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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게일 루빈 『일탈』, 현실문화 2015
시대착오적인 어떤 텍스트의 도착
서동진 徐東振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homopop@naver.com
푸꼬(M. Foucault)가 『성의 역사』 1권(1976)을 출간했을 때, 그 책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바야흐로 시름시름 이울기 시작한 성혁명을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그 속에 감춰진 권력의 모델을 맹공하였다. 그가 ‘억압가설’로 명명했던 권력의 모델이 그것이었다. 그는 권력이 외부 혹은 위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 행사되는 힘이 아님을 집요하게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은 거기에 복종하는 자들의 참여를 통해 생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에 따라 분류된 인간의 종(種, species)이 출현했음을 밝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의 유형을 열거하였다. 맬서스적인 부부, 히스테리컬한 여자, 수음하는 아이, 그리고 도착자(倒錯者)였다. 이 네가지 성의 인간형은 각기 생식에 따른 성의 체계, 연속체가 아닌 대칭적인 성의 모델, 나이에 따라 분류된 성,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에 따른 성을 대표한다. 푸꼬는 성의 인간학을 통해 근대적 권력의 패러다임을 해부했지만, 정작 그가 한 것은 성의 과학자들 목소리를 중계하는 것이었다. 그가 고지하고 조명했던 성적인 주체, 특히 비정상적인 성의 주체들은 오직 임상적인 질병의 사례로서 그의 분석에 등장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을 숨겼을지 모른다. 그의 주변에 있었던 이들이 조심스레 증언하듯이 그는 죽기 직전 한해도 빠짐없다시피 성적 이단의 낙원이었던 캘리포니아를 방문하였고, 에이즈 위기와 더불어 초토화되기 직전인 실험적인 섹스의 세계에 가담하였다. 그가 훗날 고전적인 고대의 윤리학에서 발견하게 될 자기배려의 윤리학을 착안한 곳은 어쩌면 난교가 펼쳐지는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사우나였을지 모른다. 비정상적으로 배척받은 자들이 서로를 애무하며 존중하는 세계. 그렇지만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게이 잡지인 『애드버케이트』(Advocate)와 한 인터뷰를 제외하면 그것에 관해 공식적인 발언을 아꼈다. 그리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 그 세계가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 세상은 기다려야 했다. 적어도 게일 루빈(Gayle Rubin)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알다시피 루빈은 성의 정치와 자유, 해방을 생각한 이들에게는 대모(代母)와도 같은 이였다. 1990년대초 성정치에 관한 글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던 내게 처음 그녀의 글을 읽었을 때의 기억은 새삼스럽다. 그녀가 경악스러운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세상에 등장한 인터넷을 통해 더듬더듬 그녀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읽었을 때도 나는 거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SM(사도마조히즘)의 친구였고 게이, 레즈비언 하위문화의 인도자였고 밀정이었으며 철벽 수비수였다. 그녀는 시쳇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반(反) 포르노그라피 페미니스트들에 맞서, 거의 이기기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성적인 보수주의와 동맹을 맺고 여성해방을 성적 착취의 피해에 맞선 투쟁으로 뒤바꾸고 있던 페미니스트들, 물론 시대의 기류를 장악하고 있던 그녀들에게 맞서 대담하게 대적하려 했던 철두철미 고독한 투사였다. 그리고 물론 그녀는 모든 퀴어이론가들의 성모 마리아로 승격되었다. 퀴어이론이란 이름으로 1990년대 초반 새로운 성적 소수자들에 의해 근대적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도발이 시작되었을 때, 이들 거의 모두가 그녀로부터 세례 받았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는 전적으로 시대로부터 배반당했다. 성혁명의 세대가 섹스에서 반문명적인 자유와 본능의 원천을 발견하는 순진한 환상에 빠졌다면, 오늘날 섹스 혹은 성적 쾌락은 모든 위험의 원천처럼 기피된다. 이성애적 남성의 성적 착취에 대한 비판은 관능적인 친밀관계 자체에 대한 원한으로 바뀐 것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다. 성해방이란 낱말이 거의 모든 글에서 사라졌다면 그 자리를 채운 낱말은 성희롱과 성폭력이 되었다 해도 역시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시대에 게일 루빈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적어도 서구의 대학에서 퀴어이론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국제학술회의장은 퀴어이론가들로 북적인다. 그렇지만 얄궂게도 그녀가 수성하고자 했던 모든 도착자들의 유토피아는 파괴되었고 영원히 재건되지 않을 것이다. 게이들은 결혼을 원하고, 도착자들은 사라졌으며, 일부는 이성애자 못지않게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괜찮은지를 역설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다시 도착자들은 세심하게 도덕적으로 재분류되었고, 인권의 범주하에서 보호될 수 있는 게이, 성전환자 들이 세상에 정착하였다. 서글픈 일이지만 ‘착한 게이 국민-시민 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모든 성적 주체들의 평등과 자유를 내팽개치고 정체성의 인정이라는 누추한 표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므로 게일 루빈은 이제는 거북하거나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SM을 즐기는 레즈비언이며 ‘세대 간 섹스’란 어색한 이름으로 불리는 소아성욕을 극구 옹호했던 자이다. 그녀는 오늘날 섹슈얼리티의 경찰관들이 정색하고 단속할 모든 성의 악덕을 체현했던 셈이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 그녀를 옹호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그리고 설령 그녀를 옹호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적인 이단의 영웅으로서 창백하게 기억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반항을 즐긴 팝스타가 아니다. 더욱이 그녀는 싸드 후작의 재림도 아니다. 그녀는 성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한 전투적 지식인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처럼 그녀는 성에 어떤 자유의 비밀이 숨어 있는 양 너스레를 떨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침착하게 이름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릴 성적 이단자들의 세계를 꼼꼼히 보고하였다. 그녀는 선험적인 윤리적 혐오에 저항하며, 무해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면서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작은 세계를 세상에 알렸다. 우리말 번역자들이 ‘주먹성교’란 이름으로 우아하게(?) 옮긴, 항문에 주먹을 삽입하며 즐기는 게이 하위문화에 관한 민속지적 관찰기를 읽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겨움을 억제하며 그녀가 알리는 세계로부터 기꺼이 배울 용기를 가진 자들에게 루빈의 글은 탁월한 윤리적 교육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녀의 책 『일탈』(Deviations, 임옥희 외 옮김)이 한국에 선을 보인 지금 시점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도덕의 연대기를 감안한다면 시대착오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시대착오적인 시점은 그녀의 글에 담긴 효능을 알아볼 시점이 될 수도 있다. 그녀의 독자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