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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아토포스’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아방가르드
이경진 李京眞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속물들의 윤리학」 「앨리스씨를 위한 동정론」 등이, 역서로 『공중전과 문학』 『도래하는 공동체』가 있음. snowbonbon@hanmail.net
1. 진은영의 물음들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일. 그
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
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이다.”1)
자끄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주목한 바 있다. ‘~이란 무엇인가’(what is...)라는 어떤 본질을 전제하는 물음의 형태, 그리고 어떤 본질에 저항하는 행위로서의 ‘문학’ 사이에 가로놓인 불균형이 그 물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까닭이다.2) 한데 그는 이러한 통찰이, 어떤 규범이나 제도, 진리적 가치로부터 언제나 우아하게 빠져나가는 문학의 공간이 특정한 시대적 제도로서 구획된 것이 아닌가를 회의하는 그다음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주의적인 물음은 텅 빈 물음이 아니라 대단히 특수하고 긴박한 작업으로 전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저 무용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게 만드는 어떤 배치의 공간성을 확인하고 그 장소에서부터 다시금 문학의 존재론을 정립하는 작업이다. 즉,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비평의 불가능한 물음이 아니라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어야 하는 물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여름에 출간된 진은영(陳恩英)의 『문학의 아토포스』는 이러한 물음의 (불)가능성과 고투한 비평집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회귀하는 질문들”(16면)을 ‘자유롭게 건네온’ 궤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서장에 해당하는 글은 저 유명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이다. 그 글은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중후반 그야말로 ‘종언’을 모르는 여러가지 종언의 담론들, 문학의 종언, 정치의 종언, 시의 종언, 근대 장편소설의 종언, 비평의 종언 등으로 얼어붙어 있던 문단에 랑씨에르( J. Rancière)라는 “먼 친척 아저씨”가 보내준 “달콤한 과자상자를 받아든 아이”(17면)의 설렘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생산적인 질문과 답변 들을 움트게 한 기원적 장소로 기능했다.
그리고 육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여섯해는 단순히 양적으로 환산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이 비평의 문학사적 의의를 평가하기에는 무척이나 오만하게도 짧은 시간이며, 그렇다고 그 비평의 직접적인 후속 논의를 새삼스레 선보이겠다고 자처하기에도 뒤늦은 시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시간은 저 비평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한국사회의 뚜렷한 정치적 퇴행이 끝을 모르고 계속된 시간이며 인간의 존엄과 부끄러움이 말살되었음을 고통스럽게도 여러번 확인해야 했던 시간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한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철학자가 시와 정치 사이의 헐거워진 연결고리를 과감히 부수고 새롭게 짜맞춰가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시간을 담고 있는 『문학의 아토포스』의 출간을 계기로 진은영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및 후속 논의들이 제기했던 물음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우리 시대 비평의 근거를 되묻고자 하는 시도가 아주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종언과 시작(始作/詩作)
진은영의 비평이 근래의 비평담론에서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수많은 논쟁을 점화시켰다는 사실에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시대 문학(그리고 비평)의 근거를 기저에서부터 다시 고민하는 태도에 있다. 즉 진은영의 그 글은 정치다운 정치가 실종된 한국사회에서 ‘시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지만, 좀더 넓게 보면 문학이 주도했던 정치적 공론장의 축소라는 시대적 현실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문학평론가가 이 비평으로 촉발된 ‘시와 정치’ 논쟁을 두고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지연된 대응”3)이라 진단한 것은 정확한 것이었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근대문학’에 내린 사망선고가 독단적이고 편협한(근대 장편 리얼리즘 소설만을 근대문학과 동일시하는)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 던진 충격이 지금까지도 한국문학의 몸체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문학과 정치의 긴밀한 관계를 ‘증언’(또는 ‘회고’)하는 것은 유수의 전통있는 문예지들뿐이다. 신작시와 신작소설의 앞뒤에 전반적인 시국 비판과 정치적·사회적 논평이 있으며, 철학논문을 방불케 하는 지성적 사유의 장이 펼쳐지기도 하고, 온 분야를 망라하는 근간들의 리뷰가 있는, 한국에서는 사실상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문예지의 이러한 배치로 인하여 시는 그것이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과 정치의 연계는 직관적으로 당연시되었으며 그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관습화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텍스트들 간의 접합 문법이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명하게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4) 많은 이들이 문학이 차지하는 공론장의 위축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으며, ‘작가〓지식인’의 공식 또한 낯설어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문학의 위상과 한국문학의 전통적인 당위 사이에 분열이 횡재한 시대에 문학과 현실이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할 필요성은 절실하게 요청되어왔다.
진은영의 저 비평은 바로 이러한 요청에 대한 한가지 응답이었다. 그녀가 고통스럽게 자각했던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16면)은 시와 정치 사이에 애초부터 존재했던 분열이 아니라, 카라따니 식으로 말하면 근대 문학체제가 붕괴했다는 감각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었고, 그것과 대결하겠다는 비평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카라따니가 뼈아프게 지적했듯이 문학이 사회와 사상의 변혁을 주도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미디어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이제 활자매체는 영상매체에 승산이 없다. 소설은 더이상 공감을 통해 신분, 계급, 지역, 성별의 차이를 아우르는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네이션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그래야 할 역사적 사명 또한 희미해졌다. 물론 어떤 문학들은 그것과는 다른 공동체—‘타자들의 공동체’ 혹은 ‘소수자들의 공동체’—를 열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한데 그 가능성은 ‘정치’라는 부담스러운 이름 대신에 ‘윤리’라는 이름으로 명명됨으로써 조심스럽게 타진되었다. 따라서 한동안 레비나스(E. Levinas)며, 데리다며, 라깡( J. Lacan) 등의 레떼르가 달린, 한국의 인문학과 비평담론을 풍미했던 ‘윤리’의 담론은 문학이 더이상 정치적인 비판과 투쟁의 매체로 입증되기 어려운 시대에 ‘현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사유였던 셈이고, 물론 ‘현실정치’로 환원될 수 없을 문학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호명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은영은 ‘정치’라는 무거운 이름을 비평담론에 귀환시켰다.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태도로 ‘문학이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그 ‘정치적이다’라는 술어는 의사를 소통하고 합의의 절차를 거쳐 정책을 수립하는 ‘의미론’의 차원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미학’, 칸트가 뜻했던 대로는 ‘감성론’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진은영은 랑씨에르에 의거하여 정치란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 아니”(26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는 형식적인 규정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실천의 방향으로 정향되어 있다. 랑씨에르는 ‘일이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아서’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노동자들과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 정치에서 배제된 노예들에게 제 몫을 돌려주고, 그들이 그 몫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활동이 바로 정치라고 설명한다.5) 그에 따르면 예술은 이러한 정치적 활동, 제 몫을 제대로 분배받지 못한 자들의 몫을 가시화하는 활동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고유한 활동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사실 모든 활동이 감각적인 것의 분배다. 그런데 예술의 정치는 불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 맞서서 새로운 것을 침투시키고 기존의 질서를 교란하는 데서 성립된다.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되는 방식, 이 가시적인 것들이 말해지는 방식, 이를 통해 표현되는 역량들과 무능들이다.”6) 즉 문학이 정치적이라면 그것은 문학이 공동체를 상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의 틈새를 상상하는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랑씨에르는 이렇게 단언한다.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다.”7) 문학이 공동체를 상상하는 단서를 마련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주어진 (어떤 식으로든 불평등했으나 그것이 가시화되지 않았던) 공동체를 파열하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그렇다면 예술은 폭넓은 공론장의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개개인의 단독적인 탈주를 장려하는 데서 자신의 정치성의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선명한 정치적 고발이나 폭넓은 대중적 정서에 기댄 공감을 통한 행동의 촉구보다는 작품 자체의 미학적 실험이 문학의 정치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진은영의 고민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계기가 된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의미와 소통 너머를 탐색하는 낯선 감각의 언어들은 미학적으로는 진일보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옹호받기 어려웠다. 이런 비평적 궁핍의 상황에서 진은영의 그 글은 예술이 현실과 맺는 관계가 ‘재현’ ‘반영’ ‘기록’(documentary)이라는 도식이 아니라 ‘감각적 분유(分有)’의 논리로서 사유될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었다. 그렇다면 젊은 시인들의 “유아론적 주체의 자폐적인 언어”(32면)는 소통을 거부당했으며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히끼꼬모리’(引き籠り, 은둔형 외톨이) 같은 개인들의 현실에 대한 반영이자 표현으로 해석됨으로써 이러한 시를 정당화하기 이전에 이 시들이 우리의 일상적이고 균질화된 감각을 파괴하고 해체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평적 구제는 랑씨에르가 선보였던 것이다. 싸르트르( J.-P. Sartre)에 의해서는 ‘대상의 화석화’이자 ‘인간의 능동적, 주체적 행동에 대한 감각의 결여’로 폄하되었으며 루카치(G. Lukács)에 의해서 ‘정치적 보수성’으로 격하되었던 플로베르(G. Flaubert)의 섬세한 관찰과 탐미적인 문체는 랑씨에르에 따르면 기존 문학질서와의 중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루카치는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을 동등한 중요성으로 기술하는 플로베르의 묘사술이 무엇보다도 중심에 놓여야 할 인간을 제쳐두고 사물들을 반짝이도록 갈고 닦는, 그래서 부르주아의 물신적 태도와 다름없는 태도라고 비판한 바 있다.8) 하지만 이러한 언어의 태도, 즉 문체는 랑씨에르에 의하면 도리어 무차별적인 민주주의적 감각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문학의 정치』에서 귀족주의적이고 물신적이라고 공격받았던 플로베르의 문체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원칙을 미학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재평가한다.9)
사실 여기까지라면 (순수)문학은 원래 자신이 하던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순수문학론, 또는 모더니즘 문학론과 의도는 다르나 효용의 측면에서는 동일한 지점으로 귀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랑씨에르는 ‘문학의 정치’를 ‘작가의 정치’와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투쟁을 몸소 실천하는 참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저술을 통해 사회구조, 정치적 운동들, 또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표상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함축한다.”10) 랑씨에르의 여러 저서에서 ‘문학의 정치’에 대한 설명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는 문학의 정치가 싸르트르 식의 참여문학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이러한 랑씨에르의 문학-정치론에 많은 반발과 회의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주정치의 기본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한국의 현실에서 볼 때, ‘정치’의 비판적 외부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서구의 정치철학 담론이 과도하게 이상적이거나 순진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백낙청(白樂晴)은 문학의 ‘정치적인 것’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순수하게 고집하는 태도가 현실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로 기능할 우려”11)를 덧붙였다. 김성호(金成鎬)는 한층 강경한 어조로 랑씨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이념이 한국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거나 ‘현장에 밀착’되어 있거나 혹은 ‘구체적으로 반체제적인’ 어떤 행위도 문학인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고마운 존재”11)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한다.12) 결국 진은영과 랑씨에르가 말하는, 문학이 우리의 삶에 새겨넣는 새로운 감각적 파열이 갖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그것을 굳이 ‘정치’(또는 ‘정치적인 것’)라고 명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끌어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난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구체적인 작품 읽기를 통해서 그 작품의 ‘정치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라 부르는 데 망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은영 이후 많은 비평가들은 ‘정치’라는 개념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정하는 데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13)
3. ‘아토포스(atopos)’라는 아방가르드
『문학의 아토포스』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충분히 숙고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후속으로 발표한 글들을 보면 초기의 글보다 어떻게 하면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한층 짙게 묻어난다. 그는 우선 ‘참여’의 개념을 새롭게 구성한다. 싸르트르의 ‘참여’는 작가가 당대 현실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명징한 산문의 언어로 전달하는 데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참여는 ‘의미’의 차원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가시적인 것과 말을 배치하고 나누는 ‘감성’의 차원에서 요구된다. 그리고 진은영은 시인으로서 그러한 ‘참여’의 개념을 텍스트의 자동사적 행위로서 지켜보는 것을 거부한다. 만일 문학의 정치성이 시인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나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에 있지 않고 감각들의 새로운 분유에 있다면 의미와 서정의 교류를 방해함으로써 해석의 욕망에 저항하는 그런 언어를 접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즉 진은영은 자신과 동료들에게 작품 자체의 혁신보다는 오히려 “문학텍스트와 다른 사회적 텍스트의 끊임없는 접합”(34면)을 촉구하는 것이며 이는 시 짓기와 삶 짓기로서의 이중적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두가지 예를 든다. 하나는 심보선(沈甫宣)과 시적 어휘들을 교환하여 시를 쓰는 실험이고, 다른 하나는 용산참사라는 당면한 정치적 사건으로 촉발된 시 쓰기의 실험이다. 보통의 경우 후자의 시 ‘실험’은 ‘참여시’ 또는 ‘정치라는 의제에 갇힌 시’로 여겨진다. 그런데 진은영은 이러한 정치적 조건에서 탄생한 시를 “그것 역시 문학적 실험”(141면)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온몸’으로 예술의 자율성을 예술의 타율성으로 다시 쓰고, 그 타율성을 자율성으로서 드러내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로써 진은영은 사실상 대단히 까다로운 길을 개척한 셈인데 그간 문학비평을 답보상태에 빠트렸던 여러 이분법적 대립들(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자율성과 사회성)을 지양하는 어떤 미지의 지점을 이론과 실천으로 언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진은영의 ‘온몸’의 미학-정치는 언뜻 삶과 유리된 문학을 비판하는 리얼리즘과 참여문학의 논조를 떠올리게 한다. 카라따니는 근대문학 종언의 징후로 문학과 삶의 분리를 문제시했다. 작가가 일개 직업으로 ‘세속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삶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다.14) 흥미롭게도 루카치 역시 비슷한 지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자연주의에서 인간의 삶이 결여된 이유를 자연주의 작가들이 “자본주의적 노동분업” 속에 고착화되어 있는 역사적 현실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발자끄(H. de Balzac)와 스땅달(Stendhal), 디킨즈(C. Dickens), 똘스또이(L. Tolstoy)는 시민사회의 형성을 몸소 체험한 자들이었고 그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작가였던 것이 아니라 다른 직업을 겸한 경우가 많았다. 디킨즈는 여러 직업을 전전한 노동자였고 스땅달은 군인이었으며 발자끄는 막대한 부채를 진 사업가였다. 그러나 자연주의 작가들은 전업작가였다. 즉 그들은 시민사회가 확립된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서 시민사회를 수동적으로 관찰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지나치게 사물 묘사의 기법에 매달렸던 것도 이러한 사회와의 유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루카치는 설명한다.15) 진은영 또한 젊은 시인들이 시도한 감성적 불일치가 충분히 삶 속에 파고들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34면) 물론 그녀는 시인들에게, 포크너(W. Faulkner)가 충고했듯 세상의 시궁창 속에 뛰어들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딴사람’이 되라고 권한다. 말라르메(S. Mallarmé)가 시를 통해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인’이면서 동시에 ‘해방된 노동자’가 되었던 것처럼 시인과 시민을 갈라놓는 자본의 배치에 저항하라고.
이러한 관심사에서 진은영은 부르디외(P. Bourdieu)가 제창한 문학의 장(場)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부르디외는 『예술의 규칙』에서 근대 이후 통념적인 문학의 공간으로 상정되는,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부터 유리된 예술의 신성한 ‘자율적’ 공간이 계급적 조건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는 허구적인 공간임을 보여주었다. 근대 이후 “문학의 토포스(topos)”는 “세계의 다양한 장소들 중 특수한 방식으로 점유된 하나의 장소”로서 “상업적인 화폐의 공간과 우파와 좌파 모두의 도덕주의적 정치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장소”(162~63면)로 나타난다. 진은영에 따르면 이러한 부르디외의 분석은 절반만 맞다. 예술의 공간은 사회적인 계급별로 구획된 공간으로 구조화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진은영은 이러한 문학의 공간이 어떤 장소에 부착된 성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장소 구획들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문학의 잠재적 (비)공간을 명명하기 위해 진은영이 마련한 개념은 아토포스이다.16)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영감에 강제되어 자신에게 문학적으로 새로운 공간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179면), 바로 이것이 문학의 아토포스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공간과의 사랑을 통해서 독창성의 ‘처소’를 점점이 만들어가고 확산시키는 예로 “재건축 철거에 맞서 투쟁 중인 건물에서 아방가르드 시인들의 작품을 낭송하기, 학습지 노동자들이 농성 중인 광장을 향해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왕유(王維)와 소동파(蘇東坡)를 베껴쓰기”(203면) 같은 활동을 든다.
이러한 진은영의 이중의 시작(詩作/始作)론은 구체적인 작품의 정치보다는 행위, 실천(~되기)으로서의 문학의 정치에 한층 방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우리는 ‘아토포스라는 아방가르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페터 뷔르거(Peter Bürger)는 『아방가르드의 이론』에서 20세기초에 등장한 아방가르드 운동의 요체를 이렇게 정리한다. “아방가르디스트들이 예술은 다시 실천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한다고 할 때, 이때의 요구는 예술작품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요구는 개별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요구다. 즉 그 요구는 특수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영향을 결정짓는 요소인, 사회 내에서의 예술의 기능방식을 겨냥한 요구다.”17) 이 문장들은 진은영의 지향점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앞서 진은영의 미학이 예술의 자율성을 고수하는 순수문학론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이러한 오해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닌 것이 역사적 아방가르드(다다, 초현실주의, 미래주의) 역시 18세기 말엽 시민사회의 형성과 함께 성립된 예술의 자율적 공간성을 필수조건으로 삼아 등장했기 때문이다. 즉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과 유미주의의 미학적 실험에 대한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실생활에서는 아무런 기능을 갖지 않는 것이 곧 예술의 기능이라는 모더니즘 예술의 현실 적대주의에는 반기를 든 것이었다.
진은영의 아토포스론은 바로 이러한 아방가르드 운동의 문제의식을 다시금 현재화하는 것이다. 그는 미학적 아방가르드에 중요한 ‘모럴’이 담겨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문학과 삶 사이의 분리를 뛰어넘으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진은영은 랑씨에르가 ‘숭고의 미학’이라 부른, “문학적 실험은 문학이 문학 아닌 것이 되기 직전에, 즉 문학의 고유성이 흐려지기 직전에 끝나야 한다”(135면)는 주장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정치를 고민할 때 문학과 비문학, 시인과 시민의 구분을 상정하는 것을 문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참된 미학적 실험은 “항상 다양한 정치화의 계기를 발명해내는 지평에서 작동”(140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인의 모럴’은 “일종의 ‘시민적’ 모럴을 포괄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143면)
카라따니는 근대문학체제를 대표하는 싸르트르 문학론의 의미를 “혁명정치가 보수화되고 있을 때, 문학이야말로 영구혁명을 담당했다는 것”18)으로 요약한다. 즉 혁명정치가 할 수 없는 일을 문학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고한 믿음이 근대문학을 추동하는 강력한 파토스였다는 것인데, 그는 비슷한 맥락에서 80년대 한국문학의 위대한 시기 역시 정치적 혁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19)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으로 설명한다. 앞서 보았듯이 진은영은 이러한 근대문학론의 파토스를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다. 문학의 정치는 기존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는 활동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문학의 정치는 기존의 정치 영역에서 의제화되지 못한 목소리들을 듣고 비명을 지르는 존재들을 기억하고 가시화함으로써 불일치를 창조하는 광범위한 활동을 의미한다.”(138면)
이장욱(李章旭)은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에서 진은영에게 화답하면서 예술과 정치의 동시적 혁명을 기도했던 역사적 사례들을 열거하고 이러한 아방가르드적 운동의 현재적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저 역사적 사례들이 오늘날 반복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20)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 답은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정치가 퇴행했을 때 우리는 정치의 개혁에 뛰어드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예술을 통해서 정치를 수정하는 것이 나은가. 이는 어려운 문제이며, 매번 다르게 결판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오도 마르크바르트(Odo Marquard)는 그것이 아방가르드든, 바그너(W. Wagner)의 오페라든 예술과 삶의 차이를 삭제하려는 기획을 ‘총체적 예술작품’, 또는 “미학적 근본주의”라고 명명하고 이를 위험천만한 태도로 경계한다.21) 그것은 정치가 실패하면 예술이 나서는 구도, 정치의 실패를 예술이 보완하는 구도이다. 그는 이런 태도를 하이데거(M. Heidegger)에게서 발견하는데, 특히 하이데거가 1936~37년 겨울학기에 개설된 초급 철학연습에서 왜 하필 실러(F. Schiller)의 『인간의 미학적 교육에 관한 서한』을 다루었는지 의구심을 품는다. 랑씨에르도 자주 그의 미학의 준거로 삼는 이 저작에서 실러는 독일 내부에서의 정치적 혁명은 요원하고, 프랑스혁명마저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공포정치로 치닫자 정치적 혁명과는 구분되는 미학적 혁명의 길을 모색한다. 그것은 미적 감성의 도야를 통해서 정치적 자유에 도달하려는 기획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36~37년이면 하이데거가 1934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직에서 사퇴하고 나치정권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는 중단한 때였다. 하이데거가 나치와 절연한 배경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어쨌든 그가 자신이 생각한 정치적 ‘혁명’에 실망감을 맛보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 마르크바르트는 이러한 정치적 실망감이 하이데거로 하여금 예술에서 정치의 대안을 찾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그후 그의 사유가 나아갈 길을 결정했다고 본다. 「예술작품의 기원」(1935~36), 「횔덜린과 시의 본질」(1936), 「예술로서의 권력 의지」(1936~37) 같은 논문들이 그러한 도정에서 쓰인 것들이다. 이러한 예는 수두룩하다. 독일의 근대미학 자체가 이미 독일의 정치적 후진성을 보완하려는 시도였으며21) 루카치 역시 말년에 정치에서 물러나 미학 연구로 돌아서서 『미학이론』을 집대성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22)
진은영의 새로운 실험이 역사상 ‘실패’로 돌아갔던 여러 아방가르드처럼 ‘실패’로 끝날 것이라 예단하고, 그래서 무모한 시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적 실험은 애초부터 완결될 수 있는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매순간 다시 점화되어야 하는 불꽃처럼 순간순간의 운동/삶 속에서만 살아 있기 때문에 이장욱이 말했듯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아방가르드가 ‘새로움’의 강박에 함몰되어 낯선 언어를 경쟁적으로 만들어내야 인정받는 현 예술의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비판이 아니라,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과하게 강조된다면, 즉 문학의 정치가 현실정치를 대체하거나 능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에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편견’ 섞인 불신도 들어 있다. 진은영이 문학에서 감지하는 그 정치적인 가능성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랑씨에르의 플로베르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을 발견하고 가늠할 수 있는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감식안을 지닌 사람은 드물다는 점에서 ‘문학의 정치성’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지각되고 실천되는 것이기 이전에 소수의 기민한 비평가(?)에 의해 깨우쳐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이 시인과 비평가 들만의 행복한 공동체로서 머무는 것이 아닌가(그것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술의 계급적 공간질서를 무너뜨리겠다는 기획은 다소 공허하게 끝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다.
게다가 20세기초 아방가르드 운동이 점화되었던 시대와 지금은 문학이 점유한 공간성이 동일하지 않다. 진은영이 문제시하는 문학의 자율성이란 공간은 고결한 시인들이 거하는 공간으로서 신성시되고 추앙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이 붕괴함에 따라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소멸되고 있는 공간일 수도 있다. “죽은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장치(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인 동시에 그 장치가 형성하는 특수한 인간의 형상”23)이라는 김홍중(金洪中)의 분석이 설득력을 지닌다면 대중적 ‘실천’으로서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이러한 레짐에 대응할 만한 현 시대의 당위적 체제부터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운 조건에 있는 것이고 여기에서 ‘문학주의’적인 고고한 공간은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차적인 적이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아방가르드는 더 어려운 것이다.
4.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평
하지만 비평은 더 어려운 난관에 봉착해 있다. ‘종언’의 틀을 받아들였을 때 ‘종언’ 이후의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종언’을 인정하고 ‘문학’과 결별하거나, 종언’이 뜬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문학의 정치성을 예증할 작품들을 찾아내는 데 집착하거나 하는 제한된 선택지 사이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물론 ‘종언’ 이후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비평담론을 정립하는 작업이 가장 유의미할 테지만, 이는 간단하지 않다. 한국문학의 ‘비평’ 역시 ‘종언’의 선고를 받은 그 문학체제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종언’ 이후 정치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문학의 존재가 비평적 정당화 작업(Legitimation)을 요구하는지 그것은 아직 확실치 않다.24)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하는 작업은, 문학이 정치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시대의 답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진은영이 시도한 것처럼) 당대문학의 존재론에 필연적으로 정치적 가능성이 배태될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며, 또한 현재 한국문학에 대해서 그러한 전체적인 비평담론은 이제 더이상 성립할 수 없고 개별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읽기로서만 비평의 근거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또한 마냥 회피해서도 안될 것이다. 앞서 김홍중의 분석을 인용한 것처럼 문학의 종언이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의 조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 시대 비평의 근거를 비범한 작품에 대한 비범한 비평을 통해서만 구출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특출한 작품의 출현이라는 ‘행운’에 기대는 것이고, 그런 작품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작품의 정치성을 무리하게 강조하는 방식을 통해 비평의 소진된 생명을 연장시키게 될 터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결국 좁은 문학제도 안에서만 통용되는 글쓰기로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문학에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것이 유난히도 어렵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기 위한 작업이 현재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시대분석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특히 우리의 삶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하는 자본의 세세한 배치에 대한 연구는 더욱 중요하리라 본다. 그런데, 그렇다면 비평은 문학을 위해서 문학을 잠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은영을 비롯한 시인들이 모색하는 ‘아토포스’라는 아방가르드에 동참하는 것이 문학을 사랑하는 비평가로서는 훨씬 행복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시인들에게뿐 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실은 비평가들에게 더욱) 많은, 그리고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문학의 아토포스에 값하는 비평이란 무엇일까.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시인을 독려하고 그 모험의 길에서 함께 고뇌해야 하는가?25) 시인과 함께 그 모험에 동참함으로써 넓은 의미의 시 쓰기에 함께 참여할 것인가? 구체적인 작품 앞에 서 있는 비평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씌어진 시 앞에서 씌어지지 않은 시를 함께 읽어내야 하는가? 시인의 글에서 그 현장의 아우라를 다시 불러내고, 비가시적인 감각의 지도를 가시화하고 복원하는 임무를 맡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랑씨에르처럼 일견 새로워 보이는 예술에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즉 감각의 재분배라는 관점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엄밀하게 판정해야 할 것인가? 랑씨에르가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말레비치(K. Malevich)의 예술과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의 예술 사이에서 새로운 감각성 이면의 정치성을 판별했던 것처럼? 예술과 삶의 동시적 실험을 꾀하는 ‘문학의 아토포스’는 ‘텍스트 읽기’에 머무는 비평활동에 도전하는 것이며, 문단의 장소성을 넘어서 기존의 비평언어에 갇히지 않는 ‘문학’의 장소를 탐색하는 운동이다. 이는 결국 비평가가 자신의 근간인 문학제도 바깥을 사유하고 그것을 비평의 새로운 형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인데, 과연 비평은 이 미지의 문학 안에서 토포스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또한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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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80면. 이하 본문에 면수만 표기.
2) 자크 데리다 『문학의 행위』, 정승훈·진주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53~57면 참조.
3) 한기욱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392면.
4) 이러한 시대 구분은 엄밀한 학문적 근거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주로 ‘97년체제’의 이론틀로 설명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변동에 따른 문학 공론장의 변화를 어림잡아 이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중에서도 최근 더욱 뚜렷해진 변화를 두가지 정도 거칠게 언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여러 사회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자기계발적 주체’ ‘속물적 주체’ ‘잉여적 주체’가 증가하면서 문학을 통해 내면을 성찰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심을 견지하는 태도 자체가 희귀해지고 있다. 둘째, 디지털 매체와 쏘셜 네트워크의 확산으로 인한 기존 매체의 위축을 들 수 있다. 각종 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사라지는 수많은 멘션과 포털싸이트 뉴스(주로 연성화된 뉴스의 형태를 띠면서 사실상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소비되고 있다), 1인 미디어, 웹툰 등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해지면서 활자매체에 최적화되어 있는 문학(특히, ‘고전’이란 이름으로 의무적으로 읽히는 문학이 아닌 당대 한국문학)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
5)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b 2008, 14면 참조.
6)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17면.
7)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253면.
8) 게오르그 루카치 「서사냐 묘사냐: 자연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 예비토의」, 『리얼리즘과 문학』, 최유찬 외 옮김, 지문사 1985, 200~205면; Georg Lukács, “Erzählen oder Beschreiben? Zur Diskussion über Naturalismus und Formalismus,” Werke, Bd. 4, Luchterhand 1971, 216~21면 참조.
9) 『문학의 정치』 17~23면 참조.
10) 같은 책 9면.
11) 백낙청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37면.
12) 김성호 「문학의 정치와 정치적 보편성—특집을 마련하며」, 『크리티카』 4호(2010) 16면.
13) 여기에서 이러한 시도들을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다. ‘시와 정치’ 논쟁의 행로를 세심하게 정리한 이찬의 「2000년대 한국문학 비평의 첨예한 성좌들」(『실천문학』 2010년 여름호), 또 이러한 논쟁의 소진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정한아의 「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 ‘시의 정치’ 논쟁에 대한 프래그머틱한 부기」(『상허학보』 35집, 2012)가 참조점을 제공한다.
14)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옮김, b 2006, 47면 참조.
15) 「서사냐 묘사냐」 186~87면; Lukács, “Erzählen oder Beschreiben?” 204~205면 참조.
16) 이는 알키비아데스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바친 기묘한 ‘찬사’인 ‘아토포스’를 롤랑 바르뜨에 기대어 정치적 개념으로 다시 읽어낸 것이다. ‘아토포스’는 진은영의 설명대로 그리스어에서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 ‘a’와 ‘topos’(장소)가 합쳐진 단어로 우리말로는 ‘비장소성’으로 옮길 수 있다. 원래 소크라테스를 이르는 별칭으로서, ‘낯설고’ ‘비정상적’이며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토포스를 바르뜨는 연인의 담론으로 새롭게 번역했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이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김희영 옮김, 동문선 2004, 60면) 사랑의 대상은 유일무이하며 분류될 수도 규정될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것은 그 대상의 본성이 아니라 사랑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창성의 진짜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이다.”(같은 책 62면)
17)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최성만 옮김, 지만지 2013, 120면.
18) 『근대문학의 종언』 45면.
19) 같은 책 49면.
20)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310면 참조.
21) Odo Marquard, “Gesamtkunstwerk und Identitätssystem,” In: Szeemann Harald, Der Hang zum Gesamtkunstwerk, Sauerländer Verlag 1983, 40~49면 참조; Odo Marquard, “Der Schritt in die Kunst. Über Schiller und Heidegger,” In: Martin Heidegger, Übungen für Anfänger. Schillers Briefe ü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 Deutsche Schillergesellschaft 2005, 191~206면 참조.
22) Eva Geulen, Das Ende der Kunst, Suhrkamp 2002, 33~34면 참조.
23)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31면.
24)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비평작업이 문화산업 속에서 생산된 작품의 품질을 인증해주고 소비자-독자를 위한 상품평을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러한 비평조차 미래가 밝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인터넷서점이자 쇼핑몰인 아마존은 ‘서평’이란 제도를 통해서 책을 팔아왔는데 최근에는 ‘서평’과 ‘별점’이 마케팅에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서평가들을 모두 해고했다. 아마존은 대신 고객의 책 취향에 따라 책을 추천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맞춤 추천 시스템을 개발했다.(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케네스 쿠키어 『빅 데이터가 만드는 세상』, 이지연 옮김, 21세기북스 2013, 97~101면)
25)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