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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사이먼 크리츨리 『믿음 없는 믿음의 정치』, 이후 2015
냉소의 시대, 정치의 신학적 사고에 대한 강력한 선언
정현
정치철학 및 매체학 연구자, 제5회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자 refur1343@gmail.com
루쏘(J. J. Rousseau)의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현대 정치철학의 근저(根底)에 놓인 가장 난해한 물음 중 하나로 간주되어왔다. 인민주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주권의 주체인 ‘인민’(people)이 존재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민은 인민주권을 통해 사후적으로 발명되어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 현대 정치철학의 ‘신학’적 계기는 인민주권 개념의 이러한 동어반복적 난관 속에서 출현했다. 요컨대 인민인 ‘나’를 인민이게 해주는 어떤 ‘메시아’적 계기가 존재한다고 가정되었으며, 19세기 이후 정치철학의 주된 화두 중 하나는 이 메시아적 계기를 해석하는 것이었다.
특히 해방의 유토피아적 관념에 기반한 역사적 사회주의는 현대 메시아적 정치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판본이었다. 착취와 빈곤에 허덕이던 노동계급은 ‘역사의 주인’으로 호명되는 순간 시대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메시아적 과제와 만나게 된다. 『믿음 없는 믿음의 정치: 정치와 종교에 실망한 이들을 위한 삶의 철학』(문순표 옮김)의 ‘신념’(faith)* 개념이 준거하는 것 역시 주체의 이러한 자기전환 혹은 재탄생의 메시아적 계기이다. 인민주권론의 동어반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메시아적 계기 없이는 어떠한 혁명적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는 그 근간에 있어서 신학적 계기를 갖는다. 저자 싸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 또한 이 냉소의 시대에 정치신학의 메시아적 사유의 길을 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은 바울이다. 바울은 누구인가? 율법(Law)보다 성령(Spirit)을 강조한 바울은 율법의 규율원리보다는 인간 내면의 신앙적 충실성에 주목하며 주체에게 일어나는 신학적 전향의 경험을 일깨우고자 했다. 저자는 바울의 복음 원리에서 크게 두가지 특징을 꼽는다.
첫째, 바울이라는 이름의 어원적 의미인 ‘작고 보잘것없음’이 암시하듯, 바울은 기본적으로 존재의 약함을 신앙의 메시아적 계기에 다가갈 수 있는 근본 조건으로 간주한다. 둘째, 바울은 ‘편지’의 형식을 통해 이 메시아적 계기의 수신자들(약한 자)에게 응답하고자 한다. 어원적으로 복음(euaggelion)이라는 말은 희소식을 뜻하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그것은 ‘신의 말씀을 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 포고 혹은 선포(proclamation)의 형식이 갖는 함의가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복음적 의미의 신의 소식을 ‘선포하다’ 혹은 ‘고지하다’(euaggeliomai)라는 동사적 의미에 연관짓고자 한다. 신앙은 (…) 신앙의 주체를 탄생케 하는 선포행위다.”(203면, 번역은 평자가 수정) 선포라는 것은 설득과 다를뿐더러 주체의 내면 바깥에서 작용하는 율법의 규율과도 달리, 주체의 내면에 직접 포고되어 그들의 신앙적 전향의 계기를 추동한다. 고린도서, 로마서 등 사도서간의 형식을 통해 바울이 공동체의 ‘위기’에 화답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포고’의 직접적 감응을 통해서였다.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호명은 구원의 종말론적 약속을 수반하며 다시 약자들의 ‘위기’가 갖는 긴박함에 조응하게 된다. 바울이 율법보다 성령을 강조했다고 할 때, 그가 벗어나고자 한 것은 원죄에 의해 과거로부터 항구적으로 부과되는 규율(율법)의 족쇄였다. 반면, 그가 새롭게 열어내고자 한 것은 이 긴박함의 영적 체험을 통해 생겨날 미래의 ‘낯섦’, 즉 메시아적 감응의 가능성이었다.
신앙은 인간의 무능력으로부터 나타나며, 메시아는 근본적으로 인간 역량의 범위를 초월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메시아와 관련해 불능화되어 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결단은 내 권한 밖의 일이고 약함에 대한 어떤 긍정을 통해서 이해될 따름이다.”(229면) 따라서 모든 신학적 계기는 기본적으로 수용성을 갖는다. 저자가 논하듯, 하이데거(M. Heidegger)가 『존재와 시간』에서 책임에 대해 논하며, 양심을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규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응답은 부름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세속적인 의미의 ‘수동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자신 앞에 다가온 낯섦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책임의 수용성은 무엇보다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독일어 ‘Schuld’(책임)를 통해 그 함의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 단어는 책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죄’ 혹은 ‘채무’를 의미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 세계에 대한 채무를 진 존재이며, 윤리적 책임이란 이 채무에 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치의 신학적 주체가 자유주의적 개인(person) 주체와 변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로부터의 모든 강제를 거부할 권리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적 주체와 달리, 정치의 신학적 주체는 자기 안의 채무에 응답하기 위해 자기를 초과하는 것(메시아적 부름)에 자신을 헌신하는 주체이다.
저자의 이러한 해석은 성령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아감벤(G. Agamben)적 해석에의 비판(256면)을 경유하여, 아나키즘의 비폭력 담론에 대한 비판(275~76면)으로 나아간다. 요컨대 율법 없는 성령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세와 무관한 순수 비폭력의 윤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메시아’라는 추상적 개념을 다루면서도 전혀 관념의 유희로 빠지지 않는 크리츨리의 이 책은 이렇듯 냉소의 시대에 다시금 정치의 신학적 사고를 촉발하는 논쟁적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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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서 제목은 The Faith of the Faithless: Experiments in Political Theology로, 한국어판에서 ‘믿음’으로 번역된 ‘faith’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주체적 헌신’이라는 의미를 고려해 맥락에 따라 ‘신념’ 혹은 ‘신앙’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