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희곡

 

 

대산_희곡_임빛나_사진_fmt

임빛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3학년. 1986년생.

kangta0045@naver.com

 

 

 

시에나, 안녕 시에나

 

 

씨놉시스

천둥 번개가 무섭게 내리치는 장마철의 어느 밤, 아빠와 엄마와 아이가 있는 평범한 가정집에 낯선 손님이 방문한다. 묘한 분위기의 이 손님은 유독 그 집의 아이를 경계하고 또 주시한다. 손님의 이름은 시에나. 국적불명, 나이불명, 직업불명, 정체불명. 심지어 실수로 품 안에서 떨어뜨린 소지품은 용도불명의 날카로운 칼 한자루이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어디선가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환경 운동가인 아빠와 엄마는 이 전화를 받자마자 외출 준비를 하고, 손님은 엄마에게 자신이 아이를 재우고 돌아가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하는데……

 

때는 장마철. 무대는 아빠와 엄마와 아이가 살고 있는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 겸 주방이다. 업스테이지를 부엌, 다운스테이지를 거실로 한다. 업스테이지 가장 위쪽에 싱크대가 있고 그 앞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은 아빠와 엄마의 작업 공간이다. 테이블 위에는 컴퓨터, 앞에는 커다란 소파가 놓여 있고 소파 앞으로 카펫이 깔려 있다. 상수에 난 문은 아이 방으로 통하는 문이고, 아이 방 옆에 난 문은 화장실이다. 하수에 난 문은 부모 방의 문이다. 업스테이지 왼편에는 무대 뒤로 향하는 현관문이 있다. 현관문에는 창이 나 있다.

 

 

1장

 

암전 상태에서 빗소리가 들리면서 극이 시작된다. 빗소리가 거세진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번개가 번쩍일 때 무대가 살짝 노출되었다가 암전된다. 아까보다 더 큰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다시 무대가 노출되었다가 암전. 빗소리.

조명 in

 

아빠 (흥분해서) What?

 

아빠의 격양된 목소리에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던 엄마가 쓰고 있던 안경을 쓸어올리며 아빠를 본다.

 

아빠 (유창한 영어로) I’m really confused about what you meant. A collaboration with reputable head office is very important to Korea. If we fail to consistantly interact with influential organization, environmental movement in Korea will not improve. I prepared this movement for last twenty years. Can’t you understand? (위협적으로) OK? OK? OK?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갑게) Let’s talk about this subject later. Thank you.

엄마 당신 괜찮아요?

아빠 (식탁에 있는 책을 집어 던지며) 너무 화가 나. 환경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정치판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I mean. um. 그러니까 난 이런 게 화가 나는 거야. 도대체 한국에 어떤 정당이 집권했는지가 한국에 있는 고래를 지키고 숲을 지키는 일에 왜 영향을 미쳐야 하는 거냐고. 한국 사정을 전혀 모르는 Canadian들이 왜 집권당을 신경 쓰면서 활동이 제한적일 가능성이 있느니 마느니 해야 하는 거야. 20년이야. 이 일을 준비한 지가 자그마치 20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엄마 환경운동만큼 정치적으로 휘둘리기 쉬운 것도 없죠. 다 아는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흥분해요?

아빠 그러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감정이 통제가 안되네.

 

천둥소리

 

엄마 (아빠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안는다.) 릴렉스해요. 감정 따위에 빠지지 말고 차가운 시선을 유지해요, 여보.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 그게 당신 최고의 장점이잖아요. 생각해봐요, 우리 퀘벡에서 첫 프로젝트 때. 그때 떼죽음 당한 연어들 기억나요?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하고 처참해서 다들 넋을 놓고 슬퍼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당신 어떻게 했었죠? 가장 먼저 진정하고 냉철하게 상황 판단을 해서 죽은 연어들이 다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물가에 그물을 설치했잖아요. 공장들은 기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연어들을 하류로 쓸어내려 보내려고 수문을 다 열어놓았었죠. 하지만 당신이 설치한 그 그물 덕분에 죽은 연어들이 카메라에 담길 시간을 벌 수 있었잖아요.

 

번개가 번쩍한다. 아이 방문 쪽에서 한 손으로는 졸린 눈을 비비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곰 인형을 들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엄마 감정은 때때로 많은 것을 망치게 해요.

아빠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엄마 (부드럽게 부른다) 여보. 당신 재능은 그런 거예요. 지나치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거.

아빠 (다정하게 포옹하는 아빠와 엄마) 고마워.

 

아이가 엄마의 뒤로 간다. 작은 검지손가락으로 엄마를 쿡쿡 찌른다.

 

엄마 (놀란다) 엄마야, 깜짝이야.

 

놀란 엄마의 모습에 아이가 더 놀라서 안고 있던 곰 인형을 떨어뜨린다.

 

아빠 (화를 내며) 이런. 조심해야지. 엄마 놀라셨잖니. (엄마에게 부드럽게) 당신 괜찮아요?

(사이)

아이 (어찌할 줄 모르며) 언! 어! 를!

엄마 휴.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 딸 괜찮니?

아이 (고개를 끄덕이며) 갖! 지! 못! 한!

아빠 당신 요즘 논문 때문에 예민한 시기라 사소한 거에도 놀라는 거야. 우리 딸 괜찮아? 소리 질러 미안하구나.

 

아이, 아빠에게 다가가 안기려 한다.

 

아빠 (아이를 떼어놓으며) 하지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누구든, 심지어 그게 가족일지라도 서로의 시간은 존중해야 한단다. 마치 아빠가 우리 딸을 화장실에 데려다주고 밖에서 기다려주는 것처럼 말이야. 아까 그랬던 것처럼 불쑥 끼어들어서는 안돼. 다음부터 조심하렴.

엄마 아빠 말씀 이해했니? 우리 딸은 물론 함께 있기를 바랄 수도 있지만 어떤 시간에는 혼자 있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아빠가 전에도 말씀하셨지? 기억하니?

아이 (소리 지르듯) 감! 정!

아빠 (깊은 한숨) 어휴. 자다 일어나서 또 잠투정 하나본데?

아이

엄마 소리 지르는 건 나빠. 우리 공주님 들어가서 코 잘까? 지금 자야 되는 시간인데.

아빠 여섯살은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란다. 아빠는 우리 딸이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자면 참 자랑스러울 것 같아. 그럴 수 있겠니?

아이 (고개를 끄덕끄덕) 당신 마음속

엄마 착하네. 자, 엄마랑 들어가자.

 

아이, 엄마의 손을 잡고 방 쪽으로 간다. 갑자기 걷기를 멈추는 아이.

 

아이 괴물

 

괴물의 괴성 소리

 

아빠 무슨 소리지?

아이

엄마 밖에 비오잖아요. 천둥소리겠죠.

아이 (떨어진 곰 인형을 주우러 간다. 곰 인형을 꼭 안고) 먹이가 된다.

 

다시 엄마에게로 쪼르르 달려가서 엄마 손을 잡는다.

노크 소리 (똑 똑 똑)

 

아빠 누구세요?

손님 언어를 갖지 못한 감정은 당신 마음속 괴물의 먹이가 된다.

엄마 시에나씨 오셨나봐요.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딸. 혼자 방에 갈 수 있지?

아이 (고개를 끄덕한다)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괴물은 이제껏 당신이 힘겹게 만들어온 당신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아이, 몇발짝 가다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서 손님이 오는 것을 본다.

 

엄마 시에나씨,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손님 반갑습니다.

아이 (자기 방문 앞에서) 당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소중한 것들을 다치게 한다.

아빠 누추한 곳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손님 늦은 시간에 괜한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빠 별말씀을요. 오히려 늦은 시간인데 와주셔서 저희가 감사하죠.

아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당신이 때때로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엄마 우리 딸 아직 방에 안 들어갔네?

아이 낯선 감정을 느낄 때를 조심하여야 한다. (방으로 들어간다)

 

정지 동작.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시간이 멈춘 듯 잠시 동안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목소리) 그럴 때 당신이 감정에 적절한 언어를 붙여주지 못하면 그 감정은

 

무언가에 홀렸다가 깨어나듯 모두 다시 움직인다.

 

엄마 밖에 비도 오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차 한잔 하시겠어요?

손님 혹시 와인 있나요?

아이(목소리) 데굴데굴

아빠 떠들지 말고 빨리 자자.

아이(목소리) 데굴데굴

아빠 자꾸 떠들면 혼난다.

아이(목소리) 데굴데굴

엄마 애가 자기 싫어서 그런가봐요.

아빠 (손님에게)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이(목소리) 데굴데굴

엄마 안되겠어요. 여보, 마실 것 좀 부탁해요. 데리고 나와야겠어요.

 

아빠가 손님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나온다.

 

아이 괴물의 입속으로 굴러 들어간다. (사이) 괴물의 먹이가 된다.

 

손님, 와인을 마신다.

 

손님 아이스 와인인가요?

아빠 네. 아시는군요. 활동 끝나고 캐나다 떠나면서 이 아이스 와인만 왕창 사왔었지요.(웃음)

 

밖으로 나온 엄마는 아이가 가지고 놀 블록 박스를 찾는다. 아이는 우두커니 서 있다.

 

아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괴물을 키우고 있다.

엄마 (블록 박스를 찾았다. 아이에게 준다) 거실에 있게 해주는 대신 조용히 블록 가지고 놀기다?

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같이 놀자는 듯 엄마의 옷을 잡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빠 요즘 몬트리올은 어떤가요?

엄마 (냉정하게 뿌리친다) 안돼. 지금 손님 오셨잖아.

아이 (조심스레 다시 엄마의 치맛자락을 꼭 잡는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자기 마음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공포에 떨며 살게 된다.

손님 여전히 추워요. 속눈썹이 얼어붙을 정도로.

엄마 (차갑게 아이의 손을 탁 치우며 부엌으로 간다) 와인 맛 괜찮으세요?

 

아이, 내팽개쳐진 자신의 손을 본다. 엄마의 관심이 손님에게 향하자 손님을 빤히 본다. 손님도 아이의 시선을 느끼고 아이를 본다.

 

아빠 여보. 시에나씨가 와인 맛을 보더니 캐나다에서 가지고 온 아이스 와인인 걸 딱 맞히시는 거 있지?

엄마 어머. 그래요? 웬만한 사람들은 모를 텐데. 대단하시다.

손님 뭘요. 그저……

아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블록을 바닥에 쏟는다) 어떤 사람들은 수녀나 목사가 되고 (블록 두개를 세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화가나 시인이 되는데 (블록 두개를 더 세운다)

손님 외로움을 곁들인 와인은 바람을 타고 나뭇잎처럼 입속으로 들어온다.

아이 이 중에서 가장 불행한 선택을 한 사람은 시인이다. (세워진 네개의 블록 중 하나를 넘어뜨린다)

아빠 시에나씨의 말은 꼭 한편의 시 같군요. 안 그래요? 여보?

아이 수녀나 목사는 신의 뒤에 숨어서 괴물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따금 괴물이 그들을 덮칠 때에도 신의 전능한 날개로 눈을 가리며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엄마 (질투) 그거 알아요? 플라톤이란 철학자는 자신이 국가를 건설하면 시인을 추방한다고 했대요.

아빠 이런. 하하하. (웃음)

아이 화가는 아주 영악해진다. 괴물이 힘을 얻어 몸부림을 칠 때면 그들은 형태와 색채를 무기로 몸부림치는 괴물을 꽤 훌륭하게 제어할 수 있다.

손님 제가 시인이 아닌 것이 다행이네요. (웃음) 하하하.

아빠 (더 큰 웃음으로 터진다) 하하하하하하.

엄마 그렇죠? 하하하하하.

아이 다시 말하지만 가장 불행한 선택을 한 사람은 시인이다.

 

아이, 웃는 그들을 본다. 손님과 아빠 엄마 모두 의미없이 큰 소리로 오랫동안 웃는다.

 

아이 (웃음소리를 들으며) 백지상태에서 언어 그 자체를 대면해야 하는 시인은 숨을 곳이 없다. 불안정한 언어 이외에는 괴물과 맞설 무기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시인이 자신의 감정에 꼭 맞는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사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그 감정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괴물

 

괴물의 괴성 소리.

아이가 쌓고 있던 블록이 우르르 무너진다. 웃음이 그친다. 정적.

 

아빠 무슨 소리지?

엄마 밖에 비가 오잖아요. 천둥소리겠죠.

손님 네. 천둥소리……

아이 (무서운 듯 소리친다)

손님 (아이 소리에 깜짝 마시던 와인을 옷에 흘린다.) 어머. 깜짝이야.

아빠 아빠가 아무 때나 소리 지르지 말랬지! 이런. 괜찮으세요. 시에나씨?

엄마 잠시만요. 닦을 것 가져다 드릴게요. 시에나씨.

엄마, 수건을 가지러 간다.

 

아빠 죄송합니다.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손님 아이가……

아이 먹이로 내어주어야 한다.

손님 할 말이 많은가보네요.

엄마 (수건을 주며) 저 나이 때 특유의 응석이죠. 하지만 발달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우리 아이는 지나치게 응석이 심한 것 같아요.

손님 실례지만 화장실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엄마 물론이죠. 아이 방 옆이 화장실이에요

 

손님, 일어서서 화장실로 가려고 겉옷을 벗는다. 그때 툭 하고 뭔가가 손님의 몸에서 떨어진다.

 

아빠 (물건을 줍는다.) 시에나씨, 이게 떨어졌습니다.

 

손님, 듣지 못하고 화장실 문이 닫힌다. 엄마가 와인 잔을 든다. 아빠도 손님의 물건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고 와인 잔을 든다. 때마침 아이는 블록으로 어떤 모양을 완성했다. 기뻐하며 부모에게 보여주려고 일어난다. 화장실에서 나온 손님과 부모에게로 가려는 아이가 만난다. 손님은 아이를 물끄러미 본다. 아이도 손님을 보다가 곧 흥미 없다는 듯 자기가 만든 것을 자랑하러 부모에게 가려고 일어선다.

 

빗소리. 와인 잔을 부딪치는 엄마와 아빠.

 

엄마 (와인을 들이키며) 오늘따라 와인 맛이 더 좋네요. 비가 와서 그런가?

아빠 비가 와서 그런가? 당신은 더 예뻐 보여. (엄마의 이마에 키스한다)

 

아이가 엄마의 뒤로 간다. 작은 검지손가락으로 엄마를 쿡쿡 찌른다.

 

엄마 엄마야, 깜짝이야.

아이 (해맑은 얼굴로 자신이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들이민다)

아빠 당신 괜찮아? (아이에게 소리 지른다) 도대체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아이, 깜짝 놀라 장난감을 떨어뜨린다. 덩달아 손님의 물건도 같이 떨어진다. 손님, 마침 화장실에서 나온다. 놀란 아이에게 가서 아이의 장난감을 줍는다. 아이는 손님의 물건을 줍는다. 아이, 물건을 풀어본다. 날이 선 칼이다. 조명에 반짝이는 칼. 엄마와 아빠의 전화벨이 동시에 울리는 바람에 칼을 보지 못한다.

 

엄마아빠 (동시에) 여보세요.

 

아이, 손님에게 칼을 주고 장난감을 받아 놀던 자리로 돌아간다.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 칼을 넣는 손님. 이때부터 손님은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아이 불행히도 당신은 너무나 많은 먹이를 괴물에게 주고 있다.

엄마 네. 엄마. 어쩐 일이세요?

아빠 그게 정말입니까? 오늘을 넘기기 힘들까요?

엄마 네. (짜증이 섞여서) 네. 알아서 잘할게요.

아빠 최대한 신속히 가겠습니다.

엄마아빠 (동시에) 제가

아이 (옆으로 누워 손가락으로 바닥에 금을 긋는 동작을 반복하며) 당신의 감정은 더이상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고

엄마 (동시에) 더이상 어린애도 아니잖아요. (전화를 끊는다)

아빠 (동시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다)

아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괴물은 점점 살을 찌운다.

손님 (아이에게 시선을 유지하며) 콜록, 콜록.

아빠 가봐야 될 거 같아. 당신 도움도 필요하겠어.

엄마 혹시 고래가 많이 위험한가요?

아빠 (고개를 끄덕 끄덕)

엄마 준비할게요.

 

아빠와 엄마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정리하며 나갈 준비를 한다.

 

아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당신의 마음은 메말라 갈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손님 (시선을 유지하며)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 상처 난지 몰라 온몸을 핥고 있는 삐쩍 마른 개처럼 처량하다.

엄마 시에나씨 어쩌죠. 저희가 급한 일이 생겨서……

아빠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뵈어야 할 것 같네요.

손님 괜찮습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아빠 딸 혼자 있을 수 있지?

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곰 인형 꼭 안고 자고 있어.

아이 (고개를 끄덕끄덕) 그리고

아이, 시무룩해 방으로 들어간다.

 

손님 저 혹시, 제가 따님을 재우고 돌아가도 될까요?

 

천둥소리

 

엄마 네?

 

정적.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마.

 

엄마 아, 우리 애가 혼자 있는 게 익숙하긴 한데. (사이) 그래주실 수 있어요? 그러면 저희는 너무 감사하죠.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 보단 나을 테니까요.

아빠 여보, 늦어요. 당장 나가야 해요.

엄마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빠에게) 시에나씨가 애를 봐주시겠대요.

아빠 이런 실례를. 정말 고맙습니다, 시에나씨. 다음에 꼭 다시 뵙도록 하죠.

 

엄마 아빠, 나가려고 문을 연다.

 

손님 저기……

엄마아빠 (나가려다 뒤돌아보며 동시에) 네?

손님 두분이 같이 일 하시는 게 보기가 좋아요. 두분은 외롭지 않으시겠어요.

(사이)

아빠 네. 무척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엄마 부부가 같은 일을 한다는 건 정말 행운이죠.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엄마 아빠 현관문으로 퇴장. 무대에 홀로 남은 손님. 빗소리.

 

아이(목소리) 결코 굶주리지 않은 이 괴물은 이제 너무나 비대해져 당신 속에서는 살기에 좁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손님 괴물을 죽이거나

 

손님, 가슴에서 칼을 꺼낸다.

 

아이(목소리) 스스로 괴물이 되어라.

아이의 방에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암전. 빗소리. 시간의 경과가 느껴질 만큼 충분히 빗소리가 들린다. 암전 상태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친다.

조명 in. 노크소리 (똑 똑 똑). 열쇠로 문 여는 소리.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와 아빠.

 

아빠 엄마 아빠 왔다.

엄마 딸, 우리 예쁜 딸 (사이) 시에나. 자니?

아빠 시에나

엄마 시에나

 

계속해서 시에나를 부르는 엄마와 아빠.

 

다시 암전

 

(후략)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희곡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희곡 | 심사평

 

12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 응모작품 수는 총 67편이었다. 응모작품 수에 있어서는 작년과 대동소이하다. 작년은 가족 또는 연애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올해는 좀더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와 실험성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족과 연애 이야기는 대학생들의 주된 관심사로 작용하고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많은 작품들이 희곡적 언어가 최종적으로 물질화되는 ‘무대’를 고려하지 않은 듯하여 아쉬웠다. 이는 희곡을 읽거나, 연극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기인한 것 같다.

좋은 희곡을 쓰고 싶다면 검증된 희곡과 연극을 부지런히 찾아 읽고, 보기 바란다. 그것만이 좋은 희곡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어떤 잡담」 「진짜 거짓말」 「산 넘어 그곳에」 「시에나, 안녕 시에나」였다.

「어떤 잡담」은 부조리극의 일종으로 현대인의 불안을 내면화한 작품으로 읽혔다. 발상이 참신한 점이 강점으로 꼽혔으며, 연극적으로 설정된 까페 안에서 극을 끝까지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능청스러운 대사의 힘도 좋았다. 그러나 극의 완성도 측면에서 다소 아쉬웠으며, 서사가 모호하고 관념적인 것도 문제가 되었다. 몇가지 문제점들을 고쳐낸다면 무대화했을 때 재밌게 볼만한 작품이다.

「진짜 거짓말」은 작품 서두에서도 밝혔다시피, 몇몇 유명한 작가들의 인터뷰를 참고해서 쓴 작품이라서 그런지, 극중 인물들의 대사가 신뢰할 만하였고, 생각하고 곰곰이 되새겨볼 만한 대목도 많은 것이 강점이었다. 무엇보다 현대인의 허구적 윤리의식을 조롱하듯 끊임없이 서로를 속이면서 미끄러져가는 이야기 전개와 순간순간 경쾌하고 명쾌하게 진행되는 극의 진행이 재밌게 읽혔다. 그러나 극이 전체적으로 평이하고, 결말 부분이 극의 전체를 뒤집을 만한 극적 반전으로 작동되기엔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산 넘어 그곳에」는 어린 소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상처와 소외, 상실을 사실주의로 드러내고 덜어낸(해소한) 작품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서정적인 문장력 등이 여타 작품들보다 단연 돋보였지만, 통속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와,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어디선가 본 듯한 틀이 못내 아쉬웠다.

「시에나, 안녕 시에나」는 극의 진행 방식이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와 병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이인 시에나와 아이의 또 다른 자아인 시에나(성인)가 무대 위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내면의 상처를 언어(대사)로 심리화 또는 이미지화해가는 독특한 서사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참신한 개성, 극의 긴장감, 변용되면서 반복되는 극적 상황, 분열된 극의 이미지를 시종 지탱하고 있는 메타포적인 언어들, 한편의 언어극을 읽은 듯한 이 작품은 희곡적 글쓰기가 언어적 사유의 진지한 발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읽기에 따라 불친절해 보일 수 있는 주제와 상황 설정은 아쉬웠다.

네편의 작품을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자기만의 희곡적 개성으로 연극적 신뢰성을 인정받은 「시에나, 안녕 시에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고루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신인 극작가들에게 ‘연극’이 바라는 것은 자기만의 상상력과 개성적 언어로 무대를 차별화하는 것이다.

이번에 응모한 모든 예비 극작가들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보내며, 문운이 있기를 바란다.

박근형 최치언

 

 

 

희곡 | 당선소감

 

내가 희곡을 쓰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막연히 작가의 꿈을 꾸며 뭐 소설을 쓰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운명처럼 만났다. 연극이 내게 왔고 내가 연극에게 갔다. 연극과 나의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궁금하다. 우린 몹시 위태로운 관계맺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도 기가 세고, 나도 기가 센 탓이다.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고, 연극도 제 자신이길 포기하지 않는다. 「시에나, 안녕 시에나」는 그런 연극과 나의 기싸움의 결과이다. 수상소감을 여기까지 쓰다 말을 만들지 못해 멍을 때리다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남편이 자신의 수상 소감을 쓰고 있다. 멋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배꼽이 찌릿찌릿해진다. 그리고 문득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큼 연극을 사랑한다면 연극과 나의 팽팽한 이 기싸움이 어느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 연극을 사랑한다면, 이기려 하지 않고 사랑을 해본다면, 연극을 좀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한 희곡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한다. 그분들의 선택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 좋은 희곡을 쓰고 싶다. 수상의 기회를 주신 대산문화재단께 감사한다. 열심히 해서 대산대학문학상의 자랑이 되고 싶다.

도움 주시고 조언해주시는 선생님들, 친구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개인적으로 인사하고 맛있는 것 사드리고 싶다.

두분 엄마, 두분 아빠, 동생, 언니, 믿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사랑하는 가족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임빛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