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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강하나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4학년. 1991년생.
hihana1224@naver.com
물거품이 되기 전에
1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나의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현재 동네에서 수영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한국말은 아주 어눌하다. 나와 사귄 지는 이년이 조금 넘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맥주와 닮은 색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재미동포라고 알고 있다. 그녀의 입버릇은 ‘이건 아니야.’ 그녀는 언제나 검은색 미용렌즈를 낀다. 렌즈를 뺀 그녀의 눈은 옅은 바다빛이다. 내가 말하는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렌즈를 뺀 눈이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이다. 그러나 그녀의 두 다리는 원래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년 전만 해도 땅 위를 걷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그녀는 모래로 빚은 것 같았다는 자신의 비늘을 추억한다.
내 여자친구는 인어였다. 물론,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인어’다.
2
인간이 지구에 출현해 가장 잘한 일은 아마 텔레비전을 발명한 것 아닐까. 바닥에 누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면 지구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도,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힌 고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널은 만화 채널이다. 스물여덟해를 산 남자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낄낄거리는 꼴이 남들 보기엔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웅주의로 도색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꿈과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꿈과 희망. 이번 달에만 벌써 두번째 해고를 당한 남자의 꿈과 희망이란 무엇일까. 이틀에 한번 전화를 걸어 관절통을 호소하는 부모님일까. 내 눈을 들여다볼 때 아무런 감정의 출렁거림도 없는 여자친구일까. 어쩌면 곧 걸려올 한통의 취직 통보전화일지도 모른다.
이년 전만 해도 나의 꿈은 확실했다. 나는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현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다. 두번이나 바다에 빠져 죽음을 경험한 나로서는 바다보단 차라리 지옥의 불구덩이가 나았다.
텔레비전 속 여전사는 힘차게 봉을 휘두른다. 내가 어릴 적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에 비하면 그래픽도 훨씬 고급스러워지고 스토리도 한층 탄탄해졌다. 애니메이션도 진화하는데 나란 인간은 어째서 퇴화를 거듭하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런 고민과 걱정도 애니메이션에 집중하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생각 없이 보고 있다가 다음 편 예고가 나오는 순간 텔레비전을 끈다. 찬 바닥에서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킨다. 날씨가 퍽 쌀쌀해졌으므로 보일러를 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정한 수입 하나 없는 나에게 그것은 사치다.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도 얌전히 개어 거실 한쪽에 놓아둔다.
그녀가 돌아올 시간이다. 나는 방에 들어가 낡은 책상 앞에 앉는다. ‘인어공주’라고 크게 적혀 있는 동화책 옆에는 몇권의 소설책과 취업준비서가 있다. 그 사이에서 자기소개서를 훌륭하게 쓰는 비법이 담긴 책을 꺼낸다. 마지막으로 해고당한 날 나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다만 서점에 들러 뻔한 내용이 적힌 취업준비서를 한권 더 샀을 뿐이다. 낡은 노트에 이름, 출신학교 등을 장난스럽게 적고 있으려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두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해고당했던 회사의 이름들을 줄줄이 적는다. 다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구두를 벗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가방이 거실 한쪽에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소리도 난다.
“나 왔어.”
그녀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는 화가 난 듯 소리친다.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언제나 화가 난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죄를 지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나는 입꼬리만 올려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는 한숨을 쉰다. 그녀가 한숨을 쉬는 순간 나는 그녀의 평화로운 생활을 갉아먹는 벌레가 된 기분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다시 사납게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노트에 별것 아닌 경력을 써내려간다. 물론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력이라고 할 수도 없는 회사 이름 따위나 줄줄 읊고 있는 짓이 그녀가 원하는 바는 아니라는 거다.
“이건 아니야.”
이틀째 밥상에 올라와 있는 김치찌개와 사흘째 먹는 시금치나물, 다 식은 계란 프라이가 올려져 있는 식탁을 보며 그녀가 말한다. ‘이건 아니야.’ 한국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푼다. 식탁에 밥 두공기를 놓고 자리에 앉는다. 내가 앉은 의자는 한쪽 다리가 부실하다. 나는 밥을 먹는 동안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신경을 써야만 한다.
“돈 언제 벌 거야?”
그녀가 묻는다. 그녀는 내가 어디 공장에라도 나가 돈을 벌어오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최후의 보루다. 만약 그녀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이므로 벌써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싶진 않다. 게다가 나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물론 뉴스에 나오는 ‘이태백’이라는 단어가 나를 지칭하는 말이란 것쯤은 알고 있다.
“나 면접 봐.”
그녀의 눈. 렌즈를 뺀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일은 왠지 불경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
“언제?”
며칠 전 서류를 넣었던 두곳의 회사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다. 아마 며칠을 더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몇줄의 글로 심사받는 서류전형에서조차 떨어졌다는 말은 차마 뱉을 수가 없다. 차가운 시금치나물을 먹으며 곰곰이 날짜를 고른다. 면접을 보는 척하고 집을 비우기에 적합한 날은 하루뿐이다.
“다음주 수요일.”
수요일은 그녀가 가장 늦게 귀가하는 날이다.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본다. 렌즈를 뺀 그녀의 눈이 내게는 꼭 출렁이는 파도인 것만 같다. 숟가락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난다. 나는 그녀가 계란 프라이를 먹는 것을 보며 안도한다. 몇달 전만 해도 이럴 때의 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나를 위해 두 다리를 갖게 된 여자를 두 다리로 부지런히 걸어다니게 한 것에 대한 죄책감.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안도하는 것이다. 그녀가 나의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하여.
김치찌개를 떠먹는 그녀의 숟가락을 보며 밥을 먹는다. 그녀와 속도를 맞추기 위함이다. 그녀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밥을 먹는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밥을 씹지도 않고 있는 나를 외면한 채로 말한다.
“나 내일 늦어.”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다. 왜냐는 물음이 속에서 꿈틀거린다. 내가 이유를 물으면 그녀는 사실대로 말해줄까.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나는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자격이라는 말은 취업할 때 필요한 몇장의 종이에서뿐 아니라 연인 사이에도 통용되는 단어인 것이다. 나는 순전히 소화를 위해 밥을 먹는 사람처럼 밥을 먹는다. 속에서 꿈틀거리는 물음을 뱉어낼 수 없으니 차라리 배설하고 싶은 기분으로 말이다.
그녀의 식사가 끝남과 동시에 나의 식사도 끝이 난다. 그녀는 화가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간다. 그녀의 어깨 끝에서 찰랑이는 머리를 보다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년 전만 해도 그녀와의 저녁식사는 언제나 근사했다. 나는 밥을 먹는 것인지 행복을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화 같기만 했던 감동도 채 이년을 못 넘겼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해고라는 말 앞에서 더이상 좌절하지 않는 남자와 살며 현실을 깨달았으리라. 그녀가 인간세계의 치열함과 박정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녀에겐 한국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없다. 지구 어디에도 그녀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법적 서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불우한 가정사를 가진 재미동포가 되었다. 그녀가 한국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도 그녀의 과거를 날조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동네의 낡은 수영장 주인은 그녀를 고용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택의 아랫집 여자는 아예 그녀의 손을 잡고 펑펑 울었다. 사실 그녀의 과거를 조작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나나 그녀가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었다. 그녀가 내뱉은 말 한마디가 동네를 돌아 다시 우리에게 올 때에는 수없이 많은 문장과 단어를 달고 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녀는 일과시간 내내 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도 저녁식사가 끝나면 꼭 목욕을 한다. 나는 거실의 찬 바닥에 눕는다. 그녀의 목욕시간은 아주 길다. 욕실의 문 너머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매일, 이렇게 찬 바닥에 누워 그녀가 씻는 소리를 듣는다. 코를 훌쩍거리다가 내 꼴이 너무 우스우면 멋대로 그녀를 백설공주로도 만들고 신데렐라로도 만든다. 가끔은 그녀가 씻는 모습을 상상하며 수음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는 찬 바닥에서 잠이 든다. 가끔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하는 그녀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녀는 나의 이런 버릇을 좋아했다. 씻고 나왔을 때 찬 바닥에서 잠들어 있는 나를 보면 안심이 된다고도 했다. 물론 그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지금보다 말이 더 서툴었으므로 그녀의 입으로 직접 안심이 된다는 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의 벅찬 표정과 그녀가 뱉어낸 몇개의 단어로 내가 알아들은 것뿐이다. 그녀는 가끔 자고 있는 나를 뒤에서 안아주기도 했으며 찬 바닥에서 나와 같이 잠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그녀는 젖은 발로 나의 등을 차 깨우곤 한다. 통탄할 일이지만 이제 익숙해졌다. 익숙함이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육지생활 이년 만에 육지에 익숙해진 그녀를 생각한다.
내일 그녀는 어째서 늦는 것일까. 다른 남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의 왕자가 되어주지 못했으니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왕자처럼 근사한 남자였으면 좋겠다. 그녀가 왕자 같은 남자를 만나 영화 같은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를 사랑해야만 한다. 나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그녀는 결국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그녀가 말을 해준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안데르센의 동화에 그녀의 이야기를 접목시킨 것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네가 죽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었다. 괜스레 눈물이 난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모를 뿐이다. 차라리 이대로 수증기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3
단둘이 사는 살림에도 돈 새는 구멍은 많다. 내 명의로 되어 있는 두대의 휴대전화 요금을 치른 것이 어제인데, 우편함에는 수도세 고지서가 꽂혀 있다. 아마도 모레쯤이면 전기세나 가스요금 고지서도 나올 테니 그때 함께 그녀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싶다. 그녀 입장에서도 당장 수도세를 낼 돈도 없는 남자가 각종 고지서를 하루걸러 가져다주는 것보다는 한번에 지갑에서 꽤 많은 돈을 꺼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수도세 고지서를 서랍 안쪽에 넣어놓다가 문득 어제 그녀가 물을 마시지 못했음을 떠올린다. 그녀는 소금기가 없는 물을 마시지 못한다. 싱크대에 놓인 봉지에 소금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내친김에 욕실의 문을 열어본다. 변기 바로 옆에 세면대가 있고 세면대 위에 다 낡아 꼭지가 삐걱거리는 샤워기가 달린 협소한 욕실. 세면대 아래에 놓인 빨간 고무대야가 처량해 보인다. 고무대야는 그녀가 앉으면 꽉 차서 물을 더 부을 수도 없을 만한 크기다. 그나마도 귀퉁이가 찢어져 그녀가 앉으면 물은 그녀의 발만 적시고 말 것이었다. 힘없이 욕실 문을 닫는다. 낡은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꼭 안온한 일상을 깨는 소리인 것만 같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본다. 한시간 후면 그녀가 돌아올 시간이다. 찬 바닥에 앉아 그녀를 기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텅 비어버린 소금 봉지와 찢어진 대야를 보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잠들기 전까지 계속되는 짜증 앞에서 죄인이 되느니 잠깐 비굴해지고 마는 것이 낫다.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걸쳐놓은 점퍼를 입는다. 휴대전화를 점퍼 주머니에 쑤셔넣고, 운동화를 구겨신는다.
그녀가 일하는 수영장은 도보로 채 이십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길이 마음대로 늘어날 일도 없는데 그녀의 귀가시간은 매일 조금씩 늦어진다. 달이 일찍 나온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달 같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충만한 보름달이었으니 이제 조금씩 기울 시간이 된 것뿐이고, 다시 서서히 충일하게 차오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물론 ‘바라다’의 전제조건이 ‘실현가능성 희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헬스장과 수영장이 붙어 있는 낡은 건물의 입구에 기대어 선다. 꽃다발을 사들고 가 그녀에게 멋지게 내밀고 싶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겐 꽃다발을 살 돈도 없을뿐더러 수영장에 들어갈 용기도 없다. 일곱살 때 한번, 차가운 겨울바다에 빠졌다. 그리고 스물여섯살 때는 바다에 투신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나는 꽤나 운이 좋았던 셈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일곱살, 아버지를 따라 바다낚시를 갔을 때였다. 낚싯대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바다에 빠지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나는 잔잔한 수면 위로 물수제비를 뜬 것 마냥 파닥거리는 비늘을 보았고 그것을 잡으려다가 바다에 빠졌다. 아버지는 나를 찾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으나 바다 어디에서도 나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나는 몇시간 뒤 해안가의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바다에서 똑똑히 봤다. 전혀 젖지 않은 머리칼로 내 겨드랑이를 받쳐주던 그녀를.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녀뿐이고, 내가 어떻게 구조되었는지 등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 나는 가득 고인 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의 공포증을 바다에 빠졌을 때 느꼈던 절박함이나 호흡곤란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나는 그 공포증이 내가 본 것이 환상이라고 치부해버리던 사람들의 반응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물론, 어느 쪽이 됐든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다. 스물여섯살에는 바다에 투신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죽음이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왜 살아야 하는지, 그것이 조금 난감했을 뿐이다. 난감하다는 것은 죽음에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해주지는 않았지만 삶에 필연적인 이유도 부여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일종의 모험으로, 혹은 도전으로 바다를 향했다. 배에 올라타자마자 토악질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눈을 질끈 감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바다를 무서워하면서도 바다를 유영하는 것이 꿈인 나에게, 나 스스로가 주는 상이자 벌이었다. 그리고 암전.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한기에 몸을 움츠린다. 그녀는 가끔 눈부신 모래빛이었다는 자신의 비늘을 추억한다. 눈부신 모래빛이었든 학교 운동장에 날리는 흙먼지빛이었든 중요치 않다. 그녀의 비늘은 바다 어딘가에서 녹아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우르르 몰려나온 아이들이 삼삼오오 승합차에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웬일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동그랗게 커진 그녀의 눈과 마주한다. 그녀가 일하는 수영장에 찾아온 것은 꽤 오랜만이니 놀랄 만도 하다. 지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향한 것들 중에 감동이나 기쁨 같은 것이 그녀의 안에 남아 있을까.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제일 처음 뱉은 말이 내 이름이 아니라 웬일이냐는 의문이라는 건 슬퍼해야 할 일이다.
“같이 마트나 갈까 해서.”
그녀의 미간이 좁아진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더 내뱉기 전에 그녀가 들고 있는 비닐 가방을 낚아챈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비닐 가방을 바라보다가 나를 스쳐 지나가버린다.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곁에 선다. 그러고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는다. 서늘한 것은 비단 그녀의 손뿐이었을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을 둘러싸고 있는 허공 어딘가를 잡고 있는 기분이 든다.
마트까지 걸어가는 내내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 내가 고집스레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는 길엔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한 손에는 빨간 고무대야를, 다른 손에는 소금이며 생선이 담긴 봉지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비닐 가방을 든 채로 앞서 걸었다. 그녀는 간혹 뒤를 돌아보기도 했으나 나를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방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고른 생선을 튀기다가 문득 그녀와 처음 식사를 했던 날이 떠오른다. 밥이란 것을 처음 먹어보는 것인지 한 숟갈도 다 먹지 못하던 그녀. 그녀와 처음 마트에 간 날, 그녀는 수족관 안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다에 대한 향수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살아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다시 감득한 감회였을까. 그녀와 같이 살면서 나는 일부러 생선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녀가 장을 봐오면서 생선을 사들고 왔다. 밥상에서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생선을 조리하지도 않고 날것으로 먹었던데다가, 나는 당연히 그녀가 생선을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경악한 나의 표정을 보고 그녀는 웃었다.
사람은 돼지 먹어.
나의 눈을 보고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어였던 그녀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먹었을까.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했다. 사람은 돼지 먹어. 닭 먹어. 그때 나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회의가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바닷속 그녀의 생활은 내가 믿고 싶은 그녀의 과거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처음 사람이 되었던 날을 떠올린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구조되어 먹은 물을 토해내는 내 옆에 두 다리를 가진 그녀가 있었다. 나는 내 젖은 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녀의 두 발을 내려다보며 조금 울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고, 당연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등에 업어 한참을 걸어 집으로 왔다. 며칠간 그녀는 방안을 기어다녔고, 나는 그녀를 일으켜세워 아이 걸음마 시키듯 걸음을 가르쳤다. 물끄러미 제 발을 내려다보곤 하는 그녀를 안아주기도 하면서. 그때의 나는 당연히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말 따위는 아무런 필요도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말이 아닌 단순한 소리일 뿐이었지만 나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실망했던 것도 같다.
그녀를 집에 데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사왔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줄줄 읽어주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녀가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일년 정도 지난 후 그녀는 말했다.
안데르센 나빠. 다 거짓말이야.
물론 나는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거짓말이라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다리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 전까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것들을 잘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며 바닷속의 그녀를 상상하곤 했다.
이제는 그녀가 생선을 먹어도, 혹은 생(生)김보다 구운 김이 더 좋다는 말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밥상을 다 차려놓고 그녀를 부른다. 나의 부름에 미적미적 나온 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생선의 가시를 바른다. 처음엔 생선을 날것으로 먹던 그녀도 이제 요리해 먹는 것에 익숙해졌다.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도 식사를 시작한다. 내가 부실한 의자 다리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그녀는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난 그녀는 거실에 놓아둔 빨간 고무대야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욕실로 발을 옮긴다. 좁은 욕실 안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왜?”
답이 너무도 명확한 질문은 당황스럽다. 빨간 대야에 앉은 그녀의 등에 물을 부어주고 싶을 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냐니.”
그녀가 처음 두 다리를 갖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의 작은 발을 씻겨주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는 내가 자신의 등에 물을 부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저녁식사 후 목욕은 그녀의 일과였을 뿐 아니라 나의 일과였다.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 나와 같이 설거지를 했던 그녀. 고인 물을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그리운 바다에 같이 가자는 말도 한번 하지 않은 그녀. 대신 좁은 대야에 앉아 웃음 짓던 그녀. 그녀가 욕실 문을 잠그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녀는 찢어진 고무대야를 들어 나에게 안겨준다.
“생각해봐. 왜인지.”
무언가 말을 더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나의 어깨를 떠민다.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떠다니는 말들이 제대로 조합되지 않는다. 낡은 나무문이 닫힌다. 나에게 왜가 왜 필요한 것일까. 내가 그녀의 등에 물을 부어주는 것에 대체 이유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찬 바닥에 누워 잠이 든 나를 보면 안심이 된다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젖은 발로 나의 등을 차기 시작한 것도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다.
찢어진 대야를 옆에 둔 채로 바닥에 눕는다. 물소리가 들린다. 선득선득한 바닥에서 덩달아 몸이 시려온다.
4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이 종영했다. 나는 일부러 마지막 오분을 보지 않았다. 그들이 환생을 하거나, 남자와 결혼을 하거나, 혹은 알 수 없는 대폭발로 죽어버린다 해도 모든 끝은 다 똑같으니까. 그리고 한참동안 내 삶의 패턴은 변함이 없었다. 그 시간에 하는 다른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것이 끝나면 그녀를 기다렸다. 언제나 화가 난 사람처럼 구는 그녀와 함께 식사를 했으며 식사가 끝난 후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씻고 나온 그녀가 나를 깨우면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그녀는 찬 바닥에서 잠이 든 나를 깨우며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영문 모를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보일러를 켜고 나에게 거실에서 자겠다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녀가 식사 후 다시 외출하는 경우였다. 그녀가 나가고 나면 나는 컴퓨터로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다운받아 보기도 하고, 취업에 필요한 영어단어를 외우기도 했다. 간혹 서류심사에 붙어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다음날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잠들었다.
그녀가 외출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녀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내 전화를 받지 않는 수가 늘어나면서,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 역시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스물아홉이 다가오고 있었다. 삶을 변화시킬 필요가 느껴졌다. 어머니의 전화만 해도 그랬다. 이틀 걸러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는 내 몸을 걱정하는 안부로 시작해 어머니 자신의 몸 걱정을 하는 한풀이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엔 늘 제대로 된 며느리를 구하려면 너부터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가 알고 있는 그녀는 부모도 없이 낯선 땅에서 자란 반만 한국 사람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실은 그녀는 물에서 살았던 사람이며 나를 두번이나 구해준 은인인데다 나를 위해 비늘과 다리를 맞바꾼 여자라고. 입안에서 멋대로 굴러다니는 단어들을 제대로 뱉어내지도 못하고 나는 늘 바쁜 일이 있다며 전화를 끊곤 했다. 어머니가 알고 있는 그녀와 내가 알고 있는 그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이 드는 날에는 꼭 꿈에 그녀가 등장했다. 꿈속의 그녀는 두 다리 대신 유연한 지느러미로 바다를 유영했다. 그러고는 퉁퉁 불어버린 제 손을 보고 슬픈 눈물을 흘리곤 했다. 꿈에서 깸과 동시에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안도했다. 이제 혼탁한 수영장 물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퉁퉁 붓는 그녀. 제대로 된 며느리가 될 수 없는 그녀. 그녀가 제대로 된 며느리가 될 수 없는 것은 내 탓인지도 몰랐다.
대학 선배의 회사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힘든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장을 돌아다녀보기도 했고, 학원가를 배회하기도 했다. 서류심사에서 떨어진 날은 회사 인사팀에 전화를 걸어 내가 떨어진 이유를 묻기도 했다. 언제나 흥얼흥얼 읽던 책에 밑줄이 그어지고 메모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녀에게 한국말을 가르친 경험이 있으므로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와의 사이가 점점 소원해지는 것이 문제였다. 수강생의 대부분이 직장인이라 수업시간은 모두 오후였다. 자연스레 그녀와 함께하는 저녁식사도 줄어들었다. 그녀는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피곤에 지친 나와 무엇에 지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등. 우리는 등을 맞댄 채로 잠들었다. 나는 벽에, 그녀는 침대의 끝에 가까워졌다. 다만 그녀와의 사이가 점점 소원해지는 것이 문제였고, 내가 살아가면서 겪는 커다란 사건의 배경에는 모두 ‘다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 있지.”
대화가 뜸했던 탓일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더이상 갈 곳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발이 순간 멈춘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불안한 기분이 든다.
“토요일에 바다 갈래.”
토요일은 열한시나 되어야 수업이 끝난다. 일요일은 여덟시 정도. 나는 여태까지 그녀가 나에게 했던 바다 이야기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년이 넘는 동안 그녀는 바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땅 위의 사소한 것 하나에도 놀라워했다. 그녀에게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꽃도, 수면이 아닌 지면에 내리는 빗방울도, 신발 밑을 적시는 눈도 모두 대단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꽃과 비와 눈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했고 그녀는 내 서툰 설명에도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꽃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귀찮은 것일 뿐이며 비는 빨래를 잘 마르지 않게 하는 장애물이고 눈은 길을 얼게 하는 몹쓸 것이다.
“토요일에 수영장 안 가도 돼.”
이미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그녀가 수영장도 가지 않고 출발하는 것이라면 나 역시 학원의 수업을 미뤄야 할 것이었다.
“그래, 가자.”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
“혼자 갈게.”
이번에는 내가 말을 잃는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그녀가 혼자 가지 않으리란 것쯤은 안다. 외출이 잦고 나의 부재를 반기는 그녀. 그녀와 함께 바다에 가줄 사람은 누구일까. 외제차를 탄 왕자일 수도 있고 웨이크보드를 탄 왕자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왕자였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이불을 끌어올리는 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내가 그녀에게 ‘그’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한다. 이제는 온전히 내 가방에 들어 있는 각종 고지서들과, 때로 그녀를 위해 사들고 오기도 하는 음식들에 대하여.
“그리고 안 와.”
나는 멍하니 벽지를 바라본다. 그녀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 대신 ‘그리고’와 ‘안 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토요일에 바다에 간다. 그리고. 안 와. 오지 않는다면 어디론가 가겠다는 이야기이다. 어디로 가겠다는 것일까. 바다에 간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다시 바다로 걸어들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에겐 이제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남자도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
그라고 지칭할 수도 없을 만큼 그에 대한 정보가 적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슬픈 것은 그 사실에 내가 크게 분노를 한다거나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쥔다.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뗀다. 그녀의 손이 다시 나의 어깨를 세게 쥐어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가 스위치를 켠다. 완전히 불이 켜질 때까지 몇번 점멸하는 등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녀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앉는다.
“너 뭐라는 거야?”
추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분명 추궁으로 닿았을 것이다. 신중히 단어를 고른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그녀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녀의 어깨를 본다. 그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바람을 피운다’는 말과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라는 말 중 무엇이 더 옳은 말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걱정하지 마. 난 네가 그 남자와 가도 널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발바닥이 간질거린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켠다. 울음을 마시는 것인지 숨을 마시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주먹을 쥐어 그악스럽게 눈물을 닦아낸다. 어쩔 수 없이 빨개진 그녀의 눈과 마주한다.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어쩐지 내겐 그럴 자격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참는다.
“왜?”
사랑하는 데에 왜냐는 이유가 필요할까. 당황스러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끝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넌 뻥쟁이야.”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도, 사기도, 허풍도 아닌 뻥이라니. 나는 내가 그녀에게 가르친 한국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네가 날 안 사랑해도 난 안 죽어.”
그녀를 껴안고 잠들었던 날이 떠오른다. 노래의 가사처럼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전히 행복할 수 있던 날들. 지겨운 영어학원에 가도, 첫 직장에서 호되게 질책을 당한 날도 나는 그녀 앞에 서면 무장해제가 된 사람처럼 무방비했다.
“내가 안 죽으니까, 넌 네가 계속 날 사랑한다고 믿는 거잖아.”
우리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한들 나는 내 감정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일로 여겨지곤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를 따라 침대에서 내려간다.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물거품이 되지 않는 그녀라니. 여태까지 상상도 해본 적 없던 일이다. 그러다 문득, 다른 사람들 앞에 있을 땐 꼭 손을 잡았던 내가 떠오른다. 그러나 집 안에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넌 왕자 아니고 난 공주 아니야. 넌 그냥 사람이고 난 그냥 인어에서 사람이 된 거야.”
“널 공주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눈물 때문에 볼이 엉망인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난 처음에 네가 왕자인 줄 알았어.”
진짜 뻥쟁이는 안데르센이 분명하다. 인어인 그녀가 누군가에게 반해 사람이 된다면 그 누군가는 당연히 외제차를 탄 왕자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외제차는커녕 국산 소형차 하나도 갖지 못한 남자다. 그렇다면 공주도 아닌 그녀가 왜 제주도로 가는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을까. 그녀는 왕자도 아닌 나를 위해 뭍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멀쩡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다리와 맞바꾼 것은 대체 무엇일까. 혼란스럽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울어서 부어 있다.
잠옷 바람의 그녀는, 울어서 눈이 부은 그녀는 그대로 방문을 열고 나간다. 나는 그녀를 따라나가야 할까. 그녀는 내일 돌아오지 않는다 말했다.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녀를 잡을 자격이 있는지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년간 그녀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왕자가 아니고 그녀는 공주가 아니다. 그녀가 다리와 맞바꾼 것은 단순히 비늘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곳에서의 안온한 일상과 맞바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사랑해주지 않아도 물거품이 되지 않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은 나와, 어쩌면 그녀를 사랑했을 나날들이 스쳐지나간다. 나를 왕자라고 믿은 그녀와, 현실을 알아버린 그녀와, 어쩌면 나를 사랑했을 그녀 역시도. 그녀는 그와 함께 바다에 갈까. 나는 어째서 그가 그인지 또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인가. 왜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인가.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부박한 스물아홉의 밤이 지나간다. 차라리 내 다리가 비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 일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나에게는 비늘을 줄 마녀도 없고 비늘과 바꿀 수 있는 무언가도 없다. 문득 후회가 든다. 왜 아무에게도 그녀가 인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쉬운 것인데 말이다.
5
그래서 나는 정정하겠다. 이것은 나의 여자친구 이야기가 아니다. 온전히 나의 이야기다.
나는 현재 서울 변두리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영어를 매우 어려워한다. 현재 같이 사는 여자는 없다. 나의 머리칼은 콜라를 닮은 색이다. 나의 입버릇은 ‘모르겠다’이다. 사람들은 나의 고향이 서울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언제나 내 발보다 큰 치수의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운동화를 벗으면 나의 발은 남들보다 작아서 볼품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가장 큰 매력은 선량한 얼굴이며, 내가 말하는 나의 가장 큰 매력은 때때로 불온한 상상력이다.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년 전만 해도 어떤 소설이나 동화에도 큰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가끔 연한 바다빛이었던 그녀의 눈동자를 추억한다.
나는 사람이다. 물론, 당신이 생각하는 그 ‘가장 보통의 사람’이다.
소설 |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총 307편으로 예년과 다름없는 문청들의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심사위원 셋이 3주에 걸쳐 나누어 읽고 총 10편의 소설을 본심에 올려 논의하였다. 본심에 오른 10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티를 위한 치킨」 「그의 여름」 「의자」 「강에서 만난 여자들」 「세번째 날개」 「물거품이 되기 전에」 「부담」 「세번째 파일」 「말락에 관하여」 「쿠키, 쿠키, 쿠키는 달린다」
예심을 거치며 느낀 점을 하나만 얘기하자면 젊은 세대가 아직은 경험하지 못해 이해하기에 벅찬 삶의 균열을 다루는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발상은 기발하였으나 주제의식을 확장시키는 데에는 버거운 작품이 많았다. 마치 너무 큰 옷을 입고 있거나 계절에 맞지 않는 철 지난 옷을 입고 있는 사람 같았다. 특히 부부가 겪는 상실이라든지, 살인을 모티브로 삼은 사건의 전개를 다룬 작품이 많았으나, 신선함을 주는 작품은 전혀 없었다. 소설은 ‘어떻게’ ‘무엇을’ 쓰는가 하는 것보다도 ‘왜’ 쓰는가, 혹은 ‘왜’ 써야만 하는가 하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바란다. 이는 작가에게는 동기이자 독자에게는 작가의 주제의식으로, 소설에서 가장 성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미덕임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본심을 진행하던 중 유독 눈에 띄는 두 작품이 있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플롯이 안정되어 있어서 이것만 놓고 본다면 두 작품 가운데 당선이 유력시되었다. 허나 완성도에 있어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소설에서 어떤 일정한 패턴이 읽혔기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곳에서 이러한 소설쓰기를 보아온 터였다. 한 심사위원은 이름과 학교를 가리고 심사를 하는 와중에도 단번에 이들이 어떤 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인지 알아맞히기도 했다. 현재 가장 중요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작가의 창작패턴을 그대로 베낀 느낌이었다. 이는 다른 심사 자리에서도 자주 출몰하는 경우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설에선 ‘왜 쓸 수밖에 없는가’ 하는 작가의 문학적 당위성이 가장 중요하다. 선배들의 창작패턴을 답습하고, 기존 작가의 개성 넘치는 소설쓰기를 그대로 따르는 문청이라면 굳이 꼭 소설을 써야 하는 것인가, 되묻고 싶다. 문학에 대한 절실함과 간절함을 치부처럼 안고 사는 많은 문청들에게는 새로운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지양하기 바란다.
최종 당선을 놓고 논의된 작품은 「물거품이 되기 전에」 「의자」 「이티를 위한 치킨」 「그의 여름」 이상 네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심에서는 단점이 많은 작품을 걸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최종 남은 두편 중에서는 장점이 많은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의자」는 주제의식에 대한 작가의 집중력이 돋보였으나, 전개과정과 결말의 도출이 너무 진부하다는 의견이었다. 「그의 여름」은 작가가 소설쓰기에 이미 좋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의 모호함이 아쉬웠다. 「이티를 위한 치킨」은 작가의 개성이 훌륭한 작품이다. 발랄하면서 톡톡 튀는 서사전개와 문장력은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끝까지 미련을 갖게 만든 좋은 장점이었다. 열심히 정진하여 후에 다른 지면에서 좋은 성과를 이루기 바라며 아쉬움을 접는다.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은 「물거품이 되기 전에」이다. 심사위원들은 끝까지 두편만 놓고 고민을 한 것이 아니라 본심에 올라온 작품 전체를 놓고 처음부터 논의하는 과정을 여러번 반복했다. 습작기를 지나는 대학생 신분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소설의 완성도보다는 소설에 대한 열정과 절실함, 간절함이 깃든 작품을 고르는 데 주력했다. 「물거품이 되기 전에」는 소설을 대하는 작가의 진진한 태도와 그 동기가 주제의식으로 승화되어 독자에게 건네는 좋은 질문이 일품이었다. 가독성 좋은 문체도 소설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주는 장점으로 읽혔다. 좋은 작가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백가흠 윤성희 정이현
소설 | 당선소감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꿈은 소설가였다. 소설을 읽는 것이 좋았고, 서툰 솜씨로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하루 내내 쓸데없는 공상을 하는 것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내 소설을 보여주었을 때, 긴장과 함께 오는 가벼운 현기증 같은 설렘도 좋았다. ‘소설가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을 들어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돈을 벌려고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유치하지만 다부진 각오를 다이어리에 적어두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다. 글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글쓰는 일이 어려워졌다. 나에겐 어째서 재능이 없을까. 정말 재밌는 소설을 읽은 날이면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시기나 질투도 아니었다. 스무살의 가을. 나는 술에 취한 채로 멍하니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겼을 때, 혹은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놓쳤을 때는 질투가 나겠지만, 애초부터 가진 적 없고 가질 수도 없던 것을 바라볼 때엔 절망감이 든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내 일부분을 녹여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계속 글을 써온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운명이라거나 천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음에도. 어째서 나는 내 얘기를 말로 하지 못하고 글로밖에 못하는 인간인지, 그런 것을 생각하다보면 내가 우스우면서도, 대학생활 내내 소설을 쓰며 보냈다.
이번 수상이 내 재능이나 능력을 인정해준 것이 아니란 것은 스스로도 아주 잘 안다. 분명 내 작품보다 더 잘 쓴 작품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상을 주신 것은 나의 그 간절함, 키보드에 코를 박고 울면서도 끝끝내 글을 포기하지 못했던 내 절박함을 알아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 때문에 더욱, 어떤 말로 감사드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심사위원 여러분과 대산문화재단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 마지막까지 소설을 포기하지 않는 일만이 그분들에게 보답하는 일이리라.
이번 수상에 나보다 더 행복해할 부모님. 어릴 때부터 딸이 빨리 철들었다는 걸 못내 미안해하고 괴로워하셨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나는 감사하다는 말밖엔 드릴 말이 없다. 항상 내 꿈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신 것은 물론이고, 어릴 적부터 감성적인 딸로 클 수 있게 해주셨으니까. 나는 아직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또 이번 수상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축하해준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내 주위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항상 글을 쓰며 우울해하는 나를 힘내게 해준 많은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꼭 좋은 소설가가 되고야 말 것이다.
강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