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16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김성규 진은영 2인을, 본심위원으로 이상국 이장욱 최원식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 아래 총 9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강형철 『환생』, 김기택 『갈라진다 갈라진다』, 성윤석 『멍게』, 신동호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전동균 『우리처럼 낯선』, 함민복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황학주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나다 순).
본심은 10월 24일에 진행되었는데, 대상작 모두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성취를 보여주고 있어 대상작을 좁히는 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보람을 느꼈다. 심사위원 각자가 우선 추천한 강형철 신동호 이문재 전동균 함민복 황학주 시집에 대한 깊고 긴 논의가 오간 끝에 전동균 시집 『우리처럼 낯선』(창비 2014)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우리처럼 낯선』은 따듯한 해학과 달관에 가까운 시적 득의를 통해 불편한 삶을 성찰하고, 정제된 언어로 구원 없는 현대의 묵시록을 극적으로 전경화한다는 평가를 받아, 심사위원 전원은 전동균 시인을 제16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이상국(李相國) 시인
본심에 올라온 아홉권의 시집 중 세권을 뽑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아래의 세권을 주목하기로 하였다.
신동호의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는 요지부동의 분단현실에 대하여 너나없이 무기력한 우리 시단의 괄목할 만한 성과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십수년 동안 평양과 개성, 금강산과 중국을 다닌 후 비로소 그에게 귀환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남북한 사회의 경계를 떠도는 자로서의 분발과 작심이 또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전위적 치열성과 성취가 과연 백석의 이름으로 수용될 수 있을는지 여부가 고민스러웠고, 전반적으로 시인의 목소리가 감춰진 게 너무 적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텅 빈 길 위에서 나 혼자 분단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네.”(「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라고 술회하는, 소년처럼 외롭고 씩씩한 시인을 위로하고 싶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장촌냉면집 아저씨’의 행방에 대한 의문은 그가 작금의 분단문학에 던지는 일종의 ‘부재신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문재의 『지금 여기가 맨 앞』은 우리에게 이미 낯설지 않은 그의 아포리즘적 내성(內省)과 관조의 거울을 통하여 다양한 세계를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일견 개개의 작품이 보여주는 층위에 상당한 기복이 있어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가 처처의 세계와 관계하고자 하는 사유와 열정을 지난 십년의 간극을 메워 시집 한권에 모두 담아내기에는 무리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대체적으로 그의 시는 사변적이고 정적이다.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그렇다. 그렇다고 그가 아득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머물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 내가 내 존재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든지 혹은 지금 여기가 맨 뒤라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 그곳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세계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전동균의 시에는 도처에 세상을 건너가는 고투가 보인다. 그것들은 정제된 언어와 겸허의 자세로 불편한 곳에서 견뎌내는 생에 대한 성찰과 집중의 힘을 보여준다. 한편 대상과의 조우나 그 전개에 있어서는 짐짓 달관에 가까운 시적 득의를 엿볼 수도 있는데, 그것들이 시인의 연배에 비해 다소 이르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이는 그의 공부의 깊이 덕일 것이다. 더러는 허무나 해학으로 생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도록 장치를 마련하면서도 대부분의 작품이 일정한 격조를 유지하고 있어 책장을 넘기는 기대와 재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일언이폐지하여 “밥 먹는다는 일의 누추와 장엄”(「햇반에 고추장 비벼 먹는」)을 통하여 삶의 비루를 즐기거나 위무하려는 그의 시편들은 저녁같이 깊기도 하고 연필심을 다듬는 손끝처럼 섬세하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깊이 받아들이며 이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데 동의했다.
이장욱(李章旭) 시인
출간 후 꽤 시간이 지난 김기택과 함민복의 시집을 제외하고 내가 고심 끝에 추천한 세권의 시집은 황학주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이문재의 『지금 여기가 맨 앞』, 신동호의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등이었다. 아래의 글은 내가 좋아하는 선배 시인들의 시집에 대한 소략한 감상문이다.
황학주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다음 행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는 주어에서 술어로 건너가는 길에 본능적으로 아득한 그림자들을 배치한다. 읽는 나는 발이 빠지고 마음이 빠진다. 구절들은 끊임없이 어긋나면서도 하나의 핵심으로 모인다.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같은 구절을 읽고 있으면, 시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아무래도 잊게 된다. 단지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사이에 그의 시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인데, 시집을 덮고 나면, 사랑하는 일과 죽는 일과 살아가는 일이 끝내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문청시절의 어느날, 나는 이문재를 미행한 적이 있다. 인사동을 나와 하염없이 걷는 그를 몰래, 두근두근, 뒤따라갔다.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의 시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깊고 우울한 독자였다. 첫시집 이후 이문재는 먼 길을 걸어갔다. 나로서는 더이상 미행할 수 없는 곳까지 그는 갔다. 그곳은 『지금 여기가 맨 앞』이라고 할 만한 곳인데, 거기서 그는 오래 길을 걸어온 자 특유의 그윽하고 품격있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나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면 다시 미행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신동호는 발견되지 않은 시인이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예의 그 고유하고 순정한 서정성뿐 아니라, 우회니 비유니 하는 것을 모르는 직정(直情)으로 가득한 문장들을 보여주었다. 대개 직정은 시를 망친다. 소수의 직정만이 ‘시’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직정이 깊고 깊어서, 시인의 생각이나 주장이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 ‘직진하는 몸’을 오롯이 보여줄 때이다. 신동호의 직정은 동의를 얻으려 하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고, 관조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살아내려고 하며, 돌파하려고 한다. 나는 그가 시 속에서 견지하는 특정한 정치적 신념에 동의하지 않지만, 어떤 종류의 뜨거운 회한과 신실함이 ‘시’가 되는 장면들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했다.
긴 논의 끝에 올해의 백석상은 전동균의 『우리처럼 낯선』에 주어졌다. 처음에 나는 그의 시가 조금은 전형적인 관조의 미학에 기울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불성실한 선입견 탓에 내가 놓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시의 수준이 고르고 편차가 적다는 장점 때문에 그의 수상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꽃이 오고 있다//한 꽃송이에 꽃잎은 여섯/그중 둘은/벼락에서 왔다”(「뒤」)라고 쓸 때의 그 ‘벼락’에 이끌렸다. 그의 ‘벼락’은 언제나 고요하고 쓸쓸한 하늘에서, 고요하고 쓸쓸한 방식으로 온다. 그 하늘이 구름과 무지개의 저편, 더 멀고 깊고 캄캄한 정신적 우주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의 시에 비가 내리고 꽃이 필 때, 그 비와 꽃은 저 안 보이는 우주에서 내리고 저 무한한 우주에서 피어나는 것이겠다. 전동균의 ‘고요한 벼락’은 그곳 어디에선가 안간힘을 다해 태어난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최원식(崔元植) 문학평론가
예심을 통해 올라온 아홉권의 시집 모두 독자적이다. 그럼에도 정치성이 숨은 형태로밖에 드러나지 않는 점은 전체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연 우리 시는 이런 썰물현상을 언제까지 인내할 것인지, 한편 답답하기도 하다. 나는 밀물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밀물 때도 아니거니와, 그 또한 시적 정치성의 절정이었다고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퇴조기야말로 근본적 성찰을 통한 죽음의 운명을 끝까지 수행함으로써 그 나락에서 반짝이는 부활의 씨앗을 가까스로 수확할 절호의 시점일 것이다. 최고의 문학마저 평균을 향한 무한진군의 트랙으로 강제하는 이 부박한 시대에 시의 촉이 더욱 깊이, 더욱 예민하게, 더욱 생생히 작동하길 비는 마음 그지없다.
강형철의 시집 『환생』은 얼굴만 봐도 반갑다. 「이슬비 이용법」과 「농사금지복」을 비롯한 작품들이 슬며시 보여주듯, 이 시집 최량의 시들에는 ‘설명’이 없다. 경험적 직접성을 즉물적으로 드러낸 이 실험은 그 자체가 ‘새로운 시=새로운 세계의 모색’, 즉 새로운 시적 정치다. 다음 시집에 대한 기대가 벌써 크다.
신동호의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는 일종의 자전시집이다. 박정희시대에 태어나 유사 박정희시대를 살아가는 한 운동권 시인의 평균적 초상을 정직하게 보여준 이 시집은 종이에 물 스미듯 감염한다. 그럼에도 자기연민에 더러더러 지는 머리에 끝내 후일담시집을 면치 못한 게 안타깝다.
이문재의 시집 『지금 여기 맨 앞』은 괄목상대다. 4부 뒤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깊이 사유한 시들은 이 과작의 시인을 명예롭게 한다. 특히 「우리는 섬나라 사람」은 날카롭다. 분단이 남한은 섬으로 만들고 북한은 남해가 없는 이상한 반도로 왜곡하는 지리상 발견을 통해 분단의 정치학을 번쩍 드러낸 그 눈매가 서늘하다. 그러나 사유와 감성의 분리가 전반적이다. 이 과도기가 빨리 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황학주의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제목이 암시적이다. 삶의 가장 결정적인 시간들조차 통속적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시인은 그 시간들을 탈환한다. 단도직입적으로 그 본질로 짓쳐들어가 그 절대적인 시간으로부터 발신되는 암호들을 수신하는 것인데, 시인은 문득 모국어 속의 외국인이다. 그러나 그 암호들이 아직은 지상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은 듯 소통장애 상태인 것도 사실이다. 시적 암호의 핵심으로 되는 고도의 정치조차 육체화되는 경지로 진화하기를 기원한다.
전동균의 시집 『우리처럼 낯선』은 드물게도 종교적이다.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속절없이 허락한 그 신에게 오히려 참회를 요구하는 반종교성을 통해 구원에 대한 갈구와 구원 없는 현대의 묵시록이 극적으로 전경화하는데, 그렇다고 꼭 비장 또는 감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해학이 따듯하다. 세상의 끝에 마련된 고독한 기도의 공간에서 걸어나와 새삼 연옥을 발견한 듯도 싶다. 모쪼록 새로이 출현한 연옥을 가볍게 때로는 가볍지 않게 산보하며 희망을 무서워하는 시적 분노가 고도로 단련되기를! 전동균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수상소감
전동균 全東均
1962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소설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이 있다.
어느 가을날 오후, 짧은 산문을 하나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인즉 ‘백석문학상 수상소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좋아해온 시인의 이름으로 상을 받게 되니, 공연히 먼 데 하늘을 보게 됩니다. 감나무나 소나무의 꺼칠꺼칠한 몸을, 어둡도록 푸른 잎을 만져보고도 싶고요.
백석은 저에게 「멧새 소리」의 시인입니다.
그의 절창 가운데서 유독 이 짧은 시가 남다른 것은 조금은 어려웠던 한시절을 이 시와 함께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백석은 또 선한 미소의 얼굴로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백석 평전』에서 만난 노년의 백석은 헐렁한 옷차림에 고개를 약간 옆으로 숙이고 있었고, 어딘가 좀 아픈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 모습이 제게는 맑게 웃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평생을 정직하게 흙을 일구며 산 농부가 얻을 수 있는, 삶의 질곡을 온전히 통과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런 웃음 같더군요.
무엇보다 백석은 순정(純情/純正)의 시인입니다.
그의 언어도, 시를 낳은 마음도 그러합니다.
이 순정함의 의미는 특별합니다. 지금 우리는 언어가 지닌 영혼뿐 아니라 사전적 의미조차 뒤틀리고 부서지는, 심지어는 언어가 거짓과 폭력의 도구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언어는 신성한 약속 아니던가요? 그래서 어떤 신비나 비의 속에서 탄생한 시도 사람과 세상을 떠나서 살 수는 없는 게 아닌지요.
그 처음의 약속, 첫 마음을 잃지 않는 자리에 삶과 문학이 있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모자람이 많은 시에 격려의 손길을 건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혼잣말일지라도, 고해(告解) 같고 기도 같은 질문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쓰고 끝맺으려니까, 제 속의 누군가가 한마디하는군요.
“이봐, 어쨌든 흰 당나귀 한마리쯤은 구해야 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