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조혜은 曺慧珢

1982년 서울 출생. 2008년 『현대시』로 등단. hem0302@hanmail.net

 

 

 

발음되지 않는 엽서

 

 

몇장의 우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숨 쉬지 않는 모니터 같은 얼굴로

속이 깊은 겨울을 가진 내밀한 연인들처럼

 

학습지도실

이렇게 간단한 사칙연산에도 오류를 가지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야

엄마는 내 눈을 감기고 부레에 출혈이 있는 물고기처럼 두 귀를 틀어막았다

오르락내리락 운동장을 헤매며, 나는

 

언젠가는 모두가 나를 더 싫어할 거야. 좋아하라는 부탁을 한 적도 없었는데

 

나와 내가 바뀌고 잘못 발음되고. 아빠가 생략되고, 나쁜 엄마가 조금 더 나빠져야만 하는 나의 입 속에서. 나는 자꾸만 바뀌어 발음되는 것들. 사랑은 아 더하기 너

 

12월 24일

아름다운 입천장을 가진 트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 문장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있고 싶어요

 

너와 네가 있는 학습지도실

너는 네게 말했다.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어. 너는 나를 사랑한다는 거니, 그렇지 않다는 거니

 

이해할 수 없는 너에게로 동화되는 나. 너는 사랑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는 발음할 수 없는 나.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발음해야 하죠? 이 말과 저 말 사이의 투명한 날씨와 목 뒤로 부풀어 오르는 꿈들. 너에게로 순행하는 나. 너는 사랑한다. 사랑은 그렇지 않다

 

너는 내게 말했다. 사랑은 아 더하기 너

 

우리는 아 더하기 너

 

방과후 학습지도실

이건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니야

<눈처럼 하얀 아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조금 더 웃거나, 조금 덜 울면 풀 수 있어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장난감이 ‘ㄴ’을 잃어버리고, 연필이 받침을 바꿔들고, 할머니가 할아버지도 되고 아버지가 바지도 되는 나의 입 속에서. 나는 너를 잃어버리고. 긴장한 나는 사랑을 싸움이라 말한다

 

오늘도 발음할 수 없는 나. 이해할 수 없는 너. 하지만 사랑은 가장 낮은 혀를 가진 자들의 마찰. 어느 말끔한 겨울의 한낮처럼 눈부신 우리가 좋아. 나는 손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12월 23일

너는 내게 말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어른들의 발음을 훔쳐내기 시작해

 

치아처럼 고운 눈이 내렸다

 

학습지도실

몇장의 우리가 바닥에 찢어져 있었다

너의 문제는 멀리서 반짝이는 뇌의 어떤 영역. 그건 나와는 달랐고 세련된 이름을 가졌고. 너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기꺼이 근사하게 발음할 수 있었다. 너는 그 속에 나의 손을 넣고 병든 문장들을 휘젓고 다시 배열하기를 반복했다

 

오래된 하드보드지같이 오늘은 우리가 좀 씩씩해 보이지 않니?

 

고통을 참으며 네가 말했다. 잔뜩 눌린 채 가장 어려운 7번 문항을 풀 때처럼. 장애라는 말을 구겨놓고 잔뜩 찡그린 채로

너는 학습지도실을 떠났다

 

너에게서 역행하는 나

너는 그렇지 않다. 나는 또 그렇지 않다

 

나의 파열된 입 속에는 네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뇌의 어떤 영역이, 깊은 호흡을 꿈꾸고. 멈춰서 있었다

 

방과후 학습지도실

<내가 공기를 들이마시고 성대를 진동시키는 건 네가 있는 영역에 전달되고 싶기 때문이야>

어느날엔가는 꼭 봉투에 담아 보내고 싶은 내 입 속의 키스

 

<학습지도실은 나에 대한 너의 배열 방식>

책상 위에 엎드리자 네가 남기고 간 문장들도 모두 잠든 척했다

 

12월 25일

싼타할아버지는 나의 턱에 변별할 수 있는 발음들을 넣어주었지만

나의 문제는 여전히 입 속에 있었고,

너는 내가 발음할 수 없는 그대로

 

우리는 우리를 닮은 그대로, 미숙한 이 문장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어요

 

너와 내가 있는 학습지도실

어느 말끔한 겨울의 한낮처럼 눈부신 <우리>가 좋아

 

 

 

모자

은폐에 대하여

 

 

모자를 덮고 누웠다. 모자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외로운 두 발을 할머니가 양손으로 감싸안았다. 우리 아가, 발이 차서 어쩌누. 할머니를 모자 속에 밀어넣고 모자를 뒤집어 몸을 담그면, 모자 속에서 아빠는 비틀비틀 숙련된 술꾼처럼 팔다리를 움직였다. 습기 찬 할머니에게 욕을 했고. 술병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뒤집힌 모자를 덮고 누웠다. 모자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외로운 두 손을 할머니가 양손으로 감싸안았다. 우리 아가, 손이 차서 어쩌누. 할머니를 모자 밖으로 밀어내고 모자를 뒤집어 몸을 숨기면, 모자 밖에서 아빠는 까맣게 변한 발등을 신발 속에 끼워넣느라 애를 먹었다. 할머니를 밀쳤고. 노랗게 뒤집힌 눈으로는 오지 않을 것들을 찾아 머무는 길이라고 했다

 

어느날 터진 모자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내 몸을 발견하고는 할머니, 양손으로 감싸안았다. 우리 아가. 마비된 기억 하나가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사랑하는 할머니는 장애 판정을 받은 뒤에도 양말은 꼭 신은 채 나를 찾아왔고 구겨진 손으로 모자 속을 꿰맸다. 나는 더러워진 모자 아래 누워 있었다. 자주 할머니를 먼지 쌓인 모자 속에 숨겨놓았고 할머니를 잊었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할머니를 때리는 아빠가 있었다. 모자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할머니는 멍든 무릎을 내밀었고. 아니야, 그건 모자에 남아 있던 얼룩이야. 나는 모자를 썼다

 

자꾸만 모자 밖으로 튀어나와 모자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할머니. 저리 가요. 할머니를 발로 차서 모자 속에 던져넣고 나는 모자를 뒤집었다. 모두 잊었다고 말했다

 

몰래 모자를 뒤집었다

 

모자를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