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박영호 『다석 류영모』, 두레 2009

‘잃어버린 예수’ 그리고 다석의 사상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다석-류영모-표지지난해 여름, 동양에선 처음으로 서울에서 세계철학자대회가 열렸다. 그 대회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부른 것은 류영모(柳永模)와 함석헌(咸錫憲)의 사상이었다. 서울대에서 열린 대회의 다른 분과들엔 수강생이 서너명씩에 불과했지만 류영모·함석헌의 분과엔 무려 800명이 수강해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제 세계적으로도 류영모·함석헌의 사상은 빈부격차와 경쟁과 분열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문명의 대안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柳達永)은 생전에 “인도가 180여년 동안이나 영국의 식민지로 모진 시련을 겪었으나 간디가 태어남으로써 보상되었고, 이 나라가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로 모진 압제를 받았으나 류영모가 태어남으로써 보상되었다”고 했다. 한국 가톨릭의‘양심’인 정양모 신부도 다석(多夕) 류영모를‘차원높은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우리나라에서 세계사상계에 내세울 인물로 첫손가락 꼽는다. 신앙과 삶이 일치했던 김교신은 “내가 만나본 이 가운데 가장 경외하는 사람은 류영모”라면서 “하느님을 믿되 이처럼‘믿어 사는’사람을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 현대 한국민주화의 등대였던 함석헌은 스승 류영모에 대해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시대의 양심들’이 이처럼 한목소리로 기리는 다석 류영모(1890~1981)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을 낳은 스승 정도로 알려지긴 했지만 대중들에겐‘무명의 은자’일 뿐이었다.

그런 다석의 사상을 일평생 알려온 이가 바로 박영호(朴永浩)이다. 1959년부터 1981년까지 20여년 동안 다석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그는 류달영이 만든 여의도 성천문화재단에서 1990년대부터 다석사상을 강의하고, 『문화일보』에 다석사상을 무려 325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이를‘다석사상전집’으로 출간해 오늘날 철학계와 시대가 눈을 비비며 다석을 다시 보게끔 한 증인이다.

그가 말년에 스승을 『다석 류영모』라는 한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머리만이 아니라 몸과 삶으로‘스승’을 살아가려 노력한 그답게 다석이 평생 온몸으로 살아온 정신의 골갱이를 보이려 애쓴 책이다.

다석은 만약 불교의 출가자였다면 대선지식(大善智識)으로, 유학도였다면 성인군자로, 도학자였다면 도인으로 추앙받았을 인물이다. 그러나 유불도에 통달했으면서도 그는 기독교를 떠나지 않았다. 기득권을 고수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한 폭력과 교의를 휘두르는 허울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골갱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를 오랜 우리 민족의 정신과 회통시켰다. 함석헌과 한경직, 주기철, 김소월, 이중섭, 남궁억 같은 민족 지도자들을 낳은 오산학교를 기독교사학으로 만든 것도 다석이었다. 만약 그가 키운 오산학교의 민족 동량들이 없었다면, 또 기독교와 민족을 회통시켜 한민족을 일으켜 세운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김약연, 이승훈, 이동휘, 함석헌 등이 없었다면 한국 기독교는 현대사에서 한민족 앞에 할 말이 없었을 테고, 오늘 같은 기독교의 성장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한국 기독교는 이제 이들을 이단시하고 있다. 이제 세계 근본주의 신학의 본부가 되어버린 한국 기독교에 다석은 더욱더 심한 이단일 뿐이다.‘이 세상의 값진 지혜란, 한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현자들의 이단사상’이라는‘미국의 양심’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금언을 들을 귀도 한국 기독교계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다석사상이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석이 끝까지 기독교를 떠나지 않은 것은 바로 다른 종교와 사상보다 기독교야말로 그의 사상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한 소명의식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로마 콜로쎄움에서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고, 지하묘지에 숨어 살며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은‘로마의 관용’으로 황제의 종교가 된 이후‘민초의 종교’에서 벗어나 타인과 타종교를 탄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폭군으로 군림해왔다.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의 흑인 등 무려 1억명이 넘는 사람들이‘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선교 구호를 앞세운 서구인들에게 몰살당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공개하듯이‘교회의 정통’에 충실한 무교회주의자들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다석의 사상은 이런 폭력을 막기 위해 모든 종교를 꿰어맞추는 퍼즐이 아니었다. 석가의 불성과 공자의 인성과 예수의 영성을 하나로 본 안목은, 모든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성을 간파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깨달음을 통한 다석의 통찰은 기존의 기독교 교단들의‘정통 교의’의 틀로는 가둘 수 없는 것이었다. 다석은 예수를‘참 하나님’이라기보다‘참 사람’으로 보았다. 예수 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얼의 씨를 키워 로고스의 성령이‘참 나’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얼의 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본 것이다. 이처럼 다석은 예수가 십자가에 죄많은 우리 대신 벌을 자청해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내면에 이미 구원의 씨앗을 담고 있다는‘본래 구원성’을 말하고 있다.

예수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나아갈 자가 없다는 유일성과 그 배타성으로 확장과 성장을 모색해온 한국 기독교계에 다석은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한국 정신사상의 역사를 보는 안목이 있다면 다석이야말로 한국 기독교를 나락에서 구원할 구세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심성은 근본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어느 곳보다 깊게 들어간다. 그러나 그 골갱이를 잃고 허울만 남을 때 씨ᄋᆞᆯ은 그 허울을 벗어던져버렸다. 고조선 때까지 이 땅을 이끌던 무속과 선도가 문화 속으로 흡수되었고, 삼국과 고려 때까지 국교이던 불교 역시 귀족화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양 도성출입도 못하는 노예상태로 전락했고, 조선 500년간 임금부터 시골 향반까지 싹쓸이하던 기득권자 유교도 종교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한국 기독교가 현재 성장신화에 들뜬‘허울’이 아니라‘잃어버린 예수’를 찾아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박영호의 『다석 류영모』가 그 초심을 보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