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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심보선 沈甫宣
1970년 서울 출생.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함.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있음. bosobored@gmail.com
늦잠
별은 어둠의 미묘한 순응자.
시간이 닦아놓은 밤의 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젖은 흙 위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잘 익은 사과 맛이 나는 발자국들을 찍으며.
나의 어느 쪽 귀에 더 많은 속삭임이 고여 있을까?
내가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쪽의 반대편.
당신이 메마른 숨결의 흰 가루를 떨어뜨리는 그 움푹 팬 곳.
새벽의 결정, 입술에서 이슬로 옮아간다.
금화를 세어본 적 없는 당신의 손.
언제나 잘못된 시간의 열쇠를 아침에 건넨다.
등 뒤에서 당신은 나지막이 묻는다.
“지금은 몇시죠?”
나는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두개의 눈동자를 이어주는 흙길.
녹슨 나침반의 떨리는 북쪽.
오전 열시.
이제 일어나야 해요.
4월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지의 별빛과
제국 빌딩의 녹슨 첨탑과
꽃눈 그렁그렁한 목련 가지를
창밖으로 내민 손가락이 번갈아가며 어루만지던 봄날에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에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1월과 3월 사이의 침묵을 물수제비뜨며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5월에도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에는 천사가 위로차 내 방을 방문했다가
“내 차라리 악마가 되고 말지” 하고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심리상담사가 “오늘은 어때요?” 물으면 나는 양미간을 찌푸렸고
그러면 그녀는 아주 무서운 문장들을 노트 위에 적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물론 7월에도……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8월에는 어깻죽지에서 날개가 돋았고
9월에는 그것이 상수리나무만큼 커져서 밤에 나는 그 아래서 잠들곤 했다
10월에 나는 옥상에서 뛰어 날아올랐고
11월에는 화성과 목성을 거쳐 토성에 도착했다
우주의 툇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니
내가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이 늙은 개처럼 엎드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월에 나는 돌아왔다
그때 나는 달력에 없는 뜨거운 겨울을 데리고 돌아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4월은 그 해의 마지막 달이었고 다음해의 첫번째 달이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