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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더숲 2014
‘부패’하는 자본주의가 좋은 빵을 만든다
박찬일 朴贊逸
요리사, 작가 chanilpark@naver.com
“자연계에서는 균의 활약을 통해 모든 물질이 흙으로 돌아가고, 살아 있는 온갖 것들의 균형은 이 ‘순환’ 속에서 유지된다. (…) 바로 이런 자연의 섭리를 경제활동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각자의 생을 다하기 위한 배경에 부패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부패하는 경제는 우리 각자의 삶을 온화하고 즐겁게 만들어주고, 인생을 빛나게 해주지 않을까?”(9면)
이 책의 저자 와따나베 이따루(渡邉格)의 이런 인식은 사실, 다수 현대 노동자들의 그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왜 회사는 살찌는데 노동자는 가난해지는가. 세상에 돈은 넘쳐나는데 왜 자기 수중에는 돈이 없는가. 돈이 많은 사람들은 왜 가진 돈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이 벌려고 할까. 기술을 배우기 위해 취업한 첫번째 빵집에서 저자는 그 실체를 정확히 본다. 기계적으로 숨 쉴 틈 없이 일해서 적으나마 반드시 이윤을 ‘뽑는’ 현실에서 그는 노동의 소외를 직시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부패하지 않는’ 자본주의 순환구조에서 찾는다.
나는 빵을 굽는다. 양식 요리사는 누구나 빵을 굽는다. 마치 한식당에서 밥을 하듯이. 빵이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건 좋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의 한계다. 식당의 형편없는 밥을 먹으면서, 장작불에 갓 찧은 햅쌀밥을 정갈하게 지어 올리던 어머니의 손맛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윤기가 ‘지르르’ 돌고 입에 넣기 전에 이미 구수한 곡물 특유의 향을 풍기는 맛있는 밥 말이다.
그런데 좋은 빵은 따로 있다. 적어도 와따나베의 빵은 그럴 것 같다. 보통 산업사회에서 팔리는 대량생산 빵—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자본주의적 빵—은 저자의 빵과 본질부터 다르다. 자, 우리가 먹는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아니 본디 간단하므로 더 보탤 것도 없다. 물과 밀가루, 이스트, 개량제, 설탕. 이것이 현대식의 ‘편리한’ 빵을 만든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정문주 옮김)에 수없이 나오는 ‘주종’(酒種, 자연상태에서 존재하는 균주를 술을 통해서 증식한 효모)으로 만드는 빵과는 극과 극이다. 모든 재료를 섞어 반죽한 후 일정한 온도에서 부풀린 후 굽는다. 이게 전부다. 저자가 애지중지하는 ‘개성있는’ 효모에 의한 개성있는 빵을 기대할 수 없다. 제빵사는 국내 노동자 중에서도 최악의 임금을 받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저임금은커녕 교통비만 받고 하루 열두시간 정도씩 일했다. ‘배운다’는 명목 아래 그렇게 도제로 혹사당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주체적인 노동자의 일이 아니다. 오직 기계가 하기 어려운 부분에 참여하는 일종의 ‘공정’으로서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빵을 만들까. 책을 펼치면, 빵을 만들기 위해 단 3분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는 나 같은 요리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빵 만들 줄 아는 이라면, ‘뭐야, 이 바보 같은……’이라 외치고 싶을 정도다. 저자는 각 장의 앞머리에 그림을 곁들여 빵 굽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그게 자그마치 총 10편이다. 모든 재료를 섞어 반죽한 후 일정한 온도에서 부풀린 후 굽는다,라고 내가 앞에 쓴 것과의 차이를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바란다. 그렇게 만든 저자의 빵은, 먹어보지 않아도 구수하고 깊은 맛이 있으며 다시 뜯어 먹고 싶은 생각에 침을 줄줄 흘리게 되리라는 예상이 간다. 그것이 순환하는 노동, 부패하는 자본의 본질에 가장 잘 닿아 있는 빵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이 어떤 가치로 쓰이는지 확인하려는, 그러니까 맑스(K. Marx) 『자본』의 초보적 이해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책 속의 독립적인 장으로 설정된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를 읽어보면 된다. 특히 저자는 여덟번째 장에서 우리의 노동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를 빵을 통해 설명한다. 기술혁신으로 빵값이 떨어지면 (그것을 사 먹는) 노동자가 오히려 소외되는 현실을 말이다. 빵을 굽는 사람이라면 그가 인용한 맑스의 다음 ‘선언‘이 아주 유효하다.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부속물로서의 그에게는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기술만이 요구된다.”(『공산당선언』)
고도산업사회라고들 하는 당대에 이 선언은 폐기된 줄 알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기반은 여전히 이런 노동이 떠받친다. 최저임금도 안되는 경비직과 청소직, 요리사 같은 직종에서 그 현실을 정확히 목도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수의 요리사와 제빵사는 하루 열시간 이상 일하는데, 그 노동시간과 부여받지 못하는 휴가를 산정하면 대개는 최저임금 이하의 노동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 먹는 싼값의 빵 한덩이, 분식집의 천오백원짜리 김밥 한줄은 맑스의 말대로 “오직 가장 단순하고 단조로운”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희생 위에 존재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아직까지는 실험 중인 것 같다. 7년의 시간을 투여했지만, 공황과 같은 외부의 충격이 없는 상태에서 지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 인정하듯이 대도시와 시골의 상황은 여러가지로 다르다. 자본주의가 집약된 형태로 인간의 마음까지 조종하다시피 하는 대도시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치르는 실험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실험의 성패라기보다 노동의 가치가 ‘의도와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확인이다. 7년은 그것을 인정하기에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내가 일하는 부엌 한켠에 이 책이 놓여 있다. 원래는 서평을 쓰려는 목적으로 읽었지만, 이제는 나와 내 동료들의 노동에 대한 성찰의 돋보기로 활용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부패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그런데 돈은 부패하지 않고 더 불어난다. 돈도 부패하고 경제도 부패하게 하려”는 삶으로 스스로 뛰어든 자의 장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