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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장편소설의 곤경과 활로

김려령과 구병모의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1. 문제는 여전히 장편소설인가?

 

장편소설이 다시 문학비평의 이슈가 되고 있다. 지난 계절에는 장편소설의 경향과 과제를 점검하는 논의 및 장편소설 비평론을 다루는 메타비평이 문예지의 주요 특집으로 등장했다.1)장편소설의 쟁점과 현황을 점검하는 비평적 논의2)는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왔으나 최근 제기된 장편소설론의 메타비평적인 접근은 문학비평의 수세적인 현황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더욱 강하다. 문학과 정치에 관한 논의, 문학과 공동체에 관한 다양한 이론비평의 탐색에 견준다면 장편소설의 현재를 둘러싼 그간의 현장비평들은 생산적인 쟁점의 산출로는 연결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독자가 크게 감소된 문학출판 시장의 전반적인 위축이 자리잡고 있다. 문학잡지의 연재 씨스템과 각종 문학상을 통한 생산량의 증가와는 달리 독자의 관심을 끄는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은 발견하기 어렵다. 올해 출간된 소설 현황만 보더라도 정유정(鄭柚井), 김영하(金英夏), 조정래(趙廷來),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공지영(孔枝泳) 등으로 이어지는 화제작들이 있지만, 문제적인 경향으로 떠오른 새로운 작품의 사례는 많지 않다.

최근 반복되어 제기되는 장편소설 회의론과 불가능론은 이제 장편소설을 독려하는 비평적 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장편소설을 호명하는 비평담론의 뒤에는 시장의 요구와 출판자본의 욕망이 있으며 이것은 장편소설의 개념적 상투화를 이끌어 현재 장편소설의 위기를 심화시킨 직접적 원인이 된다. 이는 2000년대 이후의 ‘장편소설 대망론’이 “‘근대’라는 기표를 호명하면서 거대담론을 바탕으로 한 장르의 위계화”3)를 도모하고 있다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장편소설 무용론을 따라가다보면 현재 장편소설이 출간되고 유통되는 출판구조 속에서 긍정적 가능성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이제 문학은 “불안한 유희를 지속함으로써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는 방식”을 고수하는 특정한 형태의 소수적 글쓰기만을 통해 가까스로 존립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된다.4)

위의 논의는 시장의 생산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장편소설의 운명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근대 장편소설에 대한 제한적이고 관습적인 이해의 도식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장편소설론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은 현실에서 생산되는 작품이 근대 장편소설의 관습적 형식에 얼마나 부합되는가에 있지 않다. 잠시 바흐찐(Mikhail Bakhtin)의 논의를 환기하자면 근대의 장편소설이야말로 권위화된 담론들을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비판하는 다양한 언어적 모험들을 통해 창출된 형식이다. 소설에 스며든 다양한 언어들의 투쟁과 상호갈등은 근대자본주의체제의 모순과 갈등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이탈하고 맞서는 이질적인 흐름들을 드러낸다.5) 한국문학사에서 장편소설과 중편소설, 세태소설과 본격소설, 로만개조론 등 장편소설 이론이 가장 화려하게 펼쳐졌던 1930년대를 보더라도 창작자와 비평가가 함께 참여한 장편소설론의 전개는 실제로 생산되는 소설들과의 접합에서 가능한 산물이었다. 이 시기의 이론들이 서구문학이론의 영향과 일본 제국주의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적 한계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당대의 소설들을 해명하려는 나름대로의 자생적인 입론을 만들어내는 성취를 이룬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문학사의 복합적인 맥락을 편의적으로 떼어낸 채 근대의 권위화된 담론 속에 장편소설론을 묶어둔 후, 그것을 현재의 비평이론이 대항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는 문제제기는 그 자체로 심각한 해석의 오류를 드러낸다.6) 이러한 입장은 어떠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상업주의에 대한 모호한 비판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소진시킬 수밖에 없다.

장편소설의 장르적 분투는 시장의 요구와 사회현실의 급박한 문제제기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과정을 담아왔다. 노동자 주체의 형상화가 중요한 과제였던 1980년대의 문학현실에서 장편소설은 급진적인 장르 해체와 경계 확장을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장르였다. 시와 비평에 견줄 때 이 시기의 소설적 성과는 상대적으로 위축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장편소설은 비평과 르뽀르따주, 노동자의 생활수기, 일기, 편지 등의 다양한 산문양식에 가장 급진적으로 개방된 장르였다. 대중문화 컨텐츠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의 문학현실에서도 장편소설은 자본과 맞서 자신의 미학적 존립근거를 주장해야 하는 대상으로 호명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염두에 둘 때 시장자본과 장편소설의 관계는 어떤 일방적 영향관계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며 대중독자 역시 시장의 흐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명명될 수 없다.

장편소설론에서 필요한 현실적인 논의는 장편소설의 형식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다양한 현실비판적 요소들을 주목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서사적 활력의 다양성이 어떤 성과로 드러나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현재 장편소설의 가능성을 진단하는 비평론 역시 안정된 서사형식으로서의 장편소설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체제를 비판하고 전유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담은 장편소설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탈근대의 충동과 계기를 자본주의 상품화과정과 체제 내의 회로에 포섭되게 하지 않고 근대극복의 소중한 예술적 자원으로 만드느냐를 고민해야”7) 하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한다면, 장편소설을 ‘내용 없는 텅 빈 기표’로 몰아붙이는 소모적인 논쟁에 경사될 이유가 없다.

서사의 해체와 파편화 현상만으로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최근 장편소설의 흐름에서 눈여겨볼 것은 장편소설의 형식적 원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배합이다. 기존의 본격 장편소설들에 섞여 있던 ‘서로 다른 서사적 구조와 관습을 내장한 개별 장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떨어져나와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이것이 다시 본격 장편소설들의 관습화된 서사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고 뒤흔드는가가 주목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8) 그 가까운 사례는 김려령(金呂玲), 구병모(具竝模) 등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청소년소설을 통해 주목받은 이들 작가는 장르서사의 다양한 조합을 본격 장편소설의 문법에 장착하는 적극적 시도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장르화된 장편소설들의 경계 확장이 본격 장편소설들과 어떤 방식으로 뒤섞이는지를 살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2. 관습적 성장서사에 맞서는 주체의 가능성

 

오세란(吳世蘭)은 “성장소설이 근대의 산물이라면 청소년소설은 근대의 철학과 탈근대의 철학을 모두 품을 수 있는 장르”9)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 논의에 따르면 청소년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주체들은 기존의 관습적인 성장서사와 달리 성인사회로의 진입을 중요한 목표로 놓지 않는다. 어린이문학과 성인문학의 그 양쪽 세계에 온전히 흡수되지 않는 불완전하면서도 저항적인 주체의 발견은 청소년소설의 독자성을 이끌어낸다.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에서도 소설의 중심은 주인공 완득이가 어떻게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가에 있지 않다. 소설은 주인공 완득이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처한 삶의 환경을 폭넓게 묘사해나간다. 난쟁이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담임선생 ‘똥주’의 삶은 소외된 현실을 담아내는 구체적인 인물들로 표현된다. 이처럼 소설에서 그리는 성장의 다의적 문맥과 삶의 진실을 직시하려는 적극적인 주체의 형상화는 관습화된 성장서사의 틀을 깨는 신선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빈부격차와 공교육 붕괴, 이주노동자와 장애인 차별, 다문화적인 가족구성 등의 사회문제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엮여 있”는 이 소설은 사실주의 소설에 담겨 있는 탈근대적 상상력의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10)

김려령의 소설에서 성장서사의 관습을 전복하는 주체의 형상화가 좀더 미묘하고 복합적인 경로로 드러난 예는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십대가 직면한 학교폭력과 왕따를 소재로 다루고 있어서 전형적인 청소년소설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에서 그려지는 언어폭력과 왕따의 체험은 십대 청소년만의 고민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구조에 스며들어 있는 폭력적 현실과 소외된 타자에 대한 정치한 비유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형식적으로도 이 작품은 어떤 특정한 장르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장편소설의 형식을 보여준다. 천지가 왜 자살했는가를 밝혀가는 추리서사의 활용을 통해 이야기의 긴장감은 극대화된다. 여기서 천지가 겪었던 고통과 갈등은 엄마, 언니, 친구 등 여러 인물들의 추측과 진술로써 간접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소설이 차용한 미스터리 구조와 판타지 서사의 특성은 소설을 전체적으로 이끌고 가는 사실주의적인 묘사들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천지가 남긴 털실뭉치에서 메시지를 하나씩 해석해가는 구조는 판타지 모험서사에서 흔히 활용되는 플롯이다. 장르서사의 흔한 틀거리가 될 수 있을 이러한 내용은 이 소설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복합적인 층위에서 전달하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형상화된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에서 죽음 직전에 구출되는 천지의 모습과 실제로는 식구들과 작별을 고하며 자살을 결정하는 천지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은 이야기의 결말을 복합적인 해석의 층위로 열어놓는다.

장르적 장치로서의 추리서사가 사실주의적 묘사와 어우러져 발생하는 의미의 중층화는 김려령의 최근 작품인 『너를 봤어』(창비 2013)에서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성과 사랑의 탐구, 물화된 세태현실로서의 문학제도에 대한 비판, 폭력적인 가족현실의 문제라는 이질적인 소재들을 미스터리의 서사형식 속에 흥미롭게 결합시킨다. 세속화된 예술 일상에 대한 풍자적 묘사는 강렬한 극적 전개를 동반함으로써 기존의 본격 장편소설이 취하는 지식인적 자의식의 서술과는 다른 개성적 서술을 보여준다. 특히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주인공의 가족사는 근대 가부장적 현실에서 추동되는 폭력의 악순환을 생생하게 환기하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폭력의 연쇄고리는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트라우마가 되어 주인공과 가족을 억누른다. “늘 눈감을 때는 없다가도 눈뜨면 구석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었기에, 함께 누워 있지 않았다 하여 새삼스러울 게 없”(52면)는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더 무겁게 주인공을 짓누르는 것은 고단한 생계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공존해야 하는 가족의 존재다. 차갑고 고통스러운 가족 현실은 부친살해의 트라우마와 뒤얽혀 또다른 폭력과 살인을 부른다. ‘개천에서 난 용’의 임무를 자각한 주인공은 사랑 없는 건조한 결혼을 선택하게 되고 이는 부인의 자살로 이어진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드러난 폭력의 성찰이 인물들의 다성적인 목소리 교차를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되었다면 『너를 봤어』도 산 자와 죽은 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교차시켜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아쉬운 점은 소설에서 작동되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매개하는 영재의 해설이다. 작가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듯한 한계를 드러내는 이 서술방식은 소설의 중층적 의미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한 가족의 내부에 잠재한 폭력의 양상에 대한 날카로운 주시가 좀더 살아나지 못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잠재한 폭력과 광기의 충동을 ‘내 속의 놈’으로 환원시키는 해설적 설명에 있기도 하다. 이렇듯 부분적인 아쉬움을 주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 섬뜩하게 묘파되는 폭력의 연쇄과정은 한 가족의 내부를 떠나서 사회구조에 만연된 폭력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김려령 소설은 장르화된 장편소설이 사실주의적 장편소설과 섞여드는 장편소설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익숙한 듯한 기법들을 낯설게 동원하는 이 흡인력있는 소설을 읽고 있으면 “미적 장치와 그것이 묘사하는 삶의 내용 사이의 의도적인 부조화”11)가 이루는 서사 효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슈바르스(Robert Schwarz)가 지적했듯이 중심부에서 작동하는 문학형식과 주변부에서 작동하는 문학형식은 동일하지 않다. 중심부에서 이미 죽은 예술형식이 주변부에서는 살아나서 새로운 이질적인 형식을 창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르화된 장편소설과 본격 장편소설 역시 “중심과 주변이 상호 연관된 현실”의 한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의 뒤섞임은 곤경에 부딪친 장편소설의 한 국면을 허물어서 “역사적 과정 전체의 핵심적이고 종종 그로테스크한 불균형을 통찰할”(121면) 풍부한 가능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3. 캐릭터의 서사, 소비현실에 흡수되는 주체

 

장르화된 서사들이 스며들면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한 불균형’의 또다른 이면에는 철저하게 장르 내부로 귀속하는 인공적인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서사의 필연성에 얽매이지 않는 선명한 캐릭터의 조형은 파편화된 이야기들을 이어가는 최소한의 뼈대로 작동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조형은 낙천적인 모험가의 형태로, 혹은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무자비한 냉혈한으로, 혹은 하염없이 잠언을 쏟아내는 무기력하고 허무한 인물들로 평면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캐릭터의 조형은 실존적인 주체의 고독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감성적인 소설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한 예로 무라까미 하루끼의 근작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 2013)는 이전의 하루끼 소설보다도 더욱 직접적인 형식으로 상품현실의 지배력을 드러낸다. 대도시 교외의 중상류 가정에서 자란 다섯 명의 동창생이 어떤 계기로 사이가 멀어져서 오해와 비밀을 갖게 되고 주인공이 이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하루끼가 여전히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 것은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미 축적된 바 있는 쿨하고 건조한 나르시시즘적 인물형이다. 이 소설이 호소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스토리가 아니다. 페이스북과 구글과 트위터의 검색을 통해서 동창생들의 행적을 찾는 이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들을 둘러싼 상품현실의 기호다. 이전의 소설에서 고독과 우울을 앓는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일정한 시대적 현실을 담아냈다면 이 소설은 노골적으로 이 ‘단독자’들을 지워나간다. 더이상 타인과 변별되는 미학적 취향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이 심취하는 것은 상품 기호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 거듭 강조하는 ‘색채가 없는’ 이라는 수사는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렉서스와 스타벅스와 구글과 페이스북을 경유해서 이들이 만나는 것은 아무 색채도 없는 자아이다. 아버지와의 기억은 ‘태그호이어 자동 손목시계’로 추억되며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순례의 해」는 주인공의 서정적인 감수성을 대체한다. 무엇을 찾는지 모호한 쓰쿠루의 모험은 최소한의 인과적 서사마저도 더욱 가볍게 휘발시킨 소비적인 캐릭터의 행보를 드러낸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끼(東浩紀)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설적 흐름으로 제시했던 라이트노벨(light novel)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게임적 캐릭터와 메타서사의 출현이다. 캐릭터 소설의 형태는 라이트노벨뿐 아니라 포스트모던한 현실을 묘파하는 장편소설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라이트노벨의 메타서사에서는 “무엇을 ‘리얼’로 느끼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리얼이라고 느낀다고 하고 있는가”12)가 핵심이 되며, “살아있는 신체를 가진 인간이 아닌 가공의 캐릭터”(44면)가 서사의 중심에 나선다. 최근 한국의 장편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킬러 시리즈’는 이러한 캐릭터 소설과 게임서사의 영향과 어느정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에서 드러나는 킬러의 삶 역시 이러한 캐릭터 서사의 한 모사로 읽힌다. 김영하 자신의 초기작품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1996)를 느슨하게 모사한 느낌을 주는 이 소설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의 독백을 통해 서사를 진행시켜나간다. 살인을 감행해온 킬러가 자신의 기억과 싸우는 과정 자체는 서사적 인과성과 상관이 없다. 혹자는 “단절된 문단 사이의 공백을 통해 망각으로 향하는 불완전한 의식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려 했다”13)는 해석을 내리기도 하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형상화되는 킬러의 모습은 허무의 포즈를 연기하는 가상적인 캐릭터에 가깝다.

그렇다면 본격 장편소설로 스며들어온 이러한 가공된 캐릭터들에서 서사의 관습들을 전복하는 새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루끼와 김영하의 소설은 기호로 체감되는 현실의 국면을 그 자체로 증명하는 효과적인 징표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소비현실 바깥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시선을 제시하지 않는다. 정유정의 『7년의 밤』(은행나무 2011)이나 『28(은행나무 2013)이 주는 극적 서사의 속도감 역시 의도적으로 축소되고 가공된 강렬한 캐릭터의 설정에 힘입고 있다. 작가는 잔인하고 섬뜩한 세계의 한 국면을 극화하기 위해 극단적인 캐릭터를 설정하면서 인물의 내면적인 갈등을 수면 밑으로 가라앉힌다. 인간의 본성에 잠재한 악마적인 특성, 선과 악의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캐릭터의 구축은 다양한 장르소설의 서사들에서 착안된 특징들이지만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가에 따라 그 전복적인 의미는 달라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슷한 캐릭터를 등장시키더라도 구병모의 『파과』(자음과모음 2013)에서 실현되는 판타지의 상징성은 훨씬 혼종적이고 복합적이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판타지의 상상력은 자본주의 일상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작가 특유의 블랙유머를 끈질기게 견지한다. 한 예로 소설에서 60대 여성 킬러인 ‘조각’이 킬러로서의 자기 직업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구절을 보자. “노후는커녕 2,3,40대조차 무사통과하지 못하는 불황의 시기다.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 언제고 내킬 때 찾을 수 있는 자신의 노동 수당을 생각해보면, 자식들 눈치를 보아가며 용돈을 타는 노인들이나 그조차 안되어 쪽방에서 식어가는 경우에 비추어 견딜 만한 말년이다”(34면)라는 구절에서 조각은 킬러인 자신을 스스로 희화화하고 풍자한다. 은퇴한 킬러들이 식당이나 세탁소에서 일하는 풍경 역시 잔혹하고 비정한 자본주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고도 섬뜩하게 드러내는 대목들이다.

인간과 벌레가 구별되지 않는 황막한 일상 속에서 조각이 냉정하고 쉼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가는 과정은 강도 높은 목표를 차례로 완수해가는 게임서사의 플롯을 그대로 반영한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리셋’ 가능한 것으로서 그리는 미디어”의 속성을 드러내는 게임서사에서 죽음은 가상적인 체험으로 그려진다.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면 플레이어 캐릭터처럼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 또다시 적과 싸우기 시작한다.조각 역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의 격렬한 싸움을 치르고 손이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킬러의 생을 살아간다.

김려령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구병모의 소설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은 그 매끈한 리셋의 과정과 부딪치는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인 사실주의 묘사의 기법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창비 2009)나 『아가미』(자음과모음 2011) 등 구병모의 이전 소설들과 달리 『파과』는 판타지와 게임서사의 플롯을 가져오되 이와 상반되는 디테일한 서술과 묘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여기에서 사물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묘사들은 어떤 현실의 세부를 옮기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낯설고 공포스러운 이물감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다. 조각의 외모가 상세하게 묘사된 소설의 시작부분을 읽어보자. “아이보리 면 모자로 잿빛 머리를 가리고 작은 꽃무늬가 인쇄된 티셔츠에 수수한 카키색 바람막이 점퍼와 검정 일자바지 차림을 하고 짧은 손잡이의 중간 크기 갈색 보스턴 백을 팔에 건 이 여성은 실제 65세이나 얼굴 주름 개수와 깊이만으로는 일흔 중반은 넘어 보인다”(10면) 같은 쇄말적인 묘사들은 킬러가 칼을 휘두르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손목에 그어진 붉은 금에서 피가 흩날리고, 그녀는 측면으로 방향을 바꿔 몸을 낮춰서 마침 경동맥으로 날아오던 칼날을 피하며 벅나이프를 수평으로 질러 그의 허벅지를 찌른다”(308면)에서처럼 사물에 대한 의도적인 클로즈업과 세세한 시각적 묘사가 이루어진다. 이처럼 가독성을 방해할 정도의 꼼꼼한 묘사는 속도감있는 사건의 진행을 지연시키는 독특한 이물감을 선사한다.

게임서사의 플롯과 충돌하는 사실주의적인 묘사로 인해 『파과』가 갖는 소설적 층위는 좀더 두터워졌지만 한편으로 이 소설이 취하는 킬러 캐릭터의 틀은 ‘늙음’에 대한 주인공의 내부적 감정을 서사화하는 데 일종의 덫으로 작용한다.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에서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에 가까운 신체를 지니고 살아온 조각은 우연히 늙은 개를 맡아 기르게 되고 상실하고 소멸해가는 자신의 육체를 절감한다. 소설에서 조각이 연모했던 남자 류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놓여나지 못하는 장면 역시 인물을 ‘서정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을 만든다. 그러나 이 서정적인 순간은 서사적 연관성 속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반짝임의 장면을 연출한 후 쉽게 스러진다.

캐릭터 소설의 문법을 일탈하는 ‘내면’의 주목은 냉혹한 여성 킬러를 강타하는 ‘늙음’과 ‘상실’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을 담고자 한다. 그러나 킬러로서의 삶이 다시 리셋되는 한 소설의 기본적인 플롯은 흔들리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에서 조각이 자신의 손톱에 얹어놓은 인조손톱을 바라보며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는(332면) 어떤 찬란했던 순간을 환기하는 장면은 그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한 상징이 된다. 잔혹한 킬러의 쉼없는 임무수행으로만 달려가는 서사의 진행은 이 어둡고 끔찍한 세계의 단면을 순간적인 이미지의 점철 속에 가두어둔다. 캐릭터를 끝내 뛰어넘지 못하는 그 이미지의 순간은 시간의 흐름을 무화하는 장르의 관습으로 빨려들어간다. 종래의 장르화된 판타지소설의 플롯 속에 쉽게 흡수되지 않는 이질적인 묘사들을 보여주는 이 독특한 소설이 지닌 아쉬운 한계도 여기서 비롯된다.

 

 

4. 장편소설의 곤경과 활로

 

현재의 자리에서 장편소설의 행로를 논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속에 위치한 문학의 미래를 판단하는 과제와 연결되어 있다. 대중문화 컨텐츠로 기능하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우선시되는 환경에서 한국의 장편소설 장르만이 독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끌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긴 어렵다. 그러나 현재 생산되는 숱한 장편소설들은 그 자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수많은 장르서사의 귀환을 맞이하여 또다시 팽창하고 변화되고 있다. 오래되고 익숙한 사실주의의 기율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이러한 장르서사의 움직임은 장편소설이 여전히 품고 있는 장르적 역동성을 체감하게 한다.

장르화된 장편소설들이 근대적 장편소설의 관습적 서사와 뒤섞이면서 드러내는 이질적인 감각들은 김려령과 구병모의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김려령의 소설이 주목하는 소외된 타자와 해체적인 가족현실은 폭력의 연쇄고리를 주목하는 서사장치를 통해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사실주의적 묘사와 뒤섞이는 환상의 기법은 장르화된 장편소설이 본격 장편소설과 섞여들면서 이루는 경계의 확장과 작품의 성취를 드러낸다. 구병모의 소설 역시 캐릭터 서사와 판타지가 사실주의적 묘사와 배합되는 방식을 통해 비정한 근대자본주의의 일상성에 대한 차가운 응시를 전면화한다.

중심과 주변의 전도는 장르화된 장편소설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본격장편소설에서도 장르문법을 장착하여 새로운 서사들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배수아(裵琇亞)와 한강(漢江)의 장편소설에서 산문과 에세이는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최진영(崔眞英)과 천명관의 소설이 구사하는 가족연대기의 방식은 기존의 가족소설과는 다른 서사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르뽀르따주를 도입한 역사소설의 변모 양상 역시 근대 장편역사소설의 관습과 규율을 끊임없이 뒤흔든다. 가독성의 고민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정하고 흡수하는 장편소설의 변화과정은 긍정적인 효과와 비판적인 의미를 동시에 작동시킨다. 고정된 형식을 늘 이탈하고자 하는 이 복잡한 해체와 혼합의 세계는 불안정한 경계성을 드러내는 장편소설 장르 자신의 역동적인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근본적인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비평적 과제의 핵심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소설의 모험이 활력으로 자리하는지, 아니면 그 자체가 소모적으로 탕진되는 경로를 걷는지에 대한 판단과 해석에 있다. 지금의 문학비평은 그 곤경과 활로를 동시에 직시하며 작품과 함께 한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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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계절에 장편소설에 관련된 논의로는 『문학의 오늘』(2013년 가을) 특집 ‘한국의 장편소설, 어디로 가고 있나’(정여울・정주아・최유찬)과 『문학과사회』(2013년 가을) 특집 ‘문제는 “장편소설”이 아니다: “장편 대망론” 재고(再考)’(강동호・김태환・조연정), 개별 작품론으로는 강지희 「좀비월드에서 응전하는 문학들: 정유정과 김영하의 근작 장편들을 통해」(『세계의 문학』 2013년 가을호)를 참조할 수 있다.

2) 장편소설 장르에 대한 비평적 고찰과 그간의 논의들은 한기욱의 「기로에 선 장편소설」(『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

3) 강동호 「리얼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문학과사회』 2013년 가을호 270면.

4) 조연정 「왜 끝까지 읽는가: 최근 장편소설에 대한 단상들」, 『문학과사회』 2013년 가을호 317면.

5) 허구적인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국민국가의 문법에서 일탈하는 근대소설의 양상과 그 이질적인 감각을 주목한 글로는 변현태 「바흐찐의 소설이론과 그 현재적 의미」(『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396면)를 참조.

6) 그런 점에서 식민지 시기의 장편소설론을 현재 속에서 읽어내려는 시도에서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은 “근대를 식민 기원의 시간으로 규정하고 식민주의를 특권화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흥규 『근대의 특권화를 넘어서』, 창비 2013, 162면.)

7) 한기욱, 같은 글 225면.

8) 백낙청은 현재의 장편소설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르혼종의 양상을 바라볼 때 ‘본격문학 대 장르문학’의 대비보다도 ‘총체적 장르를 지향하는 장편소설’(본격 장편소설)과 ‘장르화된 장편소설’의 대비를 살펴보는 것이 생산적인 구도임을 제안한 바 있다.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33면.)

9) 오세란 「『완득이』 이후」,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347면.

10) 원종찬 「우리 청소년 문학의 발전양상」, 『한국 아동문학의 쟁점』, 창비 2010, 329면.

11) 호베르뚜 슈바르스 「주변성의 돌파」, 황정아 옮김,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115면.

12) 아즈마 히로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장이지 옮김, 현실문화연구 2012, 45면.

13) 강지희, 앞의 글 4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