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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신남철 문장선집』(전2권), 성균관대출판부 2013

잠언을 저작하는 인간: 고민과 투쟁

 

 

윤대석 尹大石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yds70@hanmail.net

 

 

163_4131990년대 이후 신남철(申南澈), 박치우(朴致祐), 서인식(徐寅植) 같은 식민지 말기의 철학자·사상가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명제를 대면한 한국 지식인이,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식민지 말기에 제출된 ‘근대의 초극(超克)’이라는 명제에 조선 지식인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환기의 비평·지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탐색하기 위해 시작된 이들 사상가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 들어 제국과 식민지의 사상연쇄라는 맥락으로 옮겨갔는데, 여기서 중요한 논의는 동양주의와 동아(東亞) 신질서론에 관한 것이었다. 탈근대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 이어지는 1990년대 이후 한국근대문학 연구가 그와 관련된 담론을 지속적으로 생산했던 이들 사상가를 참조점으로 주목한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심하에서 『서인식 전집』(차승기 외 엮음, 전2권, 역락 2006), 『사상과 현실: 박치우 전집』(윤대석 외 엮음, 인하대출판부 2010)이 한국근대문학 연구자에 의해 나왔고 그 연장선에 『신남철 문장선집』(정종현 엮음)이 놓여 있다.

최근 들어 한국근대문학 연구는 식민지에서의 지식 생산·유통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에 주목하게 되었다. 정종현(鄭鍾賢)의 논문 「신남철과 ‘대학’ 제도의 안과 밖: 식민지 ‘학지(學知)’의 연속과 비연속」(『한국어문학연구』 제54집, 2010)은 그러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신남철은 대학이라는 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지식 제도’의 전개를 개인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기호이다.”(1권, 5면) 『한국 사회철학의 수용과 전개』(동녘 2002)에서 김재현은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신남철의 사상전개를 살펴보는데, ‘수용’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관계는 일방적이다. 그러나 서양철학과 신남철 사이에 매개로서 일본의 사상계를 도입하면,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 연속되면서도 연속되지 않는 사상연쇄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상연쇄에 대한 해명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더욱 촘촘하게 분석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경성제대라고 하는 식민지의 지식생산제도와의 관계이다. 이에 관해서는 박광현(朴光賢)의 「경성제대와 『신흥』」(『한국문학연구』 제26권,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2003)에서 정치(精緻)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식민지 지식인의 지식생산 메커니즘을 좀더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하여 그들이 가지게 된 고유하고 독창적인 문제의식이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해방 이후의 사상전개가 어떠한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한국의 사상계는 유행하는 사조의 집적물에 불과할 것이다. 편자는 신남철에게서 ‘딛고 넘어가자’라는 명제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제국과 식민지의 연속과 비연속을 설명할 뿐 아니라 식민지와 그 이후의 연속과 비연속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딛고 넘어가자’라는 명제와 관련하여 평자가 주목하는 것은 식민지 이후의 사상전개이다. 신남철은 해방 이후 단행본을 발간하면서 식민지 시기에 쓴 글을 조금 고쳐서 실었는데, 그것은 그 둘 사이의 연속과 비연속(딛고 넘어감)을 잘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해방 이후 사상의 전개는 식민지 시기에 잠재된 사유의 가능성을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잠언을 저작하는 인간’(2권, 206면)이 그 가운데 하나다. 그는 능동적 인간과 수동적 인간, 이론인과 정치인, 즉 창조적 자유와 국가적 전체를 넘어선 ‘제3의 새것’(1권, 136면)을 고민-투쟁하는 인간, 즉 ‘잠언을 저작하는 인간’에게서 발견한다. 희랍어 아고니아(agonia)는 고민과 투쟁을 모두 의미하고 그 파생어인 Dubitare(회의하다)와 Duellum(투쟁하다)은 모두 둘(duo)이라는 존재의 복수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확대하여 신남철은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안주성의 주체적인 교란 재조정”(1권, 142면)을 통해 공공성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자치 훈련을 제안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맑스주의와 신체제론을 ‘딛고 넘어가서’ 도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외에도 조선학, 나아가 동양학의 계보를 일본의 퇴영적인 국학이 아니라 중국의 진보적인 국학에 놓음으로써 사상연쇄의 새로운 줄기를 그리고자 한 조선학 관련 논문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편자가 지적한 대로, 맑스주의적 역사방법론뿐 아니라 랑케(L. von Ranke)류의 실증주의 역사방법론까지 수용하고자 한 사상적 고투도 볼 만하다. 이러한 점은 『역사철학』(김재현 해제, 이제이북스 2010)과 함께 놓고 보아야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사실 『신남철 문장선집』은 『역사철학』을 제외한 신남철의 모든 글을 모은 것인데, 편집체제를 볼 때 1권과 2권 사이에 『역사철학』을 끼워넣으면 그대로 ‘신남철 전집’이 된다.

한국근대문학 연구자로서 2000년대 이후의 연구경향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작가론의 쇠퇴와 전집의 부재 현상이다. 문화연구, 담론연구의 성행에 비례하여 개별 작가, 사상가가 세계를 향해 발신한 고유한 문제의식과 그 변모를 천착하는 연구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근대문학을 해석하는 참조점이 식민지 조선에서 동아시아로, 그리고 문학계에서 문화계 전체로 확대되었음을, 그를 통해 작품이나 사상이 좀더 입체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반면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의 문제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집 출간은, 생애를 근거로 저자의 작품과 사상을 해석하는 전기적 비평이라는 낡은 작가론을 해체하면서도 문학과 사상에서 윤리의 문제를 다시 부각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