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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제는 공감의 토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조연정 평론집 『만짐의 시간』・양윤의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
김미정 金美晶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비상브레이크, 자율적 공간, 문학」이 있음. null8@hanmail.net
사랑, 욕망, 웃음, 눈물, 우울, 정념, 고통, 감정, 청혼, 애무. 조연정(曺淵正)의 『만짐의 시간』(문학동네 2013)에서 눈에 띄는 어휘들이다. 이 책에 첫번째로 수록된 글이 신경숙(申京淑)과 한강(韓江)의 소설을 다루면서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것도 상징적이거니와, 특히 ‘사랑’이라는 말의 빈도수와 밀도는 단연 압도적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일단, “우리 시대만의 망탈리테를 탐색”(118면)하는 비평작업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여겨도 된다. 나아가, 저자가 김영하(金英夏)와 김연수(金衍洙)의 소설을 읽으며 “진정한 사랑의 연대”(73면)를 말하거나, 심보선(沈甫宣)의 시에서 우정과 사랑을 읽는 부분(528면)을 나란히 놓는다면 그 함의는 조금 더 분명해진다.
양윤의(梁允禕)의 비평은 조연정의 비평과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와 주체와 시대를 엮는데, 이것은 과거의 유물론적 미학론을 연상시키면서 형질적으로 다른 방법에 의거하고 있다. 『포즈와 프러포즈』(문학동네 2013)에 수록된 첫 글 「광장(square)에 선 그녀들」의 상징성에 의거하자면, 그가 2000년대 문학을 직조하는 키워드로 삼은 ‘물질, 육체, 정신, 관념’은 과거 토대-상부구조 식의 수직적 상호결정력을 연상시키지만 그 관계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 넷은 수평적 좌우관계로 조합되어 있고, 이 관계도 속에서 2000년대 문학이 재조립된다.
또한 「느낌의 서사학」에서 엿볼 수 있듯, 양윤의의 비평은 각 텍스트들을 통해 경험되는 ‘느낌’(이라 총칭할 만한 감응관계)과 서사구조의 상관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이다. 이때 사용한 방법론적 개념이 “함께 고통받는다(com-passion)”(「정념의 수용기(受容器), 공감의 문학」)라는 의미의 ‘공감’이라는 점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한편 『포즈와 프러포즈』에서는 대부분 여성작가의 소설이 다루어지는데, 저자가 이들 소설을 ‘여성작가의 소설’이라고 명명하면서도 여기에 ‘여성’의 생물학적 성별이나 젠더 개념을 함의하지 않겠다고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여성’ 담론의 변천 자체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선험적 변별자질로서의 ‘여성’을 거부하고 있지만, 계속 ‘여성’을 호출하거나 의식게 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언급하면서 언급하지 않고, 이분법의 폐기를 말하기 위해 이분법의 언어를 전유하는 전략이라 해야 할까. 이 ‘여성’ 관련 명명법은 별도로 다루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만짐의 시간』과 『포즈와 프러포즈』를 읽으며 한국문학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근 30여년간의 한국문학이 내내 ‘우리’와 ‘나’라는 두 주어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두 비평집을 통해 다시 생각한다. 환멸이라는 정서, 태도로서의 냉소로 설명되던 1990년대는, 1980년대적 공동체의 가치가 지양된 자리에서 출발했고, 그에 대한 비평적 모색으로서의 개인윤리 담론이 승하던 때였다. 또한 환멸이나 냉소 등은 2000년대 초중반 쿨(cool)함, 유머, 명랑성 등의 정조로 재해석・승계되었고, ‘우리’라는 말과 연동된 ‘공동체’ ‘연대’는 야만적 파시즘이나 사회주의의 실패한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하는, 오염된 개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2013년에 출간된 두 비평집에서, 간헐적이지만 ‘공동체’ ‘연대’ 같은 말들이 다시 비평의 언어로 등장하는 것을 본다. 이때 서둘러 부기해둘 것은, 물론 이 말들이 이전 시대의 동질적 이데올로기 혹은 폭력적인 경험 속의 ‘우리’를 통해 구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이 비평들은 ‘공감’의 비평, ‘공감’의 문학이라는 말로 요약하는 편이 정직할 것이다. 이것은 두 저자 공히 느낌, 마음, 정념 등의 여러 표현으로 변주되는 어떤 특정 정서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의 비평작업 자체가 공감의 수행적 읽기, 쓰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정념의 연대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없을까”(양윤의, 101면), 혹은 “이 땅의 슬픈 자들이여 단결하라!”(조연정, 212면)라는 구절을 통해 볼 때, 여기에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해, 수동적 감응을 능동적 지향성을 가지고 변이시키고자 하는 미세한 진동이 있다. 정념, 마음, 느낌 등의 영역에서 ‘우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이들의 글 속에 의식・무의식적으로 틈입되어 있다. ‘우리’의 가치가 이전과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활성화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감성의 공동체”(조연정, 72면), “이데올로기적 동일시를 타파하는 연대의 가능성”(양윤의, 100면) 등의 표현이 단순한 수사로 읽히지 않는 것도, 이 두권의 비평집이 지금 시대에 다시 숙고되는 어떤 가치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우리’의 긴장관계 사이에서 시대를 생각하고, 글을 읽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두 비평집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우정, 공감, 사랑과 같은 덕목은 분명, 개인으로서 ‘나’라는 외로운 성채를 넘어, 타자를 인식론적으로 지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존재론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시대의 흔적이다. 말하자면 체념과 불안과 낙관이 모호하게 뒤섞인 2000년대 초중반을 거쳐, 2000년대 중반 이후 사뭇 달라진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 그리고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 전지구적 씨스템의 위기 속에서, ‘그럼에도 속수무책 무기력하게 절망하며 외롭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바라게 된 동시대적 자각과 실감이 이 비평집들의 수사에 미학적으로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 사유되지 않은 채 ‘회복되어야 할’ 인간성이 있다고 전제되거나(조연정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 정념의 외부가 이야기되지 않고 텍스트 안에서 신학적 ‘초월론’으로 승화될 때(양윤의 「정념의 수용기(受容器), 공감의 문학」), ‘공감’은 문학적 정의(justice) 혹은 문학의 당위를 강조하는 고집스러움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이 비평집들에서 공히 개별 텍스트 비평이 승한 것도 그 징후로 여겨진다. ‘공감’ 가능성의 시대적 토대(인간 범주의 유동성, 상상력을 전유하는 자본주의 등등)가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무용하지만 내재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부정성의 형태로만 문학이 이야기되는 것은, 이 시대 문학의 위축된 조건을 비관적으로 다시 확인케 할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