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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역사와 안보는 분리 가능한가

일본의 우경화와 한일관계

 

 

권혁태 權赫泰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저서로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일본 전후의 붕괴』 『전후의 탄생』(편저) 등이 있음. kwonht88@gmail.com

 

 

1. 아베 신조오의 ‘위험한 도박’: 야스꾸니 참배

 

아베 신조오(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취임 1주년을 맞이한 20131226일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를 참배했다. 현직 총리로는 코이즈미 쥰이찌로오(小泉純一郞)2006815일 참배 이래 7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로써 아베는 일본의 ‘전후(戰後)’ 총리 28명 중에서 야스꾸니를 참배한 14명의 총리중 한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횟수로 말하자면 현직총리 참배로는 67번째에 해당된다. 야스꾸니에 A급 전범이 ‘합사(合祀)’된 사실이 밝혀진 19794(합사는 19781017일)부터 계산하면, 아베는 야스꾸니에 참배한 5번째 총리가 되고 횟수로는 29번째에 해당된다. 제1차 아베정권(2006~2007)하에서 야스꾸니를 참배하지 못한 것을 2012년 중의원선거 기간 중에 “천추의 한”이라 말했고, 또 20131019일에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다”라고 말했으니1) 아베 총리에게는 뒤늦은 ‘한풀이’가 된 셈이다.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건 나까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야스꾸니를 전격 공식참배한 1983년 이래, 야스꾸니는 항상 국제사회로부터 관심의 표적이 되어왔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는 천황이 거주하는 토오꾜오 중심가에 자리한 황거(皇居)를 가리켜 “공허한 중심”이라고 말한 바 있다.2) 사실 야스꾸니신사에는 유골도 없고 위패도 없다. 몇개의 건물과 천황의 ‘명령’으로 영새부(靈璽簿)에 등재된 A급 전범 14명과 전몰자 250만명의 ‘영혼’만이 있는 ‘텅 빈 공간’이다. 이 ‘텅 빈 공간’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치적이념적 향방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야스꾸니는 황거와 아울러 또 하나의 ‘공허한 중심’일지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총리가 등장하거나 일본에서 ‘종전기념일’이라 불리는 815일이 되면, 이 ‘공허한 중심’은 항상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하지만 아베 신조오의 이번 참배만큼 일본 안팎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지만, 특히 국제사회의 반발이 일본정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물론 중국과 한국의 반발은 아베의 예상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배를 강행한 것은 중국과 한국의 반발이 외교관계의 단절이나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아베는 취임 후 1년 동안 중국의 ‘대두(擡頭)’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동남아 10개국을 방문해 ‘중국포위망’을 구축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반발을 중국과 한국으로 가두어둘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가 아베의 야스꾸니 참배를 “외교적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보도(2014.1.4)했지만, 만일 반발이 중국과 한국에 한정되었다면 아베의 ‘위험한 도박’은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베의 예상은 빗나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발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외무부 대변인은 1229일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아베의 참배에 ‘유감’(regret)의 뜻을 표명했고,3) 반기문(潘基文) 국제연합(UN) 사무총장도 1227일 “과거에서 비롯된 긴장관계가 아직도 이 지역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럽다”4)라고 밝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캐서린 애시튼(Catherine Ashton)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대변인 성명을 통해 “(동북아)지역의 긴장을 완화하고 이웃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며 아베의 참배에 우려의 뜻을 표했다(2013.12.27). 러시아도 이 반발에 가세했다.

하지만 아베의 예상을 가장 크게 벗어난 것은 역시 미국의 반발이었다. 아베가 야스꾸니를 참배한 당일, 주일 미국대사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은 중요한 동맹국이고 우호국”이지만, “일본의 지도자가 이웃나라들과의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을 취한 것에 미국정부는 실망하고(disappointed)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고,5) 이어서 1230일 미 국무성 보도관도 주일 미국대사관의 성명을 추인했다. 쿄오도오통신 보도(2013.12.29)에 따르면, 미국은 외교적으로 훨씬 강한 표현인 ‘유감’을 검토했다가 미일관계를 고려해 ‘실망’이라는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이코노미스트』의 보도에 의하면 미국은 아베 정부에 야스꾸니를 참배하지 말 것을 수차례 종용했다고 하니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아베는 미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한 것이다.

미국의 반발에 일본 측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사실 미국의 반발은 매우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일본 총리의 야스꾸니 참배에 대해 미국정부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0번을 참배한 나까소네 야스히로에 대해서도, 또 6번이나 참배한 코이즈미 쥰이찌로오에 대해서도 미국은 ‘침묵’을 지켰다.

미국에게 야스꾸니는 두가지 차원의 문제이다. 야스꾸니에 합사되어 있는 A급 전범 14명(7명은 교수형, 7명은 병사病死)은 패전 후 ‘전범’국가 일본에 대해 미국이 주도한 극동국제군사재판(토오꾜오재판)이 내린 역사적인 결정이다. 그리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1조의 규정에 따라 이 재판결과를 ‘수락’(accept)했음을 공인했다. 따라서 A급 전범에 내려진 판결을 ‘억울함’으로 포장하거나 이를 승자가 패자에 대해 내린 잘못된 결정이라고 보는 역사관은 토오꾜오재판 및 샌프란시스코조약과 모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야스꾸니에 합사되어 있는 A급 전범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참배는 토오꾜오재판과 샌프란시스코조약을 부정하는 행위이고, 그 역사적 기반 위에 서 있는 전후체제와 미일관계에 대한 명백한 도전행위이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까지 야스꾸니신사 참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실망’ 같은 단어를 사용해 성명을 발표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아베의 참배에 대해 외교적 ‘훈수’를 서슴지 않았을까?

역시 야스꾸니 참배가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의 고조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취임 초기부터 일련의 ‘망언’으로 중국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었으니 야스꾸니 참배가 ‘불에 기름을 붓는’ 일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실망’은 야스꾸니 참배라는 행위 자체보다 영토문제 및 역사인식 등에서 아베정권이 줄곧 한국과 중국에 대해 갈등을 키웠다는 점에 있다.

물론 중일 간의 긴장고조가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반드시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일동맹체제하의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키우려는 미국의 이익과 부합할 수도 있다. 중국과의 갈등대립이 고조될수록 일본 내의 안보 위기감이 높아져 일본의 미국의존도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미국이 일본에 대해 줄곧 요구해온 헌법개정이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일본 내의 거부반응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 있어 그 긴장고조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관제(管制)’하에서만 작동되어야 한다. 중국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야스꾸니 참배를 강행한 아베의 ‘위험한 도박’이 잘못하면 일본이 미국의 관제에서 벗어나는 인화력이 될 수도 있다고 미국은 보았을 것이다.

물론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측면이 있다.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을 통해 미국을 정점으로 한 일종의 유사 삼각동맹을 맺고 있는 한일 관계에서 한일 간의 군사안보적 연계는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긴요하다. 이명박정권 때 한국과 일본이 추진했던 한일군사교류의 움직임도 이러한 미국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초기 정지(整地)작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박근혜(朴槿惠) 정부와 2차 아베정권의 동시 출범은 두 정권의 이념적 성격에서 볼 때, 한일 안보협력에 대한 미국의 기대감을 높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미국의 기대와는 다르게 역사인식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보면, 야스꾸니 문제는 2차대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임과 동시에 그 역사관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 문제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동북아 문제가 역사인식과 안전보장이라는 두가지 차원에서 기능작동하고 있음이 야스꾸니 문제를 통해 드러난 셈이다. 다시 말하면 동북아에서 역사와 안보 문제는 상관관계에 있다.

 

 

2. 아베정권과 박근혜정권의 동시 등장이 의미하는 것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와 방향이기는 하지만 아베정권의 행보가 심상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아베정권이 등장한 201212월부터 이미 있어왔으니 사실 아베의 야스꾸니 참배가 뜻밖의 일은 아니다. 제1차 아베정권 때 교육기본법을 개정했고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법을 제정하는 등 우경화의 전적도 이미 있다. 2009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민주당이 이러한 우경화 흐름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오히려 이전의 자민당과 차별성을 보이지 못한 채로 3년 만에 정권을 자민당에 내주었으니 아베의 우경화는 이미 예견된 바다.

‘일본을 되찾는다’는 구호하에 등장한 제2차 아베정권은 예상대로 영토문제, 위안부 문제, 교과서 문제 등에서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쏟아내더니 결국 야스꾸니신사 공식참배로 2013년을 마감했다. 게다가 헌법개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해석개헌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디딤돌로 일본의 안전보장에 관한 정보를 누설한 자에 대한 처벌조항을 담은 특정비밀보호법을 제정했다. 게다가 311대지진 이후 비등하던 탈원전 여론을 잠재우듯이 원전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반복해서 표명하기도 했다. 아베 자신은 2014130일 국회 대표질문에서 자신의 행보가 “결코 우경화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 책임있는 정치”6)라고 강변했지만, 우경화라는 용어가 정치이념의 좌표축의 흐름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아베정권은 오히려 기존의 우경화흐름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다보니 지난 1년 동안 한일관계와 중일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사실 2차 아베정권과 박근혜정권이 동시에 등장한 초기만 해도 두 정권 간의 밀월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두 정권 사이에 몇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첫째는 아베와 박근혜 모두 ‘2세(세습) 정치인’이고, 둘째는 상징정치의 의미에서 ‘유신’의 부활을 체현하고 있으며, 셋째는 정치이념적으로 친미반공보수의 색채가 강하다는 점이다. 2세 정치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총리를 역임한 총 19명 중 12명이 2세 정치인인데다 자민당 의원의 약 30% 이상이 2세 정치인일 정도니 새삼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2세 정치인이 매우 드물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의 등장은 향후 한국사회에서 2세 정치인의 득세를 예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압축적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났던 급격한 세대간 직업 및 계층 이동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일부 특정 지배계급 내에서 직업 및 계층의 세습화와 고정화가 점쳐지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인물의 승계가 아니라 이념과 가치의 세습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이념 측면에서는 냉전해체 후에 한일 양국에서 나타났던 여러 정치적 모색이 결국은 친미반공체제의 ‘부활’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동북아에서 냉전적 정치지형의 강고함과 그 유효성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박근혜-아베정권의 동시 등장에서 개발독재시대에 나타났던 박정희(朴正熙) 독재정권과 자민당의 밀월관계가 부활할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필자는 두 정권의 등장 직후에 동북아시아에서 두가지 상반되는 흐름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하나는 영토문제와 역사인식(위안부, 교과서, 야스꾸니 문제)에서 일본을 포위하는 남북한중국의 ‘연휴(連)’ 가능성이 커져 일본의 고립이 심각해지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중국북한과 대치하는 한국일본의 연휴 경향이 더 강해지는 흐름이다. 그리고 이같이 상반되는 두 흐름 사이에서 아베정권이 택할 수 있는 씨나리오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를 상정했다. ①안보영역에서 한국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역사문제에 대해 전술적인 ‘자숙’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 ②역사문제와 안보 영역 모두에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이다.7) 1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보면, 아베는 ②를 선택함으로써 역사갈등의 흐름이 안보 영역에서의 연휴 가능성을 압도하게 만들었다. 물론 ①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동의하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위상을 높이려 하는 아베정권에 한국의 안보협력은 매우 긴요하다. 따라서 안보협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한국과의 역사갈등은 단기적으로 피하고 싶은 선택이고 또한 이는 미국의 의향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야스꾸니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매년 4월의 춘계예대제(春季例大祭), 종전기념일인 815일, 그리고 10월의 추계예대제에 아베가 참배하지 않은 데도 한국의 안보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역사갈등을 극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쿄오도오통신 보도(2013.12.29)에 따르면, 아베는 “(자신이) 야스꾸니 참배를 이렇게 자숙하고 있는데도 한국과 중국은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라며 불만을 내비쳤다. 게다가 북한과의 대결을 선명히 내세운 박근혜정권에도 한일 공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의 안보협력은 긴요했으니 두 정권 사이의 공조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둘의 관계가 예상을 벗어나서 악화일로에 놓이게 된 것일까?

사실 박근혜정권은 영토-역사인식 문제에서 원론적인 입장에 서서 전진도 후퇴도 하지 않는 ‘현상유지’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전진은 일본과의 외교적 갈등을 키울 것이고, 후퇴는 국내의 반발을 불러 여론의 악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영토-역사인식 문제에서 여론이 악화되면, 안보에서의 한일협력 움직임에 차질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고 이는 한일 간의 공조를 바라는 미국의 의향에 반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따라서 역사문제에서 선제적공세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안보 영역과 역사문제의 ‘분리대응’ 원칙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아베의 ‘자숙’을 기대하거나, 일본의 ‘폭주’를 막아주는 미국의 역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일관계에서 원칙론을 되풀이하는 ‘정태적 외교’가 점쳐졌던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근혜정권의 대일정책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역시 문제를 키운 것은 아베 쪽이다. 그렇다면 아베정권은 왜 영토-역사 문제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살 만한 발언을 거듭했을까? 물론 20137월에는 참의원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여론 움직임에 민감한 내각책임제의 속성상 지지율의 향배는 아베정권에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아베는 ‘경제 살리기’(아베노믹스)와 함께 영토수호, 헌법개정, 야스꾸니 참배를 공약으로 내걸고 권좌에 올랐으니 대중적 인기를 지탱하는 한 요소였던 영토-역사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베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적 목표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는 데 있다. 이른바 ‘집단적 자위권’의 확보다. 이는 미국이 줄곧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하려면 명문개헌의 형태든 해석개헌의 형태든 헌법상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며 이를 위해서는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안팎의 ‘동의’가 필요하다. 여전히 높은 일본사회 내부의 헌법개정 반대여론을 찬성여론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밖으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한중과의 갈등을 키워 ‘중국위협론’과 한국의 ‘반일론’을 강조하면 할수록 일본 내의 위기의식이 커져 개헌에 반대하는 여론을 잠재우고 중간층을 찬성여론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역사갈등은 이같은 위기감을 조장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무기였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과의 역사갈등이 커질수록 안보협력은 어려워진다. 즉 역사갈등은 아베정권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결국 아베가 선택한 것은 한국의 동의를 단기적으로 포기하고 자신의 우경화 행보에 대한 지지율을 높여 단기적으로는 해석개헌, 장기적으로는 명문개헌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는 길이었다. 실제로 소비세율 인상과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이후 급격하게 하락기미에 있었던 아베의 지지율은 야스꾸니 참배 이후 반등해 상승경향으로 돌아섰다. 물론 이같은 아베의 ‘폭주’가 아베 개인의 ‘비정상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아베가 우경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우경화가 아베라는 ‘괴물’을 만든 것이다.8)

 

 

3. ‘65년체제’와 ‘95년체제’

 

하지만 박근혜정권과 아베정권의 ‘불화’를 아베정권의 단기적인 우경화 프로젝트의 결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일관계에 더욱 근본적인 모순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안보의 상관관계라는 차원에서 한일관계를 지탱해왔던 두가지 체제를 통해 그 모순에 접근해보자. 하나는 ‘65년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95년체제’이다. 65년체제란, 첫째로는 미국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계열화에 기반한 한일 유사 삼각동맹체제(미일동맹과 한미동맹)를 통해 러시아-중국-북한을 봉쇄포위하고, 둘째로는 이 체제를 유지하고 그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역사문제의 분출 등을 물리적 폭력으로 억압하거나 관제 가능한 영역에 가두고 영토문제를 ‘봉합’하는 체제를 말한다. 제도적으로는 ‘한일합방’(1910) 무효와 청구권 소멸, 그리고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1965년의 한일협정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안보를 ‘살리고’ 역사를 ‘죽임으로써’ 양자 사이의 상극을 해소한 체제를 말한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자민당의 밀월관계를 지탱한 65년체제는 냉전체제가 해체된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대 후반의 냉전해체와 한국의 민주화는 65년체제에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65년체제의 전제조건이던 남북 간의 극단적인 대결구도에 유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한소수교(1990), 한중수교(1992)가 이루어지면서, 러시아-중국-북한을 포위하는 기존의 한일 유사동맹체제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 입장에서 보면, 65년체제하에서 한국이 주로 맡아왔던 군사적 리스크가 일본으로 일부 전이되면서, 이를 미국과 한국에 의존하던 기존의 안보정책에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자위대의 외연확대, 미일동맹 강화, 그리고 헌법개정 움직임은 이같은 배경에서 나타났다.

다른 하나는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반공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억압봉인되어왔던 역사문제가 분출되어 이를 물리적 폭력으로 억제관제해온 65년체제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 등을 비롯한 역사문제가 대체로 1990년대 이후에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군사독재정권이 한일 공조체제의 유지를 위해 역사문제를 얼마나 억압해왔는지를 방증한다. 안보를 살리고 역사를 죽여 양자의 상극을 해소했던 65년체제가 더이상 작동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른바 65년체제의 위기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95년체제’이다. 95년체제란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사과를 담은 코오노(河野洋平) 담화(1993)와 식민지지배 및 침략에 대해 사과한 무라야마(村山富市) 담화(1995) 같은 일련의 ‘사과외교’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의 역사인식을 말한다. 이후 우여곡절은 있지만 역사인식을 둘러싼 한일관계의 골격은 이 95년체제에 바탕을 두게 된다. 예를 들면 199810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오부찌 케이조오(小渕恵三) 총리가 공동으로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95년체제의 대표적인 성과물이다. 또 20108월에 발표된 칸 나오또(菅直人) 총리의 ‘한일 강제병합 100년 담화’도 코오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95년체제는 90년대 이후 한일 정부가 공적으로 공유한 역사인식을 지칭하는 체제라 볼 수 있다.

와다 하루끼(和田春樹)는 코오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전후 50년을 맞이한 일본이 “확립한 공통의 역사인식”이고 “이웃나라의 이해와 지지 하에 제() 국민의 화해와 협력을 끌어온 공공재”라고 말하며 높이 평가한다.9) 그의 말대로 무라야마 담화 등이 ‘이웃나라의 이해와 지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65년체제가 무시했던 식민지지배 행위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가의 수장이 공식적으로 사과의 의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95년체제는 65년체제를 역사의식 면에서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95년체제가 65년체제의 보완물이지 대체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95년체제는 국가의 책임배상을 부정하고 이를 ‘사과’라는 형태로 봉합함으로써 65년체제가 지닌 모순을 체제 내로 흡수해 65년체제를 연명시키려는 시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후 식민지지배 책임문제는 65년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성격을 잃고 국가 책임자의 사과발언 여부나 그 수위를 둘러싼 쟁점으로 왜소화되어 표류하게 된다.10)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95년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한일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책임과 보상 없는 ‘뒤늦은 사과’로 요약되는 95년체제를 65년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통과점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65년체제의 근간이 되는 한일협정이 그 정통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 즉 반공독재정권하에서 맺어졌기 때문이다. 국제법상의 구속여부나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한일협정 폐기론이나 부정론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본은 65년체제가 국제법상으로 역사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이었다는 입장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더구나 95년체제를 통해 65년체제가 담지 못했던 ‘사과’의 의지까지 담았으니 역사문제는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한일 간의 역사갈등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해석’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65년체제와 95년체제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사실 두 사회가 경험한 역사적 차이에서 비롯한 바가 크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질서를 강고한 연속성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개변(改變) 가능성을 적어도 공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식민지시대나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나 조약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해도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통해 이것이 얼마든지 개변 가능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는 것이다.

 

 

4. 남겨진 문제

 

앞으로 한일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안보를 위해 물리적으로 역사를 죽였던 65년체제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일본이 안보를 위해 역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역시 두 정권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안보를 위해 역사문제를 95년체제 수준으로 봉합해 65년체제의 연명을 꾀하는 길이다. 특히 두 정권의 이념적 성격과 국제정세의 추이, 그리고 미국의 요구를 감안하면, 과거 정권에서 추진했던 군사교류 같은 안보협력을 가속화하기 위해 역사갈등을 95년체제의 수준에서 봉합할 공산이 커 보인다. 즉 코오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을 소극적으로나마 아베정권이 선언하고 이를 박근혜정권이 수용함으로써 양측의 관계 ‘정상화’를 꾀할 가능성이 크다. 요컨대 그것은 역사를 ‘봉합’하고 이를 안보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안보협력 기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가령 일본정부가 “과거에는 잘못했다, 사과한다, 그런데 헌법개정은 하겠다, 집단적 자위권도 확보하겠다, 한일군사교류도 추진하겠다”라고 하고, 한국정부는 “일본이 사과했다, 경제문제도 있고 안보문제도 있으니 미래를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겠다”라고 하는 방식이다. 돌이켜보면 95년체제하에서 진행된 일본의 우경화 프로젝트도 이같은 ‘분리방식’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와 안보는 분리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일관계의 기본골격이 안보를 살리기 위해 역사를 죽임으로써 성립되었고 이 구조가 줄곧 반복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 역사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태도는 두가지 차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19세기 이래 형성된 제국주의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영토나 ‘동해(東海) 표기’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은 한편으로 양국 내셔널리즘의 충돌 성격도 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시대에 일본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질서에 대한 이의제기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둘째로는 역사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65년체제하에서 형성되고 95년체제로 연명된 한일 유사 삼각동맹체제를 실질적인 삼각동맹체제로 바꾸기 위한 최근의 움직임(한일군사교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한일 간의 안보협력을 막기 위해 역사를 볼모로 삼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안보를 볼모로 삼아 역사를 죽여온 65년체제와 이의 연명을 꾀한 95년체제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역사를 살림으로써 안보를 죽이는 길과 안보를 죽임으로써 역사를 살리는 길은 결국 같은 몸통에서 뻗어나온 두 줄기다. 물론 이 길이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빠른 근대’(일본)에 대한 ‘뒤늦은 근대’(한국)의 따라잡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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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毎日新聞』 2013.10.19.

2) Roland Barthes, LEmpire des signes(1970); 일본어판 『表徴帝国』, ちくま学芸文庫 1996.

3) 싱가포르 외무성 누리집(http://www.mfa.gov.sg/content/mfa/media_centre/press_room/pr/2013/201312/press_20131229.html)

4) 경향신문 2013.12.29.

5)朝日新聞』 2013.12.26.

6)朝日新聞』 2014.1.30.

7) 졸고 「박근혜에게 ‘우파공존’ 손짓하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2호 및 2013년 1월 12일과 2013년 2월 2일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관계자가 공동으로 참여한 한일전략회의에서 필자가 배포한 발표문.

8) 아베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갖는 2014년 2월 9일의 토오꾜오 도지사선거에서 ‘예상대로’ 아베가 지지하는 마스조에 요오이찌(舛添要一) 후보가 당선되었다. 아베 노선을 일본사회가 지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9) 和田春樹安倍首相にとっての歴史認識問題」, 『世界』 2013년 9월호.

10) 90년대 중반의 ‘사과외교’에 대해서는 졸저 『일본 전후의 붕괴: 서브컬처 소비사회 그리고 세대』, 제이앤씨 201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