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세계문학’ 개념을 다시 말하자

● 창비의 지난 겨울호 특집에서, 마르께스와 모옌을 동시에 다루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꼴롬비아의 마르께스와 중국의 모옌, 이 둘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점, 세계문학의 변두리에서 세계적 작품을 써냈다는 점,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작경향을 보였다는 점(1980년대 초반 마르께스의 노벨상 수상은 중국 문단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등에서 ‘세계문학’ 개념을 둘러싼 많은 논의거리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유희석은 『백년의 고독』의 ‘세계성’을 통해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의 가능성과 이를 위한 과제를 진지하게 제시하였고, 백지운은 주목할 만한 통찰력으로 모옌 창작이 지니는 복잡성과 다채로움의 의미와 성격을 ‘민간’ 개념을 통해 개괄하였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두편의 글은 ‘세계문학’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중국문학이 세계문학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는 데 한계를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두 글은 근대 이래로 오랫동안 ‘세계문학’의 꼴을 구축해온 서구의 식민주의적 욕망과, 비서구 문학으로 하여금 ‘세계문학’을 욕망케 하는 ‘셀프 오리엔탈리즘’의 함정을 투철하게 파헤치는 시도를 유보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문학’이라는 레떼르를 통해 재확인해야 할 것은 우리(를 포함한 비서구) 문학의 세계화 가능성이 아니라 ‘세계문학’ 개념 자체가 지니는 보편주의적 폭력성과 그것을 해체적으로 사유하게 해줄 새로운 문학 개념이 아닐까?

박민호 ph1172@hanmail.net

 

과거사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바라며

● 서중석과 박준형의 대화 「‘역사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관심있게 읽었다. “역사 배우기를 실패한 자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그것을 되풀이할 뿐이다”라고 처칠이 말했듯이 우리에게 과거사를 청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일을 매듭짓지 않고 남의 나라 역사인식을 문제 삼는다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요즘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도 서중석 선생이 지적했듯이 아직도 “자유나 민주주의, 인권, 인본주의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거리감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극우세력이 잔존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우리 현대사의 학살문제만큼은 올바른 교육과 인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국민의정부 때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어 희생자에 대한 예우와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듯이, 해를 넘겨 표류하고 있는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도 조속한 시일 내에 제정되어 희생자와 유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정훈 que-sais-je@hanmail.net

 

‘역사전쟁’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세요

● 저는 현재 한국사를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입니다. 겨울호에 실린 「‘역사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읽고 교학사 교과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교과서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 한국사연구의 흐름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 오히려 실체적 진실에 더 다가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진실만이 담겨 있어야 할 교과서가 특정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도구로 활용된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교과서가 영향을 받는 것도 안타깝습니다. 대화에서 제시된 ‘실증적 연구’의 중요성에 관한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생산적인 토의가 이루어져, 역사를 둘러싼 ‘이념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해봅니다. 이념갈등이 심해져 역사도, 교과서도 분열된다면 그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학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명현 jlmh96@naver.com

 

장편소설론의 활발한 논쟁을 기대한다

● 백지연의 문학평론 「장편소설의 곤경과 활로」는 장편소설, 그리고 문학비평에 대한 여러 고민거리를 던져줬다. 2013년에는 장편소설이 베스트셀러 상위를 자주 차지했다. 자기계발서와 실용서 일색이던 이전의 상황에 비해선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필자가 말했듯, 문제적인 경향으로 떠오른 새로운 작품의 사례는 많지 않았다. 스타 작가들의 발간시기가 적절히 겹치면서 장편소설이 부흥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글을 읽으며 김려령, 구병모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문학은 거의 읽지 않는 탓에 훌륭한 작품들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앞으로 장편소설과 문학비평에 더욱 많은 사람이 발화하는 장면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창작과비평』이 그 장의 역할을 해주기 또한 바란다.

남경식 dissenting@naver.com

 

90년대를 추억하며 잊지 말 것들

● 정이현 작가와 정여울 평론가의 대담형식으로 짜여진 작가조명 「상실, 혹은 노스탤지어의 귀환」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드라마, 영화, 문학 등 문화계 전반에서 90년대를 집단적 회상의 매개로 다루는 현상에 대해 두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감성을 활용해 설득력있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었다. 특히 정이현 작가는 장편 『안녕, 내 모든 것』의 주인공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90년대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이 소설의 쓸쓸한 정서적 깊이가 느껴지도록 해주었다. “우리의 노스탤지어가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헛된 그리움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는 더 짙은 성실함, 더 뜨거운 용기가 필요”하다는 정여울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바람 불면 휙 가는 게 인생이듯이 어쨌든 90년대는 지나가버렸지만, 또다른 10년 뒤에 우리는 또 무엇이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박상원 loy9488@naver.com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아픈 이야기

● 이장욱의 단편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번 읽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게 된 남자가 있다. 그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이유는 ‘참말을 하면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을 부각한다는 것을 일찍 깨닫는다. 그런 그에게 ‘비로자나의 기린’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기린이 존재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처입은 이의 기만적인 거짓말이 결국 영혼을 뒤흔드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남자가 아름다움에 열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미시마 유끼오의 『금각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번 마음이 아팠고, 아름답다고 느꼈고, 언젠가 나도 아름다운 어떤 것을 만들고 싶어졌다.

김영주 debbykim@paran.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

● 자유, 정의, 평등, 민주. 이 가치들이 주는 울림이 사라진 시대에 마틴 루서 킹의 연설을 모티프로 한 아리엘 도르프만의 에쎄이 「감시의 세계에서 되새기는 마틴 루서 킹의 연설」은 그 울림을 다시 기억나게 했다. 킹의 연설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려서다. 우리의 일상 속에는 어느덧 ‘희망〓이상, 좌절〓현실’이라는 도식이 자리잡았고 킹이 외쳤던 보편적 가치들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민주를 쟁취하는 삶에 대해 사람들은 냉소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로는 국가와 기업과 언론의 감시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점점 더 각자의 삶이 팍팍해질 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느슨해지고 경쟁만 과열된다. 그렇다면 마틴 루서 킹의 연설이 갖는 의미를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해야 하나.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귀결된다. 그것이 희망과 꿈이 갖는 최대의 무기다. 실패의 고배를 마신 나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이 기운을 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외치며 글의 부제처럼 ‘창조를 위한 고통’을 자랑스럽게 감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박누리 mailsho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