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박노해 사진집 『라 광야』, 느린걸음 2010

보이는 것 너머 깊이

 

 

아다니아 시블리 Adania Shibli

팔레스타인 소설가 wadalmidy@yahoo.com

 

 

사진은 이차원적 예술이다. 그것은 박노해의 사진집 『라 광야』1를 만나기 전까지는,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대다수의 사진들은 배경에 펼쳐진 풍경 속의 깊숙한 곳으로 보는이의 시선을 인도한다. 사진의 프레임이 지닌 한계는 그러므로 이 사진들에서 광야의 끝없는 깊이로 대체된다. 세계의 일부를 “절단해” 프레임 안에 보존하는 대신 새로운 상상의 세계, 그 일부만이 보일 뿐 나머지는 보이는 것 너머에 자리한 상상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사진집에서 독자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는 사진에는 「바그다드 가는 길의 말라죽은 오렌지나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사진 속 지평선은 먼지 날리는 도로가 보이는 한 지점으로 독자의 시선을 끌고 간다. 이 도로는 보는이를 향해 뻗어 내려오다가 왼쪽 옆을 지나 쭉 이어지는 한편, 말라죽은 오렌지나무가 가리키는 방향의 지평선 너머로도 연장된다.

주의깊게 사진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 길 위를 달리고 있는 트럭 말고도 길 양쪽에 서 있는 사람 두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러나 좀더 주의깊은 시선이라면 도로를 향해 한줄로 걸어가는, 언덕 중 하나에 반쯤 모습이 가려진 몇몇 사람의 형상 역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저 돌무더기에 불과한 것일까? 길 양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 사람 역시 사실은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저 사막만이 보여줄 수 있는 환상인 신기루에 불과하다. 신기루는 현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에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앞서 밝힌 것처럼 『라 광야』의 사진들 대부분이 프레임 안에 담긴 풍경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그 사진들이 이 풍경 속의 사람들, 사진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허락된 지평선 너머로의 여행이 금지되어 있는 그 사람들을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어둠속에 숨어서 춤을 춰야 하는, 억압받는 쿠르드족에 대한 사진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 춤은 완전한 신체적 자유 혹은 그것에 대한 열망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상에서 가장 슬픈 비밀공연」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사진에서, 그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신체가 어둠을 벗어나 빛이 있는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허리를 숙인 채로 조심스럽게 춤을 춘다. 프레임 중간 위쪽으로 보이는 불빛 자체가 보는이의 시선을 교란하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때문에 보는이의 시선은 빛이 있는 곳에 머무는 대신 춤추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둠 쪽으로 다시 회귀하게 마련이다. 사실상 사진 속에 묘사된 인물이 자유로운 움직임을 허락받지 못할 때면 보는이의 시선 역시 언제나 프레임 내부를 더 깊이 관찰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받곤 한다. 「빛이 두려운 쿠르디스탄의 밤」이나 「귀향을 꿈꾸는 쿠르드 난민가정」 같은 사진은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사진의 캡션 중 하나가 기술하는 바처럼 “어둠이 내리면 집집마다 문 앞에 환한 전깃불이 강제로 켜진다. 쿠르드 해방운동에 대한 철저한 감시통제 씨스템”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미지 1

지상에서 가장 슬픈 비밀공연(알 까미슬리, 쿠르디스탄, 시리아, 2008)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경우, 가시적 지평선 너머로의 이동을 가로막는 것은 불빛이 아니라 주로 철조망이다. 사진 속의 지평선들 어디에 시선을 두더라도 우리는 예외 없이 사진의 배경에서 철조망, 장벽, 집단거주지, 죽음 중 하나를 대면하게 된다. 빛이 쿠르드인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일반적 수단이라면 철조망과 울타리, 살상은 지금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박노해는 마치 바람처럼 조용히 어느 귀퉁이로 다가가 그 모든 현실과 그 이상을 목격하고 포착한다. 그는 섬세하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며 사막과 얼어붙은 풍경 속 식물들의 외로움 사이에 존재하는 기이한 동질성을 포착하는가 하면, 때로는 「시리아 사막 길에서 저녁기도를 바치는 이라크인들」에서처럼 한순간에 대한 완벽한 공유로서 기도가 지닌 의미를 포착해내기도 한다. 『라 광야』의 사진들은 결국 ‘라’(Ra, 태양·빛·태양신을 뜻하는 고대 이집트어) 광야의 신비로운 풍경과 함께 지금 현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어떤 가장 없이 드러나는 그들의 잔인한 현실과 함께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서정은 옮김

 

 

__

  1. 『라 광야』는 지난 2010년 1월 7일부터 28일까지 서울의 갤러리 M에서 열린 박노해 사진전 ‘빛으로 쓴 시’의 도록으로,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등지의 사진 37컷과 함께 한국어·영어·아랍어로 된 사진해제가 수록되어 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