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불안과 죄의식의 87년체제를 넘어서
● 여름호 특집에 실린 강경석의 평론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을 흥미롭게 읽은 20대 후반의 직장인이다. 나와 내 또래는 태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를 누려온 세대이자, 억압과 폭력의 경험이 거의 없는 세대다. 하나의 목표를 놓고 함께 싸워본 일 없이 공기처럼 당연하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린 세대다. 그런 세대의 일원으로 내심 뜨거웠던 70~80년대 민주화세대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민주화라는 목표를 향해 뜨거운 청춘을 불태웠던 세대, 단 하나의 목표를 갖고 행동했던 그 세대의 공유의식과 동지의식이 적잖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었던 완전한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던 87년체제의 타협은 결국 그들 세대와 2014년을 살아나가는 이 시대의 청춘 모두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고 있다. 이제 모두 하나 되어 뜨거웠던 시대는 지나가고 각자도생의 매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87년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동지애와 체제가 필요한 것 같다. 필자가 글의 마지막에 이야기한 “보잘것없음의 연대 안에서 피어날 새로운 우애”로 불안과 죄의식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으면 한다.
강은구 mohist9@gmail.com
‘왜’ 그리고 ‘어떤’ 인문학인가
●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는 단연 ‘인문학’이다. 눈만 뜨면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 등 온갖 매체에서 인문학에 대해 떠드는 모습을 보지만, 그 누구도 우리가 왜,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말해주진 않는다. 취업전선에 서 있어 누구보다도 인문학에 목말랐던 나는 여름호에서 백낙청의 「인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나」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글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인문학을 어떤 방식으로,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답이 ‘분단시대 현실과의 만남’과 ‘한국어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 또한 설득력있었다. 나는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이 말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는 인문학을 ‘전염병처럼 앓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더불어 인문학을 논하기에 앞서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마음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박다영 kes97439@gmail.com
인문학 갱신의 두가지 길
● 논술수업을 하며 학생들과 함께 「인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나」를 관심 있게 읽었다. 사실 논리적인 글쓰기 연습을 위해 읽은 것이었지만 공부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현대기술에 대한 ‘과학기술학적’ 탐구가 새로운 인문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 특히 공감했다. 과학기술학은 자연과학 분야만의 영역이 아니라 인문학에도 필요한 접근방법이 될 수 있다. 인문학이 갱신하기 위해선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이 많이 도입되어야 한다. 한편 인문학이라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축적, 알음알이의 축적이 아닌 인문적 실천에 꼭 필요한 앎을 성취하는 마음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서,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를 다시 한번 추스르게 되었다.
이정훈 que-sais-je@hanmail.net
한국문학에 더해진 낯선 감성에 주목하자
● 외국에 다녀왔다는 경험은 이제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외국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이제 해외여행은 보편화됐다. 형태도 다양해져 여행사 패키지상품뿐 아니라 이른바 ‘공정 여행’을 떠나는 이도 많고, 아예 외국에서 몇달을 지내고 오는 경우도 많다. SNS의 발달로 외국에 있는 친구들과 손쉽게 연락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외국을 배경으로 하거나 외국인이 등장하는 소설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여름호 문학평론 「외국어로 말 걸기」에서 필자가 “이국이라는 공간이 (…) 작품의 주제가 되는 소설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다”라고 지적한 것과도 맞닿아 있다. 이 글은 백수린과 조해진의 소설을 다양한 언어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결핍을 채워나가는 과정으로 분석한 점이 흥미로웠다. 다양한 문화가 갈수록 빠르게 섞이고, 그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변화를 세심하게 짚어내는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적실히 읽어낸 평론을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경식 dissenting@naver.com
새삼 문학의 품위를 깨닫다
●「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글이 아니라 말 속에 있는 문학이 보기 좋았다. 귀를 서늘하게 두고 애써 맞춰야 했던 주파수가 아니라 깨끗하게 들리는 ‘초점’이랄까. 주목하는 신간을 다루면서도 다른 지면에서 많이 다뤄진 것을 제외한다는 점이 배려로 느껴졌다. 특히나 나기철 시인의 『젤라의 꽃』은 시인도 시집도 『창작과비평』에서 처음 보았다. 시를 찾아 읽었다. 이렇게 끝나도 되나 싶을 만큼 아주 짧았다. “쓰는 사람의 욕구 위주로 일방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좌담자 김사인 시인의 말이 성큼 다가왔다. 더욱이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는 삶과 언어를 대하는 귀한 품위”라는 이후의 설명은 이마를 딱, 하고 때렸다. 어리석게도 ‘새롭게’ 발견한 시인의 시를 아껴 읽는다.
최새롬 daresa@nate.com
그래, 편안하게 시를 한번 읽어 주자
●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은 역설법. 이것 중요하다. 형광펜으로 그어라. 나희덕 시인의 「땅끝」에 대해 열강(?)하고 나오던 날이었다. ‘입시 지옥’이라 불리는 한국의 수험생들에게 시의 정서적 수용, 심미적 가치 같은 것을 전하는 일을 잊은 지 오래다. 고3 담임만 10년째를 넘기고 있는 나에게 시는 ‘수능 대박’을 위한 철저한 분석의 대상이자 출제 가능성을 저울질할 대상일 뿐이다. 작가에게 허락도 구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정답 찾는 기술 연마용으로 주옥같은 시를 마구 대하고 있다. 학생들은 가르쳐준 대로 정답만 찾을 뿐이다. 그때 책상 위에 배달된 『창비』 여름호. 목차를 살피는 순간 「작가 조명: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조재룡의 시평을 읽어가며 방금 전 교실에서의 나의 모습이 자꾸만 겹치는 것은 왜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말미에 가서 지독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나희덕과 함께 삶의 골목들을 힘겹게 돌아들고 어두운 터널 속을 빠져나오려는 지금, (…) 여전히 우리는 이 폐허 같은 삶 저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절은 본질을 잊은 채 관성에 빠져 있는 나에게 큰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 내일부터는 고3 수험생들에게 편안하게 시를 한번 읽어주자.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정훈탁 junghuntag@hanmail.net
일상에 스며드는 ‘흡수율’ 높은 시
● 이범근 시인의 시 「과수원 수족관」에는 사물들의 낯선 결합을 관통하는 슬픔이 묻어 있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눈물이 흐르고 뼈까지 다 울어버린 몸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단어를 연결하는 방식이 일상에서 쓰이는 것이기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않으면서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전하는 이 시를 보면서 서늘한 저녁에 밤산책을 나갔던 시간이 떠올랐다. 근래에 접하는 시 중에는 이국적인 단어 사용으로 이해가 어려운 것들이 많은데 이렇게 일상어들의 조합에서도 깊이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시를 읽을 때면 나의 일상에 시가 스며드는 ‘흡수율’이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작가의 시를 더 읽고 싶어졌다. 이런 작품을 소개해준 창비에 감사한다.
박인영 any61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