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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소연 金素延 시인. 저서로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이 있음. catjuice@empas.com
김정환 金正煥 시인.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텅 빈 극장』 『해가 뜨다』 『드러남과 드러냄』 『거룩한 줄넘기』 『유년의 시놉시스』 『거푸집 연주』 등 다수의 저작과 번역서가 있음. maydapoe@hanmail.net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저서로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백지연 『창비』 50주년을 기념하는 봄호 문학초점 좌담에서 뵙게 되어 기쁘고 반갑습니다. 김소연 시인께서는 저와 함께 올 한해 문학초점 좌담을 진행해주실 예정이고요. 이번 초대손님으로는 김정환 시인을 모셨습니다.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두분의 근황을 여쭙고 싶은데요. 김소연 선생님께서는 새로운 독립잡지 『조립형 text』 창간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과 함께하시는지요?
김소연 시인 유희경 송승언 신해욱 하재연, 디자이너 김재연씨와 함께 독립출판으로 준비 중이에요. 함께하는 출판사 이름은 ‘눈치우기’이고요. 소셜펀딩 사이트 ‘텀블벅’이랑 SNS에서 홍보를 해서 독자 지원을 받았어요. 한 이년 정도를 만나서 준비해왔는데 서로 다른 의견을 듣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백지연 작년 하반기부터 기성 잡지 형식과는 다른 무크지나 새로운 형태의 문학잡지 들이 여럿 창간되었는데요. 문학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느낌입니다. 출간될 새 잡지가 기대되네요. 김정환 선생님은 주로 행사 뒤의 모임에서 뵙곤 했는데 이렇게 환한 낮에 마주 앉아 문학 이야기를 나누려니 새삼 낯설기도 한데요.(웃음)
김정환 그러게요. 누가 나를 이런 자리에 부르라고 했을까.(웃음) 두분과 책 이야기 나눈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왔고요. 이번 기회에 제가 읽고 좋았던 책도 추천했고 그냥 지나칠 뻔한 책도 새롭게 읽었네요.
김이정 장편소설 『유령의 시간』
백지연 그러면 소설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보겠습니다. 김이정(金夷貞)의 『유령의 시간』(실천문학사 2015)인데요. 작가의 성장사와 아버지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념적 선택으로 인해 전쟁 때 가족과 헤어지고 월남하여 또다른 가족을 이루고 살아온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인데요. 김이정씨가 본격적인 장편 형식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것은 처음이지요. 식민지 시기와 분단의 역사를 배경으로 ‘아버지의 생애’를 돌아보는 방식은 우리 소설사에서 아주 익숙하긴 합니다만 딸의 시선에서 아버지의 삶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다룬 작품이 많지는 않았는데요.
김소연 저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딸 ‘지형’의 시점과 아버지 ‘이섭’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서사가 전개되잖아요. 아버지가 겪은 백년 한국역사의 엄청난 비극들을 ‘유령의 시간’이란 말로 압축했다고 여겼어요. 이 유령 같은 세월이 실재할 수 있게 복원하려는 노력으로써 아버지의 시점이, 그런 아버지와 이산가족이 되어 살아온 자식이 겪은 상처들에 대한 성장서사로써 딸의 시점이 작가에겐 필요했으리라 보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복원도 온전해지고 성장서사도 온전해진다면, 이 소설은 개성이 없겠는데?’ 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어요. 좀 전형적일까봐 염려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아버지의 복원은 디테일이 아주 좋았어요. 너무 따뜻하게 감싸안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요. 아버지 이야기에 비한다면 지형의 성장서사는 마지막에서 오히려 좌절된다고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창문을 열고 아파트단지를 향해 지형이 비명을 지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는 온전하게 건사하고, 하나는 실패를 지향하는 작가의 선택이 이 소설을 빛나게 했다고 생각해요.
김정환 김이정씨가 다룬 아버지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고 계속 써야 하는 소재가 맞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읽으면서 뭔가 계몽적인 언어와 익숙한 구도로 역사와 이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60~70년대 한국소설들에서 많이 본 익숙한 사실주의 기법이기도 하고요. 평단에서는 이런 소재의 소설이 나오면 ‘이런 것도 필요하다’고 얘기하면서 의의를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이제는 소설이 역사를 다룰 때 어떤 계몽의 방식을 넘어서 현대의 수준으로 넘어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문득 인혁당 사건을 다룬 권여선의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이 떠오르네요. 어떤 사람들은 이 소설이 비극적인 역사의 공간을 왜 그렇게 아이의 시점으로 제한해서 썼는지 비판하기도 하던데요, 저는 이러한 시점과 묘사가 부조리한 상황 자체를 심화해 보여줄 뿐 아니라 끔찍한 역사적 비극을 퇴화시키는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 되묻는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신비한 독서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성태의 『두번의 자화상』(창비 2015)에 실린 작품들을 읽고서도 그런 경험을 했고요. 문학과 역사를 성찰하는 것을 작가의 생명으로 걸고 밀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현재적으로 와닿을 수 있는 형상화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백지연 『유령의 시간』이 평이한 연대기적 서술이나 주제의식의 직설적인 전달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선택한 성숙한 딸의 관찰적인 시점과 아버지의 확대된 목소리는 어느정도 의도적인 것 같아요. 김소연 선생님이 이야기하신 성장서사로서의 좌절이 깊게 와닿는 것도 그런 구도에서 비롯된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흔히 아버지의 이념적인 선택 때문에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다루는 기존의 많은 소설들에서는 ‘나’의 상처와 갈등을 크게 강조하는데요, 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존재였고 나는 어떻게 아버지를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큰 거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내려는 어른으로서의 딸의 시선이 처음부터 강하게 받치고 있어요. 아버지의 삶 자체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까요. 계몽적 서사와는 좀 다른 맥락인데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렇듯 담담하게 쓰기 쉽지 않은데, 마지막 장면까지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기록들과 싸워가는 과정이 미덕으로 다가왔습니다.
김정환 기본적으로 ‘복원’이든 ‘발굴’이든 그 자체의 의미는 소중하지요. 그런데 당대의 역사 속에 실제로 부딪쳐가는 삶의 에너지가 소설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죠. 『유령의 시간』이 기록하는 역사적 시간의 감동이 분명 있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정나원의 『아버지의 바이올린』(새물결 2005)이 생각났는데요. 혁명시대부터 개혁개방시대를 거친 베트남 사람들 여러 세대의 삶을 인터뷰한 논픽션이에요. 내용이 무척 감동적이라서 읽으면서 두번이나 울었습니다. 전쟁 이야기라면 신물이 난다고 토로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는 자기들 고생만 우선이고 확실히 어른 세대에 대한 연결고리가 없구나 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솔직한 목소리들이 남기는 여운이 굉장히 컸어요. 같은 역사를 경험했는데도 세대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는 체험들이 흥미로웠어요. 디엔비엔푸 전투(1954) 때 부모님이 밤에 몰래 보따리 쌌던 이야기를 회고하는 혁명세대 이야기도 있는데요, 프랑스군이 감쪽같이 속을 정도로 비밀리에 밤을 틈타 결집이 진행된 유명한 전투였다는 게 읽으면서 실감나더군요. 이런 치열한 혁명을 거쳤지만 뒤늦게 자본주의 체제로 개혁개방하면서 돌아보니 당의 혁명 노선이 틀렸다고 격렬하게 비판할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진짜 삶이 아닌가 싶어요. 어쨌건 인간이라는 짐승이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어떻게까지 가보다가 깨닫게 되는 현실 말입니다. 그 현실을 포괄하는 문체랄까 구도랄까 미학이랄까, 그런 것 속으로 소설이 들어가야 해요.
김소연 르뽀르따주와는 다른 소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현실을 포착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러려면 역사적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할 텐데요. 역사의 피해자라는 단순한 인식만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안에 내재된, 이런 역사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인자들을 공격하고 까발려야 하겠죠. 그러기에 『유령의 시간』은 다소 낭만적인 면이 있어요.
백지연 부모의 서사를 다루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가 낭만적인 현실인식과 얽혀 있긴 합니다. 딸인 지형은 나약하고 허위적인 아버지를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만큼 엄마의 삶 역시 모호하게 바라보는데요. 엄마는 호적 등본에도 오랫동안 기재되지 못하고 아버지의 첫 부인이나 영석이 엄마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며 살았어요. 소설에서 그런 엄마의 절절한 삶이 아버지의 삶과 어우러져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지형이 아버지의 자서전을 이어쓴다는 설정이나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해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보려는 것은 오히려 결말을 위한 관습적 장치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연좌제 문제라든지 사회안전법 문제의 이야기를 지형이나 가족의 관점에서 현재적으로 더 살렸으면 좋았을 텐데 싶습니다.
김정환 아이가 상처를 받고 성장통을 앓는 과정에서 한발 나아갔더라면 이 소설이 새로운 차원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다른 예를 들자면 최근에 홍명진이 쓴 청소년소설 『우주비행』(사계절 2012)을 읽었는데 참신했거든요. 어른의 시점을 안 버렸지만, 성장의 관점에서 역사적 상황을 다루고요. 어른의 시점이 계몽의 시점으로 고정돼서 우린 이렇게 당했다, 이런 슬픔이 있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거기서 좀더 나아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현재 문학의 차원으로 과감하게 발을 디뎌야 하지 않나 하는 거지요.
김소연 처음에 이야기하셨던 권여선의 『토우의 집』 같은 경우는 주인공이 어른이 아니죠. 그 점이 현실을 용감하게 담아내는 데에 따르는 버거움을 어느정도 완충하는 지점이 되고요. 김이정 소설의 시점은 어른으로서 이것을 감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현재 우리 문학의 한계일 수도 있겠고요.
김정환 그러니까 김이정씨가 의미있는 작업을 했다는 것은 일단 우리가 전제하고,(웃음) 이것저것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거죠. 이른바 옛날식의 참여소설이나 역사소설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텐데, 정치가 뒷걸음치더라도 문학은 앞으로 가는 것이지. 정치가 후퇴한다고 문학도 십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이럴 순 없는 것이거든요. 그게 문학의 속성이잖아요.
김소연 아쉬움은 남지만, 서사의 디테일이 주는 흡입력은 굉장히 훌륭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존재를 제대로 복원했다 생각돼요. 1915년에 태어난 인물의 삶을 이렇게 생생하도록 만든 건 여성적 글쓰기여서 가능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백지연 아버지가 새우 양식장을 했던 이야기나 서울에 올라와 직업을 구하는 과정 등등 생활 속에서의 아버지를 평범하고도 세밀하게 잘 그려낸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념적 상징으로 부각되는 ‘아버지 찾기’ 소설들과 달리 현실에서 부대껴가며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섬세하게 담아낸 장점이 있어요. 그 의욕적인 시도를 눈여겨볼 필요는 있습니다. 장편으로는 이 내용을 처음 담아냈으니 이후의 작업도 기대하고 싶어요.
김숨 장편소설 『바느질하는 여자』
백지연 김숨의 『바느질하는 여자』는 630면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장편인데요, 경장편 소설이 추세인 요즘 보기 드문 책입니다. 이 소설은 누비바느질의 명장 남수덕의 생애를 중심으로 두 딸 금택과 화순, 그리고 그들이 우물집에서 살면서 만나고 스쳐가는 무수한 여인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바느질 명장의 세계를 통해 삶과 어우러진 예술이 도달하는 높은 경지를 그려내는 전형적인 예술가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소연 이 작품이 김숨 소설의 정점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그동안 김숨 소설의 독실한 독자였는데요, 한편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숨 소설의 정점이 이 방향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김숨씨가 어느 지면에서 바느질하는 여자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계획을 말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그걸 읽고 이런 소설을 쓰겠구나 하고 예상한 바와 거의 똑같아서요.(웃음)
김정환 아니, 예상이 들어맞는 것도 문제인가?(웃음)
김소연 모티브가 빤히 내재한 상황 전개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이었어요. 지나치게 모범적인 소설을 쓰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다소 실망이 되었어요.
백지연 반대로 저는 지금까지 김숨 소설을 게으르게 읽었나봐요. 공들인 묘사며 탐미적인 문체가 제가 생각했던 김숨 소설을 뛰어넘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물론 선명한 알레고리를 고집하는 작가 특유의 강박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합니다. 바느질이라는 행위 자체가 삶을 한땀 한땀 기워간다는 점에서 소설쓰기의 알레고리로 작동하지요. 바느질의 세계에 대한 화려한 시각적 묘사의 편향에 비하면 인물 간의 관계는 매우 평면적입니다. 어머니의 인정을 갈망하는 두 딸의 관계가 동경과 질투, 선망과 좌절이라는 도식적인 갈등으로 압축되고요.
김정환 소설에 따로 구분되는 장(章)이 없고 소제목들이 연달아 나오잖아요. 이 작품을 읽은 지인이 소제목들을 왜 그렇게 재미없게 붙였을까, 하더라고요. 작가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원래는 아무 제목도 붙이지 않고 쭉 연결해서 썼던 것 같아요. 편집자가 독자를 생각해서 임의로 붙인 거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내가 소제목 없이 한번 끝까지 읽어봤어요. 전혀 지장이 없어요. 그런데 그게 김숨 소설다워요. 다음에 재판을 찍으면 그 소제목들을 모조리 빼는 게 어떨까 싶은데.(웃음)
백지연 그러고 보니 기승전결의 흐름이나 장의 구분은 처음부터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네요. 이 소설은 최근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장편소설의 특징도 부분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읽으면서 윤성희의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이나 성석제의 『투명인간』(창비 2014)이 떠오르더라고요. 인물들의 개별적 특징을 의도적으로 없애는 방식, 사소하고 작은 얘기들이 쉴새 없이 이어지는 흐름 같은 거요. 다른 점이 있다면 김숨 소설에서는 작가가 표현하려는 귀기, 정념, 한과 욕망 등이 뚜렷한 무게 중심이 되어 그 길고 세세한 에피소드들을 끌고 간다는 거지요.
김정환 제가 옛날에 김숨씨의 ‘작가초상’인가를 쓰면서 생각했던 건데요, 카프카는 결국 성에 못 들어갔기 때문에 서정이 있었는데, 김숨이라는 자는 성에 들어가봤더니 정말 별볼일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예요. 그래서 이 자의 장편소설에는 서정이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소설을 읽으면 모두 다른 인물들인데 왜 똑같은 어조로 이야기하는지 궁금하지요. 그런데 김숨은 자기 안의 그로테스크한 것을 계속 풀어내지 않고서는 앞으로 가질 못하는 사람이에요. 작가로 보면 행복이라 할지, 함정이라 할지, 비극이라고 할지.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17,8세기 하프시코드곡 같은데, 제가 예전에 이런 종류의 곡을 500시간 원없이 들은 적이 있어요. 변화도 없고 재미도 없이 계속 치는 걸 그냥 듣는 거예요. 그런데 듣다보면, 아 저런 게 있으니까 세상이 유지가 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그로테스크한 세상을 어쨌거나 살아내기 위한 의도적인 반복이랄까. 김숨 소설의 문체와 구성이 꼭 그래요.
백지연 센 강도로 가해지는 비유적 문체의 동일한 반복이 주는 힘과 쾌락이 분명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려하고 탐미적인 묘사를 연달아 읽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 ‘아, 이게 문장을 읽는 쾌락이구나’ 싶더라고요.(웃음) 소설 초반부에 월성댁과 어머니가 서로를 마주 보며 간절한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 같은 것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들이 살아 있는 시간의 흐름으로 연결되지 않죠. 그것도 기이해요. 소설에서 유일하게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은 금택과 화순의 성장으로 알 수 있는데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로 놓여 있을 뿐 사물들의 묘사와 관계를 맺지 못해요. 묘사가 질주하고 인물들은 그에 끌려간달까요.
김정환 저도 김숨 소설을 챙겨서 읽는 편인데, 단편은 문장이며 구성이 깔끔한 게 많아요. 근데 장편만 일단 들어가면 이렇게 작가의 태생적인 그로테스크한 감수성을 죽어라고 풀어내요. 소설이 끊기면 작가의 삶도 끊어진다고 했을 때, 작가로 살아온 이유에 대해서 계속 이런 방식으로 소설적인 제의를 행하면서 묻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읽으니까 왜 장편만 오면 문장이 이렇게 흐트러질까 싶다가도 그것도 의도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 예술을 하기 위한 제의로서 글쓰기가 놓여 있다는 느낌. 어쨌거나, 지독하다 싶어요.
김소연 작가에게 작품이 독하다, 집요하다, 장인이다 같은 말을 하는 건 칭찬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작품 속에서 읽어낸 게 작가의 노고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런 칭찬은 소설가에 대한 경의일 뿐, 텍스트에 대한 경의는 아닌 것이죠.
백지연 집요한 묘사의 편향은 인물들에서도 뚜렷이 나타나는데요, 소설에서 누비바느질의 명장인 어머니는 무척 차갑고 신비스럽게 그려집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말을 건네거나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소설 말미에야 어머니가 바느질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짤막하게 요약되어 툭 던져지는데요, 이 어머니는 여성이지만 전형적인 가부장 아버지나 호되게 제자를 가르치는 남성 스승의 모습을 띠고 있어요. 박경리의 『토지』라든지 최명희의 『혼불』에 등장하는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 같기도 하고요. 유교적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는 여성에 대한 미학적인 형상화랄까요. 물론 박경리와 최명희의 소설에서는 엄격하고 신비스러운 여성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뛰노니까 서사가 닫히지 않는데, 이 소설에서는 어머니의 캐릭터가 워낙 강력한 중심을 형성하고 있어서 딸이며 다른 인물들이 숨쉴 여지가 없어요.
김소연 큰 여인의 전형이 있죠. 아주 과묵해서 속을 짐작만 겨우 하는, 타나토스는 있지만 에로스는 없는, 그런 여인이 한국문학에서는 전형적으로 등장하죠.
김정환 그런데 소설 속에 어머니가 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아까 이야기한 최명희나 박경리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말이 많지요.(웃음) 지역 색채도 강하고 그 말들의 세계가 발화되면 표준어보다 훨씬 강력한 인상을 주죠. 김숨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의도적으로 말이 없어요. 작가는 어떤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게 그 사람을 알려주는 좋은 방식일까 하고 의심하는 쪽이에요. 소설에서 어머니는 침묵하지만 대신 주위 모든 사람들이 누비바느질의 명장인 남수덕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그게 오히려 어머니에 대해서 서술하는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백지연 딸의 시점에서 어머니에 대한 동경과 좌절의 마음이 끊임없이 묘사되긴 하는데요, 두 딸의 그 욕망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왜 그렇게 그들이 불안해하는지 공감이 잘 되지 않습니다. 물론 금택은 진짜 딸이 아니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어머니의 인정을 갈망하고, 화순은 바늘에게 엄마를 뺏긴다는 초조감을 표출하긴 하지만 소설 안의 갈등 관계 속에서 설득력있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김소연 두 딸과 어머니의 관계도, 소설의 내적인 필연성보다는 우리 소설들에서 흔히 보는 관습적인 갈등구도에 기대고 있는 게 저는 좀 아쉬웠어요. 김정환 선생님께서 인물의 말수가 최대한 절제된 부분을 좋게 보셨는데, 저는 인물들이 해야 할 말을 소설가가 독점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바느질 및 의식주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인물의 내면과 관련된 문장들 모두를 소설가가 독점하다보니, 여성 소설가가 쓴 여성들의 이야기임에도 남성 중심의 세계관 같은 게 배후에 쓴맛처럼 배어나는 느낌이에요.
김정환 그렇게 소설 전체를 작가의 특정한 시선과 묘사의 욕망이 장악한다고 볼 수는 있죠. 그런데 그런 묘사의 욕망에 힘을 받아서 세고 싱싱한 비유들이 나와요. 똥 보고 구리 같다고 한다든지. 그전 소설들에서는 못 보던 비유죠. 그 또한 자기 안의 그로테스크함을 극복하려는 필연적인 장치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작가가 지역과 상관없이 등장인물의 말을 통일시키는 방식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전라도든 경상도든 언어의 토착성에 지나치게 기대서 그것으로 소설적인 완성도를 증명하려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제가 서울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백지연 그래도 언어나 공간의 지역적 특수성을 살리는 문제를 떠나서 소설의 우물집이라는 공간은 더 개방적인 곳으로 활달하게 그려져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누비바느질이라는 소재 자체가 민중의 생활, 삶 속에서의 예술을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담았다고 봤거든요. 우물집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바느질을 부탁하거나 배우러 오면서 각자의 사연들을 이곳에 풀어놓는 것도 그렇고요. 그렇게 다양한 삶과 이야기들이 흘러들어와 얽히고 넓어져야 하는데요. 그러지 못하고 어머니와 딸이 뿜어내는 집요한 정념의 세계와 부딪쳤다 사라져요.
김정환 그 부분은 저도 같은 생각인데, 역사라든가 그런 게 서로 섞여서 공명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그로테스크를 푸는 것에만 집착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사실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가 자유롭고 산발적으로 들락날락 거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사연이 표피적으로만 스쳐지나가는 건 아쉬움이지요. 다른 한편, 작가가 더 고집을 밀고 나가서, 이른바 전통소설의 시간과 역사를 닮은 문체를 아예 뛰어넘어, 이 작품 도처의 의식주 비유가 서로에게 최대한 밀착해가는 것에서 그 싹이 보이듯, 그 말로만 전해져오는 임종 순간의 주마등, 즉 공간의 문체 속으로 자신을 더 밀어넣어도 좋겠다 하는 생각도 있고요. 제가 좀 짖궂은 편이라서.(웃음)
오한기 소설집 『의인법』
백지연 『의인법』은 정지돈 이상우 오한기 등 최근 새로운 소설의 흐름을 표방하고 나선 작가들의 성취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이 작가들이 내세우는 ‘후장사실주의’는 남미 작가 로베르또 볼라뇨의 작품 속 ‘내장사실주의’에서 따온 말이라고 하는데요, 기존 소설의 고정된 규범들에 반기를 들면서 새로운 방식의 리얼리티를 탐색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어요. 어떻게 보셨는지요.
김소연 오한기(吳漢基) 소설은 우리가 어떤 토론을 하게 될까가 가장 궁금한 경우였어요. 저는 이 소설집을 순서대로 읽었어요. 처음 읽을 때는 문체며 구성이 서투른 부분이 많아서 불만스러웠어요. 여성 캐릭터 묘사할 땐 화가 나기도 하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편하게 읽었는데요. 대신 맨 뒤에 있는 「새해」라는 작품은 참 좋았어요. 작가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모든 규칙을 배반하려는 야심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소설에 대한 믿음에 어떤 반기를 드는데, 이 작가가 들고 있는 반기의 방향성 같은 건 토론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가는 제발트나 보르헤스 정도인데, 오한기는 이런 작가들과도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자기가 해석한 세계나 그것에 대한 반성이 방대한 자료와 인용—때로는 허구의 자료와 인용까지—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죠. 세계의 복잡함을 그런 방식으로 포착하는 적극적인 시도가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를 무엇 때문에 한 걸까, 그 목적을 생각하면 고개가 갸우뚱해져요.
백지연 기존의 소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조립소설의 방식인데요. 그래서인지 오한기 소설을 읽으면서 ‘발칙하다’는 생각보다는 매우 익숙하고 아기자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어쩌면 이런 소설들은 새로움보다는 그 익숙함과 하찮음, 시시함을 의도하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제 독서 경험에 한정된 건지는 모르지만 오한기의 소설은 장정일, 백민석, 박민규로 연결되는 소설적 상상력의 계보를 의도적으로 충실히 때로는 서투른 방식으로 노출하더군요. 햄버거 상징, 엽기적 모티프, 외계인 상상력 등을 느슨하게 모사하고 재조립한다고 할까요. 기존 작법들에 대한 강력한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기 드는 방식마저도 조롱하면서 심드렁하게 유희화한다고 해야 할까요. 진지하게 보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하는 듯해요.
김소연 그 때문에, 후장사실주의는 어떤 면에선 문학 힙스터들의 세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정환 후장사실주의라는 말도 그냥 농담 아닌가요?(웃음) 난 이거 읽으면서 깡다구는 좋은데, 큰일났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 소설이 나름대로 부수어보려는 미학적 테두리는 이미 많은 선배작가들이 깨고 있는데요, 비극적인 현실을 우스꽝스럽게 비틀면서 그 미학적인 관습을 벗어나는 건 박민규의 소설이 훌륭하게 보여줬거든요. 이 계보를 거슬러올라가면 성석제나 은희경이나 이승우 같은 선배들이 있고 김태용이니 박형서니 최제훈이니 또다른 선배들이 꽤 있잖아요. 이미 계보가 서 있는 영역에서 이걸 좀 해보겠다고 나왔으니, 배짱이 좋은 작가지요.(웃음) 그런데 오한기 소설이 기존 소설의 형식들을 흩어놓긴 흩어놨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이유랄까, 그런 마무리가 아직은 없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앞선 작가들보다 훨씬 더 느긋하게 시작을 했으니 두고 봐야 하겠지만 한참을 가야겠다 싶어요. 그래서 느긋한 건가?(웃음)
백지연 김솔과 김희선의 소설처럼 조립소설의 구성 자체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계열도 있는데요, 오한기 소설은 그런 정치함으로 가지는 않고 소설쓰기의 모티프를 재구성하는 풍자와 조롱에 집중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개별 단편보다는 소설집으로 모아서 읽으니 힘이 붙고 뭘 얘기하려는지도 더 드러납니다. 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의식적으로 다른 작품에 연결되는 방식이라든지, ‘나’와 ‘한상경’이 짝패를 이루며 소설가소설의 의미를 되묻는 방식이라든지요. 이 두 인물도 한편으로는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나’와 ‘은행원’에 대한 비유 같았어요.
김정환 우리가 이렇게 작품의 의미를 따지고 얘기하면 작가가 이렇게 나올지도 몰라요. 완성된 작품이나 해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후장사실주의라고.(웃음)
백지연 그렇다면 할 말이 없어지겠네요.(웃음) 그런데 완성된 해석을 거부한다면 소설 자체가 열린 텍스트의 흥미로움을 보여줘야 하잖아요. 사실 단편 중에서 재미있었던 「햄버거들」이나 「의인법」의 전개나 구성도 다분히 도식적이었어요.
김정환 나는 진지한 소설에 대한 자학쯤 되겠다, 이렇게 읽었어요. 소설을 보면 진담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읽다보면 가끔 이건 혹시 진담 아닐까 싶은 솜씨가 있기도 하고.
김소연 문장이나 문장의 전개방식을 보면 참 미숙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러한 결함을 독자가 인지하는 행위를 이 작가는 조롱하고 있겠구나 싶어집니다. 우리가 서투르다고 지적할수록 오한기는 성공했다고 여길 것 같은 거예요. 그러나 장정일 같은 소설가들이 오래전에 그랬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제 작가가 어떤 식으로 우롱하고 싶어하는지 좀 익숙해진 것이죠.
백지연 그래도 궁금한 것은, 이 소설이 전제하는 진부하고 관습적인 소설이 도대체 뭘까 하는 건데요. 리얼리즘을 비틀고 싶다면 리얼리즘이 뭔지 스스로 해석한 게 있어야겠지요. 새로움은 어쨌든 기성 체제에 대한 읽기와 해석이 치열한 가운데서 나오는 걸 텐데, 넘어서려는 장벽 자체를 매우 단순하고 진부하게 그려놓고 그것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느낌입니다. 그건 너무 손쉬운 방식이지요.
김정환 의외로 이 사람이 느긋해서, 박형서든 박민규든 그 소설들 신경 안쓴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 배짱은 좋다, 지켜볼 만하다 싶긴 해요. 둘러보면 얼마나 재능있는 작가들이 많은가요. 재난을 전망으로 전화(轉化)하는 상상력이 편혜영 김애란 윤이형한테서 이미 나왔고, 박솔뫼는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오히려 일상 전복적인 대목을 파고드는데, 오한기 소설은 갈 길이 험한 거지요. 그러나, 그러니, 꿋꿋이 가라 말하고 싶어요.
김소연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동료는 알랭 레네와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찬양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비판했다.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일원들과 비교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폭력적이고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반론을 내세우진 않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알랭 레네와 장 뤽 고다르의 영화가 현란하고 난해한 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76면) 이 소설집을 읽고 제가 판단한 오한기 소설과 이 대목이 딱 통한다는 생각입니다. 고다르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저는 작가가 투영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백지연 인용하신 부분처럼 현대나 고전을 아울러서 많은 예술가의 이름과 문화적인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메타픽션의 흔한 기법이죠. 그게 좀더 발랄하고 흥미롭게 쓰이면 좋겠는데 그냥 평면적으로 등장해서 오히려 소설의 재미를 떨어뜨려요. 찰스 부코스키도 여러번 나오지만 상투적인 방식으로 언급되고요.
김소연 찰스 부코스키를 좋아한다고 해서 여자친구가 그 작품을 읽어봤다고 했을 때 사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라고 주인공이 일부러 대꾸하는 그런 방식이죠.
김정환 진담 공포증. 새롭다고 하기엔 앞선 것에 빚진 게 너무 많은 게 아닐까요.
김소연 힙스터들의 징후와 맥락이 같아요.
백지연 어쨌든 소설을 읽으면서 기성 체제를 이미 한번 비틀어놓은 전위의 계보 속에 가볍게 합류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모사와 조립 자체가 저항이라고 보기에는 이전 세대의 작가들과 친연성이 너무 강한 세계랄까요. 앞으로 어떤 활로가 생겨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소연 작가의 말에 “소설은 늘 나를 비참하게 했지만 대신 좋은 친구들을 선물해주었다”고 적혀 있는데, 「의인법」에 찰스 부코스키가 한 말이라며 이런 구절을 써놓았죠. “작가에게 가장 나쁜 일은 다른 작가와 알고 지내는 것이고, 그보다 나쁜 일은 다른 작가 여러명과 알고 지내는 것이다.”
황유원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백지연 황유원(黃有源) 시집은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자유분방하고 스케일이 상당히 크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상상력의 공간도 확장되어 있고, 시집 전반적으로 운동성이 강하더라고요. 팽창과 활공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어더군요. 시의 공간이 계속 이동하고 확장되면서 시적 주체도 그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고요. 시를 읽으면서 이렇게 넓어진 공간과 자유로운 움직임을 만나니까 읽는 입장에서 좋았어요. 오랜만에 시집을 훌훌 넘기며 마음 편하게 읽었습니다.(웃음) 시인이 마음껏 부풀려놓은 공간 안에서 독자인 저는 아무 곳에나 굴러다녀도 된다는 느낌이었어요. 대체로 시들이 길고 산문적인데 상당한 리듬감도 있고요.
김소연 편안하게 읽었다는 그 말씀이, 황유원씨가 시집을 내고 반성해야 한다면 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웃음) 저도 황유원의 시들이 무척 활달하고 리듬이 좋아 반갑게 읽었습니다. 성기완 시인의 해설을 보면, 사운드스케이프를 형성하고 있다는 표현이 있는데, 아마 황유원의 시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도 이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시인을 한명 더 알게 되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만히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쓴다 싶은 부분도 눈에 띄었어요. 제 세대나 좋아할 법한 시적 모티브들이 지배적이었어요. 지네 개미 달팽이 뭐 이런 것들, 공간도 바라나시 운동장 마당이라든가, 비, 우산…… 뤽 베송, 빔 벤더스, 조니미첼, 빌리 홀리데이…… 전자기타도 자주 나오고요. 지난 세기말에 등장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박정대와 강정의 시세계와 유사성도 보이고요. 김경주 시인이 많이 다루었던 소재들과 겹치는 데도 많고요. 그 기시감 때문에 어쩌면 더 익숙하게 읽은 것 같기도 해요. 자유분방한 형식에 비하면 소재가 낡았다는 생각이 좀 아쉬웠어요.
백지연 저는 「쌓아 올려 본 여름」이라는 시가 무척 좋았는데요, 장정일의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의 정서가 확 다가와서요. 말씀대로 90년대의 익숙한 시적 풍경이 많이 깔려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김정환 나는 이걸 읽고서, 뭔가 이 사람이 대중적인 전위를 꿈꾸는구나 싶었어요. 이 시집에는 한국 시문학사의 요체가 다 들어가 있어요. 요체가 적절하게 흐름을 이루면서, 그게 뒤에서 앞으로 밀어주는 느낌입니다. 이 사람을 전위이게 해주는 것은, 시문학사 전체의 흐름이 아닐까 싶은 거죠. 첫 시집으로는 상당히 성공했는데 그렇다면 두번째 시집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궁금해졌어요. 허허벌판에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시적 진경은 그때 열리는 게 아닐까. 그때는 아마도 시집이 이렇게 두껍지 않겠지요.(웃음) 그건 그렇고 이 작품이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는데 작품의 대중성이 그것과도 연관이 있는 건가 싶어요. 민음사가 주관한 ‘오늘의 작가상’은 독자 투표제를 도입했던데 김수영문학상은 선정방식이 다르지만(투고제) 거기에 영향을 받은 건지 모르겠네요. 최근 기혁 시인의 수상도 그렇지만 김수영문학상은 한동안 아주 전위적인 시들을 뽑았던 것 같은데요.
김소연 제가 습작하고 첫 시집을 내던 시절과는 김수영문학상의 운영 시스템이 많이 달라졌어요. 근래 이 상은 단행본 출간을 공모 조건으로 걸고 있습니다.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을 전제하고 시행하는 장편문학상 공모들도 많으니 그걸 염두에 둔 변화 같기도 한데요. 결과적으로 민음사에서 시집을 낼 사람들이 이 상을 받게 되는 거지요. 애초에 김수영문학상이 출발했던 취지와 많이 달라졌어요. 상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는 내부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돼요.
백지연 말씀을 듣고 보니 김수영문학상의 오랜 역사와 인지도에 비해 상의 최근 선정기준이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시대 흐름에 따라 문학상의 현재적인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상 자체의 열려 있는 운영을 위한 대내외적인 성찰과 노력은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덧붙여서 저에게도 김수영문학상은 젊고 파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전위시, 혹은 난해시의 상징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느낌인데요. 황유원 시의 대중적인 특징이 어떤 식으로든지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대중성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시집에서 활발하게 쓰이는 문학적 차용의 방식도 얘기해보고 싶은데요. 요새 시들의 경향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텍스트와의 영향관계를 일부러 드러내는 각주 과잉의 시들이 꽤 있더라고요. 「돌고래시」와 「시베리아 주제에 의한 다섯개의 사운드 트랙」의 경우에는 굳이 이렇게 각주를 써야 하나 싶었는데요.
김소연 문단에 불어닥친 표절 사태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 어디까지를 리메이크나 오마주라고 볼지,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김정환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 아닌가 싶어요. 문학사의 흐름 자체를 자기 시로 변용한다는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은 거지요.
백지연 그런데 각주 범위를 설정할 때 기준이 들쑥날쑥해요. 예를 들어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방식이요. 「백주의 악마」는 이미지가 뚜렷이 공유된다고 생각해서인지 표시하는데 「끝없는 밤」 같은 경우에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해서인지 표시를 안했어요. 이런 방식은 너무 단순한 구분이 아닌지요? 개인적으로는 「끝없는 밤」처럼 아무 설명 없이 소설의 이미지를 지우고 밤 파먹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품을 즐겁게 읽었어요. 출처 표시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면 일관되게 각주를 안 쓰는 게 나은 것 같아요.
김소연 각주에 대한 시인의 원칙에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 같긴 해요.
백지연 어쨌든 황유원 시의 자유롭고 활달한 호흡은 기성 텍스트를 녹이고 접합시키는 특유의 방식에서 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한걸음 나아가 과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애매하게 느껴져요.
김소연 전체적으로 소리를 담아내려는 시도가 개성적이에요. 이제니 시에는 리듬을 어떻게 전개해나가는지, 그것을 지켜보고 혀로 읽게 하는 재미가 있었다면, 황유원 시는 시인이 주제의식과 메시지를 내세우면서 그 배면에 사운드스케이프를 감추고 있어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면이라고 생각해요. 성기완 시인의 해설도 그런 음성학적 특징을 잘 지적했는데요, 저는 시집 해설 마지막 대목에서 “음악 좀 듣니?”라고 던지는 물음이 재미있었어요. ‘너 음악 좀 듣는구나?’가 아니거든요. 내가 음악을 좀 듣는데, 너가 음악을 좀 듣는지는 잘 모르겠구나,라는 미묘한 어감이 있어요.(웃음) 메시아적인 주제의식 뒤에 숨은 이 소리에 대한 시인의 감각은 의도된 것인지 서툰 것인지, 저는 그게 좀 궁금했습니다.
백지연 1, 2부에 모인 시들이 집중성이 강했던 것 같아요. 뒤로 갈수록 산문적 리듬이 지루하게 반복되면서 긴장감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시도 1부의 시들이었고요. 「루마니아 풍습」과 「북유럽 환상곡」의 감수성이 좋았어요.
김정환 그 시들은 성자(聖者)의 목소리를 갖고 있어요. 처음에 시집을 펼치고 맨 앞에 있는 시인의 말을 보고 놀랐어요. 이 기도문들은 뭐지? 하고 의아했거든요. 뒤의 시들과 연결이 안됐는데요. 가만히 보니 이 사람이 성자의 목소리와 시선으로 고통을 직시하는, 그리고 고통을 직시하면서 그것을 서정화하는 게 있더라고요. 성기완씨는 음악적인 특징을 지적했지만, 이 사람의 특징은 성자의 어조에 있는 것 같아요.
김소연 저는 성자의 내러티브는 시인의 포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정환 시적인 형상화에 실패하면 아예 가벼운 명상시나 잠언풍의 시가 나올 우려가 있지요. 고통의 직시를 좀더 서정화한다면 좋을 것 같은데요.
백지연 성자의 목소리도 그렇고 시인이 설정하는 초월의 지점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공간을 마구 확장시키지만 그것을 굽어보는 태연한 시선이 있거든요. 「바람 부는 날」을 보면 “만물지중이 낙하하고 비행하는 난장판” 속에서도 화자는 술잔을 기울이지요. 세상이 온통 흔들리고 뒤집어져도 소주병을 일렬로 늘어놓고 술을 따르는 장면이요. 잔뜩 부풀린 공간 속에 그것보다 더 위에 있는 시선이랄까요.
김소연 그런 면에선, 성자풍이지만, 구도(求道)라는 것이 시로 어떻게 가능한지 지켜보고 싶어집니다.
김정환 문학이, 시가, 신 없는 시대에 신학이 되어주는 면이 있어요. 소설로 말하자면 정론 없는 시대 잡학-썰의 체계화랄까?(웃음) 그런데 우리의 문학에선 그런 경향을 찾기 쉽지 않아요. 김동리는 무속 세계고, 그리고 이승우 소설, 고진하 시 정도가 있달까.
임승유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봐』
김소연 성자의 포즈가 황유원 시의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색깔이라면, 임승유(林承諭) 시는 가장 안쪽에 그 성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떤 폭력, 어떤 외설, 이런 것들을 굉장히 앙큼하게 넘나들거든요. 그 모든 것들로부터 표표한 태도를 외양에 풍기는 게 참 좋았어요. 거룩한 느낌과 그래서 닿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거룩한 척을 안하는 게 너무 예쁜 거죠.
백지연 임승유 시집은 첫 시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하고 성숙한 시적 세계를 갖추고 있어서 놀랐어요. 이 시집의 키워드는 ‘여자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시에서 쓰인 여성 독백체가 아이 혹은 미성년의 목소리로 위장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시에서 환기하는 성적인 상상력이 특이한 설화성과 상징구조를 지닌 것도 눈에 띕니다. 시를 읽으면서 문득 데이비드 린치 영화도 생각났어요. 세계의 폭력과 끔찍함을 몽환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요. 여성의 감춰진 꿈과 욕망을 이렇게 비밀스러운 스토리텔링으로 보여주는구나 싶어서 재미있었어요.
김소연 흔히 여성이 쓴 시를 여성시로 따로 분리해서, 최승자 김혜순 나희덕 김선우의 시들에 적절한 호명을 해주었잖아요. 우리가 잘 알던 이름들이었죠. 마녀, 모성 뭐 그런 것들요. 그런 점에서 임승유 시는 진짜 스스로 발명한 페르소나를 갖고 있어요. 이 개성적인 화자를 기존의 어법으로 명명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건강하고 안전한 생활」 「하고 난 뒤의 산책」 같은 시를 보면, 이토록 발칙할 수가 없죠.
백지연 저도 그 두편의 시와 「계속 웃어라」가 무척 좋았어요. 아슬아슬하게 금기의 상상력을 탐하다가 어느 순간 상상력의 방향을 확 바꾸는 방식이요.
김소연 그런 식의 폭발이, 여성 화자의 시에서 아버지가 등장하거나 삼촌이 등장하거나 남자 선생님이 등장했을 때, 예상과 맞아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묘한 방식이 있어요. 이상한 방식으로 살부(殺父)를 하죠. 임승유가 체화하고 자기가 발명한, 승리의 어법이란 생각이 들어요. 김선우와 비교를 하자면 김선우가 호연하게 뛰어넘은 금기를 임승유는 새침하게 다루고 있어서, 확 드러내지는 않는, 은밀한 부분인 것이죠.
김정환 임승유 시는 센 아줌마의 등장이랄까. 제대로 된 아줌마의 등장이랄까. 왜냐하면 여성 억압이 심한 것이 시단도 마찬가지거든요. 처음부터 특정한 여성성의 세계를 드러내고 버티든가, 아니면 좀 지나면 갑자기 자연을 읊고 초월을 읊고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임승유 시는 자연스럽게 나이 먹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줘요. 제가 전에는 절망에 몸부림치는 화려한 시적 몸부림을 멋있다, 참 멋있네 그렇게 느꼈어요. 그런데 오래 지켜보니까, 그 화려함이 더 극한의 화려를 낳을 뿐 절망을 버티는 틀이 되기는 힘들겠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녀 불문하고 쉽게 지치고, 그러면 늙어가지고 또 그 화려했던 포즈를 반성하고…… 그런데 임승유 시를 보면서 절망이 참으로 잘 짜여 있어서, 그 짜임으로 절망들을 계속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절망의 탄탄한 미학이랄까. 틀거리가 가능하겠다 싶은 거죠. 이렇게 시가 나이를 먹는 경우도 가능하구나 생각했어요. 다만 워낙에 틀을 잘 짜놓은 절망이라는 점이 걸리죠.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가 시의 동력을 결정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잘 짜여가지고 앞으로의 동력을 어디서 빌릴 것인가, 그것을 앞으로 유심하게 봐야겠다 싶어요. 아주 독특한 시집이었어요.
백지연 말씀대로 제 나이의 흐름을 담고 있는 성숙한 여성시예요. 세계의 폭력이 자기와 관계하는 통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정교한 상징과 암시를 쌓아요. 무엇보다도 임승유의 시에서 폭발적인 지점은 남성적인 폭력의 환상을 흡수하고 다른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지점에 있는데요, 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상투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고 흡수한 후 반전시키는 그 지점이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시적 형상화에 성공할 때 권력의 해체가 일어나지만, 어떨 때는 그대로 흡수되어 더 위험한 방식으로 가라앉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도 있어요.
김소연 저는 훨씬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싶어요. 제가 ‘발명된 화자’라고 언급한 바로 그 지점이요. 보통의 여성 시인은 자기가 주체고 남성이 타자가 아니죠. 자신을 타자화하고 남성을 주체로 중심에 두죠. 임승유는 자신을 스스로 주체화했어요. 김선우의 대표적인 시 중에서 「오동나무의 웃음소리」라는 시가 있죠. 노상방뇨를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통쾌하게 읽었어요. 그 때는 김선우가 여자도 노상방뇨를 한다는 자기 쾌락의 화통함을 드러냈어요. 그런데 임승유의 「볼일」은 너무 당연하게 오줌 누는 이야기를 해요. 오줌을 쪼그리고 앉아 눌 때에나 발견할 만한 것을 지켜보죠. 진화를 한 거죠.
김정환 김선우 시는 자기 나이보다 젊어 보이려고 했거나, 늙어 보이려 했다면 임승유 시는 제대로 된 나이로 말하고 있는 거죠. 시인이라서 꼭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은 장르 특성 때문에 노력에 따라 자기 나이를 반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시는, 특히 여성시의 경우에는 사회적 억압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제대로 나이를 먹기가 쉽지 않아요. 그냥 신화가 생길 뿐이에요. 실패한 신화가 생길 뿐이죠. 임승유 시를 읽으면서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도 제대로 나이를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백지연 시집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생산에 대한 사유도 독특합니다. ‘낳는다’라는 단어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여성의 ‘몸’이 생명을 낳는 ‘기원’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는 점이 낯설고도 신선했어요. 여성의 몸을 여성 스스로가 다채롭게 응시하는 관점이 새롭게 다가오는 거죠.
김소연 저는 임승유 시를 읽은 다음에 한참 뒤에 황유원 시를 읽었어요. 임승유 시 「계속 웃어라」에 ‘팬티’가 나왔는데, 화자의 태도가 상큼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황유원의 시에도 ‘팬티’가 나와요. 여자의 팬티죠. 왜 남성 시인들은 자기들 팬티는 얘기 안하고 여자 팬티만 얘기할까. 자기 팬티 이야기를 이렇게 멋있게 할 수 있는데. 왜 남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까.(웃음)
김정환 촌스러워서 그래. 아주 촌스러운 위악이죠, 말하자면. 괜히 시 쓰면서 위악 떨고 싶어서. 위악을 제대로 떨어야하는데 촌스러우니까 여자 팬티 이야기 하고.
김소연 작년에 나온 시집 중에서 안희연 시집과 임승유 시집을 읽다가, 시인의 캐릭터, 시인의 페르소나가 진화하고 있다는 희망찬 생각이 들어서 무척 기쁘고, 이들이 존경스러웠어요. 시집에 대한 아쉬움을 굳이 말해보자면요. 임승유 시인의 시어 중에서 ‘기분’이란 단어가 지배적인데요. 요새 첫 시집을 내는 많은 시인들, 첫 시집 내기 이전의 시인들이 ‘기분’이란 단어에 심취해 있는 것 같아요. 기분을 다룰 때 수동적인 인간으로 기분에 감금되는 경우가 아니라, 기분조차 핸들링할 수 있는 의지의 운동성 같은 게 시에 구현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부분은 좀 아쉬웠어요. 예를 들어 「역말상회」라는 시에서 “이곳에서 기분이 시작된다”로 시작하는 대목이요. 그 기분에 대해 예민하게 감각화하기는 하지만, 그 기분을 어느 쪽으로 데려가려 하지 않고 끝나거든요. 기분에 대한 수동성 같은 것이 느껴져요. 여성이 여성으로 길들여져온 한계와 연관된 부분이겠지요.
백지연 ‘기분’에 대해 들려주신 분석이 흥미로워서 다시 시를 읽어보고 싶네요.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과 조짐을 상상력으로 붙잡고 정교하게 확장하는 임승유 시의 특성을 잘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임승유의 시는 성정체성에 대한 얘기가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는 시대를 반영하는 독특한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어요. 단 한줄로 쓰인 시인의 말도 예사롭지 않은데 저는 읽고 흠칫 놀랐어요. “다음엔 내가 너의 아이로 태어날게” 이렇게 무서울 수가요.(웃음) 욕망을 읽고 되돌려주는 방식이 정말 도발적입니다.
이현승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
김정환 먼저 이 시집은 제목을 가지고 풀어보고 싶네요. 나는 처음에 제목을 봤을 때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생각 대 생활’인 줄 알았거든요. 시집 전반부는 그런 구도를 유지해요. 그런데 뒤로 갈수록 ‘~라는 생각이다’로 흐르는데, 그 과정이 시가 느슨해지는 과정이기도 해요. 김수영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생활이라는 것은 몰고 갈 수도 있고 뚫고 갈 수도 있는 거예요. 얼마든지 전위의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생활이죠. 이현승(李炫承) 시집에서 전반부는 ‘생활’이라는 삶과 ‘생각’이라는 관념의 긴장도가 유지되면서 좋은 시구를 얻어내요. 시구가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해 보여도 그 하나하나가 새로 뚫은 길처럼 소중해요. 그런데 3부, 4부로 갈수록 길이 안 뚫려요. 뭔가 현실 비판적인 얘길 하면 길이 막힌다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막히면 시는 비판하지 말아야 해요. 막힌다고 스스로 말하는 순간 과거지향적이 되고 대개 허위로 끝나기가 쉬워요. 허위가 또 울화를 부르고. 이 시집의 후반부가 대체로 그렇게 긴장이 느슨해지는 듯해요.
김소연 이현승 시인의 『아이스크림과 늑대』와 『친애하는 사물들』을 너무 좋게 읽어서 세번째 시집을 많이 기다렸거든요. 기대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살짝 실망스러웠습니다. 만화 『미생』의 서사 같달까요. 이 시집을 만나기 전에 『미생』을 먼저 봐서.(웃음) 그 이야기에 처자식이 있는 가장 서사가 보태졌을 뿐, 기시감이 심해서 저는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백지연 『친애하는 사물들』의 감수성과 이번 시집은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긴 합니다. 무의식중에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삶의 풍경을 하나하나 곱씹는 방식의 사유가 워낙 강하게 표출돼요. 김정환 선생님께서도 잘 짚어주셨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생활’이라는 말의 의미가 매우 중요한 듯해요. 현실을 포착하는 중요한 통로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평균적인 삶」의 부제로 ‘증강 현실’이라는 표현도 쓰이고요. 평범한 시선으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낯선 리얼리티를 잡아보려는 시인의 의지가 매우 집요하게 관철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적 주체가 평범한 생활의 절차 하나하나에 반동을 걸면서 예민해지는 거지요. 회사 이야기며, 일상생활을 다룬 시들을 쭉 읽다보니 김기택 시도 떠올랐어요.
김소연 김기택 시는 집요하고 예민한 투시력이 있죠. 뚫어지게 응시해서 찾아낸 관찰력으로 그로테스크함을 담보해내죠. 이현승 시는 스케치하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 스케치가 이 시집의 스피드를 만들어주긴 했어요. 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까지를 보여준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김정환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주던 시인들이 뭔가 현실 비판적인 얘길 하는 순간 막히는 지점이 있어요. 이현승의 이번 시집도 현실을 생각하는 과한 중력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요.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혹시 창비시선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몰라요. 뭔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못된 중력 같은 거.(웃음)
백지연 창비시선이 지닌 그 중력이 구체적으로 뭔지 저도 궁금한데요.(웃음) 단순히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가의 문제를 말씀하신 건 아닐 테고요.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새롭게 포착할까를 고민하는 문학적 전통과의 상호작용이라면 그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김정환 요즘은 창비시선에도 소재나 기법이 무척 새롭고 복잡한 시들이 많아졌어요.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담아내는 시적인 아름다움의 역동성이랄까 깊이는 약해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요. 새로워지려고 할수록 뒤로 가게 되는 이유는 뭘까 곰곰 생각해보는데, 조태일과 이성부 시가 터득한 새로움의 지점이 요즘 시를 돌아보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아요. 이분들 시는 말하자면 농촌 모더니즘이라 표현할 수 있어요. 현실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자기가 터득하는 모던한 지점이 있어요. 김수영식으로 현실을 뚫는다는 것은 그런 거지요. 저는 창비 평단이, 아니 거의 모든 평단이 신경림이냐 고은이냐, 혹은 김지하냐를 화두 삼느라 이성부와 조태일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했다고 종종 말해왔는데요. 이 시인들의 작품을 현재적인 관점에서 유심히 읽어볼 필요가 있어요.
백지연 과거의 유산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뚫는 방식에 대한 말씀이 여러모로 중요하게 새겨집니다. 현실의 중력 문제를 좀더 이야기해보면요, 이현승의 이번 시집에서 저는 「평균적인 삶」을 좋게 읽었어요. 선생님께서 짚어주신 생활과 생각 사이의 긴장이 잘 살아있는 시였어요. 이 시가 포착한 장면은 직장인의 애환을 다루는 많은 소설들에서 흔하게 나오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시적 표현으로 바꾸는 순간 상당한 긴장이 느껴졌어요. 세월호 이야기를 다루는 「고통의 역사」나 「사람의 얼굴들」 같은 경우도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구요. 그런데 시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윤리적 충동이 표면화되면서 오히려 중압감 그 자체로 발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고통의 역사」에서 출산 장면과 세월호 이야기를 대비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상상력인데 시가 끝나면서 왜 정서적인 파동으로 연결되지 못할까 아쉬웠어요.
김소연 황유원 시인이 원심력을 가진 시인이라면, 임승유는 구심력을 훨씬 더 가동시키는 시인이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현승은 이 둘 사이의 균형감각이 있죠. 어느 쪽으로 힘이 가동되지 않고 팽팽한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 점이 아쉬워져요. 팽팽함이 시집 전편에서 흐르니까, 계속 그렇게만 하니까 맴도는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럴 때 어느 한쪽의 힘을 놓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현승에게 이걸 기대하나봐요.
김정환 이현승 시의 소재나 스토리는 원심력을 갖고 있고 형식 자체는 구심력을 가진 측면이 있어요. 그것의 어우러짐이 절묘할 때는 이현승의 시가 재미있어요. 그런데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가 심심해지는 건 미학적인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우리가 소설평에서 했던 토론을 이어서 하고 싶은데요. 이현승 시인도 세월호 이야기를 다뤘지만요. 세월호 사건의 고통이 문학하는 사람에게 남겨준 건 그거예요. 우리가 피해자인 것만이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 그렇게 삶의 균형감각을 맞추어 현실을 바라보라는 게 그 사건이 남긴 전언이 아닐까 싶어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어 보는 게 아니라, 나의 책임이 분명히 있고, 슬픔의 책임만 있는 게 아니라 원인의 책임이 있고, 세상을 좀더 복잡하고 넓게 보면서 자기만의 미학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잡아채야 하는 거지요. 그런 생각을 작가들이 해야 세상이 좀더 보이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소연 덧붙여서 저는 이번 시집에서 이현승 시인의 문체가 굉장히 씩씩해졌다 느꼈어요. 『친애하는 사물들』에 비하면요. 그 씩씩함이 전면에 있어서 그렇지, 내용 면에서는 우리가 이 시를 읽고 짠해지듯, 시인이 스스로를 많이 짠하게 여겨요. 그 자기연민이 감상적인 인상을 주었어요. 김수영스러울 정도의 씩씩한 문체로, 이 연민을 가리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백지연 「기념일들」에도 그런 씩씩함과 연민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십일년 전에 나는 결혼했고/그때는 네 아이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결혼이란 그러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의 시작이다”라는 대목은 표면적으로는 단호한 전언인데 깊은 피로와 슬픔이 배어나와요. 이런 감수성은 이현승시가 갖고 있는 특성 같기도 하고요.
김소연 「코뿔소」라는 시가 있는데요. “형식은 궁리인데, 내용은 기도가 되는/피차 빤하고 짠하기만 하는 삶,/미친 여자가 꽃으로 자기를 꾸미는 것이/나에게는 어떤 암시처럼 보인다” 라고 했죠. “피차 빤하고 짠하기만 하는 삶”과 “미친 여자가 꽃으로 자기를 꾸미는 것”은 이현승이니까 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조합이기는 한데, 이현승도 미친 여자처럼 뭐라도 했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풀려나오는 대목이 있거나, 자기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를 쳐본다거나 한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김정환 상상력이 기가 막히는 시인인데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에요. 의미있는 일인데, 처음이라 그 무게에 눌리는 거지요.
김소연 많은 시인들이 현실에 발을 디뎌 현실에서 뭔가를 얘기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비한다면 이현승 시인의 이번 시집은 상대적으로 소중한 대목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새롭게 이야기하려는 방식을 자기 안에서 발명해내야 하는데, 쉽지가 않죠. 우리 시의 과도기가 아마 이 통로에 있을 거고, 이현승 시인이 이 문제를 붙들고 좀더 고민했으면 합니다.
백지연 그런 맥락에서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람은 역시 쓰는 사람이다”(「천국의 아이들 2」)라는 대목은 우리 시대의 문학을 향한 전언으로도 깊게 와닿습니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물질적인 결핍이든 나를 얽어매는 삶의 복잡한 결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에 눌리지 않는 열린 상상력만이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소연 시집들을 함께 읽다보니 각각 아쉬움들이 있어요. 황유원은 포즈도 좋고 리듬도 좋은데 소재들이 약간 낡았고, 이현승은 씩씩한 문체만으로는 생활을 담보하기엔 허전한 데가 있지만 모티브들은 살아 있고. 앞에서 다룬 소설들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꼈는데요. 자신이 천착하는 세계와 그것을 담아낼 형식이 잘 결부된 작품이 드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뜻하지 않게 비판적인 언급이 많이 나온 것 같아요. 이 작가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지금 우리 한국문학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로 다가옵니다.
김정환 본래 문학이 복합적인 생물이라서 욕을 하다보면 어느새 칭찬이 되고 칭찬하다보면 욕이 되는 거예요.(웃음)
백지연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나눈 이야기라 그 어느 때보다도 거리낌없고 진솔한 비평으로 와닿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인들의 직관적인 비유와 예리한 작품 분석을 음미하는 즐거움도 컸고요. 문학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다채롭고 풍성한 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