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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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신예소설가특선

 

양선형

1990년 광주 출생. 201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tolevinas@naver.com

 

 

 

수은의 시도

 

 

관념은 조금 빈 잔이고 모서리가 있다.1)

 

그는 간다. 대개의 환영은 피로 때문이다. 세계란 자아의 암실이다. 암실을 향한 환영 폭파다. 그는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환영을 내버려둔다. 이윽고 그것을 어기적거리듯 쫓아간다. 여하간 그는 오랫동안 걸었다. 눈 속을, 눈에 파묻힌 벌판을, 은막에 휩싸인 지붕 위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양쪽 무릎이 눈밭 아래로 푹푹 빠져든다. 눈이 햇빛을 튕겨낸다. 빛은 날카롭다. 쉬이 아물지 않는 빛이다. 지칠 때면 멈춰서 눈을 파헤친다.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한다. 깡마른 억새들이 손아귀로 줄줄이 딸려온다. 날씨는 쾌청하다. 어젯밤 내린 폭설이 무색할 정도다. 그는 자신이 어느 지대를 통과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유리컵 안에 몇개의 얼음덩어리가 있다. 그는 상상한다. 컵이 놓여 있는 장소는 침대 옆의 나이트테이블이다. 유리컵의 오른쪽 측면으로 간이 스탠드가 비치되어 있다. 조명을 받은 유리컵이 둥글게 번쩍거린다. 얼음은 환하고 투명하다. 내부로 자잘한 균열이 비친다. 기포들이 있다. 물과 함께 그대로 응결된 기포들이다. 얼음이 사라지기 전에 그녀가 온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다.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빠득빠득 얼음을 씹고 있으면 마치 부러진 이빨을 씹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다. 실내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간혹 취한 자들의 음성이 창문에 쳐진 린넨 커튼을 천천히 흔들어댈 따름이다.

곧 그는 눈 속에 매장되어 있는 한채의 컨테이너를 발굴하게 된다. 과정은 이러하다. 그는 눈으로 이루어진 언덕을 본다. 손을 뻗는다. 눈을 쥔다. 입에 넣는다. 갈증이 가신다. 그는 이러한 행동을 수차례 되풀이한다. 눈 속에서 그가 처음 발견한 것은 비죽 튀어나온 컨테이너의 문고리다. 그는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컨테이너 상단에 쌓인 눈뭉치가 우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문은 잠겨 있지 않다. 그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선다. 처음에 그곳은 어둡다. 그는 열린 문 앞에 서서 제 눈이 침침한 어둠에 길들여지길 기다리고 있다. 컨테이너 안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는 마치 가래를 삼킬 때 나는 꼴깍거리는 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는 걸음을 옮긴다. 컨테이너 안에 누군가 있고, 그는 아직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

 

그는 차량사고를 겪었다. 그는 그 사고가 어젯밤의 기억인지, 좀더 이전에 벌어졌는지, 아니면 불과 몇시간 전의 일이었는지 좀처럼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사고가 있었다. 그것은 홀연한 기억이었다. 사실 최초로 떠오르는 기억이란 눈발을 거스르며 삐걱삐걱 움직이던 와이퍼의 모습이다. 이때 그는 핸들에 손을 얹은 채 구불거리는 도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고산지로 이어진 국도였다. 와이퍼가 눈에 덮인 차창을 긁어대고 있었다. 더디고 안쓰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눈발 사이로 불쑥 삐져나온 경고 표지판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스팔트를 점령한 폭설은 마침내 제 내부를 주파하려는 모든 의지를 묵살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와이퍼가 우두커니 멈췄다. 눈발이 중복되고 있었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고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코를 골고 있었다. 미약하고 가느다란 음향이었다. 그녀는 잠만 잤다. 출발할 당시부터. 좀처럼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에 슬쩍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허벅지가 축축했다. 긴 머리칼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차는 눈 속에 고립된 담뱃갑이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눈발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발이 시야의 여남은 간격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뜬금없이 그는 조난당한 처지였던 것이다.

코골이 사이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데 분명치는 않은 말이었다. 귓바퀴에 걸리지 않는 말, 주르르 미끄러지는 말, 예컨대 그것은 말이 아니라 말들의 잇새에서 사그라지는 거품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가로 얼굴을 가져다댔다. 말들을 해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는 폭설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눈에 파묻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금의 처지를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오래도록 잠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이 그칠 때까지 잠의 세계에서 되돌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무언가를 속삭이고, 그녀와 입을 맞대고, 그녀가 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그것은 이상한 욕망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꿈속의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혼미한 꿈속을 떠다니는 그녀의 익사체와 말이다.

곧 그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차량을 출발시켰다. 눈발이 허공을 나뒹굴고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차량이 굉음을 냈다. 그는 백미러를 쳐다봤다. 눈 사이로 수렁처럼 아스팔트가 고여 있었다. 눈발이 낙서처럼 이지러졌다. 비좁은 시야가 망원경을 들이대듯 확대되어 보였다. 그는 핸들을 내팽개쳤다. 가드레일이었다. 충돌한 차량이 쨍한 소리를 냈다. 엔진이 팽창하고 있었다. 바퀴가 공회전을 했고, 차량이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했다. 그는 사고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반경에 포함된 눈발이 순식간에 연소되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그는 깨어진 파편이 그녀의 얼굴 위로 무수히 박혀드는 광경을 보았다. 앞쪽 유리가 잘게 부서져 있었다. 유리가 눈발에 반향하며 예리하게 반짝거렸다. 그녀가 부서진 유리창에 얼굴을 짓이기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

 

그는 주저하듯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선다. 눈은 재빨리 녹아버린다. 그는 쭈뼛거린다. 불안하게 발을 구른다. 꾸벅 인사를 한다. 안쪽을 향해 말이다. 내부는 캄캄하게 닫혀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텅텅 소리를 내는 컨테이너 바닥이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모종판 같다. 그는 멈춘다. 지금 그는 망설이는 사람이고, 망설이자마자 컨테이너의 어둠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다.

컨테이너 중앙에 구식 석유난로가 놓여 있다. 방열판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온다. 쇠약하고 앙상한 빛이다. 그는 석유난로 앞에 선다. 바깥과의 기온차로 인해 온몸이 화끈거린다. 그는 달아오른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그는 곧 이곳이 컨테이너를 개조한 가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둠이 헐거운 터번처럼 벗겨져간다. 저편에서 신음이 들린다. 컨테이너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줄곧 귓속을 파고들던 음성이다. 그는 신음의 정체를 확인할 용기가 없다. 이내 그는 난로가 발하는 빛 안에 잠시 머무른다.

오른편 벽으로 철제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에는 화재감시초소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한 필체로 새겨져 있다. 못으로, 아니면 철심으로, 조악하게 표기된 글씨다. 신빙성이 없다. 실내에서 후텁지근한 유황 냄새가 난다. 그는 기침을 한다. 은은한 난로의 미광이 호롱처럼 컨테이너 내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신음이 들려오는 방향을 주시한다. 빛은 아직 신음의 자리까지 권역을 넓히지 못한 채 어느 선상에서 멀겋게 멀어 있다. 그는 코트를 벗는다.

그는 신음을 향해 전진한다. 지지부진하게, 거의 표가 나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그러나 그것은 끈질긴 걸음걸이다. 끈질기다 못해 집요한 걸음걸이에 가깝다. 신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다. 그는 신음의 주인에게 사과를 할 작정이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사고가 났어요, 전화를 좀 쓸 수 있겠습니까, 어딘가 아프신 모양인데, 등등.

그는 소파에 누워 있다 천장의 형광등은 점점이 그을린 얼룩이 있고 타버린 구리선이 통째로 내다보인다 어쨌든 그는 누워 있고 허물어진 자세 그대로 천장의 어느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는 갑작스레 깨어난 자다 누군가에 의해 한꺼번에 주어진 자다 무성의하고 게으른 자다 그는 의지가 없고 계속해서 복기할 기억이 없고 그러한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없고 그런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괴롭지 않다 좀처럼 괴로워지지 않는다 소파 측면으로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곁눈질하면 화면을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은 며칠째 같은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색색으로 시끄러운 나비들의 영상이다 궁지와 불만의 반짝이는 분말들인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있다 나는 유령처럼 있지 않고 환각처럼 있지 않고 그러한 것들에 항변하듯이 있다 유령처럼 있는 것 환각처럼 있는 것 허구의 영점인 것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가면에 불과하다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 안에서 그는 바닥으로부터 한뼘가량 떨어져 있는 그녀의 다리를 본다. 달랑거리는 다리를 본다. 하늘거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백랍의 개체들을 본다. 넘어진 의자, 칼집이 난 침대보, 팽창하는 커튼의 시야를 본다. 층층이 반복되는 계단들, 층간에서 사선으로 몰아치는 눈발을 본다. 기억의 진위를 판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기억의 계단을 기어오르는 일은 중요하다. 그는 교살된 벼랑을 본다. 그녀의 입 밖으로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는 혓바닥을 본다. 그는 계단을 오르지 않는다. 다만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계단의 높이를 측량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긴장한다. 손바닥이 젖는다. 땀이 밴 셔츠가 그의 가슴을 갑갑하게 옭아매고 있다. 호흡을 가다듬을수록 그에 상응하는 열기가 기도로 밀려든다. 그는 복도를 걸어가고 손안의 열쇠를 틀어쥐고 객실 문을 열고 낯선 객실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먼지가 없는 객실이다 객실은 비어 있다 벽시계가 걸려 있다 침대가 가로놓여 있다 침대 옆으로 나이트테이블이 있다 벽걸이 텔레비전이 있다 라디오가 있고 화장대가 있다 냉장고를 열면 비린 냄새가 나고 홀쭉한 유리병에 담긴 음료수가 삐뚜름히 넘어져 있다 화장실에선 난데없이 변기가 깨져 있다 쪼개진 변기 안쪽으로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 그는 프런트로 전화를 건다 응답이 없다 수화기에서 메아리가 들린다 박살난 자신의 목소리다

그는 놀란다. 컨테이너 끄트머리에 매트리스가 놓여 있다. 매트리스는 허름하다. 노인이 있다. 매트리스 안쪽으로부터 뾰족하게 곤두선 스프링들이 드러누운 노인의 신체를 성긴 철조망처럼 에워싸고 있다. 노인은 매트리스에 몸을 부려놓은 채 제 눈을 감았다 뜬다. 연이어 그렇게 한다. 꺼진 눈알이 검붉게 덩어리져 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노인이다. 어떻게 보면 변사체 같다. 지속되는 신음만이 노인의 간헐적인 생존을 전해올 따름이다. 고랑이 난 주름마다 땀이 맺혀 있고, 온몸에서 흘러나온 땀이 매트리스 전체를 누리끼리한 빛깔로 적시고 있다. 노인은 가르랑거린다. 노인은 수척하다. 노인은 병든 해마 같다. 오염된 아스파라거스 같다. 썩어버린 오렌지 같다. 망가진 아코디언 같다. 쪼그라든 입매가 자루를 봉한 매듭처럼 비죽 튀어나와 있다. 벌어진 입속으로 잇몸이 보인다. 파랗게 헐어버린 잇몸이다. 그는 노인의 신체를 차례차례 살핀다. 얼굴에서부터 어깨, 튀어나온 흉골, 음흉하게 부어오른 주머니, 헤아릴 수 없는 각도로 휘어진 팔꿈치와 무릎, 점점이 피어난 흑반들, 꼿꼿하게 곤두선 발목을. 그럼에도 노인은 임박한 죽음을 향해 쉬이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는 매트리스 모서리에 걸터앉는다. 노인은 발가벗은 채고, 자신의 발가벗음에 아무런 자각이 없는 듯하다.

언젠가 그는 지쳐 있다 그는 서 있고 아무도 그가 그곳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한손에 우산을 짚고 있다 고깔 모양의 길쭉한 장우산이다 그는 우산을 휘두른다 그는 목적이 없다 원한이 없다 그가 벌이는 도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 그를 둘러싼 모호한 분위기가 그의 정체를 평평하게 잠재우고 있는 것이다 정면에서 열차가 지나간다 예컨대 그는 뎅뎅 소리를 내는 건널목 앞에 서 있다 언제나 환영인 철교 앞에 서 있다 그는 들어오는 열차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지 않고 대신 뒤로 두 걸음 옆으로 세 걸음 비틀거린다 그런 다음 그는 울고 있다 그는 생각한다 나는 열차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지만 어쩌면 열차와 더불어 울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그는 열차가 건널목을 완전히 지나칠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제 그는 뾰족한 우산으로 공중을 쑤셔대고 있다 자신이 흘린 눈물이 매우 창피했던 모양이다

눈을 감으면 흐릿한 빛의 잔상이 방열판 모양으로 패어 있다. 노인의 불알이 발갛게 불어 있다. 그는 코트로 노인의 사타구니를 덮어준다. 그는 회상한다. 아침이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는다. 방안으로 틈입한 빛이 희박하게 물결치고 있다. 그녀는 자리에 없다. 이미 외출한 것이다. 드러난 방 안의 풍광이 낯설다. 그는 침대를 정리한다. 베개를 바로 놓고, 구겨진 담요를 서너겹으로 접어 매트리스에 펼쳐놓는다. 나이트테이블에는 여전히 유리컵이 있다. 컵의 상단에 립스틱이 묻어 있다. 물은 증발되고 없다. 그녀가 마셨을 수도 있다. 그는 욕실로 간다. 그가 없는 침실이다. 창문에서 밀려든 햇빛이 점진적으로 강렬해진다. 그것은 길어지고, 그것은 침대가로 이동하고, 그것은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녀가 잠에서 깬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욕실 쪽을 응시한다. 그를 부른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

 

그는 한동안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고 때때로 창밖을 응시한다 객실 안을 익숙한 패턴으로 배회한다 잠을 잔다 그가 잠든 사이 인부들이 다녀간다 혼곤한 의식 속에서 그는 방 안을 바삐 청소하는 인부들을 본다 먼지떨이로 객실 구석구석을 두들기는, 개방된 창문을 힘차게 닫아버리는, 인부들이 다녀가는 시간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결박된 것처럼, 박제된 것처럼, 가위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만류하는 손들에 의해 제자리에 붙들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잠 바깥으로 몇몇 발음들을 흘려보낸다 인부들은 그를 괘념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부들의 모습이란 잠이 생성한 거짓 기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한다 잠에서 깨면 객실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는 그것으로 인부들에 대한 기억이 거짓이 아님을 새삼 자각하게 된다

컨테이너에 이르게 되기까지 그는 하루나절 눈밭을 헤매고 다녔다. 모든 방향이 너른 개활지였으며 막연한 눈밭이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다음부턴 자주 뒤쪽을 돌아봤다. 차량은 홀연히 도드라진 암초처럼 보였다. 가능하다면 무릎 밑을 잘라내고 싶었다. 치아가 딱딱 부딪쳤다. 햇빛이 눈밭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공중으로 튀었다. 얼어붙은 신경 다발이 코트 안쪽에서 소스라치게 불어터지고 있었다.

실신 상태에서 깨어난 뒤 그가 처음으로 확인한 것은 그녀의 생사였다. 조수석이 텅 비어 있었다. 조수석 시트 위로 깨어진 유리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큰 조각부터 자잘한 파편까지 다양했다. 그녀는 이미 차량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오른쪽 차문이 휑하니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서운했다. 나중엔 걱정이 되었다. 그는 차문을 밀었다. 쌓인 눈이 차량의 하부를 집어삼킨 채였다. 눈의 무게로 인해 제법 강하게 힘을 넣어야 했다. 왼쪽 팔뚝에 파편이 박혀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뻗어 파편을 뽑아냈다. 통각이 무뎌진 탓인지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밭은 아득했다.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창가 쪽에 의자를 놓는다 아주 느리게 아주 단속적으로 그것은 제한된 동작이다 그는 그곳에 앉는다 고개를 수직으로 치켜세운다 황혼이 창턱을 기어오른다 어스름과 석양이 반반씩 어우러진 수평선 선상으로 수중 등대와 야광 부표와 만선의 불빛들이 점차 그 아스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노을을 응시한다 하늘은 젖은 바지를 말리는 건조장 같다 포말이 쇠잔한 노을을 난반사하고 있다

이때 태양은 막 적출된 육체 같다

막 적출된 육체가 파랗게 괴사하고 있는 것 같다 암회색 덩어리로, 광물의 형상으로, 실내는 벨벳이 씌워진 어항이다 그는 자연스레 눈을 감고, 자신의 의식이 감추어진 어항 속에 거뭇하게 엉겨 있는 해초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이미 그가 따라붙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광막한 눈밭을 앞질러 가서, 벌써 구조를 요청했는지도, 구조대를 대동한 채 현장으로 되돌아오는 중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그것을 지연시키고 싶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싶었다. 망연한 태도로, 벌판을 뒤덮은 눈이 사라지기를, 마비된 시간이 순차적으로 해제되고, 벌판의 민낯, 동파된 그녀의 육체가 드러나기를, 그 순간을 기다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구태여 그녀를 찾아 눈밭을 방황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주어진 전방을 통과했을 따름이었다.

얼마 후 정신이 돌아온다 그는 인부들을 목격한다 인부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인부들이 객실을 들쑤시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잠을 물리치지 못한다 객실 중앙에 석쇠를 데우는 무쇠향로가 놓여 있다 향로를 둘러싼 인부들은 무언가 비밀스러운 작전을 골똘히 모의하는 중이다 이윽고 인부들 중 하나가 향로의 수북한 잿더미 속에서 인두 한자루를 뽑아든다 인두는 발갛게 달궈져 있고 끄트머리가 갈퀴 모양으로 휘어 있다 인부들이 인두를 서로 바꿔들며 그의 허벅지를 갈아엎기 시작한다 마치 써레질을 하듯 말이다 허벅지에 고랑이 파이고 고랑의 벼랑으로 개흙처럼 뭉친 살점들이 뭉텅뭉텅 떨어진다 그럼에도 그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부들은 능숙한 고문기술자들 같다 악몽의 숙련된 설계자들 같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에서 배어나는 누린내가 객실 내부를 장악한다 지금 그는 자신의 잠이 영구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란다 고문당한 육체가 스스로 개입할 수 없는 광물 태양 아래서 여전히 상연되기를 바란다 무한히 도래하지 않을 폭력의 거짓 기억으로서 말이다

공중에서 수십의 헬기들이 공중전을 벌이고 있었다. 탄환이 번쩍거렸고, 격추된 헬기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 눈밭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헬기들의 전투가 눈밭이 불러일으킨 신기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눈밭에 엎드렸다. 엎드려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환영이 지나갈 때까지, 환영이 소진될 때까지, 그것은 한벌의 잔상을 소각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였다. 폭음이 들리지 않았다.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밭은 잠잠했다. 그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환영이 나타났다. 환영이 눈밭 위를 가볍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마치 다리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말린 무화과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녀가 아찔한 걸음으로 그를 스쳐갔다. 그는 짐짓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

 

화재감시초소 현판 아래에는 노인이 쓰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상이 있다. 책상에는 전화기가 있고, 전화기를 중심으로 철이 된 파일들이 혼잡하게 뒤엉켜 있다. 그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어올린다. 수화기 밖은 고요하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난로 앞으로 돌아온다. 그는 얼마간 이 컨테이너에 머무를 작정이다. 이곳은 따뜻하며, 아늑하고, 병상에 누운 노인을 제외하면 모든 세간이 꽤나 잘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방열판을 주시한다. 방열판은 새까맣다. 그을음 때문이다. 난로가 기침을 한다. 방열판 틈새로 거뭇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는 주입구를 연다. 석유를 붓는다. 석유가 구멍 테두리로 줄줄 샌다. 연기가 그친다. 난로가 딸깍거린다. 그는 기름통을 놓아두고 노인에게로 간다. 노인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아주 긴 시간 이곳에 거주해왔던 것 같다. 아마 생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겠지. 그의 추측이다. 이번에 그는 의자를 노인 앞으로 끌어다놓는다. 죽음이 노인을 앞질러간다. 노인은 죽음과 겹쳐지지 않는다. 그는 노인의 살갗을 힘주어 꼬집어본다. 살갗이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난다. 이번에 그는 노인을 반대로 뒤집는다. 노인은 저항하거나 뒤척이지 않는다. 엉덩이가 거무스름한 얼룩으로 절어 있다. 그는 손가락으로 노인을 헤집어본다. 영락없이 포로의 병세를 검진하는 모양새다.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고통은 퇴화한다. 소리만 남는다. 그는 헝겊으로 노인의 엉덩이를 닦아준다. 헝겊이 엉덩이에 눌어붙는다. 판판하게 짜부라진 엉덩이, 빨래판을 닮은 엉덩이다. 반점들이 보인다. 반점 안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돌기가 잔뜩 돋아나 있다. 그는 손톱을 사용해 돌기를 하나씩 터트려본다. 돌기들이 툭툭 째진다. 신음은 높낮이를 갖지 않은 채 단조로운 계기로 지속된다. 헛헛하게 드러난 항문이 물집으로 부풀어 있다. 엉덩이에 말라붙은 얼룩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번에 그는 헝겊으로 노인의 온몸을 세차게 문지른다. 마치 간병인처럼 말이다.

노인을 간병하는 동안 시간이 간다. 그는 컨테이너를 떠나지 않고, 책상에서 난로, 난로에서 노인 사이를 바삐 왕래한다. 한번은 난로 앞에서 기지개를 켠다. 그런 자세를 취한다. 혹은 컨테이너 내벽을 이리저리 더듬거린다. 그치지 않고 컨테이너를 배회하는 그는 뭔가 뒤가 구린 사람 같다. 초조한 사람 같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다. 때로 그는 한자리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 실내를 되돌아본다. 그리고는 다시금 노인 앞으로 간다. 맴돌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컨테이너 안에서 그가 그리고 있는 그러한 궤적은 그가 앞으로 체험하게 될 시간의 이미지와도 닮아 있다. 예컨대 그는 컨테이너가 어딘가 착륙할 수 없는 곳으로 이송되는 중이라고 상상한다. 어느 시기가 되면 문을 연다. 밖으로 나선다. 들판이 질펀하게 젖어 있다. 기울어진 억새들이 컨테이너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허리가 외로 꺾인, 눅눅한 억새들이다.

는 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의식을 잃은 장소에서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 다시는 발견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는 어느 중국식 사당의 신상(神像)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장군이 든 언월도가 그의 길고 굽은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그는 한번 죽었던 장소를 지난다 거리에서 그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난다 자신과 닮은 사람은 좀처럼 넘겨지지 않는 전봇대와 씨름을 하고 있다 결착이 나지 않는 싸움이다 기억은 쌓이지 않고 나부끼며 먼 곳에서 재차 쌓인다 시간이 의식을 횡령하고 있는 것이다 생생하게 그는 죽었다 그는 지났던 장소를 다시 지난다 혹은 그는 매 순간 자신이라는 머리맡에서 제 임종을 지키고 있다

그는 휘발되는 의식 속에서 서서히 출현하는 광선의 차창들을 본다 광경이 궤멸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한 현실이 세계 시계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를 덮친다 덮쳐서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워버린다 옆구리에 총구를 들이민다 너는 가야 한다 그는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우리의 타깃이다 그는 속삭임에 이끌린다 얼마 후 그는 낯선 곳에 있다 낯선 곳에는 검은 두건이 씌워진 타깃이 백여명이나 된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비슷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두건을 벗기면 그는 다시 중국식 사당이다 언월도를 휘두르는 맹인 장군의 칼날에 사당의 공중이 휙휙 잘려나간다 잘려나가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칼자루 끝에서 딸랑거리는 방울만이 장군의 무력한 용맹을 표현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컨테이너를 떠나지 않는다. 노인에게 말을 건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기억은 날조된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선다. 인기척이 없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방 안은 적막하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찌개가 타고 있다. 그는 침실로 향한다. 침실에서 그는 그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는 침실을 나와 가스레인지 곁으로 간다. 가스레인지를 끄고, 냄비에 차가운 물을 붓는다. 냄비 안에서 증기가 매캐하게 솟아오른다. 그는 시체를 업는다. 집을 나선다. 무릎이 후들거린다. 차량에 도착한 그는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를 싣는다. 그는 생각한다. 눈이 쏟아지겠군. 눈발이 대기를 허정거린다. 내린 지 얼마 안된, 성긴 눈발이다. 그녀의 어깨에도 눈이 묻어 있다. 그는 차를 타고 달린다. 몇차례 신호를 위반한 다음부턴 신호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차량이 깜깜한 시야를 굴착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다. 눈발이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철문에서 매트리스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내부는 기다란 수도관을 연상시킨다. 이번에 매트리스에 앉아 있는 이는 그녀다. 그런 것 같다. 문이 열린다. 그녀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본다. 찰칵 소리가 들린다. 실내가 둔중하게 가라앉는다. 그가 입구를 등지며 안쪽을 향해 다가온다.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다. 그녀가 몸을 낮춘다. 매트리스가 출렁거린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뜬다. 회백색 그림자가, 그림자를 둘러싼 어둠이, 음영을 달리하듯 일렁거린다. 그가 난로 앞까지 도달한다. 난로가 그의 얼굴을 언뜻 비춘다. 얼굴이 휑하니 드러난다. 흥건한 얼굴, 반죽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이다. 그녀가 아는 얼굴이 아니다. 수척하게 질린 낯빛이 며칠을 굶은 사람 같다.

그는 갑작스레 중얼, 중얼거린다. 난로 앞에서 말이다. 난로를 향해 뭔가를 지껄이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의 모습이다.

그녀가 전방을 향해 나이프를 움켜쥔다. 나이프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그는 아직 뒷모습을 노출한 채 난로를 바라보고 서 있다. 그의 목소리가 비실비실 졸아든다. 뭔가 억울한 심경을 표출하고 있는 듯하다. 난로를 향해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나이프를 앞세운 그녀가 그의 등 뒤로 접근한다. 난로가 들썩거린다. 그가 난로를 걷어찬다. 그러면서 허공으로 멱살을 잡는 시늉을 한다.

그녀가 나이프를 치켜든다. 그의 목소리가 격양되고 있다. 나이프가 그의 뒷목을 부드럽게 꿰뚫는다. 침착하고 연속적인 동작이다. 그가 쓰러지고, 나이프가 꽂힌 틈새로 맑은 피가 콸콸 쏟아진다. 그녀가 그의 뒷목에서 나이프를 빼낸다. 물길이 범람한다. 사망 직전까지 그는 제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억울한 심사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모양이다. 피가 컨테이너 내벽으로 튄다. 그녀가 난로 주변을 둥글게 서성거린다. 지금 맥없이 고꾸라진 그의 사체는 예컨대 난로의 정면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다. 뒷목에 파인 세로줄 상처에서 새빨간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다시.

그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선다. 내부는 검고, 밖은 밤새 쌓인 눈으로 하얗게 멀어 있다. 마치 수도관을 따라 걷는 기분이다. 실내는 싸늘하다. 뭔가가 발에 치인다. 난로다. 녹슨 석유난로 한대가 식은 채로 엎어져 있다. 그는 고개를 쳐든다. 화재감시초소라고 적힌 문패 아래로 책상이 있는데, 책상 위에는 철이 된 파일들이 고의적으로 뒤섞여 있다. 고의적으로. 그는 책상에서 몇몇 파일을 잡아챈다. 그리고 그것을 무성의하게 넘겨본다. 휘갈긴 글씨들이 보인다. 대개 의미가 누락된, 마치 미친 사람의 중얼거림을 그대로 채록해놓은 것 같은 내용들이다. 파일을 읽는 그의 입술로 입김이 무연하게 흩어져간다.

매트리스에 그녀가 누워 있다. 잠든 채로 말이다. 그는 매트리스 발치로 다가선다. 그녀가 허밍을 한다. 소리가 귀에 익다. 마치 그러한 노래를 들어본 전력이 있는 듯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처음 만난 여자다. 그는 손바닥으로 매트리스 모서리를 짚은 채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기억이 매트리스 아래로 줄줄 엎질러진다. 기억은 그녀의 허밍에서 그녀라는 인물을 솎아내지 못한다. 허밍이 그치지 않는다. 이미 그쳤는지도 모른다. 메아리가 귓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허밍은 느슨하고 휴지부가 없다. 외벽이며 벼랑을 미끈하게 타넘는 뱀의 리듬처럼 말이다.

어느새 그는 늘씬하게 벼려진 단검 한자루를 들고 있다. 날붙이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그녀의 가슴이 미약하게 동요한다. 그는 그녀를 향해 단검을 겨눈다. 손목을 휘젓는다. 날붙이가 허공을 돌아나간다. 이내 그는 단검 손잡이를 치켜세운다. 날붙이가 그녀의 가슴을 관통한다. 그녀가 매트리스에서 몸을 뒤친다. 메아리가 멎는다. 뱀의 허리가 댕강 잘려버린다. 매트리스가 화염을 분사하는 구덩이처럼 질펀하게 꺼져들기 시작한다. 그는 단검을 내버려두고 난로를 향해 돌아선다. 이때 그녀의 중심에서 그녀를 영원한 잠 속으로 인도하고 있는 이 단검이란, 이미 그녀가 단 한번 난로 앞에서 그를 살해하는 데 사용한 바 있던 바로 그 나이프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다시.

컨테이너는 감감하다. 찰칵 소리가 들린다. 문틈이 푸르스름하게 벌어진다. 찰칵 소리가 들린다. 암전이다. 철문이 열린다. 밖은 퍼붓는 눈의 환란으로 어지럽다. 노인이 굼뜬 동작으로 석유난로가 있는 컨테이너 중앙으로 다가온다. 작업복 군데군데가 눈의 입자로 인해 회칠된 것처럼 지워져 있다. 지금 컨테이너는 텅 비어 있다. 살해된 그도, 매트리스에서 최후를 맞이한 그녀도 이곳에는 없다. 난로와 책상과 문패와 매트리스, 가장 단순하게 구획된 공간, 고독, 유예, 노인만이 이곳에 존재할 따름이다. 노인은 생각한다. 난로에 넣을 기름이 떨어져가는군. 어서 기름을 보충해야지. 그리고 책상 앞에 앉는다. 뭔가를 휘갈겨 쓴다. 전화를 건다. 수화기 밖은 먹통이다.

폭설 때문이다. 노인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비실비실 매트리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매트리스에 길게 몸을 부려놓은 노인은 갑작스레 온몸을 덮친 신열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마가 홧홧하게 부푼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쿵쿵 발을 구르고 있는 것 같다. 의식이 수챗구멍 아래로 빨려드는 것 같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노인은 서서히 고갈되고 있는 난로를 본다. 난로의 빛, 난로를 가운데 두고 친친 덧씌워지고 있는 장막들, 난로가 한점 윤곽으로 어렴풋해지고, 이내 빛을 잃은 그것은 차갑고 무감한 납빛 광물처럼 보인다.

재차 방이다. 나이트테이블에 유리컵이 있고, 간이 스탠드가 있고, 이때 유리컵은 스스로 광채를 발산하는 은빛 크리스털처럼 보인다. 스탠드 조명이 동그란 테두리를 형성하며 제자리에 정박해 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조명 안으로 들어서서는 나이트테이블 바로 앞에 우두커니 멈춘다. 그림자는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방 안의 정황은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다. 컵 안의 얼음들로 말할 것 같으면 아이스큐브 특유의 가지런한 형태가 거의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모습이다. 얼음 표면에 성에가 끼어 있고, 성에는 유리컵과 달리 조명에 반향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조명을 배척하듯이, 조명을 차단하려는 것처럼, 조명과 무관하게 탁하고 희부연 색조를 띠고 있다.

그림자가 뻗어드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그곳엔 그녀가 서 있고, 그녀는 손안의 단검으로 제 목을 겨눈 채 저편 커튼 밖을 응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그대로 있다. 가만히 있다. 그녀는 불활성이다. 정지된 자세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제멋대로 떠내려간다.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물길처럼. 그녀는 녹슬어 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막 주조된 동상 같다. 산패된 부식철판 같다. 낙차(落)를 얻어맞는 광물의 육체 같다. 조도의 차이, 혹은 시간의 차이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림자가 매섭게 회전한다. 수은주가 그림자의 중심에서 수직으로 자라난다. 던져진 찌처럼 말이다. 그것은 투명하다. 눈금은 멈춰 있다. 떨고 있다. 날붙이는 극점에 매달린 나뭇잎 같다. 룰렛으로 날붙이들이 척척 꽂힌다. 원판이다. 날붙이들이 빙빙 돌아간다. 그녀는 자신을 꿰뚫지 못한다. 손아귀를 벗어난 단검이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그녀의 입이 벌어진다. 둥근 조명이 수선스레 흔들리고, 어느새 그녀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움켜쥐고 있다. 용해된 얼굴을 화농처럼 모아들고 있는 것이다.

다시.

유리컵 표면으로 물방울이 맺히고, 물방울들은 유리컵에 투사된 빛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그가 커튼을 걷는다. 창밖은 밤, 눈이 내리고 있다. 먼 지역에서 노인이 죽어간다. 그는 나지막하게 쓰러지고 있는 노인의 호흡을 상상한다. 아니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간다. 얼음은 언제부턴가 더이상 녹지 않는다. 난로의 연료가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손바닥으로 노인의 목을 감아쥔다. 노인은 그제야 자신의 목을 조여드는 그의 손길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 소리, 낄낄거리는 소리, 속삭이다 “그만!” 하는 소리, 낮게 우물거리는 소리 등등이 두서없이 울린다. 정황은 불분명하다. 불이 켜진다. 그는 바닥에서 한뼘가량 떨어진 그녀의 다리를 본다. 전선으로 목을 맨 그녀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갈변된 혀가 시들어버린 풀잎처럼 오그라들어 있다. 그는 단검을 공중에 휘두른다. 단검이 전선을 끊는다.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힘없이 낙하한다. 이제 그는 그녀를 거칠게 흔들고 있다.

또는 그녀는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다. 창밖으로 눈발이 일정한 속도로 떨어진다. 눈발 사이로 가로등이 있다. 가로등 주위에서 눈발은 좀더 빽빽하며 좀더 혼란스럽게 나부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리 도처에 오목하게 파인 자리들이 있고, 하향하는 눈발이 그러한 공백을 평탄하게 메워버리고 있다. 가로등 아래서 누군가 창문 쪽을 쳐다보는데, 시야를 휩쓸고 있는 눈발로 인해 그 인상이 확실치는 않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든다. 가로등 밑의 그는 여태 뻣뻣한 포즈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는 생각한다. 저 여자는 누굴까. 저 여자는 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걸까. 이상한 여자다. 모르는 척을 해야겠다. 그는 얼른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둬들인다. 그녀는 생각한다. 사람을 착각했군. 성급했어. 반가운 마음이 너무 앞섰던 모양이야. 이윽고 그녀는 창문을 닫는다. 커튼을 친다. 그는 다시 창문 쪽을 올려다본다. 멍하니 본다. 그리워하듯 본다. 마치 그러한 시선만으로 창에 드리워진 커튼을 벗겨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눈발이 빛의 투망 속을 뒹굴고, 정갈하게 쌓여가면서, 그는 이내 눈에 의해 발이 묶이고 만다. 그는 가로등 아래를 떠나지 않는다. 폭설이 정황의 면면을 백색으로 밀봉하고 있다.

 

*

 

눈의 지평선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숨진 채였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검지로 쿡 찔렀다. 그의 다리가 핸들 아래에서 잘려 있었다. 그녀는 놀라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어젯밤 그는 마구잡이로 가드레일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졸지에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앉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차량에서 탈출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정면으로 눈의 샛길이 생겼다. 샛길 틈새로 억새들이 보였고, 억새들은 무량하게 뒤덮인 눈의 무게로 인해 말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앞만 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전방을 향해. 추위로 인해 온몸이 둔화되어 있었다. 기지개를 켜는 일도, 허리를 곧추세우는 일도, 걷는 일을 제외한 어떤 다른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나는 곧 이대로 죽으리라, 그런 생각을 했다. 눈에 파묻힌 채로. 눈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걸음이 의식을 비껴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하나의 얼음덩어리를 만들었다. 얼음을 삼키면 찬 기운이 몸 안으로 퍼진다. 동심원을 그리면서, 게으르게 번지는 물감처럼,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손끝이 송곳처럼 창백해진다. 그녀는 빙판에 얼굴을 비춰본다. 빙판은 유려하다. 몇몇 칼날들이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그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해변에서 몇개의 작은 돌들을 줍는다 줍고 싶은 돌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돌 반질거리고 모서리가 닳아 있는 돌 그것들은 엇비슷한 돌멩이들 사이에서도 꽤나 신중하게 선별된 것들이다 그는 객실에 도착한다 돌멩이들을 객실 화장대 위에 펼쳐놓는다 그는 말한다 이것이 광물 태양이다 책상 위에 펼쳐진 돌멩이는 한줌이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는 흩어진 돌멩이들을 내려다보며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돌들은 제각기 암영이 다르고 반점이 있으며 불투명한 빛깔이다 그는 분말 펜슬을 꺼내 돌멩이들 사이를 잇는 선분을 긋는다 돌멩이들을 숨긴다 돌 없는 선분이 화장대 위를 무질서하게 가로지르고 있다 그는 하나씩의 선분을 손가락으로 쓱쓱 지운다 그리고 처음처럼 돌멩이들을 펼쳐놓는다 그는 제 필체를 다 써버릴 때까지 이러한 놀이를 되풀이한다

하늘이 제 가사를 잿빛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태양이 먹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이때 그녀는 눈 속에 다리를 묻은 채 지평선을 향해 던져지는 어스름을 망망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발을 뗄 기운이 없었다. 결빙된 눈의 입자들이 어스름 아래서 차츰 뾰족해지고 있었다.

어스름이 지평선 근처에서 점으로 모아졌는데, 누군가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입김이 누군가의 안면을 흐릿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뻤다. 소리를 쳤다. 누군가가 방향을 틀어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의 일직선으로, 쇄빙선처럼, 간격들을 한보에 건너뛰면서, 그의 걸음에 속력이 붙고 있었다.

그는 한손에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자세가 눈에 띄게 구부정했다. 전체적으로 산악인의 차림새였다. 발그레한 눈두덩 안으로 좁쌀 크기의 눈동자가 괴이하게 박혀 있었다. 산악인이 손짓을 했다. 그리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갈 수 없어요.” 산악인이 대답했다. “따라오시오.” 그녀가 말했다. “업어주세요.” 산악인이 말했다. “그럴 수 없소.” 뒷모습이 하염없이 멀어져갔다. 그녀는 걷고 싶지 않았다. 환영이 전소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물거리는 어스름 안팎에서 말이다.

그는 눈밭으로 간다 새로운 광물을 수집하기 위해서다 스무개가량의 눈덩이를 뭉친 그는 이내 눈밭에 앉아 자신이 만든 눈덩이를 하나씩 간택하고 있다 눈덩이를 향해 허리를 기울인 그의 모습이란 마치 지금 막 먹이를 섭취하려는 쥐의 포즈를 닮아 있다 그는 눈덩이를 깨문다 그는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 지구다 눈덩이 내부에서 피가 번지는데 이내 그의 입가가 흥건하게 젖는다 핏방울이 눈밭으로 뚝뚝 떨어진다 지구는 비릿하게 떨고 있다 그는 자신의 축일을 기념하고 싶다 지구는 원을 그리며 뛴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는 포켓에서 주머니칼 한자루를 꺼내든다 그리고 생물의 가죽을 벗겨내려는 것처럼 눈덩이 표면을 얇게 발라내기 시작한다 회임한 토끼의 보()를 그대로 적출하듯 말이다 그는 생각하듯이 말하고 말하듯이 본다 입을 벌린 공중 지퍼에서 생물의 내장이 끓어오르고 그것은 마치 체외를 향해 익사하는 민물장어를 연상시킨다 그는 생물을 꼬집어 그것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있다.” 산산이 해체된 눈덩이들, 배를 까뒤집은 눈덩이들이 눈밭 여기저기에 홀홀히 나자빠져 있다

컨테이너로 돌아온 산악인은 우선 건빵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실내에서는 극심한 악취가 난다. 그는 컨테이너를 한바퀴 선회한다. 담배를 피운다. 매트리스에 사체 한구가 놓여 있다. 사체는 이미 점액 상태로 부패한 채다. 폐사한 신체의 여러 부위들이 타르에 절은 공업용 수세미처럼 눅진하게 녹아내리고 있다. 머리맡으로 담배꽁초가 촘촘하게 꽂혀 있는 자리가 있는데, 그곳은 산악인이 자주 꽁초를 처리하는 장소로, 그는 그러한 재떨이를 향해 물고 있던 꽁초를 휙 던져버린다. 사체의 정체로 말할 것 같으면 노인이 틀림없고, 그러나 노인은 또한 이미 죽었고, 산화된 지 오래이며, 그러한 사체에서 노인의 개성을 변별하는 일은 매우 난망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난로가 부패를 재촉하고 있다. 화재감시초소라고 적힌 현판 아래로 책상이 있다. 책상에 당일의 일과를 기록한 일지가 있다. 일지에는 그날그날의 감시 현황이 빽빽한 필적으로 적혀 있다. 산악인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눈발이 컨테이너를 매립하고 있다. 누군가 철문을 두들긴다. 그는 철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연다. 문밖엔 아무도 없다. 눈발만 있다. 그는 다시 문을 닫는다. 눈이 그치면 사체를 처리해야지. 그는 생각한다. 냄새가 지독하잖아. 그는 코를 킁킁거린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다. 사체는 평화롭다. 넘치지도 첨벙거리지도 않는다. 산악인은 이내 등산복을 벗는다. 두꺼운 등산복에서 그의 알몸이 표백된 것처럼 빠져나온다. 이제 산악인은 사체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 같다. 그는 매트리스에 눕는다. 꿈 모를 잠, 끈적끈적한 잠, 부드러운 잠이 이어진다.

 

*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노인은 연이어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몸이 가뿐했다. 어제는 밤새 식은땀을 흘렸다. 열병의 빙하가 의식 아래로 수몰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의 일이었다. 들판 어귀로 채 사라지지 않은 눈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퇴색된 눈. 진흙에 절은 눈. 펼쳐진 억새들이 설원의 남은 잔해를 난폭하게 뜯어먹고 있었다. 노인은 억새들의 샛길을 되밟으며 갔다. 발목으로 억새의 쭉정이, 거꾸러진 잡풀 같은 것들이 자꾸만 걸렸다. 도처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들판은 광활하고 괴괴했다. 화재의 기미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인은 안심했다. 그는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들판을 순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 앞으로 차량이 나타났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노인은 차량으로 다가갔다. 차량은 흡사 억새에 둘러싸인 꽃다발처럼 보였다. 칠이 벗겨진 보닛이 녹슬어 있었고, 사고 순간의 처참함을 증명하듯 그것은 한쪽 측면을 향해 심각하게 우그러든 채였다. 또한 차량은 말 그대로 하늘 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벌판에는 어떤 벼랑도, 가드레일도, 차량이 진입할 만한 어떤 협로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인은 처음엔 약간 신기했고, 나중엔 어떤 경악, 지면이 우묵하게 꺼져드는 것 같은 위태로운 심경에 사로잡혔다.

노인은 차창을 들여다봤다. 차량 안에 시신이 있었다. 수분 없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몸이 마치 염장한 미라를 연상시켰다. 이윽고 노인은 억새들 사이에서 가느다란 수수깡 하나를 주웠다. 그것을 차창 안으로 집어넣었다. 수수깡이 시신을 간질이고 있었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이번에 노인은 제 팔을 사용했다. 어깨를 붙들자 시신이 화들짝 놀랐다. 그런 느낌이었다. 먼지의 더께가 얇아지고 있었다. 불거진 관골 밑으로 누렇게 바랜 눈알이 삭힌 굴젓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인은 차량에서 몇발짝 물러났다.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 다시,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는 노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신음이 들린다. 자명한 수순으로, 언제나 지속되는 음향이기도 하다. 노인은 간다. 그리고 매트리스에서 죽어가는 노인을 발견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컨테이너 내부의 광경은 이제까지 무수한 방법으로 묘사되었던 많은 컨테이너들과 큰 차이가 없다. 책상, 난로, 현판, 매트리스가 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다르다. 차이는 쉽사리 밝혀지지 않는다. 가령 철문의 경첩이 미세한 깊이로 닳아 있다. 책상이 벽으로부터 일 밀리미터 가량 앞쪽에 있다. 거짓말이다. 차이는 결정적이지 않다. 혹은 서술되지 않는다. 이번에 노인은 눈을 감고 있다. 부연 어둠 속에 석유난로 한대가 놓여 있다. 백랍이 무너지고 있다. 혼연한 촛불이 컨테이너 내부를 산산이 부서지는 파문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간다. 가서 난로 앞에 선다. 난로는 뜨겁다. 아니면 벌써부터 식어 있다. 그는 방열판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한다. 긴 시간 그는 난로의 강판을 문지르고 있다. 그러한 동작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때 난로는 타버린 환영의 흉상, 영원히 소각되지 않을 미래의 물건이다. 그것을 넘어뜨리고, 컨테이너를 텅 빈 화염 속에 내던지는 일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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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준규 「관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