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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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진영 崔眞英

1981년생.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장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 『구의 증명』, 소설집 『팽이 』가 있음. metaphor81@naver.com

 

 

 

하룻밤

 

 

여자와 자고 싶다. 모르는 여자 앞에서 남자답게 허세 좀 부리며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맞는 담백한 아침. 그러고 나면 뭐든 달라질 것 같다. 애인 같은 건 부담스럽다. 내 모든 것을 말하고 상대의 모든 것을 들어야만 하는 관계는 너무 어색하고 피곤하다. 은지와 그런 짓을 일년 정도 해봤다. 우리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잘 잤어?

아니.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난 원래 그런데.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잠을 왜 못 자?

몰라. 난 그런데.

뭔데. 무슨 일인데. 게임했어?

아니.

그럼 어디 딴 데 나갔었어?

아니.

그럼 뭔데. 잠 안 자고 뭐 했어?

그냥 누워 있었어.

밤새?

몰라. 그러다 잠들었어.

몇시쯤에?

새벽에. 시계는 안 봤는데.

뭐야. 그럼 자긴 잔 거네.

……

여보세요?

응.

왜 대답이 없어?

……

아…… 답답해. 뭐가 응인데.

……

아침부터 왜 그래?

은지는 아침부터 왜 그랬을까? 내가 잠을 잘못 잤다는데, 내가 원래 그렇다는데, 잠을 잘못 잔 나를 굳이 잘 잔 애로 만들어야 했을까? 아침부터 그렇게 많은 질문을 던져야 했을까? 은지는 그게 다 관심이라고 했다.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거라고. 모르겠다. 그냥 같이 있을 때만 서로에게 집중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약속 잘 지키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꼭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나. 나는 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말을 하려고 하면 속에서 울산바위처럼 커다란 돌덩이가 먼저 튀어나오려고 한다. 그게 목에 턱 걸려서 숨을 쉴 수가 없다. 은지는 내게 ‘너는 사랑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어이없고 피곤했다. 그럼 그동안 자기랑 나랑 했던 건 뭐란 말인가. 우린 대체 뭘 했던 거니? 나와 만나는 동안 은지는 SNS 프로필에 이런 문장을 올려두었다.

 

사랑의 첫번째 의무는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폴 틸리히

 

이런 글귀를 자기 삶의 엄청난 명언인 양 적어놓고 왜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이런 짓이랑 초등학생이 방학 첫날 그리는 생활계획표랑 뭐가 다른가 말이다. 지금 은지의 SNS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선물이다.

장 아누이

 

아, 모르겠다. 뭐가 그렇게 거창하고 의미심장한지. 그런 의미 없이 여자와 자고 싶다. 하룻밤 산뜻하게 섹스하고 나면 뭔가 달라질 것 같다. 돈을 받고 자는 여자와 자고 싶지는 않다. 부담스럽다. 하룻밤이 비즈니스 같고, 주눅 들고, 아무튼 그들은 전문가고, 그런 여자들이랑 자면 내가 너무 햇병아리 같지 않을까. 전화가 온다. K다.

뭐 하냐.

집이야.

새끼. 내가 뭐 하냐고 물었지 어디냐고 물었냐?

뭐지. 이 은지스러움은. 혹시 이 새끼도 SNS 프로필에 사랑 어쩌고 적어놨나? K와는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아,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고등학교에서 갈렸다. K는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 나는 중간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쳤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대학에 들어갔고 지금은 그마저도 휴학 중이다. K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웬만큼 알아주는 대학에 갔고 역시나 휴학 중이다.

오랜만에 뭉치자. SO한테 내가 전화 다 돌렸어. 이따 다섯시에 맥도널드 앞에서 만나는 걸로. 일단 빅맥세트 때리고 쓰리쿠션 좀 치고. 그다음 코스야 말 안해도 알겠고.

역시 K다. 공부 좀 해본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계획성과 추진력이 아주 섹시하다. 그런데 난 돈 없는데. 며칠 전에 단기 알바 뛰어서 이십팔만원 벌긴 했지만 교통비에 카드값 메웠더니 이제 구만원 남았다. 그 돈으로 또 한동안 살아야 하는데.

O한테 돈 있대. 클럽은 O가 내겠다고 했어. 클럽 다음부터 각자 충당하는 걸로.

역시 O다. 부잣집 아들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오래된 친구들이라서 그런가, 이럴 때 보면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 같다.

 

밤 열한시 넘어 클럽에 들어섰다. 말이 클럽이지 그냥 나이트다. 나이트에 들어선 순간 나는 목적을 잃었다. 내가 술을 마시러 왔던가. 춤을 추러 왔던가. 여자를 만나러 왔던가. 뭐긴 뭐겠어. 놀러온 거지. K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수건과 냅킨으로 테이블과 컵을 닦았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페브리즈를 들고 다니며 테이블과 의자에 뿌려댔는데, 군대에서 그 버릇을 고쳤다. S는 술부터 말았다. 맥주와 소주의 31 황금비율. 선 채로 술을 들이켠 뒤 O와 나는 바로 춤추러 나갔다. 여러 여자의 어깨와 팔뚝과 엉덩이가 몸에 닿을 때마다 감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춤추는 순간만큼은 여자와 자고 싶다거나 밤이 무섭다거나 머릿속에서 급브레이크 소리가 들리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따위의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음악이 잠시 멈춘 사이 눈을 떠보니 O는 없고, O를 찾을 이유도 없고, 어서 다음 음악이 나오면 좋겠는데, 자극적인 조명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얼굴들이 빛을 쏘아대는 심해 생물 같았다. 어딘가에서 봤는데, 틀림없이 케이블 채널이겠지, 심해는 바다의 90%를 차지한다고 했다. 바다는 지구의 70%. 그렇다면 적어도 지구의 60%는 심해라는 뜻 아닌가? 이렇게 계산하는 게 맞나? 아무튼 그곳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란 이런 것이다. 거기 사는 애들은 몸에서 빛이 나고 입과 눈이 엄청 크다. 시각은 죽고 나머지 감각기관만 발달한 생물들이다. 근데 지금 여기 있는 여자애들이 그렇다. 눈도 입도 엄청 크고 거의 맨살이다. 심해에는 파도나 수온이나 채광의 변화가 없으니까 심해 생물은 환경 변화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물고기인데도 수십년에서 수백년까지 산다고 했다. 심해는 완전 암흑인데, 어차피 시각은 죽었고 평생 빛이란 걸 볼 일이 없으니 암흑도 암흑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빛이 엄청난 재앙이자 폭력 아닐까? 커다란 물고기가 죽어 심해에 가라앉으면 심해 생물들은 그 사체만 먹으면서 길게는 수십년까지 살 수 있다. 게다가 거기는 산소가 없으니까 식물도 없다. 연하고 순한 식물. 존재만으로 그저 선한 식물이 없다니. 엄청나지 않은가. 유토피아는 지상이나 하늘이 아니라 바로 바다 바닥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 닿기 전에 짓눌려 죽어버리는 곳. 하지만 여기가 바로 유토피아지. 나는 60%의 세계에 있다. 절대 암흑과 냉혈의 세계에 있다. 저기 보라. 번쩍거리는 심해생물들이 짝, 아니 먹잇감을 찾고 있다. 내 몸에서도 저런 빛이 날까? 나도 유토피아의 일원으로 보일까? 나도 찾을 수 있을까? 오늘밤을 구원해줄 단 하나의 생명체를?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끈다. 힘이 장난 아닌데? 힘 센 여자와의 섹스는 어떨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마냥 끌려가는 게 약간 자존심 상해서 그 손을 내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아, 야! O가 나를 돌아보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곤 다시 내 손을 잡아끌고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곳에는 네명의 여자가 뚝배기 속의 조개처럼 오순도순 앉아 있었다.

 

새벽 한시 넘어 클럽에서 나왔다. 키 크고 몸매 좋은 여자는 O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K가 찍은 여자는 오현아를 닮았다. 오현아가 누구냐면 내 첫사랑인데, 열다섯살 때 같은 반이었고 나 혼자 많이 좋아했다. 오현아를 생각하면 지금도, 되게 희귀한 느낌이 든다. 오현아는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볼수록 점점 예뻐지고 나중에는 우주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그런 애였다. 오현아 이후로는 그렇게 점점 예뻐지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K가 찍은 여자도 클럽에서 봤을 때는 오현아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첫인상 이후로 점점 안 예쁘게 보였다. S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는 귀여웠다. 그리고 좀 못돼 보였다. O가 내 어깨를 감싸며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야, 내가 지금 현금이 하나도 없어서 저기 편의점 ATM 기계에서 돈을 뽑으려고 했거든. 근데 그게 고장 났더라고. 너 현금 있냐?

지갑을 열어보니 칠만원이 있었다. O는 그중 육만원을 빼가며 말했다.

내가 다른 ATM 찾으면 바로 니 계좌로 돈 쏠게. 여기에 계좌번호 적어.

O가 내게 스마트폰 메모장을 들이밀었다. 난 그곳에 내 계좌번호를 찍었다. 찍으면서 놀랐다. 세상에. 내가 이런 걸 다 외우고 있었다니.

새끼, 고맙다. 내가 바로 돈 보낼게. 오래 안 걸릴 거야. 니가 모텔 들어가기 전까지 책임지고 넣는다. 그러니까 바로 방 잡지 말고 일단 어디 가서 술 좀 더 마시고 있어.

O가 내 어깨를 꽉 잡으며 당부했다. 편의점 앞에서 핫식스와 캔커피를 나눠 마시며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다가 O의 커플이 먼저 자리를 떴다. KS 커플도 반대방향으로 사라졌다. 맙소사. 내 옆에도 여자가 있었다. 클럽에서도 밖에서도 별말 없던 아이. 그래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아이.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다가 모두 떠난 뒤에야, 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알아챈 아이.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런 아이. 저 속에서, 우리에게도 빛이 났을까?

 

여자보다 앞서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 봤다. 부재중 전화 12통. 모두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문자메시지함을 열어보았다. 절로 한숨이 났다.

이름이 뭐야?

여자에게 물었다.

G야.

여자가 대답했다. 뭐, 알게 뭐람. 어차피 본명을 얘기해주지도 않을 텐데. 이은지란 이름만 아니면 된다. 아, 오현아도 안된다. 고희영도. 나민지도.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이름만 아니면 된다. 그런 면에서 G란 이름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마음에 드는데, 사실 외모는 내 타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G와 헤어져봤자 다시 집으로 가야할 테고, 집으로 가긴 싫다. 여기도 싫지만 거기도 싫다. 같이 있는 것도 내키지 않지만 혼자 있기도 꺼려진다. 이렇게 이도저도 싫을 때는 하던 걸 계속하는 게 속 편하다. G에게 술 한잔 더 하자고 했다. 같이 술 마시면서 얘기하다보면 G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럼 자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O가 어서 돈을 보내줘야 할 텐데.

좀 그런데.

G가 말했다.

응?

나는 G의 말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술은 많이 마셨잖아. 치마가 터질 것 같은데. 근데 나 화장실 좀.

G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까운 놀이터 입구에 공용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해놓고 그냥 집에 갈 것만 같았다. 나랑 잘해볼 생각이라면 치마가 터질 것 같다는 말 같은 건 안하지 않았을까. 멀어지는 G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G가 갑자기 돌아왔다. 내 앞에 서더니 ‘이것 좀 맡아줄래?’라면서 자기 가방을 맡겼다. 그리고 정말 화장실을 향해 종종 걸어갔다. 기분이 묘했다. 아쉽지 않다는 감정은 거짓이었나. G는 집에 가지 않는다. G는 이 밤에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꽤 좋아졌다. 나는 G의 가방을 팔목에 걸쳤다가, 어깨에 걸쳤다가, 한 손에 든 채 어깨 너머로 넘겼다가, 다시 두 손으로 얌전히 들었다. 가방에는 프라다 로고가 붙어 있었다. 꽤 비싼 짝퉁 같았다. 가방이 열려 있어서 안을 살짝 들여다봤다. 불투명한 약봉지가 한 움큼 들어 있었다. 가방을 살짝 흔들었더니 약 봉지에 가려져 있던 책이 드러났다. 무슨 책인가 제목을 보려는데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엄마다. 전화 안 받으면 계속 전화하겠지. 전화를 받더라도 계속 전화하겠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엄마는 내게 어디냐고 묻고, 뭐 하느냐고 묻고, 어서 N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걔를 엄마,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는 있어. 엄마도 알잖아.

그럼 어서 찾아와야지. 데려와야지.

찾으면 뭐해. 또 나갈 걸. 이게 어디 한두번이야?

걔가 집에 없으니까 내가 잠을 못 자.

알아, 엄마. 근데 걔가 집에 있어도 엄만 잠을 못 자잖아.

내가 죽겠어, 진짜.

엄마 맘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내가 듣고 있기가 힘들어.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래. 하루하루가 징그럽고 겁나.

하지만 엄마, 걔를 찾는다고 뭐가 달라져? 아니잖아. 걔 때문이 아니잖아.

그래도 찾으면 좀 나아질 거야. 얼른 찾아서 데려와. 다시 나가더라도 찾아와.

…… 알았어. 찾아볼게.

G는 어느새 내 앞으로 돌아와 놀이터 주변의 술 취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하고도 고요해졌다. 불행해졌다. 여자랑 자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그런 열망이 아주 우스워지고, 술이나 엄청 마시고 싶었다. 그다음엔? 취하겠지. 잠들겠지. 날이 밝겠지. 다시 시작되겠지. 이 우스꽝스러운 감정의 디스코팡팡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 가위에 눌리고 악몽을 꾼다.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결정적 장면 같은 게 계속 반복된다. 눈을 감기가 무섭다. 자꾸 기억이 나고, 진화하는 기억, 닳지도 않는 기억, 내 속에 있어 내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기억…… 나는 무작정 걸었다. 대로를 피해 골목과 골목을 이어 걸었다. 어느 골목에 들어서더라도 까페와 술집이 있었다.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작은 건물 지하에 선술집이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선 후에야 내가 G의 가방을 계속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뒤를 돌아봤다. G는 내 뒤에 서 있었다. 사람이 말을 거는데 왜 대답을 안해? 잔뜩 골이 난 목소리로 G가 말했다. 못 들었는데. G에게 가방을 내밀며 대꾸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계속 말했잖아. 그걸 하나도 못 들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G가 쏘아댔다. 그랬어? 뭐랬는데?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냐, 됐어. 새초롬하게 대꾸하며 G는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G의 가방을 든 채로 담배를 빼물었다. 한개비를 다 피우고 허리를 숙여 술집 안을 들여다봤다. G는 창가 자리에 앉아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었다.

 

내가 죽을 거라고.

G가 말했다. 나는 소주를 마셨다.

그러니까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너는 증인이 될 거야.

무슨 증인?

내가 죽기 전에 뭘 했고 기분이 어땠는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증인.

내 앞에서 죽을 거야?

글쎄. 기분 봐서.

왜 죽는데?

죽고 싶으니까.

난 다시 소주를 마셨다.

너 이런 말 몇번이나 해봤냐?

오늘이 처음이야.

거짓말.

G가 소주를 마셨다.

다시 물을게. 왜 죽겠다는 건데?

물어놓고,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다. 말하지 마라. 듣기 싫다.

나는 소주를 마셨다. G도 따라 마셨다. G가 울까봐 겁이 났다. G는 울었다. 나는 O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이어 전화가 왔다. O인 줄 알았는데 K였다.

야, 너 어디 빈방 아는 데 없냐?

K가 다급히 물었다. 여자애랑 자려고 하는데 돈이 없다고 했다. 돈도 없이 무슨 배짱으로 그 단계까지 갔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그런 걸 생각하면서 진도 나가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용카드를 쓰려고 했는데 카드가 정지됐다고 했다. 여자애한테 모텔비를 내라고 했더니 그냥 택시 타고 집에 가겠다고 했단다.

너 아는 친구 중에 혼자 사는 애 없어? 방 좀 잠깐 빌릴 수 없을까?

그게 말이 되냐. 새끼야.

아, 잘 좀 생각해봐. 나 지금 존나 진지해.

O한테 전화해봐.

진작 해봤지. 안 받아.

S한테 전화해봐. 그럼.

해봤어. S가 곧 너한테 전화할 거야.

그 자식은 또 왜?

몰라. 그건 S 만나서 얘기하고.

뭘 만나. 내가 걔를 왜 만나.

아무튼, 방 빌릴 데 생각나면 바로 전화 줘. 내가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는다. 너도 알잖아. 나 안한 지 진짜 오래됐단 말이야.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씨발. 나는 내가 존나 불쌍하다. 내가 돈 달라는 거 아니잖아. 자취하는 애들한테 빨리 연락 돌려봐. 알았지? 너만 믿는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란 소설이 있어.

G가 말했다. 탁자에는 불투명한 약봉지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보나마나 수면제겠지. 매주 정신과를 찾아다니며 구걸한 약이겠지. 엄마 덕분에 이런 분야는 내가 꽤 잘 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고, 알면 안될 것 같았는데, 알고 싶었던 다른 것들보다 훨씬 빨리 알게 되었다.

너도 자살에 실패하고 정신병원 들어가서 인생의 참다운 진리를 발견하겠다, 이거야?

와, 너도 그 책 읽었어?

G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인생의 엄청난 동지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그럼 『브리다』도 읽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침묵을 견디던 G의 얼굴에 다시 새초롬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넌 정말…… 속을 모르겠다. 완전 고슴도치 같아.

G는 잔뜩 골이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죽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는 고슴도치가 낫지 않냐?

너, 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뭘.

남의 상처에 대해 그렇게 빈정거리는 거 아니라고.

뭔 소리야. 난 니 상처가 뭔지도 몰라.

근데 왜 그렇게 말해? 나는 말이야. 내가 왜 죽으려고 하느냐면.

됐어. 말하지 마. 너 아니라도 나는 엄청나게 많은 상처를 알고 있다고. 너무 많이 알아서 도라에몽이라도 되고 싶다고.

전화가 온다. O인 줄 알았는데 엄마다. 전화를 받고 응, 그렇지 엄마. 알지 엄마. 그래도 엄마. 대답한다. 그래. 알았어. 그럴게. 그렇게 전화를 끊고 소주를 연거푸 두잔 마셨다. G는 탁자에 냅킨을 깔고 약봉지를 뜯더니 알약 하나하나를 집어 냅킨에 소중하게 올려두고 있었다.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렸다. 문자함을 열어본다. S다. S는 여자애와 잘 안된 듯했다. 내게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무조건 합치자고 했다. 같이 술 마시자고 계속 졸라댔다. S와 문자를 주고받다 고개를 들어보니 G는 아직도 약봉지를 뜯고 있었다.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챈 G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두고 봐. 난 오늘 꼭 죽을 거니까.

돈 있냐?

G에게 물었다. G의 표정이 멍해졌다.

죽기 전에 여기 계산부터 해줄래?

자리에서 일어나며 G에게 말했다.

 

그런 건 나도 먹어봤다. 불안하고 무섭고 심장이 빨리 뛰고 환청이 들리고 잠을 못 자고, 그랬다. 지금도 그렇고. 내가 먼저 약을 먹기 시작했는지 엄마가 먼저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누군가 먹어서 같이 먹었다. 그리고 나는 곧 약을 끊었다.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때마다 더 깊은 죄책감에 빠져버리는 게 싫었다. 엄마는 내게 상담을 권하기도 했다. 나는 거부했다. 상담을 받으려면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하는 순간 소리가 되고, 그건 분명 들리는 거다. 들리고 전해지는 것. 누군가의 뇌 속에 저장되는 것. 내 마음속에만 있는 그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냥 품어두기에도 무섭고 끔찍한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돌게 되다니.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에 대해 말하겠지. 쟤는 사람을 죽여놓고도 어쩜 저렇게 잘 살고 있을까. 그렇게 말하겠지. 나는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생략과 비약이 너무 많다. 그래도 나는 그런 말을 그저 듣고 있어야 한다. 살았으니까. 살고 있으니까.

 

시간은 새벽 세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건데?

뒤따라 나온 G가 물었다. 순순히 계산을 했나보다. 그러고도 나를 따라오고 있다니. 문득 미안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내가 왜 얘한테 짜증을 내고 있나, 사람을 왜 이렇게 함부로 대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 춥진 않아?

나도 모르게 다정하게 물었다. G는 괜찮다고 했다.

술 잘 마시나봐.

물었더니, G는 배시시 웃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지? 저 웃음은. 왜 날 보고 저렇게 웃지? 혹시 내가 좋아졌나? 그런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다. 무서워지자 멀어지고 싶었다. 일부러 G에게 아플 것 같은 얘기를 꺼냈다.

너 아까 같이 온 여자애들이랑 별로 안 친하지?

아니야. 우리 엄청 친해.

G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거짓말.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완전 베프들이야. 서로 못하는 얘기 없이 다 해. 우리 매일 붙어다녀. 근데 난 특히 은지랑 친하지.

뭐야. 여기서 왜 은지가 나와.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은지와 커플이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은지가 누구였지?

있잖아. 키 크고 완전 글래머인 애. 걔가 성격이 좀 쌀쌀맞긴 한데, 걔도 원래 그랬던 건 아니래. 자꾸 상처 받고 이용당하다보니까 착하게는 못살겠더래. 걔가 사귄 남자 중엔 좀 불량한 애도 있었는데, 그 남자애가 은지 때려서 병원까지 가고 장난 아니었어. 왜 그런 애를 만났는지 이해가 안돼. 근데 가끔은 헷갈려. 걔가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이 굴 때 보면 아, 얘가 상처가 많아서 그렇지 싶다가도, 근데 상처가 많다고 나한테까지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고. 걔가 가져가서 안 돌려준 내 목걸이랑 귀걸이랑 화장품이랑 다 합치면 백만원도 넘을걸. 근데 그래도 착한 애야. 건망증이 좀 심해서 그렇지. 근데 걔 자기 자랑 쩔어. 걔 말만 들어보면 온 세상 남자가 다 걔만 좋아한다니까. 걔가 남자 때문에 나랑 약속 깨고 나 이용해먹은 게 정말 한두번이 아닌데, 그래도 나랑 제일 친한 친구니까.

무슨 말이 그러냐.

응?

정말 친한 거 맞아?

그렇다니까.

그럼 걔도 알아?

뭘?

너 그렇게 약 사 모으는 거.

G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병원은 무슨 돈으로 다니냐?

G는 갑자기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너, 나 우습게 보지 마. 나 되게 열심히 살아.

G가 야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다시 걸었다. 무작정. 아무 데로나.

술 더 마실래?

나를 종종 쫓아오며 G가 물었다.

너 나랑 잘래?

G에게 물었다. G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됐다.

난 나에게 말했다.

난 오늘 죽을 거라니까.

G가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됐다고.

나는 다시 내게 말했다.

근데 발이 아파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쉬고 싶긴 한데……

말끝을 흐리며 G가 말했다. 나를 쫓아오는 G의 하이힐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렸다. 언제까지 걸을 건데! G가 신경질을 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봤다. 두세시간만 지나면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이다. 피씨방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여기 근처는 이미 만실일 거고, 일단 택시라도 탈래?

G가 내 팔꿈치를 살짝 잡으며 물었다.

나 발 아파. 걷기 힘들다구. 너무 아프단 말야.

G의 혀가 갑자기 짧아졌다. 전화가 온다. S다. 어디냐고 묻는다. 아까 거기 근처라고 대충 대답했다. 근처에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 스타벅스랑 GS25 편의점이 있다고 대답하자, 새끼야, 그런 건 어디에나 있잖아! S가 신경질을 낸다.

나 발 아프다니까. 너무 힘들어. 더는 못 걷겠어. 택시부터 타자니까. 응?

G의 혀가 더 짧아졌다. G가 슬쩍 내 손을 잡는다. 손이 차다. G가 어린애처럼 울먹거린다. 저 다물어진 입속에서 야금야금 자기 혀를 잘라 먹고 있는 거 아닐까. 편의점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온장고에서 캔커피 두캔을 꺼내 하나를 G의 손에 쥐여줬다. 전화가 온다. 엄마다. 전화를 받을까말까 망설이며 계산대 앞에 섰다. 캔커피를 계산대에 놓으며 휴대폰 액정에 찍힌 ‘엄마’라는 글자를 빤히 바라봤다. 직원이 바코드 찍을 생각을 안한다. 휴대폰 진동은 계속 울린다. 휴대폰을 든 채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거기 N이 있었다.

너 이 새끼.

나는 N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뭐하냐.

…… 보면 몰라. 일하지.

N이 받아친다. 옆에 있던 직원이 우리 눈치를 보다가 캔커피 바코드를 대신 찍었다.

점장 어디 있어.

커피 값을 치르며 N에게 물었다.

당연히 여기 없지. 이 시간에.

N의 불만 가득한 말투.

얘 가출한 미성년자인 거 알아요?

옆에 선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이 고개를 젓는다.

내가 얘 친형인데요. 얘 잡으러 왔거든요. 미안하지만 지금 데려가도 되죠?

아, 왜 이래. 좀 냅둬.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N의 짜증 넘치는 말투.

그래, 알지. 너는 너무 모든 걸 알아서 하지. 그래서 자꾸 문제가 생기잖아.

문제는 무슨. 뭐가 잘못됐는데.

봐.

나는 N의 눈앞에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엄마에게서 끈질기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지금이 몇시냐. 이 시간에 엄마가 왜 자꾸 나한테 전화를 하겠냐.

형 들어오라는 전화겠지.

너 잡아오라는 전화다, 인마. 옷 벗어.

N에게 유니폼을 벗으라고 말하고 통화키를 눌렀다.

응, 엄마. 방금 찾았어. 정말. 정말이라니까. 내가 데리고 들어갈게. 이제 좀 자요. 아니, 엄마, 지금 얘가 엄마랑 통화를 하고 싶겠어? 내가 데리고 들어간다니까. 내가 왜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믿어, 제발 믿으라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 N은 입을 꾹 다물고 선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점장한테 전화할까?

동생한테 이런 협박이나 하며 살긴 정말 싫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N이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사과했다. 일 마치는 시간까지 여기서 기다릴 수도 없고, N이 내일 다시 이곳에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으니 지금 데려갈 수밖에 없다고. 내가 내일 다시 와서 점장에게 사정을 말하겠다고. 직원은 N보다는 나이가 많고 나보다는 어려 보였다. 그는 N이 미성년자인 건 알았지만 가출한 줄은 몰랐다고 했다. 예의도 바르고 성실하게 일도 잘해서 같이 일하는 동안 편하고 좋았다고 했다. 창고에서 나오는 N을 보면서는 나중에 따로 연락하자고, 형한테 괜히 덤비지 말고 집에 잘 들어가라고, 그리고 조금만 기다렸다가 스무살 되면 그때 집 나오라고 웃으며 말했다. 모름지기 십대란 인고를 배우는 시간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그가 나보다 더 친형 같았다.

 

형도 집이 싫잖아.

편의점을 나오며 N이 투덜거렸다.

난 내가 싫다. 내가 있는 곳은 다 싫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는 함부로 대꾸했다. 엄마가 잠을 못자는 건 N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N이 집에 없으면 불안해하는 것이다. N이 나처럼 사고라도 칠까봐. 미안했다. N에게도 엄마에게도. 아니다.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어째서 보기 싫다는 말이 떠오를까. 미안해서 보기 싫은 걸까. N에게 해장국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젠장, 돈이 없다. 은행 ARS에 전화를 걸어 잔액을 조회해봤다. O는 돈을 부치지 않았다. O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대신 S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로변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을까 싶었다.

어, 니가 왜 여기 있냐.

SN을 보며 잠시 놀랐다.

어, 얘도 계속 같이 있었나보네.

G를 보고도 놀랐다. 그렇지. G가 있었지.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G를 쳐다봤다. 나는 왜 자꾸 G의 존재를 까먹는 걸까. 둘이 계속 술 마셨어요? SG에게 물었다. 네, 술도 먹고 산책도 하고 그랬어요. G의 혀가 도마뱀 꼬리처럼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돈 있냐? 나는 작은 소리로 S에게 물었다. 새끼, 당연히 없지. S는 어깨를 으쓱대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그 뭐냐. 저걸 뭐라고 하더라. 아, 주차장. 주차장 제일 끝에서 오른쪽 길 있잖아. 거기로 쭉 들어오면 편의점 하나 있거든. 거기 앞이야. 이쪽으로 와서 전화해. 누구에게 전화한 거냐고 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K지. S가 대답했다. K에게도 돈은 없을 것이다. 우린 왜 이렇게 돈이 없는가. 지금 오겠다는 걸 보니 K도 여자애랑 잠은 못 잔 것 같은데, 우리 모두는 왜 이 모양인가. S의 전화기를 뺏어 O에게 다시 전화를 해봤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머릿수를 세어봤다. 여기 있는 사람은 네명. 이제 곧 다섯명이 될 것이다. 삼만원, 아니, 삼만오천원만 있으면 해장국을 먹을 수 있는데. 해장국을 먹고 나면 날이 밝을 텐데. 그럼 각자의 길로 가면 되는데. NG는 두런두런 자기소개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걸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G는 자기 이름은 지은이고 스물세살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일한다고 했다. 친언니와 같이 살고, 부모님은 강릉에 계신다고 했다. 병원 일이 삼교대고 간호사들 간에 분위기가 엄격해서 힘들긴 하지만 일 자체는 의미도 보람도 있어서 괜찮다고 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쓰는 게 기분 좋다고 했다. 예전에는 사나흘간 오프를 받으면 집에서 잠만 자거나 집안일을 했는데, 친구들이 너도 스트레스 좀 풀라고 해서 오늘 클럽에 가봤더니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고 피로만 더 쌓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얘기를 술술 하는 게 신기했고, 나에게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 서운함이 우습기도, 부끄럽기도 했다. 어쩌면 G는 내게 일부러 모나고 못된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애가 왜 내 앞에서는 계속 죽을 거라고 협박했을까. 가만, 그거 혹시 협박이 아니라 고백 같은 거였나. 그 약들은 정말 수면제였을까. 아, 모르겠다. 이제 와서 G에게 진실을 물어보기에는 우리의 대화가 너무 꼬여버렸고…… 내가 직접 묻고 듣는 것보다 이렇게 엿들을 때 훨씬 진실에 가까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같이 있던 사람처럼 K가 우리 틈에 섞여들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물었다. 야, 배고프다. 뭐 좀 먹으러 가자. K는 딴청을 피웠다. 하긴 한 거야? 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K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했네, 했어. S가 그 웃음을 보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O는 왜 돈을 안 보내지. K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도 그 자식한테 돈 빌려줬어? 나도 줬는데? S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G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하이힐을 벗었다. 발이 심하게 부었고 뒤꿈치는 까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NG를 부축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가의 플라스틱 의자에 G를 앉혔다. 가까이서 보니 상처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 N이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봤다.

어떻게 여자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끌고 다닐 수가 있어?

N한테 돈끼호떼 귀신이라도 씐 것 같았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끌고 다닌 거 아니야.

대꾸하면서도 내 안에서는 ‘비겁한 변명입니다!’란 외침이 들렸다. 그런 대사가 나온 게 무슨 영화였더라.

발이 너무 아파서 내가 계속 택시를 타자고 했는데 얘가 들은 척도 안하는 거야.

G의 혀가 다시 짧아지고 있었다.

얘 차 못 타는데.

K가 말했다.

이 자식 차 못 타. 지하철이랑 기차만 타. 차 타면 큰일 나는데. 기절하는데.

S가 말했다.

형. 차 못 타?

N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형이 왜 차를 못 타요?

NK에게 물었다. K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N이 채근하듯 재차 묻자 K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몰라. 쟤는 원래 그런데.

NS에게 다시 물었다.

그냥 그렇다니까. 타면 기절해.

S의 대답이었다.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NG에게도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G는 왠지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젠장.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N은 결국 내게 다시 물었다. 형, 진짜야? 왜 그런 건데? 왜 차를 못 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씨발, 원래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N은 누구에겐지 모르게 화를 냈다. 아니, 내게 냈다. 아니다. 그 자리의 모두에게 냈다. 내가 지금 N처럼 열여덟살 때 N은 열두살이었다. 그때 N은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지난 육년 동안 N의 마음에 대체 무슨 꽃이 폈는지, 무슨 재난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N은 일년에 두어번씩 가출하는 청소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는 않다. N은 여전히 착하다. 가출이 무슨 대수인가. 내가 열여덟살 때는 사람을 죽였다.

열일곱살에 P를 만났다. P는 최강이었다. 힘도 성적도 돈도 외모도 자아도, 모든 면에서. P는 매일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심부름을 시켰고 기분이 좋지 않거나 심심할 때면 껌 씹듯 때렸다. 그러다가 J를 발견했다. J는 식물처럼 선하고 순한 아이였다. J 덕분에 나는 말단 신입에서 차장 정도로 진급했다. 잡일은 줄고 심부름은 덜 하게 되었지만 책임감 같은 게 주어졌다. J를 관리감독하는 책임. P가 원할 때 J가 주위에 없으면 그 폭격이 모두 나에게 쏟아졌다. 나는 J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괴로울 때는 J와 같이 자살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J와 같이 복수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자살과 복수는 같은 의미였다. 열여덟살 여름 새벽, P가 자기 형 차를 끌고 나왔다. 검고 커다랗고 단단한 차였다. J에게 운전을 시키고 나보고 조수석에 앉으라고 했다. 강변북로를 달릴 거라고 했다. 양화대교 근처에서 여자애를 태웠다. 여자애는 꺅꺅 소리를 지르며 차에 탔다. P는 차창을 모두 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브레이크를 밟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여자애와 섹스를 했다. 창밖으로 여자애의 손과 발이 쑥쑥 나왔다. 여자애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삼천명의 귀신소리 같은 바람소리가 얼굴을 때렸다. 여자애의 몸이 찌그러진 깡통처럼 변할 때까지 P는 여자애를 몰아붙였다. 나는 캠코더로 그들의 섹스를 흔들림 없이 찍어야 했다. 강변북로는 지옥이었다. 우리가 타고 있던 차는 지옥의 핵이었다. 청담대교가 보였다. 예뻤다. 예쁜 다리였다. 섹스를 하던 P가 올림픽대로로 갈아타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J가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얌전하던 놈이 욕을 하면서 핸들을 마구 내려쳤다. 차가 흔들렸다. PJ의 뒤통수를 내려치며 당장 차를 세우라고 했다. 차를 세우자마자 너는 내 손에 죽을 거라고 했다. 죽여서 한강에 던져버릴 거라고 했다. 차를 세워도 세우지 않아도 너를 죽일 거라는 말로 들렸다. 얼마나 더 달렸는지 모르겠다. 차 안에서는 고성과 비명이 계속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어서, 그만두고 싶어서, 아니, 그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서, 나는 J대신 브레이크를 밝았다. J의 손을 잡고 핸들을 틀어버렸다.

J는 육개월이 넘도록 의식을 찾지 못했다. 나는 두달 만에 퇴원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자퇴생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날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으니까. 견디다 못해 그날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말한 적이 있다. 살면서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엄마는 귀를 막았다. J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육개월 동안, 나는 J가 깨어날까봐 두려워했다. 깨어나지 않을까봐 두려워했다. 강변북로의 광란이 머릿속에 박혀서 떨어지질 않는다. 할아버지 방의 24시간 켜져 있는 텔레비전처럼, 할아버지가 죽어야 꺼지는 텔레비전처럼, 내 머릿속에서 그 하룻밤의 영상은 24시간 내내 켜져 있다. 종종 P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외국으로 나갔다고도 했고 의대에 갔다고도 했다. 어쨌든 잘 먹고 잘산다는 소문이었다.

 

해장국이나 먹으러 가자.

K가 말했다. 우린 텔레파시가 통하는 게 분명하다. G는 하이힐을 다시 신으려다 포기하고 맨발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내 운동화를 벗어줬다. G는 내 운동화를 신은 채 몇걸음 걷다가 운동화를 벗었다. 걸을 때마다 상처가 닿아서 아프다고 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양말까지 벗어 G에게 줬다. G는 동그란 눈을 하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쇼를 하세요들. NG와 나를 보며 중얼거리더니 바로 옆 편의점에 들어가 슬리퍼와 양말을 사와서 G에게 줬다. 편의점에서 슬리퍼도 팔아? 나는 G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KN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 너, 돈 얼마나 있냐? 우리 해장국 좀 먹자. 이 새끼, 내 동생한테서 안 떨어져? 나는 K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뭐라도 먹으러 가요. N이 말했다. KS는 에버랜드에 가자는 말을 들은 어린애들처럼 좋아했다. 아냐, 그건 내가 살게. 양말과 슬리퍼를 신고서 G가 말했다. 양손에 하이힐을 한짝씩 들고 있었는데, 그렇게 두 손에 들고 있는 게 신고 있을 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자. 바깥에서 이러고 있는 거 너무 지쳐. G가 말하자 모두들 순한 양처럼 G를 따라 움직였다. 눈앞이 서서히 파란빛으로 바뀌었다. 문득 공기가 청명해진 느낌이었다. 오늘밤은 이제 지난밤이 되었다. 지난밤 길바닥에서 일어난 이러저러한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려보니 불면증에 시달리며 이따금 꾸는 복잡한 꿈 같았다. 하지만 저기 앞에 승희와 기태와 남수와 또 이름이 뭐랬더라, 지은이랬던가, 지은이 오순도순 걸어가고 있지 않나. 꿈은 아니었던 거다. 해장국 먹고 헤어질 때 지은의 전화번호를 꼭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은이랑 자는 사이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해장국 값을 갚고 싶어서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 가끔 확인도 해봐야 할 것 같고. 그렇게 확인을 하다보면 나도 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고…… 해장국을 먹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한숨 자고 나면 오늘이 다 지나가 있겠지. 그렇게 오늘을 흘려보내면 되는 거겠지. 하루쯤은 그래도 되는 거겠지.

해장국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4차선을 가로지르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선 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나는 몸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영혼이나 정신 같은 거, 아니 기력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초록색 불이 들어왔고, 다들 도로에 발을 내디뎠다. 그때 반대편 차선에서 승용차가 멈췄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아무 경계도 의미도 없이 그 차를 쳐다봤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내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P였다. 운전석에서 내린 P는 비틀거리며 차를 한바퀴 돌아 뒷자리에 탔다. 조수석에 탄 사람이 차에서 내려 운전석에 탔다. 차는 서서히 출발했고, 나에게 뭔가를 확인시켜주듯, 뒷좌석의 까만 창이 서서히 내려갔다. P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가죽 시트에 편히 머리를 기댔다. P는 웃었다. 분명 웃고 있었다.

신호등의 초록색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에 갇혔다. 반대편 인도에서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불러댔다. 어서 건너오라고 외쳤다. 새벽이라 지나다니는 차는 많지 않았다. 건너려면 충분히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굳어버렸다. 그날의 강변북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지옥은 그날의 강변북로만이 아니다. 모든 길이 지옥이다. 나는 계속 그 길을 달리고 있다. 브레이크도 핸들도 없이.

남수가 좌우를 살피며 내게 뛰어오려고 했다.

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게 다가오지 말라고.

나는 여기 있겠다고. 영영 여기 있겠다고.

P가 탄 차는 멀지 않은 곳에서 유턴을 했다. 검고 커다랗고 단단한 차가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