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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갑용 『길은 복잡하지 않다』, 철수와영희 2010
과연 노동운동의 길이 복잡하지 않을까?
이병훈 李秉勳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bhlee@cau.ac.kr
요즘 노동운동이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혹자는 현재의 노동운동에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비관 또는 체념의 논평을 내놓기도 한다.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노동시장 현실에 더해 제몫 지키기에만 열중하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이기적인 행태, 노조 간부들의 추잡한 비리와 성폭행사건, 그리고 낯 뜨거운 폭력사태로 드러난 노동운동 내부의 심각한 계파갈등이 연이어 보도되면서, 노동운동은 어느새 깊은 실망과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기업 MB정부에 의해 반노조 공세가 득달같이 퍼부어지니 노동운동의 앞날은 더더욱 위태로워질 듯하다.
이런 와중에 노동운동의 심각한 현실을 준엄히 꾸짖는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골리앗 전사’라 일컬어지는 이갑용(李甲用)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거침없는 사자후를 토해내는 책, 『길은 복잡하지 않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1958년생인 저자의 때이른(?) 자서전적 일대기를 담고 있다. 저자의 인생역정 자체는 어찌 보면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일부다. 1984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풋풋한 청년 이갑용은 이후 노조의 투사로 변신해 현대중공업-민주노총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한때 민주노동운동의 한복판을 주름잡았다. 이후 수차례의 감방생활과 대통령 면담, 울산 동구청장 취임 등 참으로 곡절 많은 삶을 살아왔다. 이 책은 우리 산업현장에서 국가경제를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 그리고 국가권력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여온 지난 25년간의 정치·경제와 노사관계의 단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한국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의 뼈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폭력과 간계로써 노동조합을 끊임없이 탄압하는 대기업들의 ‘반노동’ 실체를 목격하게 되고, 눈먼 권력욕과 현실타협의 관료주의 그리고 옛 동지들의 안타까운 변절 등의 기억에 때로는 분개하고, 더러는 답답한 심정을 품게 된다.
이갑용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들어 기업들이 노조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집요하게 공격해왔는지,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굴종의 삶을 강요하기 위해 어떤 술책을 동원하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들춰 고발한다. 저자가 자본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 까닭은, 자신이 노조활동에 겁없이 뛰어들던 당시 자본의 생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에 확실하게 싸우지 못했다는 회한이 남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저자의 이러한 고발은 스스로 밝히듯이 오늘 새롭게 일떠서려는 노동운동 후배들이 자본의 공세와 꼬임으로 다시금 실패와 좌절을 맛보지 않게 하려는 선배의 속깊은 배려이기도 하다.
또한 저자는 노동운동과 진보정치가 작금의 위기상황에 빠져들게 된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심지어 노동운동의 침체와 진보정치의 왜곡을 낳은 문제 인물과 계파정치에 대해서는 실명까지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질타한다. 그동안 가려져왔던 노동운동의 단면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게다가 현장노동자 출신다운 투박하고 진솔한 말투에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가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내부문제를 이렇듯 가혹할 정도로 통렬하게 따지고 드는 데서는 나름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현재의 엄중한 위기는 철저한 반성과 근본적인 쇄신 없이 성취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문제제기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한가지 의문은 노동운동의 부활을 위해 제시하는 그의 ‘복잡하지 않은 길’이 적절하고도 충분한 선택일까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의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를 평가하면서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시종일관 계급적 자각과 투쟁을 강조한다. 물론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결의와 투지를 굳건히 다지기 위한 이념적 무장과 (저자가 강조하듯이) 노동자대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복무하겠다는 결연한 실천적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운동의 지당한 명제라 할 수 있다. 특히 노동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관료적 보신주의나 정파적 권력지향, 더 나아가 현실굴종의 투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길이 복잡하지 않다”라는 명제는 깊이 새길 만하다. 하지만 이같은 계급의식과 전투성만을 고수해서 과연 노동운동을 다시금 부활시킬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운동관은 다소 진부하거나 순박하기만 한 것은 아닐까? 노동운동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여건 및 산업구조와 기술환경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기반이 되어줄 노동자대중은 매우 다원화된 이해관계 탓에 연대감이 형성되기 어렵고, 더구나 ‘뱀’ 같이 교활한 자본의 노조파괴 공세와 유연한 노무관리전략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동운동의 계급적 전투성을 촉구하는 이 책의 외침은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노동자대중, 자본, 국가권력, 그리고 외부 환경의 변화로부터 동떨어진 경직된 계급원칙만을 고수하기보다 오히려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올라타려는 주체적 선도성과 전략적 유연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자신의 별명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에 대해, 지난 세월 민주노조운동의 올곧은 투쟁을 이끌어온 투사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호칭이라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투쟁이 왜 노동자계급의 의식 고양과 조직 확산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외롭게’ 되었을까. 현대중공업과 민주노총 그리고 울산 동구청의 오늘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봐야 한다. 자본과 보수세력의 집요한 공세에 대응한 노동조합과 진보세력의 전략·전술이 어떤 이유로 실패하고 대중적 지지를 잃거나 그 진지를 약화시키게 됐는지, 좀더 구체적이고 명철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오늘 노동운동의 길에는 저자가 강조하듯 계급적 전투성이라는 ‘복잡하지 않은’ 결연한 실천자세로 무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화무쌍한 당면현실과 주변상황에 맞서 그 ‘복잡함’을 감당할 줄 아는 전략적 대응력을 갖추는 것도 절실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