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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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만 文東萬

1969년 충남 보령 출생.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창간호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나는 작은 행복도 두렵다』 『그네』 등이 있음. munyaein@hanmail.net

 

 

 

미루나무 살풍경

 

 

성냥개비로 귓구멍을 파며 나는 미루나무를 생각하지

눈을 감을수록 속성하는 나이테

말을 참을수록 번성하는 이파리

그런 나무들의 용한 내력을 알아보라고

귀 밝은 나무의 독자들이 귀띔하는 통에

재미없게 올바르지 말라고 충고하는 통에

나는 잠시 내 뿌리를 걷으며 새 뿌리에 접붙이는

일도 생각해보았고,

하루종일 서 있는 길고 지루한 미루나무를

긴 흔들림을 그립고 애틋하게 그려내는

목가풍의 서정을 궁리해보기도 했지

어디선가 또 이런 말도 들었다

크고 헐거운 나무일수록 단명하고

성냥공장으로 이쑤시개로 팔려가더라는

속성한 나무들의 비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흐뭇하고 삐딱하고 결연하게 버티는 나무가 어딨는가

새알을 품고 흔들리는 마딘 나무가

생전 만져보지도 기록되지도 못한 단단한 나무가 어딨는가

미루나무로 귓구멍을 파며 그 나무만 생각하곤 하였지

 

 

 

먼저 죽은 여덟명처럼

 

 

여긴 싸가지 없는 백혈구가 착한 백혈구를 잡아먹는 일 따윈 없어요. 방독면을 쓰고 납도금을 한다든지 장갑을 두겹으로 껴도 손바닥에 화공약품이 박히는 그런 일도 없고 방사선기계에 노출될 위험은 더더욱, 여긴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이니까. 박지연씨 라스베이거스 가보셨어요. <만국가전박람회>요. 거기가면 고명한 두 딸의 손을 다정히 잡고 가는 그 양반을 볼 수 있어요, 진짜 가족들이죠. 외동아들은 뒤에서 약간 새침하게 긴장한 듯 쫓고요.(당신이 막내딸이라 해도 잘 어울렸을 텐데) ‘정직한 사회’를 꿈꾸신다는 꼬장꼬장한 발걸음을 호흡곤란 어지러움 구토 하혈 이런 고통 없이 그냥 뒤쫓아보기만 하면 되는데. 자 눈을 감아봐요. 당신도 아빠 손을 잡고 간당간당하게 설레게 달작지근하게 물오른 밭둑의 삐비를 뽑아봤잖아요. 그러니까 박지연씨는 2010년 3월21일 스물셋으로 여기로 오셨네, 쏙 빠진 대머리에 몸무게 30kg으로 가볍게 오셨네, 몸을 덜어오면 우리 일이 좀 적어지긴 하지. 당신은 ‘또 하나의 가족’에 포함되지 못했소. 먼저 죽은 여덟명처럼. 당신은 내부의 가족에도 또 하나의 가족에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태어나셨어야 해요. 입사는 그다음의 일이었으니까. 인간은 운명을 모르고 태어나는 존재들이라 그게 속을 썩이지. 왜 일찌감치 와서 아프지 않은 얼굴로 웃는 거예요. 우는 거예요. 이제사 바싹 마른 뼈 위에 막 살도 오르네. 봄이라, 당신에겐 억울하겠지만 봄이라, 당신 머리칼도 산달래처럼 몇 가닥 오르네. 아무튼 아프지도 않고 숨소리도 없는 박지연씨. 당신처럼 쌉싸름하고 아랑아랑 현기증이 날 땐 못 가본 라스베이거스만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악수도 못했네. 잠시 억울한 명부록(名簿錄)은 접고, 자! 손이라도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