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15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김중일 안현미 2인을, 본심위원으로 나희덕 염무웅 이시영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 아래 총 10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곽재구 『와온 바다』,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김신용 『잉어』, 박성우 『자두나무 정류장』, 복효근 『따뜻한 외면』, 신용목 『아무 날의 도시』, 엄원태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이영광 『나무는 간다』, 장옥관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가나다 순)
본심은 10월 24일에 진행되었는데, 대상작 모두가 나름의 특색 있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어 시 읽는 즐거움과 더불어 대상작을 압축하는 데 난감함을 겪었다. 심사위원 각자가 우선 추천한 곽재구 김선우 복효근 신용목 엄원태 이영광 진은영 시집에 대해 논의를 거듭한 끝에 엄원태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창비 2013)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는 생의 기미와 소멸의 운명을 잔잔한 내성의 언어로 예리하게 조탁해내어 존재들의 내면적 깊이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아, 심사위원 전원은 엄원태 시인을 제15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나희덕(羅喜德) 시인
본심 대상작인 열권의 시집을 통해 우리 시단의 풍요로운 수확을 즐겁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개성을 보여주는 시세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늘 힘겨운 노릇일 수밖에 없다. 또한 ‘백석’이라는 이름에 잘 부합하는 시인을 찾아야 할지, 새로운 탐구와 성취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인지도 고민거리였다. 전자의 기준으로는 엄원태의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와 곽재구의 『와온 바다』가 격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자의 기준으로는 이영광의 『나무는 간다』,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 김선우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신용목의 『아무 날의 도시』 등을 지지하고 싶었다.
이영광 진은영 김선우 신용목 등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만나는 다양한 지점과 방식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전위들이다.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죽음일 수도, 기억일 수도, 권력일 수도, 문명일 수도 있지만, 그 열도(熱度)와 탄성(彈性)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네 시인 중 누가 수상자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광은 이번 시집에서도 현실의 폭력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직정적 태도와 화법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전의 시적 성취에 비해 다소 거칠고 단순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그가 세상과의 육박전 끝에 올리는 “주저앉는 기도” “뭉개지는 기도”의 핍진성을 여전히 신뢰하는 쪽이다. 진은영은 감각과 사유를 유연하게 결합시켜 매력적인 장면을 길어올린다. 때로 동화적 모티프나 이국적 이미지가 눈에 띄지만, 그것이 단점보다는 시에 독특한 생기를 불어넣는 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타자를 향해 겸손하게 말을 건네는 이 시인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우정과 공동체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김선우의 시는 사랑과 혁명에 대한 성찰을 발랄한 어조로 노래한다. 지나치게 유창하고 수려한 것이 그 진정성에 대해 유보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시인의 낙관과 여유에 힘입어 세계는 다시 한번 활짝 피어난다. 신용목은 구도자에 가까운 언어 탐구와 형이상학적 모험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모호한 이미지들의 운산이 때로 소통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 안의 폐허를 응시하며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선은 여리면서도 끈질기다. 그가 자발적 유폐를 통과해 눈부신 해방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백석의 세계에 가까운 시집을 들라면, 단연 곽재구의 『와온 바다』다. 십여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따뜻한 서정과 녹슬지 않은 언어감각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그는 변함없는 길 위의 시인으로서 만나는 모든 존재를 피붙이처럼 끌어안는다. 그의 애틋한 시편들은 통영으로 북관으로 떠돌면서도 갈매나무 같은 정신을 지켰던 백석의 순한 눈매를 자주 떠올리게 했다.
엄원태의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는 다소 건조한 묘사체로 도시 변두리의 일상적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집이 견고한 인식과 언어적 품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다소 평이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얻기란 그런 것/적어도 십년 공부는 기본”(「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시인이 인내 끝에 가까스로 얻어낸, 녹록지 않은 마음의 경지를 시집 곳곳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공력과 외로움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엄원태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한소식처럼, 내 몸에도 빛기둥이 섰다”(「일주(日柱)」)고 전하는 시인에게 이 상이 늦은 오후에 찾아든 겨울 햇살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
염무웅(廉武雄) 문학평론가
예심을 거쳐 온 열권의 시집들 중 본심에서 집중 논의할 세권을 고르는 것부터가 내게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시집들마다 독특한 빛깔과 고유의 깊이를 달성하고 있어서, 어떤 기준을 따를지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삼십대부터 오십대까지의 시인들 중에서 대표성을 가진다고 여겨지는 한사람씩을 선택했는데, 이들을 통해 오늘 우리 시단의 지형도를 일부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소득이다.
젊은 세대의 대표로서 주목한 것은 신용목의 『아무 날의 도시』였다. 주목했다고 하지만, 사실 내가 신용목의 시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 경우 ‘시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명한 것은 아니다. 가령, “나는 허공 속으로 북파되었다/맹세의 긴 철로를 걸어 나는 캄캄한 중심으로 침투할 것이다, 열차가 들어오자/앞뒤로 둘러지는 바람의 인계철선”(「꽃들의 작전명」 2연)에서 ‘북파’ ‘침투’ ‘인계철선’ 같은 낱말을 근거로 어떤 군사적 대치국면을 환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 그치는 것은 시인이 쳐놓은 지시언어의 덫에 걸려 작품의 내부구조로 진입하는 데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난관이 성벽처럼 시집을 둘러싸고 있음에도 『아무 날의 도시』는 우리 시대의 불가해한 어둠에 관해 시인이 치열하게 고뇌하고 있음을 무겁게 전해준다.
『나무는 간다』의 이영광이 딛고 선 현실이 신용목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물로서의 시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신용목이 아직 진지하게 현실을 정시(正視)하고 그것을 독특하게 미학적인 언어로 재현하고 있다면, 이영광은 이미 “강의 뼈를 부수고 물의 내장을 긁는 형장”(「절망」)을 목격해버린 자로서의 ‘폐허의 목소리’로 삶에서든 시에서든 고지식한 자세의 견지가 불가능해진 악마적 상황에 대하여 격렬하게 발언한다. 그런데 이영광의 시들은 고르지 않다. 전체적으로 풍자적이지만, 어떤 것은 침통한데 어떤 것은 좀 안이하다.
엄원태의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는 신용목과 이영광의 시집에 견주면 정통적인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난해한 비유도 많지 않고 기발한 상상에 의존하는 법도 별로 없다. 평명한 언어로 순탄하게 서술해나가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시집에는 한 고독한 영혼의 자기단련의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고 그런 데서 양성된 지극한 울림이 있다. 엄원태가 연출한 시의 무대에서는 소소한 생활현장의 디테일, 계절의 변화, 새와 숲과 나무가 모두 애니미즘적 생명을 가지고 자신의 언어를 말하는 듯하다. 「싸락눈」이라는 짧은 시를 아래에 예시하면서, 다른 두 심사위원과 더불어 기꺼이 이 시인을 수상자로 합의했음을 알린다.
고독은 그늘을 통해 말한다.
어쩌면 그늘에만 겨우 존재하는 것이 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늘로 인해 생은 깊어갈 것이다. 고통과 결핍이 그늘의 지층이며 습곡이다.
밤새 눈이 왔다.
말없이 말할 줄 아는, 싸락눈이었다.
이시영(李時英) 시인
본심에 오른 열권의 시집 중 이미 다른 상을 수상한 진은영 시집을 제외하고 내가 주목한 것은 다음 여섯권이다.
복효근의 『따뜻한 외면』 중 「꽃잎」 「폭포」 「이녁」 같은 작품은 참 좋았다. 오랫동안 우리 시가 잊고 있었던 잔잔한 서정이 이 시인에 의해 경이롭게 빛나고 있는 것도 믿음직스러웠지만, 소외의 일상을 다스려나가는 마음가짐이 묵직하게 말을 들어올려 그것을 시의 제자리에 단단하게 갖다 박을 줄 아는 기예가로서의 석축(石築) 솜씨도 남달랐다.
김선우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와 이영광의 『나무는 간다』 또한 이 시대의 리얼리스트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주목할 만한 시집이었다. 아쉬움을 먼저 말하자면, 김선우의 경우 「그림자의 키를 재다」 같은 뛰어난 작품과 시와 포즈의 경계를 아슬히 넘나드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같은 작품들이 혼효되어 있어 시집 전체로서의 성취도를 가늠하는 데 약점으로 작용했으며, 이영광의 경우는 이번 시집의 맨 앞의 시 「이따위 곳」이 주는 충격이 워낙 큰 탓인지 그 다음 작품들이 주는 인상이 오히려 시적 긴장의 완화로 느껴진 점이 불만이었다. 그에게 있어 이번 시집은 이전 시집의 강렬한 아이러니의 동어반복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신용목의 『아무 날의 도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 시집이다. 이미지의 병치, 복문의 구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환유의 방법으로 이 시인은 ‘자본-도시’에서의 ‘포로 된 삶-죽은 삶’을 세밀히 탐사하는데 우선 그 정밀성과 끈질긴 부정정신에 탄복하면서도 시가 이처럼 어려워서야!라는 짜증스런 느낌 또한 들었다. 난해성 자체가 문제 아니라(사실 모든 시는 난해시라는 김수영의 주장도 있지 않은가!) 그 난해의 문법을 뚫고 들어가 우리가 발견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무엇인가가 중요한데, 내가 이 시집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폐허를 폐허로 응시하자’는 전언이었다. 손쉬운, 그래서 덧없는 전망 대신 절망의 도시에서 포복하듯 자신의 죽음과 맞부딪는 온몸으로서의 저항은 그 자체로 한없이 순결하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래된 영혼의 폐허”(「늙은 산들의 마을」)에도 한줄기 빛은 깃들여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삶은 아니지만 죽음은 이해해”(「하지만 이해해」)라는 구절도 있지만 그의 시편들은 아직 자신의 영토를 발견하지 못한 시적 묵시록에 가까우며, 그가 지금 막 모종의 이행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심사도 역시 개인적 취향의 개입을 어찌할 수 없는데, 마지막까지 내 손에 남은 작품집은 엄원태와 곽재구의 것이었다. 이 두 시집은 우선 편하게 읽힌다. 『와온 바다』는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가슴 뜨거운 일”(「백야도에서」)이라는 뭉클한 시적 감동을 선사하며 대상을 향한 그의 감각과 응축이 녹슬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엄원태 역시 「극지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다」 「길을 가면서」 같은 작품에서 기량을 마음껏 발산하며 인간 존재의 비극을 예리하게 조탁한다. 다만 곽재구가 여행을 통해 우리 삶의 건조한 일상에 시적 온기와 활력을 선사한다면, 엄원태는 근교의 산책을 통해 생의 기미와 소멸 그리고 마음의 결을 발견한다는 점이 다르다. 솜씨에 있어서는 곽재구가 조금 앞선 듯하지만 그렇다고 엄원태가 그에 못 미치는 것 또한 아니다. 다만 이럴 때 나는 심사 기준을 행간의 울림을 누가 더 깊게, 오래 창출하느냐에 둔다. 일급의 시는 씌어진 부분보다 씌어지지 않은 행간 혹은 작품이 끝난 다음이나 그 처음에 더 많은 ‘시-음악’을 내장하고 있다. 곽재구의 경우 “눈 오시네/와온 달천 우명 거차 쇠리 상봉 (…)”으로 시작되는 첫 시 「시」에서부터 「와온 가는 길」 「와온 바다」 등에서 그 울림이 크게 다가왔으나 3, 4부의 여행시에 이르면서부터는 그 여운이 현저히 줄어드는 걸 느꼈다. 반면 엄원태의 경우는 「타나 호수」에서부터 마지막 시 「11월」에 이르기까지 표현된 것 이상으로 더 크고 깊은 울림이 다가오는 듯했다. 가령 이런 예가 그렇다.
나무는 끝내 아무런 말이 없고,
습기 머금은 공기만 무겁도록 숲을 채우고 있었다
—「나무가 말을 건네다」 마지막 연
뚜렷한 결구 없이 끝나는 위의 구절은 그러나 무한한 울림을 안으로 함축하고 있어서 시집을 덮고 난 뒤에도 어떤 공명 효과를 산출한다. 물론 이 시집은 더 많은 미덕을 갖고 있다. “삶이란, 언제나 죽음 지척의 일”(「주저앉은 상엿집」)이지만 “주검을 딛고, 죽음을 건너는 무수한 발굽들”(「강 건너는 누떼처럼」) 있어 “저녁 무렵, 여름의 앞날은 꽤나 창창할 것”(「녹음」)이라는 도저한 낙관주의가 그중의 하나인데, 이 생에 대한 낙관은 죽음을 마주한 “고통의 임계 지점”(「타나 호수」)까지 다다른 적 있는 화자만이 적을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삶과 죽음만이 아니라 시인은 일상의 소소한 발견 앞에서도 섣부른 긍정이나 부정이 아닌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시인-견인주의자’로서의 또다른 덕목을 추가한다.
수상소감
엄원태 嚴源泰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90년 『문학과사회』에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침엽수림에서』 『소읍에 대한 보고』 『물방울 무덤』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대구시협상 등을 수상했다.
끈질기게 걷고 또 걸어가야 할 길
별다른 생각 없이 제 몸의 호흡을 바라보며, 아니 발걸음에 숨쉬기를 맞춰 심호흡을 의식하면서 걷기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산책이라 하기엔 상념이 너무 없고 운동이라 하기엔 몸이 따라주지 않아 느린 걸음을, 다만 쉬엄쉬엄 오래 걷고 걷는 것이 요즘의 제 일과입니다.
지난여름에 저는 큰 수술을 받고 이제 조금씩 회복 중에 있습니다. 아직까지 외부 접촉을 자제하고 감염에 주의를 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새 생명으로 거듭난 것이지요. 새 생명의 경이란, 가족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기꺼이 내준 장기들이 제 몸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낄 때, 어떤 복합적이고 먹먹한 감정의 덩어리 같은 느낌으로 벅차게 밀려오곤 합니다. 이토록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느낌이나 상태를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하는 게 문학의 아이러니이자 운명이기도 할 테지요. 그 불가능성의 글쓰기에 끈질기게 도전해야 할 숙제를 제가 새롭게 떠안은 셈입니다.
요즘 저는 ‘걷기’의 중요성을 그야말로 체험을 통해 새삼 더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걷기는 수술로 흐트러진 내부 장기들이 다시 제자리를 잡도록 도와줌은 물론 온몸의 피돌기를 도와서 쇠약해진 심장과 혈관을 튼튼하게 해 기력을 되찾게 해주는 육체적인 효과 외에도, 가만히 무념무상의 호흡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명상의 상태로 이끌어주는 정신적 효과도 매우 큽니다. 걷는다는 것은 또한 오랫동안 꾸준하게 지속해야 비로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어서, 저는 오로지 걷고 또 걷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글쓰기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걷고 또 걷는 꾸준한 보행처럼 그렇게 치열하고 끈질기게 가야 할 길이 문학의 길이자, 시 쓰기의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런 치열함이나 간절함이 제 시 쓰기의 허술한 도정에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백석 시인께서는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합니다. 시인의 「팔원(八院)」과 「여승(女僧)」이라는 시를 떠올려봅니다. 거기 나오는 먼 길을 쫓겨가야 하는 아기보개 소녀와 남편 잃고 옥수수 팔던 여승에 대한 고담(枯淡)하면서도 한없이 깊은 연민과 불이(不二)의 시선을 저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일까요.
과분한 격려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곁을 지키며 몸을 나눠 생명을 함께하는 가족들에게는 할 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