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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데이비드 크리스천밥 베인 『빅 히스토리』, 해나무 2013

모든 것을 품은 거대한 역사

 

 

장대익 張大翼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djang@snu.ac.kr

 

 

162-촌평-장대익_fmt지구에 여행을 온 베가성의 외계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은 이 행성을 탐구한 후에 공동으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지구가 빅뱅 이후로 언제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보자고 할 것이다. 지구의 생성을 이야기해야 하니 태양계의 출현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벌어졌던 별의 탄생과 원소의 생성까지 논의해야 한다는 이도 있을 것이다. 베가성에서 지구까지 올 정도의 호기심이라면 아마도 ‘대체 지구에서 생명은 언제쯤 시작되었을까?’를 한목소리로 물을지 모른다. 그러고는 지구의 다양한 생명체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질문할 것이다. ‘지구 생명체는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이렇게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는가?’ ‘지구를 지배한 생명체는 무엇인가?’

지구의 동물들 중에서 외계인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존재는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동물 전체의 생물량(biomass) 중에서 98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종으로서 실질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냉철한 외계인의 시선에서는 인류도 생명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운 좋게 매달려 있는 하나의 잔가지에 불과하겠지만 존재감만큼은 최고라고 평가할 것이다. 왜일까? 인류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문명’이라는 것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호모 사피엔스만을 집중적으로 탐구해보겠다고 자원하는 외계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을 해왔으며 어떤 미래로 가고 있는지를 조사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인류가 이룩한 것들, 또한 인류에게 영향을 준 것들을 꼽아보기 시작했다. 목록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농경, 도시, 국가, 제국, 인구증가, 기후, 전염병, 산업혁명, 과학기술…… 그리고 묻기 시작한다. 농경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이제 미션을 수행할 차례다. 그들은 총 세 팀으로 나눠 일을 분담하기로 했다. 시간순서를 고려해 1팀은 빅뱅부터 지구의 탄생까지를, 2팀은 생명의 탄생부터 인류의 기원까지를, 그리고 마지막 3팀은 인류가 이룩한 세계를 다루기로 했다. 우리의 지식수준을 훌쩍 넘어선 외계인에게 이런 식의 분담은 그저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리라. 이때 그들은 인간의 지식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1팀 주제의 경우에는 인류가 그동안 천문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이라는 이름으로, 2팀 주제의 경우에는 주로 생물학을 통해, 그리고 3팀 주제에 대해서는 역사학과 인류학, 그리고 지리학 등의 분야를 통해 이미 많은 작업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인류보다 훨씬 똑똑한 외계인은 인류가 명확히 구획해놓은 이러한 학문경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지식을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으로 구분하고 심지어 따로 가르치는 우리의 교육방식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른다. 그들은 모든 탐구방법론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끔 교육받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들의 공동연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보고서의 제목을 달아야 할 순간이 왔다. 지구에 대한 탐구보고서이니 ‘지구사’(global history)라고 하자는 이도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우주와 지구, 생명과 인류의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기록한 것이니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고 짓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빅 히스토리’, 참 멋진 이름이다.

빅 히스토리의 창시자 격인 미국 태생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은 이 책 『빅 히스토리』(조지형 옮김)에서 어쩌면 이런 ‘외계인의 시선’으로 우주, 생명, 인간,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줄기차게 인류의 역사를 자연과 인문의 융합적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주장해온 통 큰 역사학자다. 예컨대 그는 분야사와 지역사로 매몰된 전통적인 역사학의 관행에 더 큰 그림을 그려보자며 역사학에 천문학과 생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마침내 그의 외로운 주장에 감동을 받은 빌 게이츠(Bill Gates)의 후원으로 그는 현재 전세계의 시민을 위한 빅 히스토리 교육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그런 그가 역사교육학자 밥 베인(Bob Bain)과 함께 쓴 이 책은, 말하자면 일반인을 위한 빅 히스토리 교재다.

400면이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야심차게도 이 책은 ‘모든 것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이 말이 모든 것을 다 다룬다는 뜻일 수는 없다. 대신 137억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타임라인에서 역사의 대전환점을 만들었던 여덟번의 ‘임계국면’(threshold)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차례로 우주의 탄생(137억년 전), 별의 탄생(135억년 전), 원소의 생성(135억년 전), 태양계와 지구의 생성(45억년 전), 생명의 탄생(38억년 전), 집단학습의 출현(20만년 전), 농경의 시작(11천년 전), 근대혁명(250년 전)이다. 저자는 각 임계국면에서 매번 복잡성이 차원을 달리하며 증가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양성, 관용과 개방성, 상호관련성, 정보의 축적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에 빅 히스토리의 분수령이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아마도 어떤 독자들은 그런 분수령에 왜 진핵생물의 탄생(15억년 전)이나 성()의 진화(15억년 전), 또는 글로벌 네트워크의 탄생(2000년 전) 등이 포함되지 않는가에 대해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성의 출현, 즉 무성생식만 하던 생명체가 암수의 결합을 통해 유전자를 섞어 다양하고 복잡한 생명체를 만들게 된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지구를 수식하는 단어로는 ‘화려함’보다는 ‘밋밋함’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또한 임계국면마다 복잡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주장에도 이견이 나올 수 있다. 현대 진화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생명은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진화했는가’에 대한 큰 논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우주, 생명, 인류, 문명의 역사를 큰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최근의 의미있는 시도들 중(가령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포함하여)에서 가장 돋보이는 텍스트라 할 만하다. 다른 유사 저작들과는 달리 역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주의 시작에서 현대문명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를 꿰는 ‘통찰’을 던지려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역사학도들은 어쩌면 이런 통찰이 피상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테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도 명확한 사실이다.

이 거대한 역사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는 단지 역사학의 다른 이름이라거나 역사학의 한 분야를 뜻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인류의 지적 자산을 총동원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융합적 마인드의 인상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