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경위

 

올해 사회인문학평론상 공모에는 모두 44편이 도착했다. 세명의 심사위원이 1차 검토를 걸쳐 본심 대상작으로 총 5편을 선정했다. 101일 열린 심사회의에서는 우선 박가분과 정인의 글로 대상을 좁혔으며, 다시 집중적인 검토와 논의를 거쳐 박가분의 「변신하는 리바이어선과 감정의 정치」를 제4회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사평

 

먼저 올해 응모작 가운데는 세월호참사를 직접 다루고 있는 글이 많았다는 사실과, 꼭 그렇지 않더라도 화두나 문제의식에서 대부분의 원고가 세월호의 의미와 씨름 중이었음을 밝혀둔다.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는 누구도 벗어나기 어려웠을 터이다. 우리 사회의 과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거부하고 현실의 난관을 직시하고자 한 글이 많았던 것도 세월호참사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풀기 어려운 현실의 교착상태를 비평적 개입을 통해 타개하려는 모습은 해를 더해가는 사회인문학평론상이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는 증표라 할 것이다. 본 공모에 관심을 가지고 훌륭한 원고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본심에 올라온 5편 중 우리 사회를 옭죄고 있는 ‘종북 프레임’에 대한 정면돌파를 시도한 박천우의 「이것은 종북이 아니다」는 천안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한 진보개혁진영의 소극적 대응을 질타하는 기개가 돋보였다. 다만 종북 프레임의 문제를 정치커뮤니케이션 문제로 접근하면서 분단현실의 역사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영광의 「잃어버린 장소를 찾아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또하나의 ‘핵심현장’이라고 할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을 삶의 양식의 문제로 그려낸 수작이다. 급박한 현실의 투쟁과 철학적 사유를 결합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인상적이었지만, 결론이 다소 범상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정기석의 「침몰의 나선, 우리 시대의 배」는 르네쌍스 초기의 그림인 <광인들의 배>와 세월호를 대비시킴으로써, 사회적 낙오자를 고립시키고 침몰시키는 우리 사회의 특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폭넓은 인문학적 탐색이 본 상의 취지와 잘 맞는다고 보았으나, 신자유주의의 구체적 양상을 심도있게 파고들기보다는 그 자체로 자명한 개념이자 현실로 간주한 점이 한계로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함께 거론된 정인의 「주체성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21세기 정치의 조건」과 박가분의 「변신하는 리바이어선과 감정의 정치」는 글의 주제의식이나 전개에서 공통점이 많아 흥미로웠다. 두 글 모두 끊임없는 접속이 이루어지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적 고립을 조장하는 SNS의 속성에 주목하면서 정치의 가능성을 복원할 길을 탐문하며, 변화된 시대환경을 적극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실천과 사상의 입지가 좁아져버린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사회비평의 본령을 제시했다. 정인의 글은 신경영의 대두나 친밀성의 변화 등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삶의 변화들을 폭넓게 다루면서도 21세기 정치의 조건이라는 문제의식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탄탄한 필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새로운 서사 가능성의 발명이라는 결론이 더 큰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미리 규정된 신자유주의적 시공간의 틀을 넘어서 한국사회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감정의 전염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반응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시도한 박가분의 글 역시 근대사회의 감정정치를 분석하고 새로운 감정회로의 설계를 제안하는 과정에서 감정과 매체의 관계뿐 아니라 정보 및 기술의 문제를 단순화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시대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실종된 채 감정의 폭주만이 만연한 현상을 비판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지식인의 사상적 책무라는 묵직한 주제를 힘있게 풀어낸 이 글은 응모작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바가 있었다. 결론에서 제시된 레닌주의적 상상력에 대해 심사위원들의 입장은 조금씩 달랐지만 공포와 분노가 가득한 시대를 넘어서는 방안으로 희망과 용기 그리고 집단적 헌신 같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옹호하는 젊은 비평가의 패기를 높이 평가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덧붙여 그밖의 응모자와 이 상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 바라는 몇가지가 있다. 필자들의 주된 연령대에 따른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겠으나, 대부분의 글이 정보·네트워크 사회, 소비문화와 신자유주의적 주체 등 젊은 도시인들에게 익숙한 주제에 국한되었다. 그런 점에서 비평의 주제를 다양한 삶의 영역이나 계층, 집단으로 확대하고, 분석의 시야에서도 한반도적·동아시아적·지구적 시각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문화비평이 주를 이루는 상황, 역사적인 분석이나 사회현실에 대한 자료를 직접 모아서 작성하는 글이 드물다는 것 역시 아쉬운 점이다. 분과학문의 틀을 벗어나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통합적 연구를 지향하는 사회인문학의 취지를 상기한다면, 사회인문학이 어떤 것인지는 여전히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여러 현장과 학문영역에서 활동하면서 학문의 실천성과 현장의 성찰적 분석에 매진하시는 다양한 연구자와 활동가 제위께서는 사회인문학이 어떤 것이라고 예단하지 말고 자유로이 응모해주시기를 기대한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더불어 학문과 실천의 경계, 학술과 운동의 경계뿐 아니라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삶을 바꿀 수 있는 글쓰기를 추구하는 사회인문학의 문제의식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수상소감

 

박가분 본명 박원익(朴源益)

1987년생.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 재학 중. 저서로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일베의 사상』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등이 있음.

 

 

 

우선 오랜 기간 한국의 진보사상 및 담론을 선도해온 『창작과비평』의 사회인문학평론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비평의 역할이 모호해진 현 상황에서 창비가 이러한 공모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반갑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본고의 착상에 기여한 번역가이자 철학자이며 개인적 스승인 이성민 선생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립니다.

사회인문학평론상이 인문학적 지식을 버무린 이런저런 사회평론을 권장하기 위해 제정된 상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같은 평론이라면 차고 넘치며, 유행마저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평’의 역할을 복권하는 역할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습니다. 비평의 어원은 비판(Kritik)으로서, 그 역할을 최초로 자각한 사람은 아무래도 칸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칸트는 일생을 걸며 비판의 강령적 역할을 모색했던 인물입니다. 정당에 강령(program)이 있다면 학자에게는 비판이 그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적어도 칸트는 그렇게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학부 간의 논쟁』에서 칸트는 학제적인 구분을 넘어서 학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으로 택한 이후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맑스의 『자본론』뿐 아니라 케인즈의 『일반이론』 역시 자세히 보면 ‘비평’적인 저작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협의의 경제학을 넘어선 시대에 대한 비평일 뿐 아니라 동시대의 학문지식 체계에 대한 비판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후 두 저작은 학제구분을 넘어선 지식사회의 공공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비평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됩니다. 아니, 비평에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중매체가 발전한 오늘날 사회문제에 대한 평론은 TV의 예능시사 프로그램과 인터넷 및 SNS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모두가 각자 관심있는 분야에 대한 비평가를 자임하는 시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잠시 여기서 화제를 돌려볼까 합니다. 제가 대학에 적을 두면서 가장 문제를 느꼈던 것은 지식인의 냉소와 무기력만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어느정도는 바깥 사회를 냉철하게 바라보며 그 나름의 비판적 분석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대학 및 지식사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학문연구는 이윤에 종속되어 있으며 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대다수 대학원생의 미래는 불안정한 강사 내지는 비정규직 연구자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오늘날 지식인, 학자의 가치는 칸트의 시대에 생각되었던 것보다 더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위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학자의 시선은 멀리 있는 권력, 특히 정권과 거대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에 쏠려 있습니다. 그에 비해 시간강사의 처지, 학벌사회, 이윤에 대한 학문의 종속, 대학사회 내의 위계질서에 대한 비판과 대안 모색은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비평의 시급한 역할은 큰 것과 작은 것,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 정치권력과 지식권력에 대한 비판을 병행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지식인과 학자 들이 현실에 만연한 정치적 무기력과 냉소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무기력한 야당’과 ‘역동적인 거리의 정치’라는 구도가 빚어낸 독특한 정치문화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정치문화는 일정부분 교착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광우병 촛불시위에서 세월호 침묵행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대중행동도 근본적으로 승리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어떤 사상도 현실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응모한 글도 바로 그같은 현실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강한 야당’ 내지는 ‘정당정치’의 복권과, 한층 강한 ‘거리의 정치’의 복원이라는 두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지식인과 학자 들이 정당관료가 되는 넓은 길과 거리의 정치에 사상적으로 복무하는 또 하나의 좁은 길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응모작을 통해 후자만이 사상과 비평에 제 역할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는 데 한표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의 학자 카라따니 코오진(柄谷善男)이 정식화했듯 비판이란 근본적으로 ‘이동하는 비평’이라는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에게 비판이란 지식사회 안팎을 이동하는 비평인 동시에 학문과 실천을 오가는 비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온전한 의미의 ‘비판’을 복원하고 그것을 젊은 학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강령’으로 만드는 실천에 동참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