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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클로드 르포르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그린비 2015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사유하기
진태원 陳泰元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jspinoza@empas.com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Essais sur le politique: XIXe-XXe siècles, 홍태영 옮김)은 프랑스 정치철학자인 끌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1924~2010)의 저작 가운데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책이다. 르포르는 모리스 메를로 뽕띠의 제자로 약관 20대 나이에 『현대』(Les temps modernes)의 주요 필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싸르트르와 논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60년대에는 급진좌파 집단인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 그룹을 이끌었다.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한계에 실망하여 쏘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가로 전향했지만, 그는 프랑수아 퓌레나 마르셀 고셰 등과 달리 자유주의의 옹호자가 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근대 민주주의의 특성을 깊이 탐구하면서 현존하는 민주주의체제를 급진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의 탐구는 에르네스또 라끌라우와 샹탈 무페를 비롯하여 슬라보예 지젝의 초기 작업, 에띠엔 발리바르, 삐에르 로장발롱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르포르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우리에게 너무 늦게 소개된 셈이다.
프랑스어로 1986년에 출간된 이 책은 르포르의 사상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표작 중 한권이다. 저술가로서 르포르의 특징 중 하나는 단일 저작보다는 주로 논문집으로 된 저작을 펴낸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프랑스어로 하자면 옴므 드 르뷔(homme de revue), 곧 여러 저널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사(文士)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현대』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비롯, 『떽스뛰르』(Textures), 『리브르』(Libre), 『과거-현재』(Passé-Présent) 같은 여러 저널을 이끌면서 이 지면을 통해 자신의 글을 발표하고 활동했다. 따라서 그의 글들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성찰이자 개입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2편의 글에서 그의 탐구주제를 이루는 것은 민주주의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고유성이다. 그는 유럽 정치철학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정치’(la politique)와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구별에 입각하여 근대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탐색한다. 이 구별의 의미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은 각각 책 서두와 말미에 나오는 「민주주의의 문제」와 「정치신학적인 것의 영원성?」이다.
프랑스어로 원래 정치가를 뜻하는 ‘르 뽈리띠끄’(le politique)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훨씬 광범하고 급진적인 의미를 얻는데, 르포르는 그것을 “사회를 산출하는 원칙 혹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사회의 다양한 형태를 산출하는 원칙”(328면, 번역은 수정)이라고 규정한다. 사회를 산출하는 원칙으로서의 르 뽈리띠끄는 사회의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생산과 재생산에 관여할 뿐 아니라 “의미부여” 및 “사회적 관계의 무대화/연출”(330면)에도 관여한다. 곧 정치적인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적 관계를 설립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행위자들이 이 관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틀의 구성이기도 하다.
르포르에게는 바로 여기에서 실증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학, 곧 “사회적인 것 내에 특수한 사실들의 질서를 구획하는 것”을 문제삼는 정치학과 “사회적인 것의 제도화의 원칙을 사유”(340면)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정치철학의 차이가 드러난다. 따라서 그가 “정치적인 것을 사유한다는 것은 정치(과)학적 관점과의 단절을 요구한다”(22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르포르가 근대 민주주의의 특성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정치적인 것의 차원이다. 그에게 근대 민주주의체제가 이전의 체제와 다른 점은, 예전에 왕으로 대표되던 주권자의 자리, 곧 “권력의 자리”를 “빈 장소”(30면)로 비워놓았다는 점이다. 이 자리는 상이한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장소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영원히 차지할 수는 없으며, 그 자리의 점유자는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교체될 수밖에 없다. 반면 전체주의체제는 총통이나 수령, 당의 이름으로 비어 있는 그 자리를 (영속적으로) 메우려고 한다. 이것이 두 체제를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점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반(反)전체주의로 규정하고 주기적인 선거와 다당제를 그것의 핵심 특징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르포르의 정치학은 일면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그가 또끄빌을 따라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구별하고 “무조건적인 것”으로서의 정치적 자유를 “정치적인 것의 본질”(262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규정할 때, 그의 사유는 급진 민주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사유의 이러한 측면은 아직도 여러 가치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번역이 충분히 좋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평자가 기획위원으로 관여하는 그린비출판사의 ‘프리즘 총서’로 출간되었다. 평자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현실을 깊이있게 성찰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이 책을 총서의 한권으로 선정했고, 좀더 많은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해 서평 도서로 택했다. 하지만, 아뿔싸! 번역된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당혹스러움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평자의 기대와 달리, 첫 페이지부터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뒤로 가면 나아질까 조바심을 내며 읽어봤지만, 뒷부분에서도 번역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 책은 극심한 오역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좋은 번역본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우며, 무엇보다 번역본으로만 읽을 경우 내용 이해가 난망하다는 점이 큰 문제다.
가령 53면의 “현재 개인 이외에 다른 근거들을 갖는 권리들을 살펴본다면, 동일하게 정치적 효력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제 개인에게만 준거하는 권리들을 살펴본다면 (…)”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또한 326면의 “첫번째로, 종교가 모든 적절성을 상실하는 것을 넘어서는 다소간의 확장을 제공하고 그 한계를 토론할 수 있다”는 “첫번째로 우리는 종교적인 것에 대하여 더 크거나 더 작은 외연을 부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면 종교적인 것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문턱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로 옮겨야 하는 문장이다. 이 책은 이런 식의 숱한 오역으로 훼손되어 있다.
이것은 역자와 편집자만이 아니라, 기획위원인 평자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결과이다. 좀더 좋은 번역본을 만들지 못해 독자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