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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정화 崔正和

1979년 인천 출생. 2012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이 있음. daysmare@hanmail.net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라는 제목이 달린 그 그림은 싸이즈가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캔버스에 그려졌는데, 전시된 다른 작품들이 회색을 섞어 둔탁하게 가라앉은 느낌을 주는 것과 달리 강렬한 원색의 파란 물감을 써서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그린 것 같았지만 이목구비를 흐릿하게 처리한데다가 배경에는 크기를 비교할 만한 마땅한 사람도 사물도 없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키가 큰지 작은지조차알 수 없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그 남자는 이십대의 청년 같기도 했고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어선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남자에게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가 입고 있는 푸른 코트뿐이었다.

그림 앞에서 한동안 꿈쩍도 않고 넋이 팔려 있다가 함께 전시회를 보러 온 남편이 언제부터인지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무평 남짓한 전시장을 세번이나 둘러본 뒤에야 나는 남편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출입문의 대각선 반대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도록을 읽고 있었다. 사실 갈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얇은 종이책자를 무릎에 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긴 했다. 다만 그게 남편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낯선 사람을 쳐다보듯 한동안 남편을 관찰했다. 펼쳐놓은 지면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러 있고 책장은 넘기지 않고 있었다.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거나 아니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가는 대신 다시 그림 앞에 섰다. 그림에서 눈을 떼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이번에는 남편을 찾는 데 시간이 좀더 걸렸다. 소파는 이제 비어 있었고 남편은 이번에도 그림을 감상하는 무리들 틈에 없었다. 남편을 발견한 곳은 정수기 앞이었다. 그는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중이었다. 나는 남편이 종이컵에 냉수를 받아 연거푸 두잔을 마시는 모습, 종이컵에 남은 물을 바닥에 흘리고 구두창으로 대충 문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문득 그가 불필요하게 덩치가 크다고 느꼈다. 평소보다 키가 오 센티미터 정도는 더 커 보였다. 목은 짧고 둔하며 허벅지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두껍다고 느꼈다. 그의 신체가 불균형해 보이니까 바닥에 흘린 물을 구두창으로 문지르는 행동마저 그가 평소에 드러내지 않던 부도덕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의 사소한 행동 때문에 그의 신체 전체가 불균형하다고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 그림은 거대한 쇼핑몰 건물과 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세명의 여중생이었다. 그림은 별 감흥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다른 그림을 보면서도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만 어른거렸다. 그림 속의 남자가 실존하는 인물일 거라는 생각에 그 남자가 진기와 아는 사이일 거라는 생각이 덧붙었다. 이따 진기에게 그 그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물어보기로 했다. 그 남자를 실제로 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그림 속의 남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며 나머지 그림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제일 마지막 그림역시 흐릿한 회색 배경에 사람들의 얼굴이 둥둥 떠다니는 그림으로, 어떤 사람의 코는 누군가 베어문 듯 패어나가 있었고 어떤 이는 뒤통수가 있어야 할 부분이 비어 있었다앞에 섰을 때 남편이 내 옆에 와 섰다.

이 미술관 요즘 대센데 진기씨가 장소 컨택을 아주 잘했네.

남편은 내 친구 덕분에 오랜만에 이런 문화생활을 하게 되니 마음이 다 개운해진다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개운하다는 것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그림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남편은 그림들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편의 처진 눈매에는 졸음이 그득했다. 그림에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서서 전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태도였다. 남편의 나른한 얼굴을 향해 ‘좀더 관심을 갖고 제대로 감상을 해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아주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남편의 얼굴이 전과 전혀 다르게 보였다. 진하게 쌍꺼풀 진 눈은 토끼의 동그란 눈처럼 지나치게 동그래서 어리석어 보였고, 평소 내가 좋아했던 갸름하고 부드러운 턱선은 남자답지 못한 유약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통통한 입술은 불만스럽다는 듯 툭 튀어나와 보기 싫었다.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선명해서 부담스런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였던 얼굴이 눈에 거슬리자 내가 더 당황했다. 남편에게는 일단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출입문을 빠져나왔다.

전시회와 복도를 가르고 있는 유리벽 앞에 섰다. 남편은 아까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신나 보여서 나는 좀 의외였다. 그림의 어떤 점이 그를 신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슬쩍 비켜서서 다시 보니까 남편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그는 요즘 SNS에 빠져 있는데 아마 전시장의 그림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도 휴대폰을 너무 쥐고 산다는 이유로 그에게 화를 냈다. 남편은 나를 빼고 모두가 SNS를 하고 있다고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다. 오로지 나만이 세상의 흐름에 뒤쳐져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과 재미를 모르고 있으며, 너는 그게 고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라고 비아냥거리며 비난의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남편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남편은 원체 유행에 민감했다. 새로 나온 전자제품은 꼭 사서 사용해봐야 직성이 풀렸고, 인기그룹 멤버들의 이름도 다 알고 있었다. 유행이 지나면 멀쩡한 옷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가 세련되다고 칭찬했지만 내 귀에는 그게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남편과 함께 전시회에 온 것을 후회했다. 진기가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그냥 지나가는 말일 뿐인데 그 말을 굳이 기억해두었다가 그를 억지로 데리고 나온 건 순전히 내 잘못이다. 남편이 그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모처럼 휴일에 집에서 쉬면서 티브이나 보도록 내버려두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립스틱을 고쳐 바른 뒤 다시 전시회장에 들어섰을 때 남편은 진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그가 말실수나 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이 진기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무슨 얘기를 떠들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끼어들었다가 대화가 더 길어질 것이 걱정되었다. 나는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를 좀 더 감상했다.

조금 뒤에 키가 작고 빼빼 마른 여자가 케이크가 든 상자와 작은 난초 화분을 들고 나타났다. 나에게는 그 여자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진기가 그녀를 맞으러 가자 나는 손짓을 해 남편을 불렀다. 나는 진기를 도와 전시회 뒷정리를 하고 갈 건데 당신은 피곤해 보이니까 먼저 집에 돌아가 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괜찮다고 했다. 그는 ‘모처럼 문화생활을 하니까 기분이 꽤 좋다’고 했다. 그는 또다시 문화생활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 단어는 남편이 전시회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증명이었다. 그는 진기가 그린 그림을 ‘문화’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로 뭉뚱그리고 있었다. 나는 왜 남편이 평소와 달리 눈치 없이 구는지 몰랐다. 하지만 억지로 들어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남편과 나는 전시회가 끝나고 술자리에까지 참석하기로 했다. 남편은 진기에게 마감시간을 묻더니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술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져서 어느새 밤 열한시가 지나고 있었다. 진기와 나는 이십년지기 친구로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전에는 한번도 진기의 그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진기도 나에게 딱히 그림에 대한 의견이나 감상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대체로 기분을 들뜨게 하거나 가라앉히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공유하는 사이로, 나는 평소에 진기가 화가라는 사실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았다. 진기가 무얼 그리는지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술자리에서 나는 진기에게 그림에 대해서 물었다. 질문이라고 하기도 뭣한 단순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이 질문은 내가 진기의 그림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뜻했다.

나는 진기에게 그 그림 속의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진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진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시선을 슬쩍 돌려 남편을 쳐다보았는데,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기가 무슨 중요한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이야.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다 가정을 꾸리는 동안 짝을 찾지 못하고 혼자 지내던 진기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느냐며,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남편이 맥주를 비우더니 술을 채워달라고 빈 잔을 내밀었다. 남편은 내 질문이 전시회의 뒤풀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이번에는 남편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져 다른 테이블을 쳐다봤다. 그러나 좀 전보다는 빨리 결단을 내렸고, 새로 사귀고 있는 애인이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거기서 질문을 멈춰야 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 사업이라는 게 뭔데?라고 또 물어보았다. 이제 진기는 확실하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 이번에는 망설이지도 않고 수출업과 관련된 것,이라고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나는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는?

스물여덟.

진기가 대답했다.

스물여덟?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스물여덟에 무슨 수출업 사업을 한대?

스물여덟이랑 수출업 사업이 무슨 상관이 있지?

진기가 나를 노려봤다. 진기의 오른손이 옆구리에 올라갔다. 진기의 눈빛이 무섭게 변해 있었다. 검은자위가 커져서 홍채까지 완전히 뒤덮을 지경이었다. 진기는 애인이 좀 이따 이리로 올 거니까 그때 인사를 시켜주겠다며 대화를 정리했다.

한동안 유쾌한 분위기가 흘렀는데 나는 문득 시계를 보다가 그런데 그 남자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별 생각이 없이 그가 언제 오는지 물었다. 진기는 시계를 확인하더니건성으로 블라우스의 소매 끝을 들어올렸을 뿐 진짜 시간을 확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그가 곧 올 거라고 대답했다. 진기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 나는 진기가 내 뺨이라도 때리는 줄 알았다. 진기는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내가 탓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변명을 시작했다.

너가 몰라서 그러는데 요즘은 그 정도 나이차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스무살 차이 나는 커플이 두쌍이나 있어.

진기는 내가 자기보다 너무 어린 사람을 사귀는 것에 대해 윤리적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파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빨리 보고 싶었던 것 뿐이었는데 진기와 나 사이에는 다시 메우기 힘든 골이 파여 있었다.

진기는 다른 테이블을 살피더니 술을 더 주문해야겠다면서 카운터 쪽으로 가버린 뒤에 다시 우리 테이블로 돌아오지 않았고 자정이 되기 전에 남편과 나는 술집에서 나왔다. 남편은 내게 핀잔을 주었는데 내가 자꾸 쓸데없는 데 관심을 보이니까 진기씨도 그러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당신은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인간관계도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고 변한다고. 요즘에는 아무리 친구라도 그렇게 사적인 질문을 할 때는 조심스러워 하는 게 대세야.

남편은 나를 어르듯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인데 원치 않는 질문을 던져 진기를 곤란하게 한 것 같기는 하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진기 편을 드는 남편이 얄미웠다.

요즘이 개인주의가 대세이건 아니건 아무 상관없어. 진기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냐. 우린 그 정도 얘기는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진기가 아까 그렇게 화를 낸 건 그애가 술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명했다.

아까 보니까 취해서 눈이 완전히 풀려 있더라고. 난 동공이 그렇게 커진 사람은 처음 봤어. 걘 완전히 취했어.

야, 너 지금 써클렌즈 얘기하는 거지?

남편이 집게손가락을 세워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진기씨 오늘 보니까 써클렌즈 꼈던데 너 그게 뭔지도 모르지? 너 지금 써클렌즈 보고 동공 풀렸다고 얘기하는 거지? 응?

남편이 깔깔 웃었다.

그게 렌즈야?

나는 말끝을 흐리며 앞장서 걸었다. 뒤에서 남편이 웃음을 참느라고 피식거리며 뒤따라왔다.

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파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림 속 인물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아, 그가 어떤 사람일까, 그를 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는 것뿐이다. 진기를 비난할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진기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미안하지만 오히려 문제는 좀 이따 술집으로 올 거라던 진기의 애인이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데 있다.

 

저녁식탁을 차리기가 귀찮지 않느냐면서 남편은 휴대폰에 저장된 할인쿠폰을 보여줬다. 남편의 회사와 제휴를 맺은 상대 기업이 외식업을 시작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체인점이 들어섰다고 했다. 쿠폰은 개장 이후 한달 이내에 사용할 수 있는데 이제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다음주와 다다음주에는 주말에도 근무를 해야 하니까, 오늘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순순히 남편을 따라나섰다.

남편은 스테이크를, 나는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남편은 쿠폰을 사용해서 오천원가량을 할인받은 것 때문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후식으로 초콜릿을 얹은 레몬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남편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당도는 강한데 칼로리가 거의 없다고 설명해주면서 마치 자기가 그 케이크를 개발한 사람처럼 굴었다. 케이크에 들어 있는 초콜릿 성분 때문인지 남편은 가볍게 흥분한 상태였다.

남편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손가락으로 옆테이블을 가리켰다.

건너편 테이블에는 남자와 여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는 이십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여자는 그보다 열살은 더 많아 보였다. 남자 쪽에서 연상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여자에게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서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것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둘 사이에는 긴장감이 떠돌고 있었다. 여자는 오래 눈을 맞추고 있기도 어려웠는지 대화 도중 테이블의 찻잔이나 벽에 걸린 장식품이나 오가는 점원들로 가끔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남자 쪽에서 더 적극적인 게 분명했다. 그는 여자를 향해 조금씩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고 상체를 앞으로 향한 채 소매를 걷어붙이고 가끔씩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말투는 일부러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외국에 다녀와서 한국말을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속도가 느리고 어딘가 억양이 부자연스러웠다.

남편이 그쪽을 보다가 요즘은 유부녀가 젊은 애 사귀는 게 유행이라더니,라며 왼손 중지로 테이블을 쳤다.

그런 게 유행이라고?

진기씨도 어린 친구 사귄다고 하지 않았나?

걔는 예술가니까 그런 거고.

남편이 피식 웃었다.

텔레비전이라도 좀 보지그래. 너 인터넷 포털 뉴스도 안 읽잖아. 아무리 연구가 재밌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지.

나는 화장품 성분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 신제품을 개발 중이라 밥을 먹을 때 말고는 항상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신제품 때문이 아니더라도 실은 세간의 유행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길을 갈 때도 남편은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확인하는 데 반해 나는 늘 머릿속으로 피부재생에 효과가 있는 생약 성분들의 결합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어느 상점을 지나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음료를 한잔 더 주문한 뒤에 젊은 남자와 마주 앉은 연상의 여자, 나보다 댓살은 더 많아 보이는 여자의 삶이 어떠할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 나이 또래의 다른 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가정이 있는 여자들이 구태여 왜 다른 남자를 만날까. 왜 그런 일이 유행을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짝짓기 상대가 정해져 있는데 남자 쪽에서 불임이 아니라면 왜 또 짝을 찾아 시간을 낭비해야 한단 말인가. 생물체란 보수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니까 누군가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 여자는 왜 자신에게 줄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 어린 상대를 짝으로 골랐을까? 그가 그녀에게 대체 무엇을 줄 수 있지?

야, 야, 그만 쳐다봐. 저쪽에서 다 알아채겠다.

남편이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테이블을 중지로 톡톡 건드렸다.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로 갔을 때 남편과 나는 다시 그 커플을 마주쳤다. 그들은 내 바로 앞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굽이 없는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도 남자 쪽이 오 센티미터 정도 더 작았다. 계산은 여자가 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그들과 함께였는데 나와 남편의 눈을 의식한 건지 아니면 아직은 서먹한 사이인지 엘리베이터의 양 끝에 떨어져 섰다. 나는 1층 버튼을 누르는 남자의 새끼손톱이 길게 자라 있는 걸 봤다.

그다음에 내가 본 것은 그의 오른팔에 걸려 있는 푸른 코트였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주시하던 불륜의 남자, 그가 바로 진기의 남자친구였다. 그가 내 친구가 사준 코트를 입고 또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남자는 그림 속에서 지금 막 그대로 나온 듯했다. 회색으로 탈색하고 옆머리를 비스듬히 잘라 넘긴 헤어스타일과 검정색 워커가 그때야 눈에 들어왔다. 로비를 빠져나가며 그가 푸른 코트를 걸치자 그림 속의 인물과 완전히 같아졌다.

입맛이 싹 달아났다. 남편도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남편다운 행동이기는 하다. 남편은 구체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지만 먼저 나서서 알은체를 하거나 마음을 쓰는 일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로봇과 같다. 버튼을 누르면 실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괜히 남편에게 뾰로통한 마음이 되어 집까지 가는 동안 아무 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묻는 말에만 아니, 응, 그럴 수 있지, 25일까지, 같은 단답형 대답을 하면서 푸른 코트를 입고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그 젊은 남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에게는 진기에게 진실을 전할 의무가 있었다. 의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책임감이라고 해두자. 아니 그 단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만약에 진기가 내 남편이 외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나에게 전해주기를 바랐으므로, 나 역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목격한 광경을 진기의 기분이 상하게 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남편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고 가끔 알아듣지 못할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진기의 새 애인이 그녀의 예술적 재능에 반했을 뿐 실제로 진기에게 그렇게 많이 빠져 있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는 연상 여자들의 허점을 노리는 킬러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그 나이의 여자들이 젊은 애들의 열정에 쉽게 마음을 열고 과거의 뜨거운 로맨스에 빠지고 싶어하는 심리를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진기가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기의 새 애인은 수출업 종사자가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고, 심지어는 돈 때문에 그애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돈 많은 여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제 또래 여자애들에게 화장품을 사주는지도.

시침이 숫자 5를 가리켰을 때 나는 진기가 애써 그린 그림을 팔아 그 젊은 남자에게 푸른 코트를 사준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더이상 참지 못해 새벽 다섯시에 진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그러지 말아야 했는지도 몰랐다. 남편의 말을 따라야 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의를 지켜야 했는지 모른다. 아침까지 기다렸다면 상황이 좀더 나아졌을까. 햇빛을 받은 뒤에 명료한 정신으로 통화했다면 상황을 좀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까. 진기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좀더 객관적으로 내용을 전달했다면 그애가 속마음을 차분히 내게 털어놓았을까.

진기가 전화를 받자마자 흥분 상태에서 ‘너는 속고 있었다’고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수화기를 쥔 손도 떨리고 있었다.

너 무슨 일 있어? 대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진기는 목이 쉬어 제대로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너가 여태 속고 있었다고.

나는 다시 반복했다. 나는 차마 네 애인이 다른 여자와 있는 걸 봤다는 얘기는 아직 꺼내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속았다는 거야?

너가 속았다고. 그 남자가 너를 속였어.

나는 용기를 냈다.

그 남자?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 말이야.

뭐?

푸른 코트를 입은 사람. 네 애인 말이야.

푸른 코트가, 뭐라고?

진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재야.

진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더 용기를 내어 아까 저녁에 내가 본 광경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진기는 말없이 내 얘기를 경청했다. 얘기가 끝났을 때 진기는 일단 자고 내일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고 오히려 진기 쪽에서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진기는 나보다 침착했다. 진기가 그렇게 나오니까 나는 더 화가 났다. 더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말았다.

그 푸른 코트 네가 사준 거지?

진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된 게 아니라면 나이 어린 애인에게 속아서 비싼 코트를 사준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진기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니가 오늘 본 남자가 푸른색 코트를 입고 어떤 늙은 여자랑 같이 있었다는 거지? 그 얘길 하고 있는 거지, 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놓고?

그렇다니까.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너 푸른색 코트 입은 남자 처음 봤어? 그래서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야?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럼 내가 무슨 수로 네 애인을 전에 또 봤겠어? 난 그 사람 오늘 처음 봤어. 내가 무슨 수로 전에 니 애인을 봤겠어?

진기는 한숨을 쉬더니 자기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자다가 겨우 한시간 전에 수면유도제를 먹고 잠에 들었다고 한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해서 말한 뒤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몰랐다. 만일 내게 잘못이 있다면 요즘 시대에 유행이라는, 그 철저한 개인주의에 기반한 인간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점점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진기가 애인에게 사준 푸른 코트가, 젊은 사기꾼이 늙은 여자를 만날 때 입고 나간 그 푸른 코트가 우리 집 옷장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손에 힘이 빠져서 옷장문을 닫지도 못한 채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샤워중이어서 나는 그가 나올 때까지 십여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뒤덮었지만 쉽게 판단을 내리지는 말자고 주문을 외우면서, 허리에 수건을 두른 남편이 나타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남편이 흰색 극세사 타월을 허리에 두르고 나타났을 때 나는 열린 옷장 문틈으로 보이는 푸른 코트를 가리켰다. 남편은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랬는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 저거 때문에 그런 거야? 아까 퇴근길에 샀어.

샀다고?

그는 이번에 회사에서 새로 제휴를 맺게 된 회사가 의류업체라서 십 퍼센트나 더 할인을 받았다는 얘기를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원래는 백만원이 넘는 옷인데 겨울도 막바지에 이르렀으므로 삼십 퍼센트 쎄일을 하는데다가 자기는 제휴카드로 계산을 했기 때문에 오십만원을 번 셈이라고 했다.

당신 회사는 왜 그렇게 제휴업체가 많아?

요새는 그렇게 회사마다 다른 업체랑 제휴를 해. 곧 우리 회사가 그 회사를 인수하게 될 거거든.

남편은 이제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었다. 남편은 내가 그 코트를 쳐다보자 옷장문을 닫았다.

별로 안 비싸게 주고 산 거라니까. 요새 웬만한 코트는 다 백만원대야. 모처럼 새 옷 샀는데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절약하고 있어. 제휴 아니면 안 사고 안 먹는다니까.

남편은 자꾸만 얘기를 다른 데로 돌렸다. 나는 더 따질 기운도 없었다.

지금 나한테 저걸 샀다고 하는 거야? 지금 그걸 설명이라고 하고 있는 거냐고?

야, 나도 코트 정도는 니 허락 없이 한벌쯤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저걸 샀다는 거잖아.

그래, 샀다. 내가 샀다고.

남편은 나와 대화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속아넘어가지 않을 거짓말을 끝끝내 참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가 내게 진실을 얘기할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다는 걸 알았다.

상황을 해석해야 했다. 진기의 사기꾼 남자친구의 코트를 왜 남편이 집에 갖고 들어왔는지, 이 수수께끼를 혼자서 풀어야 했다. 진기가 전화를 그냥 끊은 것, 더 거슬러올라가 그날의 술자리, 내가 처음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진기가 남편을 쳐다봤던 것, 연하를 사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진기가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뿜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결국 그날 술자리가 끝나고 남편이 내게 화를 내면서 진기 편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걸 생각해내자, 진기가 전시회에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했던 것도 떠올랐다.

위가 쓰리기 시작했다. 그날 진기가 내게 괜히 날을 세웠던 것, 남편이 대화에 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그리고 전시회에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그 모든 일들이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됐다. 내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 한가지 요소가 나를 이러한 혼란 속에 빠뜨렸고, 나는 그것을 찾아냈다.

바로 남편이 그림의 모델이었다는 사실. 남편은 진기와 만나고 있다. 진기는 늘 새로 남자를 만날 때면, 서로 호감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부터 나에게 의논을 해왔다. 유독 이번에만 그러지 않았다. 애인이 온다고 했는데 안 온 것이 아니라, 그날 술자리에 진기의 애인이 있었다. 다만 오직 나만이 그게 누군지 몰랐던 것뿐이다. 둘은 용케도 나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

나는 남편이 있는데 다른 남자를 만나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수많은 다른 남자들을 놔두고 굳이 친구의 남자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새로 하나를 얻을 수 있는데 굳이 하나를 잃으면서 다른 하나를 얻는 선택을 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내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포털 뉴스를 읽지 않고, 하루 종일 화장품 성분이 될 실험에 골몰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적어도 내 남편과 친구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결격사유가 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티브이를 틀어보고 인터넷 창에서 뉴스와 광고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도저히 관심이 가지 않았다. 거기에는 나를 자극하는 어떤 흥미로운 요소가 없었다. 나에게는 인간의 피부와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 식물의 세포분열 쪽이 훨씬 구미가 당겼다. 나는 세포분열을 할 때 줄기세포가 갈라지는 모양이 공중에서 오로라가 뻗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나는 세포분열을 찍은 파일을 볼 때 남편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SNS에 멘션을 달 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 사이의 문제였을까. 언젠가부터 퇴근 후 집에 가서 남편과 식사를 할 때면, 전처럼 남편에게 내 실험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편했다.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라면 수컷은 되도록 많은 암컷을 만나는 것이 유리하다. 진기와 만나는 남편의 선택에는 분명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그 과학적인 진실과 별개로 그와 내가 쌓아온 어떤 신뢰가 무너졌다. 그런 약속을 명시적으로 한 적은 없지만, 내가 진기를 남편에게 소개했을 때에는, 그녀를 짝짓기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최소한의 약속이 공공연하게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아한 것은 그가 자신이 진기의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자기가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기지도 않고 코트를 과감히 옷장에 넣어두었다는 점이었다. 남편은, 왜 그랬을까?

그때 남편은 현대인에게 의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내게 설파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어떤 옷을 입는지는 그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긴긴 설명 끝에, 나는 너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어,라고 단정지었다. 그는 더 설명하기가 싫다고 했다. 나는 이 시대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네 머릿속에는 연구밖에 없으니까. 지나가는 사람한테는 관심도 없으니까. 이 시대에 관심이 없다고. 나는 너랑 있으면 딴 나라에서 온 사람이랑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아. 매번 뭔가 설명해주는 것도 이제 지겨워. 너랑은 더이상 말이 안 통해. 이해를 해보려고 하지도 않잖아.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더니 남편은 푸른 코트를 꺼내 입고 나가버렸다.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의 모델이 남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식당에서 만난 그 남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남편의 코트를 왜 그 젊은 남자가 입고 있었던 것일까?

현관문이 닫히고 자동잠금장치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베란다에 서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건너편 건물들마다 네모난 창을 통해 환하게 밝혀진 형광등 불빛에 동공이 환하게 열렸다. 나는 코코블록 마을처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낯익은 풍경에 시선을 팔았다. 그 거리를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가 걷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남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알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차 있고, 당장이라도 하늘 높이 날아오를 듯 몸이 가벼워 보인다. 마치 자기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장소를 찾았다는 듯, 그곳으로 갈 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듯 보였다. 푸른 코트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다. 코트는 그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남편에게 묻고 싶다. 다시 한번 듣고 확인해야겠다. 정말 나랑은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지. 나랑 얘기하는 게 답답하기만 한지. 어쩌다 가끔 내가 모르는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평소에도 늘 그렇게 느끼는지. 다시 한번 더 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도 단념을 하든 노력을 하든 무슨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그래? 나랑 사는 게 다른 시대에서 온 사람이랑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싫기만 해? 처음에는 그런 내가 신기하고 재밌다고 좋아했잖아. 밤하늘에 깜빡이는 게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는 걸 가르쳐주면서 즐거워했잖아. 자기는 설명하는 걸 좋아하니까 내가 모르는 게 많아서 좋고, 다른 여자들은 브랜드 같은 거에 목을 매는데 나는 그런 걸 구별하지 못해서 더 맘에 든다고, 내가 신선하다고 그랬잖아. 마음이 달라진 게 언제부터야.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신고 복도를 향해 뛰어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남편이 지나간 거리를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붉은 신호를 무시하고 이차선 도로를 건너 대로변의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남편을 찾았다. 그가 차를 타지 않고 버스를 기다리는 이유는 몰랐지만 다행히도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질문을 던질 시간은 허락된 것이다. 나는 유리문에 기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남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자,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세요?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느라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망연자실한 표정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위로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네요.

남편은 어디 있어요?

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제 남편이요. 지금 댁이 제 남편 옷을 입고 있잖아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 코트 말이에요?라고 물었다.

네, 그 코트요. 입고 계신 그 코트가 제 남편의 옷이잖아요.

나는 아직도 숨이 차서 겨우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남자가 웃었다.

이 코트가 남편 옷이라니요. 이건 제 돈 주고 제가 산 제 옷이에요.

그릴 리가 없어요. 이건 제 친구가 남편에게 사준 옷인데. 푸른 코트잖아요. 제 친구가 그린 그림 속에 있던 코트가 이 푸른 코트고요.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이 코트 입은 사람 처음 봤어요? 이 색깔 코트가 지금 유행이잖아요.

남자가 이상한 사람을 보듯 나를 힐끗 쳐다보고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두어걸음 물러섰다. 곧 23-1번 버스가 정차했고 남자는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창가에서 나를 보았다. 나도 그를 보았다. 버스가 떠났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떠난 것은 길거리에서 처음 본 남자일 뿐인데 나는 버려진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허망한 마음이었다.

다시 아파트 단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좀 보고 다녀. 세상에 관심을 좀 가져보라고.

남편의 목소리가 귀를 맴돌며 반복되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점마다 간판에 두른 네온사인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고 사람들의 표정은 지나치게 밝아 보였다. 그들의 동공은 약에 취한 듯 환하게 열려 있었고 발걸음이 빨랐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혼잣말을 하면서 걷고 있기에 자세히 살펴보니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핸즈프리였다. 남편이 그걸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남편이 내 것도 주문하겠다고 했지만 거절했었다. 난 걸으면서 통화하는 걸 싫어하는데, 걸을 때는 그냥 걷기만 하는 게 좋고 전화를 하는 것보다는 만나서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좋으니까, 내가 다른 시대에서 왔거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그게 좋아서 그랬다.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옷가게를 지나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멈춰섰다. 쇼윈도의 마네킹이 푸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마네킹은 목 위로 둥근 구의 형태를 얹고 있었다. 눈, 코, 입이 없었고 코트 아래로는 역시 허연 플라스틱 다리가 세워져 있었다.

유리벽의 안쪽에는 가위로 오려낸 잡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젊고 잘생긴 한 남자가이름은 몰라도 그 남자가 연예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푸른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나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나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진기의 그림 속 모델이 입었던 코트가, 식당에서 만난 젊은 남자의 코트가, 남편이 제휴카드를 이용해 할인을 받아 샀다던 코트가, 정류장에 서 있던 낯선 남자가 입고 있는 코트가 하나가 아니라 모두 다른 코트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른 코트가 유행이라는 사실 외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다행일까? 나를 혼란에 빠뜨렸던 질문,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가 누구인지는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것은 애초에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으므로. 문제는 이제 내가 무엇을 궁금해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데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는 남편과 키가 비슷하고 남편의 걸음걸이를 닮았으며 남편과 똑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가 푸른 코트를 입었다는 사실과, 그 코트가 유행이라는 사실 외에 그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하는 바가 없다. 그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나를 꼭 안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안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의 품에 안겨서 쇼윈도의 마네킹을 바라본다. 마네킹은 나를 안고 있는 남자와 똑같은 푸른 코트를 입고 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다. 지금은 남자들 사이에서 푸른 코트가 유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