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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동아시아 담론, 온 길과 갈 길

백영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의 안팎 살피기

 

 

이정훈 李政勳

서울대 중문과 교수. 중국의 사회문화 및 동아시아 담론과 관련한 최근 논문으로 「중국의 미래, 중국이라는 미래」 「한국발(發) 동아시아 담론의 현단계: 최원식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에 대하여」 등이 있음. luxun@snu.ac.kr

 

 

1. 들어가며

 

백영서(白永瑞)의 새 책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창비 2013, 이하 핵심현장)를 접하는 반가움은 각별하다. 복고적 권위주의로의 퇴행으로 요약될 법한 최근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지식계 전반에 미만(彌滿)한 무기력에서 벗어나 지식공론장을 재활성화하는 데 ‘동아시아’만큼 적합한 의제도 달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 책에는 저자가 2000년에 출간한 『동아시아의 귀환: 중국의 근대성을 묻는다』(창비, 이하 『귀환』)를 통해 한국 지식계에 동아시아를 하나의 화두로 제출한 이후 지금까지 온양(醞釀)해온 관련 논의의 성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금까지의 작업에 대한 저자 스스로의 중간결산인 동시에 한국지식계 내부에서의 후속토론을 위한 예비발제로서의 성격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최원식(崔元植)과 더불어 이른바 ‘창비발()’ 동아시아 담론의 축을 맡아온 저자의 입론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저자의 문제의식이 좀더 널리 확산되어 지식계의 동아시아 관련 논의가 재활성화되었으면 하는 기대에서 출발한다. 자료의 폭넓은 섭렵과 학적 엄밀함이 녹아 있는 문체는 『핵심현장』의 중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문제의식이 대중적인 파급에 최적화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몇몇 일간지에서 서평의 형태로 출간의 의의를 짚어본 바도 있으나 평자로서는 좀더 본격적인 반향에 대한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오랜 숙성기간을 거쳐 집약되고 체계화된 저자의 논지를 짧은 지면에 굳이 반복해서 소개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 글을 통해 저자가 그간 거쳐온 지적 모색의 역정을 되짚어보는 일은 향후 한국 지식계에서 동아시아론을 둘러싼 진전된 토론의 활성화를 위하여 긴요한 작업이라 판단된다. 하여 여기서는 동아시아론과 관련한 저자의 첫번째 책 『귀환』과 여타 다른 저작에 실리지 않은 그의 의미있는 작업1)을 포함하여 좀더 넓은 맥락에서 『핵심현장』의 의미를 살피는 것을 소임으로 삼고자 한다.

 

 

2. ‘주변’의 정당성: 동아시아 담론의 민족주의 DNA와 그 극복

 

90년대초 당시 동아시아론의 제기가 80년대말 이후 한국사회 안팎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부분적 성취,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탈냉전 및 구 사회주의권과의 수교(북방정책) 등의 상황변화 속에서 70년대까지의 민족주의와 80년대 대두된 ‘급진’ 담론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대안의 모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3년 최원식이 발표한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2)에 이어 백영서가 발표한 「한국에서의 중국현대사연구의 의미: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을 위한 성찰」3)과 「중국 인권문제를 보는 시각: 동아시아적 상황과 관련하여」4) 두편의 글을 통해 ‘동아시아적 시각’은 90년대 지식계의 새로운 방향탐색에 중요한 이정표로 떠오른 바 있다. 동아시아론의 제기는 한국사회를 냉전구조하에서 형성된 독특한 ‘분단체제’로 이해하면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동시적 지향을 추구하는 백낙청(白樂晴)의 분단체제론과 깊은 이론적 연계성을 가지는데, 창비 지식인그룹에 의해 다듬어진 이 ‘분단체제-동아시아론’5)은 당대 한국의 현실을 일국적 시각에서 벗어나 한반도 전체, 나아가 지역적 맥락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6)가 되었으며, 그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드물게 자국 상황에 근거해서 형성된 현실분석의 도구이자 이론으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선진(?)이론의 수입경쟁으로 점철되어온 한국 지식계에서 이 점은 각별한 의미를 인정할 만하다.

이렇듯 성공한 이론으로서의 동아시아 담론의 발전과정에서 『핵심현장』에 포함된 논의들이 갖는 의미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귀환』과 『핵심현장』 사이의 문제의식의 연속-단절에 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귀환』에서 저자는 한국에서의 중국사 연구가 갖는 한계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분과학문으로서의 중국사 연구에 있어 주체적 시각을 모색하면서 이를 동시대 비판담론의 새로운 추형(雛形)을 형성해가는 방향으로 사유를 전개해간다. 그리하여 이 책은 대안적 비판담론의 생산이라는 사회적 책무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제도적 분과학문의 한계에 대한 반성 및 대안모색이라는 전문연구자로서의 자의식 간의 내적 긴장이 숨은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귀환’이라는 제목이 전자의 문제의식에 근거한 미래적 지향(‘프로젝트로서의 동아시아’)을 제시한다면, ‘중국의 근대성을 묻는다’라는 부제는 후자의 문제의식을 낳은 학문적 근거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새 저작 『핵심현장』이 담고 있는 그간의 이론적 진전 양상을 살펴볼 때 이 내적 긴장은 저자의 사유의 밀도를 높이는 촉매제로 작용해온 듯하다. 저자가 언급했듯 한국에서의 중국사 혹은 중국학 연구는 당연하게도 한국 안에서 중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했고 자연스럽게 한중관계사 등 자국사와의 관련성에 관심이 집중되어왔다.7) 이런 제약을 고려할 때 한국의 입지는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오랜 기간 연구성과를 축적해온 서구, 일본과 비교하기 어려운 처지이다. 그러나 백영서는 주변부에 속한 연구자로서의 자의식을 오히려 독자적 중국이해의 가능성의 단초로 재해석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 승화한다. 저자는 “한국인으로서의 체험을 중시하되 그것을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재구성하”8)는 것이야말로 큰 의미를 가진다고 선언한다.9) 이에 기반하여 ‘문명으로서의 아시아’와 ‘지역연대로서의 아시아’라는 관점과 더불어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란 발상이 동아시아 담론의 단초로서 정식으로 제출되기에 이른다. 저자가 중국 내부의 중국인식이 가진 맹점(횡적 사고의 부재)을 날카롭게 지적10)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런 원리의 발견에 힘입었다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모델 속에 저자의 ‘주체성’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저자의 지적 배경 가운데 하나인 민족주의적 성격과 결부지어 이해해볼 수 있다. 민족문학론을 통해 문단과 지식계에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해온 ‘지식인집단 창비’의 역사성을 감안하면 그러한 창비 동아시아론의 일부로서 저자의 주장 역시 태생적으로 민족주의 전통에 연원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90년대 초반 당시의 지식상황을 돌이켜볼 때, 민족주의의 재구성,11) 즉 ‘저항적 민족주의’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시대에 맞게 재정립하는 일은 매우 긴요한 사상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70년대까지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80년대 이후의 급진이론이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동반 몰락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뒤이어 등장한 각종 포스트담론 중심의 외래이론의 홍수 속에서 한국상황에 뿌리를 둔 토착적 비판담론의 의의는 작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수입’ 담론들이 갖는 공통적 한계, 즉 고착화된 분단구조를 통해 적대적 공존을 지속해온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그에 기반한 한국사회의 특이성이라는 측면에 대한 해명이 미흡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저항적 민족주의가 갖는 정당성의 재확인과는 별개로 90년대의 상황은 민족주의 자체의 자기갱신을 필요로 했다. 고도화된 한국자본주의하에서 종래 민족주의의 설명틀(식민성과 종속성의 강조)에 입각하여 현실의 모순을 설명하는 것은 그 한계가 분명했으며 이에 따라 90년대의 상황에서 동아시아 담론은 분단체제론과 연속적 계기를 형성하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민족주의 담론을 ‘버전 업’ 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되는데, 한편에서 토착적 현실인식에 근거한 저항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 담론이 빠져들기 쉬운 자아중심적 국수화의 위험에도 맞서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감당해야 했다. 『핵심현장』은 이러한 사상적 과제에 부응하여 저자가 전개해온 이론적실천적 탐색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저자의 새로운 동아시아론의 중핵을 구성하는 ‘핵심현장’과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라는 개념은 “횡적 사고를 통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구도”12)를 발견해냄으로써 민족주의의 한계를 내면적으로 넘어서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3. 세개의 제국, 이중적 주변, 핵심현장

 

먼저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 가진 이론적 함의를 살펴보자. 동아시아를 하나의 분석단위로 삼을 때, 한국(혹은 한반도)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작은 규모와 피식민 경험 등으로 인해 종속적 위상에 놓이기 쉽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라는 범주의 설정 자체가 한국의 입지를 좁히는 일종의 탈-주체화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한국이 갖는 주변국과의 ‘비대칭성’으로 생겨나는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백영서는 앞서 언급한 전환적 발상, 즉 동아시아 내부의 중심-주변 관계에 대한 역사적 시선을 투사함으로써 발견한다.

주변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이 정의되어야 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동아시아에서 중심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세개의 제국’이다. 즉 과거의 ‘중화제국’, 20세기 전반의 ‘일본제국’,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미국이 각각 동아시아 내부의 제국적 질서를 형성하는 중심축으로 기능해왔다는 것이다. 조공체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적 대립 등 이 세 제국이 지역의 역사에 그늘을 드리워왔음도 자명하다. 그렇다면 미래의 동아시아가 지향하는 평화와 협력의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는 제국 중심부가 아닌 주변의 입장에서 대안을 모색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다. 따라서 시기별로 조공국, 피식민지, 분단국으로서의 피동적 운명을 겪어온 한반도의 입장에 설 때 미래의 동아시아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의 주변적 입지 자체가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이는 한국으로 하여금 중국, 일본과 달리 서구에 대해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갖는 주변적 위치에다 동아시아 내에서의 또다른 주변적 위상이 중첩되는 이른바 ‘이중적 주변’의 위치를 갖게 한다. 이 ‘세개의 제국’론에 입각할 때, 한국은 미국이 대표하는 현재의 제국적 질서(냉전과 그 유산)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라는 과거의 두 제국에 대해서도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말하자면 ‘세개의 제국’론은 미국, 일본, 중국의 세 방향을 향해서 동시에 민족주의의 저항성을 투사하는 역사관이자 현실인식 방법론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변성’이 한반도에만 배타적으로 허용되는 것일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현재 일본 영토의 일부를 구성하지만 복잡한 근대사의 질곡을 거치며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한 오끼나와와, 흔히 중국의 일부로 인정되는 동시에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하는 대만의 경우 어떤 점에서는 한국(한반도)에 비해서도 더 주변적이다. 한국은 중국, 일본에 대해 주변적이지만 넓은 의미의 중국, 일본에 포함되는 대만, 오끼나와와의 관계 속에서도 이 주변성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국민국가의 경계만을 배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한국과 대만, 오끼나와 사이의 관계와 비대칭성은 포착되기 어렵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중앙과 주변의 관계는 단순히 지리적 위치를 가리키지 않고 무한한 연쇄관계 또는 무한 억압이양(抑壓移讓)의 관계를 맺는 것”13)으로서 새롭게 정의된다. 이렇게 또다른 주변‘들’을 발견함으로써, 중심-주변 관계의 절대화가 초래할 수 있는 편향, 예컨대 한반도의 주변성에 대한 강조가 그 역방향인 국수적 성향의 자민족중심주의로 경사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대만이나 오끼나와 같은 국가와 비국가의 중간상태, 혹은 여러 심급의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한국 혹은 한반도의 그것과 견주어봄으로써 민족주의 간의 횡적 비교와 연대를 매개로 한 새로운 참조체계의 확보가 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 담론은 그 내부에 민족주의적 계기와 탈민족주의적 계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민족주의가 자기부정을 거쳐 일종의 ‘열린 민족주의’로 진화해간 사상적 결정(結晶)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하나의 국민국가체계 내부(일본-오끼나와) 혹은 분단된 국민국가의 양측(남북한 및 양안관계)에서 다양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문제 삼기 위해서는 근대적 국민국가 단위의 관계분석을 넘어선 복합적 인식틀이 필수적이다. 저자가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관한 대안으로 검토된 백낙청의 복합국가론을 대안적 동아시아상()의 모색에 필수적 계기로 배치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한반도와 더불어 대만 및 오끼나와를 ‘핵심현장’으로 지목하는 저자의 취지는 동아시아를 논하는 새로운 담론틀 안에서 이 두 지역의 ‘발견’이 민족주의적 입장에 근거한 현실인식의 주체성과 민족주의의 폐쇄적 시야를 넘어서는 개방성의 공존 가능성을 시사해준 것과 깊이 관련된 듯하다. 이 지점들은 단순히 중심과 주변 간의 모순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제국’에 대한 즉자적 저항을 넘어선 대안적 미래 구성의 원리가 창출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나의 ‘사고실험’으로 출발한 동아시아는 저자의 동아시아론에서 주변의 횡적 연대를 통해 현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핵심현장』에 담긴 이론적 진전의 결과물은 전작과 비교할 때, 분명 한차례의 ‘판올림’(up-grade)을 거친 것이라 할 수 있다.

 

 

4. G2시대, 핵심현장 재규정의 필요성

 

이러한 ‘횡적 사고’에 입각한 백영서의 동아시아론은 특히 ‘중심부’이자 ‘제국’에 속하는 중국어권 지식계에 상당한 반향과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어로 출판된 그의 저서14)에 관해 중국어권의 매체15)와 지식인들이 보인 진지한 반응16)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륙의 지식인은 물론 대만의 지식인들조차 저자의 사유를 통해 자신에게 내재된 ‘중화성’, 즉 제국적 유산 내부에서의 사유습관에 대한 반성17)에 이르렀음을 고백하는 것을 볼 때, 이중적 주변의 시각 제기가 동아시아 비판적 지식계 내부에 연대의 기초를 다지는 데 제몫을 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폭넓은 대중의 공통관심사로까지 밀고 나가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할 듯한데, 이는 저자가 제시하는 동아시아 모델의 사고실험적 측면이 오늘날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대중적 실감과 바로 연결되기에 일정한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센까꾸(尖角)/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에서 전개되는 중일 간의 해군력 대치, 남중국해에서의 중국과 필리핀, 베트남 간 영유권 분쟁처럼 동아시아 내부에서 최근 불거지고 있는 새로운 갈등은 저자가 지목한 ‘핵심현장’에서 조금 비껴난 지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만의 경우 경제활성화에 역량을 집중하여 최근 중국과 민감한 영역인 서비스업 상호개방 등을 포괄하는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하면서, 경제적 측면에서 이른바 양안(兩)의 실질적 통합을 의미하는 ‘차이완’(Chiwan) 시대의 개막이 운위되는 형편이다. 한반도 역시 남북 간에 핵문제를 포함한 현안들이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동시에 중국 제조업의 추격으로 인한 비교우위 상실에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한 한 일간지의 특집기사18)로 중국 관광객을 상대로 한 카지노산업의 대거 유치 등 중국 내수와 서비스산업을 주요 대상으로 한 특단의 경제구조 재편방안이 등장할 정도로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구조조정 문제는 발등의 불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등장한 ‘통일대박론’에서 엿보이듯 전통적으로 안보이슈로만 자리매김되었던 통일문제까지도 이제 내수확대라는 경제전략과 연계되어 논의될 정도가 되었음에랴.19)

중일 간의 군사적 갈등이 여전히 부각되고는 있으나, 동아시아의 새로운 정세는 냉전의 유산을 이어받은 군사적 대치로 표상되는 전통적 의미의 갈등만으로는 더이상 설명하기 어려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전개 국면에 따른 자본의 이동과 노동의 재배치 및 그에 따른 국가의 역할 변화 등과 관련한 새로운 이해가 절실한 형국이다. 특히 오늘날 동아시아를 둘러싼 소용돌이의 핵심에는 중국이 있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의 급속한 경제적 성장은 동아시아 전체는 물론, 미국과 서유럽 같은 자본주의 중심부에 그 영향을 미치는 데서 더 나아가 아프리카와 남미, 대양주를 포함하는 전세계의 변모를 추동하는 ‘중국효과’(China effect)를 낳고 있다.20) 따라서 ‘중화제국’의 전통과 관련하여 현재의 중국을 파악해온 시각을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변동이라는 세계체제적 차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최근 인구에 회자되는 미국의 ‘동아시아 복귀’(Pivot to Asia) 정책만 하더라도 2008년 써브프라임 위기 이후 중국이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권위에 도전하고,21) 미국이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로 이에 맞서는 상황에 따른 갈등표출로 볼 여지가 있다.21) 세계체제론에 입각한 분석22)에 따르면 여기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에서 중국을 중핵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으로 자본축적의 중심이 전이됨으로써 유발된 주도권 갈등이 그 본질에 자리하고 있다.23) 이처럼 현재의 동아시아를 규정하는 새로운 동력은 ‘G2’가 되었건 ‘차이메리카’가 되었건 단순히 거대한 두 국민국가의 경쟁이라는 차원만으로는 그 실체를 포착하기 어려운 글로벌한 조건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복합성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 담론이 애초에 제기했던, 한반도 분단체제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사이의 중간범주로서 동아시아의 매개적 의미를 실질적 차원에서 구명(究明)하는 작업은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는 기존의 ‘제국’ ‘국민국가-복합국가’ ‘중심-주변’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했던 동아시아 및 그 ‘핵심현장’에 대한 시각을 중미 간 갈등 및 그와 연동되어 전개되는 국면변화를 중심으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새로운 의미에서의 ‘핵심현장’으로서 중국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백영서 자신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발표한 논문24)을 통해 중문학과 중국사 영역을 중심으로 한 제도권 학문의 전통을, 70년대 리영희(李泳禧)를 하나의 범례로 한 ‘운동으로서의 중국학’과 대비하면서 검토한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백영서는 “운동으로서의 중국학을 동력으로 삼아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비판적 중국연구 (불)가능성을 전망”하면서 비판적 중국연구가 새로운 사유의 공간을 열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으로 주변적 관점과 더불어 지구지역학에 입각한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25) “자본주의에 더 잘 적응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지역이 동아시아이다. 특히 중국이 발전하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를 더 잘 발전시킬 수 있는 동시에 그 위기 또한 더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란 지역은 이제 전지구적 차원에서 문제적이다”26)라는 지적은 저자가 주창하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핵심적 문제의식이 동아시아론과 연속성을 갖는 작업이라는 점을 더 명확히 드러낸다. 이러한 과제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동아시아론이 또 한번의 ‘판올림’을 수행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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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영서 「중국학의 궤적과 비판적 중국연구: 한국의 사례」(『대동문화연구』 제80집,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2)와 대만에서 출간된 『思想東亞:韓半島視覺的史與實踐』(臺社/唐山 2009)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 『창작과비평』 1993년 봄호; 최원식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 창비 2009에 재수록.

3) 『중국현대사연구회회보』 제1호, 1993; 『귀환』에 재수록.

4) 『창작과비평』 1994년 겨울호; 『귀환』에 재수록.

5)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의 관련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류준필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아세아연구』 제138호,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2009.

6) 창비의 이론작업의 일환으로서 동아시아론이 당대 지식계의 상황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관해서는 『귀환』 의 「책을 펴내며」 참조.

7) 「한국에서의 중국현대사연구의 의미」, 『귀환』 133~37면.

8) 같은 책 144면.

9) 이런 점에서 저자의 동아시아론은 중국학(즉 외국학)에서 출발하여 개별연구의 한계를 넘어설 통합적 성격의 대안해석 체계를 구성하려는 귀납적 필요성을 원천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굳이 구분하자면, (한)국학을 기초로 한일을 공통문명의 기초라는 틀로 파악하고자 하는 최원식의 동아시아론이 가진 연역적 입장과 그 출발에 있어 미묘한 차이를 갖는다.

10) 「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 『귀환』 49면.

11) 백영서 인터뷰 「東亞尋找創造新文明的可能性」, 『文匯報』 2012.5.14.

12) 孫歌横向思考的东亚图景:评白乐晴分断体制民族文学与白永瑞思想东亚:韩半岛视角的历史与实践』」, 『开放时代』 2011년 제6기. 국역본은 쑨 거 「동아시아 미래에 대한 횡단적 사유」, 『동방학지』 제154집, 연세대 국학연구원 2011.6.

13) 「프롤로그: ‘핵심현장’에서 찾는 동아시아 공생의 길」, 『핵심현장』 17면.

14) 중국어판은 2009년 대만의 『대만사회연구계간』을 통해 『思想東亞: 韓半島視覺的史與實踐』의 번체자본이 출간된 후, 중국어권 미디어의 관심에 힘입어 2011년 베이징 三聯書店에서 같은 제목의 간체자본으로 재차 출간되었다.

15) 2010년 5월 3일 중국 광저우의 유력 일간지 『난팡두스바오』(南方都市报)에 특약평론기자 닝 얼(宁二)과 백영서의 인터뷰(「白永瑞:双重周边视角下的东亚共同体」)가 게재되었다. 『思想東亞』는 10월 14일에 상하이의 『동팡자오바오』(东方早报)에 리 궁밍(李公明)의 서평 형식으로 그 내용이 소개되었으며, 12월 30일 홍콩의 유명 언론인 량 원다오(梁文道)가 진행하는 피닉스TV의 서평 프로그램(开卷八分钟)에서도 상세히 다뤄진 바 있다. 또 2012년 5월 14일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원후이바오』(文匯報)에 백영서의 인터뷰 「‘동아시아’에서 문명창신의 가능성을 찾다」(東亞尋找創造新文明的可能性)가 실렸다.

16) 2009년 9월 12일에는 대만에서의 출간을 기념하여 타이페이에서 저자 초청 독서포럼이 개최되었다. 취 완원(瞿宛文)의 사회로 진행된 이 행사는 천 팡밍(陳芳明), 닝 잉빈(甯應斌), 린 자이쥐에(林載爵), 천 광싱(陳光興) 등 대만 지식계 인사들과 저자의 토론에 이어 일반 독자와의 질의응답으로 진행되었다.

17) 위 독서포럼의 참석자 가운데 천 광싱은 발제문에서 독서 후의 소회를 ‘충격’으로 표현했다. 백영서의 입론을 통해 ‘중화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계기를 확보했음은 물론, 영어권 학술성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대만학계와 달리 그의 책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한문 포함), 일본어 등의 광범위한 성과를 종합하여 한국 동아시아 관련 논의가 갖는 폭과 깊이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思想東相遇」, 『文化硏究雙月報』 제100호, 2010.1.

18) 「한중수교 20년, 미래로 가는 KORINA」, 동아일보 2012.6.4~2012.8.8.

19)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과 관련한 2014년 1월 31일 KBS뉴스의 보도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통일이 되면 내수신장 효과를 비롯해서 새로운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게 되고 남북한 모두에게 있어서 큰 경제적 이득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현대경제연구원 통일경제센터장 홍순직) 한국의 과잉생산을 해소하는 계기로서 통일이 갖는 경제적 효과를 언급한 사례로는 다음의 기사도 주목할 만하다. 유시민원 톄쥔(溫鐵軍) 대담 「한중 지식인 ‘중국을 말하다’」, 경향신문 2013.10.20.

20) 담비사 모요 『승자독식』, 김종수 옮김, 중앙북스 2012; 세르주 미셸 외 『차이나프리카』, 이희정 옮김, 에코리브르 2009 참고.

21) 배리 아이켄그린 『달러제국의 몰락』, 김태훈 옮김, 북하이브 2011, 269~71면.

22) 훙 호펑 외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 하남석 외 옮김, 미지북스 2012; 리 민치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 류현 옮김, 돌베개 2010.

23) 조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강진아 옮김, 길 2009, 22~25면.

24) 백영서 「중국학의 궤적과 비판적 중국연구: 한국의 사례」, 『대동문화연구』 제80집.

25) 같은 글 599면.

26) 같은 글 60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