얘기는 안하죠. 그리고 86년에서 88년까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 있었는데 그걸 전두환(全斗煥)의 공로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상하게도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런 신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극우반공세력은 박정희 가지고는 안심할 수 있다, 계속 박정희를 키우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자기네 세계를 열어가는 데 튼튼한 담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유신체제하 경제발전론을 반박한다

 

박준형 60, 70년대 한국경제의 발전이 박정희만의 공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시기의 경제발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서중석 국내외적인 조건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먼저 국내를 보면, 근면한 산업예비군 한글세대가 50년대 중후반부터 두텁게 축적돼 있었다는 것이 첫째고, 둘째는 국가의 능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육이 큰 원동력이었고 테크노크라트를 그 다음으로 거론할 수 있겠습니다. 50년대 중후반 미국에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58년 산업개발위원회가 구성되고 60년대에 경제기획원이 움직이는데, 이로써 50년대에는 대한노총 노동자의 수조차 통계를 못 내던 사회가 60년대 초중반 이후로 1인당 GNP 통계도 낼 수 있고 전반적으로 국가의 경제운용 능력이 크게 함양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국외의 조건인데, 50년대부터 70년대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던 때예요. 50년대까지는 해외차관을 얻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특히 70년대 들어 유로달러를 포함해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자본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차관의 규모가 막대하게 커집니다. 또 60년대에 7대 오일 메이저가 전세계 석유를 장악하여 1배럴에 1달러씩, 얼마나 싼 에너지가 공급됐나요. 이런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한국이 60년대말, 70년대초 한때 경제위기를 맞아요. 노동집약적 수출이 한계에 이른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중화학 쪽으로 가자, 이렇게 된 거죠. 한국과 대만이 똑같은 기로에 섰던 건데 그래서 양쪽이 동시에 중공업에 매진하면서 대만의 10대 프로젝트나 한국의 중공업화선언이 같은 시기에 나왔어요. 아무튼 70년대 초반은 중화학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지요. 그 당시 선진국에서는 중화학공업이 대체로 사양화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분야는 그만두고 좀 뒤처진 나라에 주자고 한 겁니다. 일본이 왜 고등 제철기술 같은 걸 한국에 주었겠습니까. 그런 여건 속에서 또 중화학 수출시장이 좋아져 76, 77년에 크게 성장하거든요. 이렇듯 국제경제를 무시한 국내경제 분석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돼요. 특히 한국은 수출 위주의 경제편성이라 국제경제가 나쁘면 국내경제가 좋을 수 없어요. 한일협정 체결로(1965) 자본이 들어왔고, 베트남전쟁(1965~73) 특수, 그리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파견, 이런 요인들이 한국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동력이 됐는데, 그건 꼭 박정희가 주도해서 된 게 아닙니다. 서독이 요청해서 간 거고, 한일협정이나 베트남 파병도 마찬가지예요. 미국이 요구했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식은 달랐을 수 있지만요. 70년대 중반에 다시 고비를 맞지만 그때부터 갑자기 중동 특수가 일어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박준형 ‘개발독재’라는 말처럼 일각에서는 지속적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유신체제가 불가피했다고 말합니다.

서중석 박정희 경제를 말할 때 제일 핵심은, 유신체제가 경제발전에 득이냐 해냐 하는 겁니다. 사실 진보세력이 박정희 18년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박정희 문민통치 시절은 그것대로 충분히 인정을 해줘야 해요. 문제는 유신체제인 거예요. 박정희 시대의 여러 메커니즘을 보면 75년까지는 유신체제가 아니었다고 해서 경제발전이 후퇴했을 거라고 볼 수는 없지요. 그리고 75년 이후는 김종필(金鍾泌)이나 김영삼(金泳三)이나 김대중(金大中)이나 누가 돼도 난 박정희보다 잘했을 거라고 봅니다. 한국이 원래 엄청난 동원국가예요. 천년 동안 중앙집권적으로만 발전한 독특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다른 나라엔 그런 역사가 없습니다. 더구나 일제와 미군정, 이승만이 얼마나 동원정치를 폈습니까. 박정희가 이걸 이어받은 거예요. 하여튼 전반적인 면에서 유신체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1980년에 우리나라가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52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극복한 다음부터는 한번도 마이너스인 적이 없었습니다. 1960년이 경제적으로 무척 나쁜 해였고 정권이 세번이나 바뀌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경제 악재가 다 겹쳤는데 그때조차도 플러스 성장을 본 거예요. 그런데 80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는 걸 많은 이들은 눈여겨보지 않지요. 아주 심각한 현상이었는데요. 나는 이 경제침체의 큰 원인이 박정희의 과욕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치열하게 일어나니까 경제로 답을 해주겠다 하면서, 성장을 위해 중화학공업을 무조건 확장하기만 했어요. 하지만 재벌이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중복・과다 투자를 하면서 몸이 불어나는 속에서 오히려 경제가 굉장히 어렵게 됐어요. 또 노풍벼(신품종 볍씨) 피해가 박정희 말기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중곡가제와 통일벼 보급 때문에 70년대 중반에 식량자급이 됐어요. 그러자 정부는 유신체제를 홍보하려고 식량증산을 내세우며 새로운 볍씨를 개발했는데 문제는 실험 없이 바로 재배했던 거죠. 농민들은 몇년간 경험으로 이중곡가제하에서 재배만 하면 수지가 맞는다며 그걸 마구 심었는데 그만 도열병이 돌아버린 거예요. 그러자 옥토지대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렸죠. 그래서 781212총선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1.1% 앞섰고, 더 강성인 제2야당 표까지 합치면 8.5%를 앞선 거예요. 장기집권과 경제난 때문인데, 그래서 비서실장과 경제관료를 모두 바꿀 수밖에 없었잖아요. 이렇게 경제가 악화되었는데, 이듬해인 1979년에 훨씬 더 불황이 심화되고 물가고,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동산투기붐, 조세저항 등이 김영삼의원 제명사건과 겹쳐 일어난 것이 부마항쟁이지요. 중화학 중복・과다 투자 후유증은 1980년에 훨씬 더 심각해 29년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이지요.

2공화국의 장면(張勉) 총리나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열심히 경제발전에 힘썼지만, 박대통령은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516쿠데타를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성공한 것도 그렇고, 박정희 집권 초기는 경제정책의 잇단 실패도 작용해 나빴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 발전할 수 있는 국내외 여건이 대단히 좋아졌고, 또 중화학공업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만났고, 대단한 중동건설 특수를 맞았잖아요. 그리고 오일쇼크까지 겹쳐서 경제가 아주 어려워질 무렵, 부마항쟁의 현장에 갔다온 김재규(金載圭)가 경제와 장기독재로 전국적인 민란 같은 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로 유신의 심장을 쏘는 사태가 ‘빨리’ 일어남으로써, 박대통령이 경제를 얼마나 어렵게 했는가를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 전에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되어 나중에 박정희 씬드롬으로 ‘부활’할 수 있게 된 것도 역설적이지만 사실이잖아요.

박준형 경제에 대한 기여도와는 별도로 유신체제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막대합니다. 유신체제의 유산은 무엇이며 그것의 청산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중석 박정희 시대의 유산 중에서도 제일 큰 짐이 성장지상주의입니다. 근대화지상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떤 비인간적인 수법을 쓰더라도 경제발전만 하면 된다, 목표 달성만 하면 된다는 데 상당수가 동의를 해버린 거잖아요.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무시했잖아요. 저 사람이 경제발전 시켜줄 거다 하면서요. 이런 식의 경제지상주의, 성장제일주의, 근대화지상주의를 확고하게 가진 사람이 우리 사회에 40~50퍼센트가 있는데 이들이 수구냉전세력을 지지하는 강고한 기반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2010년 천안함사건을 전후해서 두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어요. 하나는 사건 직후 62일 지방자치선거에서 여권이 북풍을 잔뜩 기대했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북쪽과 제일 가까워서 반공표가 많이 나오던 경기도와 강원도 등에서 결과가 거꾸로 나왔어요. 그러면서 야당이 크게 약진한 선거가 됐죠. 그런데 그때를 전후로 극우세력이 공공연하게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강한 대북 적개심을 표출했어요. 마치 유신시대를 연상시킬 정도였는데, 615남북공동선언 이후에 이뤘던 성과를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게 할 만큼 극우반공세력의 의지가 강렬하게 표출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북주의 몰아세우기로 대표됩니다만, 이런 현상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필요해요. 한반도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 그게 대한민국의 경제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해야죠. 왜냐하면 우리는 앞으로 중국, 러시아와 경제관계를 더욱 깊게 가질 수밖에 없어요. 유라시아 철도라든가 시베리아 가스・송유관 같은 사안을 포함해서 동북아 경제의 통합적 발전까지 염두에 둬야죠. 그런데 그런 모든 게 남북관계가 심각한 갈등을 갖고 있을 때 실현 가능한가, 과연 중국과의 관계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편으론 과거 유신체제에서는 인본주의, 인간주의가 전혀 자리잡을 수 없었다는 점이 있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본주의의 토양은 유신체제에 대한 깊은 반성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민주정부 10년의 공과(功過), 세심히 분별해야

 

박준형 선생님께서는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이한 강연에서 우리 역사에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김대중정부에서 노무현정부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민주정부를 통해 역사의 가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2008년 이후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우익 쪽에서는 선생님께서 가능성을 발견한 그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래서 민주정부라고 할까요, 그 시기에 대해 지금 선생님께선 어떻게 평가를 내리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공이 있다면 과도 있을 텐데요.

서중석 앞서 말한 것처럼 박정희정권도 군정시대와 3공화국시대와 유신시대를 엄격하게 분리해서 봐야 하는데, 절차적 민주주의가 있었던 3공 시기에 어느정도 커갔던 역사의식 등을 발판으로 70년대에 역사학계나 경제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비판적인 의식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6월항쟁 이후에는 노태우(盧泰愚)정권조차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힘이 작용했다고 할까요, 물론 3(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을 통합해 보수대연합인 민주자유당을 만들고 했던 측면도 있지만 점진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진전되도록 국민의 요구를 수용한 점도 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후에 들어선 김영삼정권은 초기에 8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얻었어요. 아마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할 겁니다.(웃음) 군부 30년 독재를 단칼에 잘라버리고 금융실명제를 포함해서 대단한 개혁을 해냈죠. 나중에 죽을 쒀버렸고 남북관계에서 잘못한 게 많지만 초기는 달랐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참 어려운 상황에서 집권했습니다. 97IMF사태는 우리 역사에서 최대의 경제적 위기 중 하나였죠. 그때 김대중정부가 영국 새처리즘을 상당부분 수용한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당시 나는 정말 통탄해 마지않았어요. 그러나 여성정책을 포함해서 소수자를 위한 배려에선 진전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건, 남북갈등이 그때도 얼마나 심했습니까. 서해교전 비롯해서 여러 문제에 김대중 대통령이 참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봐요. 그래서 2000615정상회담까지 가면서 한반도 역사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았죠. 그런 부분을 노무현정권이 이어받으려고 상당히 노력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험 부족으로 야당을 다루거나 여당을 통솔하는 데 여러 문제를 노출했어요. 그리고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그런 경향의 하나라고 봅니다만, 경제관료한테 지나치게 기대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공로는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수천년간 억압돼 있었어요. 군주제 하에 있었잖아요. 일제총독 지배의 역사도 겪었고, 해방 후로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정말 지독한 독재체제 속에 있었어요. 반면에 노무현 대통령은 대단히 서민적인 사람이에요. 아주 강한 평등주의, 반권위주의를 내세웠어요. 대통령 권한도 최대한 축소해버렸죠. 그처럼 모든 면에서 철저하려고 한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무리가 있긴 했습니다만 우리나라가 너무 불균형적인 지역경제를 가지고 있으니 균형을 맞추려 했죠.

박준형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은 보수우익의 패배주의적 감성의 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민주정부의 10년이 앞선 시기와의 단절이라기보다는 결국엔 6월항쟁 이후 우리 사회의 점진적 진보의 산물이었다고 보고 계시군요. 그럼 오늘의 주제인 역사 연구나 교육과 관련해서는 민주정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서중석 대체적으로 우리 역사가 큰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 각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인정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 근현대사 연구나 교육도 상당히 꽃을 피웠죠. 특히 노무현시대에는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한 대단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때 이미 제주43위원회가 세워졌고요. 아무튼 해결하기 무척 힘들고 어려운 학살 문제를 전반적으로, 타당성있게 다루는 진실화해위원회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역사학자에겐 과거사 청산 문제가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면에서 근현대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국민적 안목이 키워졌다, 그 속에서 폭넓게 인본주의, 인간주의와 연결되는 자유가 이 시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난제를 풀기 위해

 

박준형 진실화해위원회를 말씀하셨습니다만, 우익에서 진보사관에 대해 자학이라고 하는 데는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범죄를 ‘나’와 일체화시키는 사고방식이 있는 듯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국가가 주체가 되어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이 꽤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피해자의 복권뿐 아니라 자학이라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죄의식을 해소시켜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요. 하지만 그들의 죄의식은 오히려 깊어졌고 민주정부와의 괴리 속에서 상실감과 패배주의만 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은 저서 제목이기도 한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라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그 표현을 빌린다면 그들은 ‘지배자의 국가’와 자신을 일체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민중의 나라’와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서중석 일제 군국주의자들, 극우반공세력은 자유나 민주주의, 인권, 인본주의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거리감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일부에서는 어떤 조건에서라면 이승만이 민주주의 정치를 할 수도 있었지 않느냐고 묻는데, 난 이렇게 답합니다. 민주주의 정치를 하는 그 순간부터 이승만은 권력을 잃게 될 거라고. 이승만에게는 민주주의와는 너무 먼 비민주성, 말하자면 친일파라든가 일제 잔재의 온존이라든가 사회혼란 같은 게 있어야 계속 집권할 수 있는 면이 상당했다, 그걸 간과하지 말라는 겁니다. 유신체제도 그와 비슷한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죠.

일부 극우반공세력이 과거사 청산에 대해 자학사관을 들먹이곤 합니다만, 전 일본의 극우세력을 보면서 변형된 신()나치 세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인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 억압을 받아야 말을 잘 듣는다.’ 일제 때 참 많이 썼던 말이고 유신체제 때도 횡행했습니다. ‘유신 같은 강한 체제가 있어야 국민화합이 된다.’ 그게 무슨 화합입니까? 억압 속에서의 화합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강제로 끌려가는 것 말고는 무슨 인간의 자유, 자율성을 생각할 수 있느냔 말이에요. 20세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특히 서유럽을 중심으로 대량학살 등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과거사를 참회하고 반성하면서 화해하자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등지의 인종차별 같은 것도 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세계적으로 많이 약화되고 있어요. 일본에서의 조선인 차별도 겉모습은 80년대 이후 많이 달라지고 있잖아요. 이렇듯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을 거스르면서 과거의 억압지배가 좋다고 하는 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죠.

사실 역사 기술(記述), 특히 교과서 서술 문제는 과거사 청산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어요. 예컨대 제주도 사람들이 한맺힌 게 있거든요. 예전 교과서에서는 43을 좌익폭동, 그것도 북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여러번 써놨어요. 이건 전혀 근거 없는 겁니다. 제주 43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이뤄져서 충분히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고 보는데 교과서는 안 그랬던 거예요. 그 교과서가 2000년대에 와서야 달라진 건데 그것을 옛날로 되돌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금년에 나타났어요. 이제 현대사를 기술한다면 우리가 2000년대 들어 과거사를 청산하려고 한 노력이 담겨 있어야 하고, 이것이 근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교육과 인식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과거사, 특히 학살 문제에 대한 반성은 세계적인 추세에서 보듯 인간 본연의 양심을 회복하는 게 핵심입니다. 독일의 메르켈(A. Merkel) 총리는 학살을 영원히 기억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이야기했는데,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친일파 문제를 둘러싼 논란

박준형 우리 과거사 청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친일파 문제입니다. 과거사 청산은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한편에서는 저항과 협력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행위가 아니었다, 결국 누구나 친일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게 아니냐면서 단죄와 같은 형식의 청산은 안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사 청산 문제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면 적대를 물려주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서중석 나치즘이나 군국주의, 파시즘은 인류사에 역행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난 것에 대해선 철저히 비판, 단죄해야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나치 협력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고, 얼마 전엔 이딸리아에서 죽은 나치 전범의 장례식을 못하게 한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나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똑같은 궤도에 있는 거죠. 일각에서 한국은 35년이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4년 정도밖에 안되는 프랑스의 예를 따라 처벌하자는 것은 비현실적이지 않느냐고도 하는데, 대단히 부적절한 말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경우 구한말에 매국노, 민족반역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해도 좋아요. 그리고 1910, 20년대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협력했다고 하더라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모두 단죄의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최남선(崔南善), 이광수(李光洙)만 하더라도 이 시기에 친일적인 주장도 많이 했지만 한국인이 보기에는 민족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주장도 했어요.

문제가 되는 것은 1930년대 중후반에서 45년까지 일본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편승해 덕을 보려고 그 광적인 전쟁에 적극 가담해 한국인을 내몰면서 징용이라든가 공출 같은 여러 방식으로 협력한 경우예요. 연합국이 여러 전범재판에서 밝힌 대로 이러한 경우는 인류의 적이자 비인도적인 행위로 마땅히 규탄받고 처리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거기에 더해 씻을 수 없는 죄악을 하나 더 저질러졌어요. 황국신민화운동이라고 해서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완전히 일본인이 되라는 건데 이건 문화와 인간,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입니다.

박준형 해방 정국에서는 이광수 같은 인물도 일제 치하에서의 친일행위에 대한 자기반성적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서중석 해방이 됐을 때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성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때 악질에 대해 어느정도 처단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반성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친일파 문제는 역사에만 남지 현실에서는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반공세력이니 수구세력이니 이런 것도 안 생겼을 테지요. 일본도 어쨌든 전전(戰前) 세력이 자민당의 중추가 됐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많은 구석은 민주화되지 않았습니까. 전쟁 때와 많이 달라졌잖아요. 오히려 예전의 일본적인 성격이 많이 남은 곳은 한국이었어요. 친일파 세력에 의해 온존된 겁니다. 해방 이후에 다시 친일파 세상이 되니까 그전에 반성했던 사람들도 달라집니다. 나는 박정희가 자신이 일본 군인이었다, 일본 군인정신이 철저했다며 반성을 남긴 기록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친일파 폐해가 심각한 것은 해방 후 처리 문제도 있지만 역사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거예요. 일제의 나쁜 습성이 해방 후에 오히려 권력을 업고 더 커져버린 면이 있습니다. 한국은 분단체제에서 비롯된 갈등이 오래전부터 아주 심각합니다. 이런 현상을 고착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세력 중에서도 친일파가 언제나 앞장서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들처럼 통일국가를 반대하고 남북화해를 반대한 세력이 없습니다. 남북이 화해할 경우 자기가 설 자리가 없다는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고 대비한 거죠. 해방 이후 수십년간 우리가 얼마나 가치관의 혼란을 느꼈는지 지금 젊은이들은 이해 못할 거예요. 그 당시 정의라는 것, 정직하게 산다는 것,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어떻게 대우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어진 친일파 세상에 대한 이야기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건국에 집착하는 한・일 우익의 내면

 

박준형 2008년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이하여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논의도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1997년부터 이미 1952428일, 즉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어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날을 기념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그들도 815일의 ‘종전기념일’을 428일의 ‘주권회복의 날’로 대체하려는 것인데, 올해 일본정부가 주최한 ‘주권회복의 날’ 기념식에서는 “천황폐하 만세”까지 외쳐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우익이든 한국의 우익이든 국가의 탄생(birth) 혹은 재생(rebirth)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국가의 정통성을 새로운 기원으로부터 재정립하려는 움직임과 관련될 텐데요. 그 점에서 한국 우익이 말하는 ‘건국’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중석 우선 용어 측면에서 한마디하고 싶어요. 일본인의 용어 문제가 심각합니다. 히로히또(裕仁)가 읽은 것이 「종전칙서」(終戰詔勅)로 되어 있어요. 그게 패전이지 종전입니까. 대동아공영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한국도 일본을 배워서 그런지 민족주의라든가 자유민주주의라든가 하는 수많은 용어가 뒤엉켜 있어요. 언어를 어떻게 쓰는 게 정확한가, 어떤 개념과 관련지어서 용어를 쓸 것인가를 원론부터 생각해야 해요. 어떤 단어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그것이 왜 일본과 한국에서는 왜곡되어 잘못 쓰이고 있는가, 이런 것을 역사학이라든가 언어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합니다. ‘건국’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건 아닙니다. 언제 어떻게 써야 하냐의 문제죠. 지구상의 많은 나라는 신생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하라 이남, 남북 아메리카, 태평양제도가 그렇고, 제국의 형태로 있었던 중동의 여러 나라도 그렇지요. 그러나 한국을 신생국가라고 하면서 건국이라고 얘기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봐요.

박준형 대한민국은 신생국가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서중석 건국이 아니라 주권회복입니다. 이미 1919년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건국이라는 말은 부적절하고 오해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연합국의 지배를 여러해 받았는데도 아무도 신생국가라고 안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신생국가라고 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건국, 건국절이라고 하면 광복이라는 말과는 달라서 독립운동이 떠오르지 않고 오히려 이승만의 단정(單政)운동에 앞장선 친일파가 떠올라요. 또 이 용어에는 유일 합법정부 같은 말이 결부되면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나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를 연상케 해요. 분단을 합리화하는 측면도 대단히 강하지요. 이렇듯 여러모로 볼 때 건국이라는 말은 되도록 적게 쓰는 게 좋습니다. 헌법도 건국헌법이 아니라 그 당시 사용한 그대로 제헌헌법인 거예요. 그리고 헌법정신에 살아 있는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이어받는 것을 의미 깊게 새겨야지 무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박준형 같은 용어이지만 일본 우익이 ‘주권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패전 후 미군정기가 ‘주권상실’의 시대였음을 부각시키고, 그 당시에 추진된 민주화 정책과 군국주의 해체를 과소평가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우익에게 미군정기란 자기부정의 시대와 같았기 때문에 국가의 단일하고 연속적 역사 속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움직임은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우익의 꾸준한 시도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우익은 ‘주권회복’의 의미마저도 부정하려 든다는 점에서 일본의 우익보다 한층 더 뒤틀려 있습니다. 60, 70년대의 경제성장이 박정희 신화로 윤색되어 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 이야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화가 시도되고 있는데요.

서중석 6월항쟁 이후 특히 1995년 광복 50주년 이후를 보면 박정희보다 이승만 살리기에 치중하는 면이 있어요. 박정희는 진보세력도 인정하는 구석이 있지 않느냐는 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승만에게 그렇게 매달리고 그를 건국대통령으로 미화하려는 것은 4월혁명으로 쫓겨난 것을 합리화하는 목적도 있지만 해방 전후의 복잡하고 다사다난했던, 특히 친일파 문제를 봉합하고 은폐하면서 자신이 분단이라든가 독재에 협력한 것을 합리화・정당화하는 기제로 삼으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김구(金) 암살범인 안두희(安斗熙) 재판 때 바로 지금 우리가 나누는 수많은 문제가 제기됩니다. 안두희는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이 암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했어요. 검찰관이 그걸 제재하려고 하니까 원용덕(元容德) 재판장이 가로막았어요. 원용덕은 만주군 중좌 출신, 나중에 이대통령에 의해 헌병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악명을 떨친 사람입니다. 변호사는 안두희를 대한민국에서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법정 안팎으로도 안두희는 의사(義士)다, 안두희는 대한민국의 표창감이다, 이런 벽보가 붙어 있었죠. ‘건국’을 위해서 김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논리가 아주 강하게 작용한 거죠. 그후 안두희는 군에서 특진을 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419로 고난의 길을 겪습니다만, 516 이후 다시 해방된 기분으로 잘 살게 됩니다. 이런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 단면이 우리의 국가관, 건국론과 연결이 된다고 봅니다.

 

민족주의 비판에 대한 입장과 열린 민족주의

 

박준형 차원을 좀 달리하는 문제입니다만, 한국사회는 이미 외국인등록자 수가 백만이 넘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에 기반한 역사서술이라는 게 한국 화교를 비롯해서 결혼이주자라든가 이주노동자, 조선족처럼 국민이나 민족의 범위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는 반성을 할 수 있겠는데요. 선생님께서 대한민국은 신생국가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주권의 회복이란 의미에서는 타당하지만 근대국민국가의 성립이란 점에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듯합니다. 예컨대 국적법을 처음 심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해방 이전에 태어난 이들도 대한민국 국민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새로운 데 반해, 혈통주의에 기반한 국적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국민은 이미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일 것입니다. 국민국가는 언제나 과소 상태에 있거나 과잉 상태에 있다고도 합니다만, 대한민국 ‘건국’의 또다른 의미는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한 ‘국민’ 만들기, 뒤집어 말하면 소위 빨갱이나 외국인 같은 ‘비국민’의 배제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일본에서는 요즘 재특회라고 해서, 재일조선인의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모임이 활동 중에 있습니다. “한국인은 돌아가라”고 외치는 저들의 목소리는 사실 청산되지 않은 식민주의, 과거사 문제와도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사 청산을 위해서라도 현재 역사학이 풀어야 할 과제라고 한다면, 국민의 범주 밖에 있거나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역사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열린 민족주의라는 개념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서중석 ‘비국민’이라는 말은 일제 말부터 유신시대에 걸쳐 꽤 많이 사용됩니다. 주로 일본 천황이나 이승만・박정희 권력에 저항한 사람들을 가리키곤 했고, 특히 좌익수와 그 가족이 비국민 취급을 받았는데, 21세기에 이주노동자 문제가 생긴 거지요. 앞으로 이주노동자 수가 많아지면 우리나라에도 신나치 비슷한 극우세력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구언론도 태도가 지금보다 훨씬 악화되지 않을까 걱정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대체로 다문화를 이해해야 된다, 소수자를 중시해야 한다 하지만요. 앞으로 국적법 같은 것도 좀더 포용성있게 수정해서 이주노동자가 국적을 쉽게 취득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강구해야죠.

박준형 한국의 자민족 중심주의는 일본 우익의 혐한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임지현(林志弦) 교수는 교과서 문제와 관련하여 “국사 공부 그만하고 이제 역사 공부를 하자”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민족주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중석 민족주의에 양면성이 있다는 건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을 보면 아까 얘기한 사구체 논쟁이 떠올라요. 너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얘기가 아니냐. 우리 근현대사에서 민족주의가 뭐가 잘못됐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얘기해야 되는데 이게 다른 나라 민족주의 비판인지 우리 민족주의 비판인지 알 수가 없어요. 난 민족주의가 한국에 아직도 유용한 측면이 있다고 봐요. 물론 그게 소수민족 문제에서 배타적인 성향으로 나타나거나 일본과의 관계에서 감정적이 되면 안되겠죠. 하지만 우리가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나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관계를 만들어가는 데도 민족주의가 일정기간 동안은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박준형 저 또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를 말하는 순간 순수한 민족의 구성이라는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와의 연관 속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재평가가 긍정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에서 민족주의라고 하면 우선 군국주의를 떠올리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뒷받침한 것은 사실 단일민족론이 아니라 혼합민족론이었다는 연구는 시사적입니다. 열린 민족주의도 똑같은 반성이 필요하겠지만, 민족주의의 역사성에 무감각한 민족주의 비판 또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논리에 부합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서중석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현대사 공부를 통해 얻는 긍지와 반성

 

박준형 대화의 막바지에 온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얘기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교과서는 학교교육 씨스템과 연계되는 까닭에 많은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기존 교과서의 역사서술을 넘어서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일국사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선생님도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현대사 개설서를 저술하신 바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는 학생들에게 “자네들은 그야말로 6월항쟁의 최대 수혜자인데 어째서 6월항쟁과 우리 현대사를 그리도 모르는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선생님께서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서중석 지금 같은 세계화시대에 특히 한국은 워낙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편성돼 있어서 동양뿐 아니라 서양과도 많이 교류하고 더불어 그들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춰야 하는 특이지대라고 생각해요. 일본도 마찬가지죠.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 열심히 하고 영어 열심히 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일본이든 한국이든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 교양은 갖춰야 이런 시대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고 봐요.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자기 문화와 근현대사를 모르고 남과 교류한다면 정체성이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고 봐요. 그럼에도 지금 학생뿐 아니라 사실은 언론인이나 지식인, 대학교수도 현대사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그런데다 극우보수언론이 저렇게 떠들고 있잖아요. 이런 역사논란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도 대중이 현대사의 기본 지식은 갖췄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한국사 못지않게 세계사를 중시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하는데, 특히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세계사를 잘 알지 않으면 안되는 나라예요. 그런데 세계사와 한국사가 학교에서 암기과목이 돼버려서 입시에서 가장 꺼려진다는 게 참 슬픈 일이에요. 현대사에 대해서 재미와 함께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도록 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고, 역사책도 그렇게 씌어졌으면 좋겠어요. 내가 『6월항쟁』(돌베개 2011)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6월항쟁을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와 함께 우리 문화사, 생활사, 일상사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지고 자기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속에서 세계와 어떻게 대화할지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박준형 마지막 질문입니다. 처음에 역사전쟁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 국면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전망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중석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전쟁은 여러가지가 뒤엉켜서 참 복합적인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합리적・이성적인 논리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막가파식의 싸움을 벌이고 있어요. 역사교육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종북주의자라고 몰아세우는 속에서 새로운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가 출현했는데, 이런 식의 쟁투는 함께 자멸하자는 것이지 조금도 생산적인 싸움이 될 수가 없고, 우리 사회의 출구나 미래를 닫아버리는 퇴행의 처사라고밖에 보이지 않아요. 몹시 암울합니다. 나는 6월항쟁 직후부터 우리나라의 극우반공세력이 뼈아픈 반성을 할 것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습니다. 2008년 봄에 낸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역사비평사 2008) 서문에서 곧 출범하게 될 이명박정권에 대한 기대감을 쓴 적도 있어요. 합리적인 보수정권이 나왔으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이번 역사교과서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이건 70년대, 50년대 싸움인 거예요. 이런 모습을 볼 때 한국은 진보세력도 문제가 있지만 보수세력은 정말 깊은 병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 생각은, 국회에서 작년인가 통과시킨 국회선진화법과 비슷한 법을 만들었으면 싶어요. 정권은 항상 바뀔 수가 있어요. 그러나 국회는 완전히 바뀌는 건 아니니까, 교과서를 검정하는 독립기구를 여야 일정한 비율로 구성하는 거죠. 제일 바람직한 것은 여러 선진국에서 하듯 자유롭게 출판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건데 당장은 어렵다면 독립기구에서 검인정을 하게 보장할 수 있도록 국민합의를 이끌어내는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박준형 현행 기구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있습니다만.

서중석 그게 독립기구가 아니니까 그렇지.(웃음) 내가 국편위원을 하는 동안(2003~2009) 이름부터 바꾸자고 그렇게 주장을 했어요. 도대체 국사라는 용어 자체도 말이 안 되지만 어떻게 국사를 편찬한다는 말이냐 그랬죠. 한국사는 세계사처럼 자연스럽게 써서 검인정 수준으로 두어야 해요. 국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나 국립도서관, 국가기록원처럼 한국사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하면서 연구자들과 공유하는 쪽에 중심을 둬야 한다, 국사편찬위는 없애야 한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법을 바꾸는 게 힘들다고 하면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어요.

박준형 선생님께서는 어려울 때에도 항상 낙관적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낙관적인 전망도 부탁드립니다.

서중석 궁극적으로는 진보세력도 크게 반성하면서 우리 현대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보수세력은 그야말로 합리적인 보수주의자가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수준을 높여야지요. 성숙된 모습을 보일 때 이런 역사전쟁은 없어질 거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반성을 많이 해야 합니다.(2013.10.30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