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김석철‧오효림 『도시를 그리는 건축가』, 창비 2014
시대의 이상을 그리는 도시설계가의 열정
안건혁 安建爀
서울대 명예교수, 도시설계가 ahnkh@snu.ac.kr
이 책은 건축가 김석철(金錫澈)이 전직 기자이자 변호사 오효림(吳孝琳)과 나눈 자서전적 대담록이다. 책에는 건축가로 출발해, 도시와 국토를 다루고, 나아가 동북아로 연결되는 구상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작품세계를 확장해온 ‘대가’ 김석철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건축에서든 도시설계에서든 김석철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그같은 열정과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첫째는 그의 박식함이다. 보통의 재주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학문적 통달함에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매사에 임한다. 늘 자신을 천재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것과 같이 그는 천재다. 둘째, 그는 끝없이 도전한다. 조금도 쉬지 않는 것 같다. 항상 생각하며, 항상 무언가를 그리거나 쓴다. 셋째, 그는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는 언변을 가졌다. 평자도 43년 전 처음 그를 만나 일을 도와주면서부터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밤을 새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 입담이 담긴 만큼 이 책도 한번 손에 잡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놓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평자가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다 읽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한번 시작하니 그렇지가 않았다.
그의 도시설계에 대한 꿈은 ‘여의도계획’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당시에도 물론 도시계획이라는 분야와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그때의 도시계획은 대부분 도로나 상하수도와 같은 기반시설 구축이나 용도지역 지정에 대한 것이었다. 도시개발도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유일한 방법이어서 토목분야 출신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도시설계는 개념조차 없었다. 건축가가 도시설계에 참여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추세와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의도라는 작지 않은 도시의 설계를 건축가가 주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도 건축가들의 도시설계가 대부분 실패하거나 아이디어 제시에 그치고 만 것처럼 여의도계획안도 거의 구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것은 김석철의 안이 토목 중심의 낙후된 도시계획 관행과 너무도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의도계획 이후에도 김석철은 ‘서울대 마스터플랜’과 쿠웨이트 자흐라(Jahra) 신도시 프로젝트 등의 도시설계를 했지만 전자는 실행과정에서 배제되었고 후자는 실현되었지만 영향력이 크지 않은 주거단지였다.
2000년대 들어와 설계한 중국의 베이징 경제특구와 취푸(曲阜) 신도시 계획은 김석철로 하여금 도시설계에 몰입하게 한 계기였다. 이때부터 건축보다는 도시설계에 집중해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중국을 대상으로 많은 도시설계안을 발표했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난 뒤부터는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왔고 그 첫번째 프로젝트가 새만금 바다도시 구상(2003)이다. 정부의 새만금 간척사업과 환경운동가들의 방파제 완전철거 주장이 첨예하게 맞선 상황에서 제시된 창의적인 대안으로서, 김석철이 여의도계획 이래로 30여년 만에 국내를 대상으로 만든 구상안이다. 이후 인천의 ‘밀라노디자인시티’,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 이명박정부의 4대강사업에 대한 대안, 두만강 하구 다국적 도시 프로젝트 등이 이어진다.
이러한 도시설계 구상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프로젝트의 발주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프로젝트의 발상 자체를 김석철이 시작한 것이다. 발주처가 없으므로 계획안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사람이 없다. 또 반드시 계획에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이상적인 아이디어만 반영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김석철의 도시설계안은 실행계획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의 도시구상은 하나의 비전 제시이다. 비전은 정치적 힘을 갖지만 현실의 벽을 넘기 힘들다. 실현되지 못한 숱한 구상에 대해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현될 수는 없더라도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에 더 큰 의미를 지닌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이러한 작품에는 김석철의 일관된 철학과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 속에는 항상 새롭고 창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점이 아이디어에 목말라하는 정치가들을 반하게 만든다.
김석철은 자신의 설계안을 정책결정자에게 제안하고, 그들이 결정만 하면 바로 실천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 민주사회에서 하나의 도시설계를 실현시킨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수많은 결정과정을 거치는 동안 타협되고 수정되며 변질된다. 그래서 도시설계는 당대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 하나의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윗분’들만 아니라 실무선에까지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환상적인 아이디어라도 공중에 떠버린다. 정치가들은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쓰지만, 끝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 40여년에 걸친 그의 도시설계가 안타깝게도 대부분 실현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도시계획 메커니즘과 관계가 있다.
‘도시를 그리는 건축가’라는 책의 제목만큼 김석철에게 어울리는 표현도 없는 것 같다. ‘그리는’ 것은 ‘짓는’ 것과 다르다. 그리는 것은 이상을 생각해내는 일이지만 꼭 지어지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김석철의 한계가 있고 도전이 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이 건축가보다 도시설계가로서 일을 더 많이 했다고 자평한다. “그러면서 인문주의자(humanist)로 더 기억되고 싶습니다”(423면)라고 말을 맺는 것을 보면 그의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도시설계의 ‘인문학적’ 의미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50년간 수많은 업적을 쌓아온 저자는 이제 일흔을 넘기고, 수차례의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을 견뎌내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업,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내는 일에 매달려 있다. 건축가의 도시설계에 대한 꿈, 그가 하는 일이 최후의 결실을 맺을지는 시간만이 말해주겠지만 우리는 모두 그것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