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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성호 張成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2학년. 1994년생.
meta_phor@naver.com
전염
우리는 기다렸다
이 길을 통해 그들이 곧 지나갈 것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총신을 겨눈 채로 우리는 말이 없고 이따금 수풀이 조금 흔들리는 것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로 하면서
그들은 언제 올까 묻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매복이었으니까 정적 속에서 새떼가 날아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새를 쏘고 박수를 쳤겠지 새를 맞추지는 않았지만 같이 박수를 치자 말하고 싶었지만 매복이었으니까 우리는 점점 우리라는 보호색을 가진 혼자가 되고
빈 길을 응시했다
본 적 없는 그들의 모습을 만들었다 지우면서
본 적 없는 그들의 머리에 아는 얼굴을 붙이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을 하면
우리는 모두 죽었던 적 있는 사람들
총신을 겨눈 채로 해가 졌다 그들이 곧 올 것이라고 말해준 이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바람이 불었고 수풀이 흔들렸다 이제 돌아가자, 말하려고 옆을 봤는데 어둠 속에는 가득한 얼굴들 돌아가자, 돌아가자 중얼거렸는데
총성이 울렸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총을 쏘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 쉽게 그들이 되고
전투 속에서 밤이 지났다 햇빛이 들기 시작한 숲을 둘러봤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새들이 가득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박수를 치면서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텅 빈 숲이었는데 행군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착시
거실에는 하루종일 머리를 빗는 언니들 목맬 밧줄을 쓰다듬는 사람처럼
식탁에는 빈 접시가 하나, 이곳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잘 잤느냐고 물으러 오지 않고
접시 위에 서 있는 먼지들의 발을 본다 발이 만드는 벼랑에 대해서 발이라는 벼랑에 대해서
누구의 것이든 발소리가 듣고 싶은 아침
아무도 없는 방을 돌아다니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다가
잠에게 일요일에게 아침에게 발을 붙여주는 놀이를 했다
좋은 곳으로 가라 좋은 곳으로 가라 중얼거리면서
어느새 시간은 흰 편지만큼 길어지고*1) 언니들의 긴 머리카락이 더 길어지고
언니들의 머리카락이 계속 길어져서 내 꿈을 덮었다
이제 거기에 목을 매달 수도 있겠다 말해주고 싶은데
얼마나 오랫동안 비명을 질러야 목소리는 눈에 보일까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를 깨우러 오지 않는 방안에서
언니들을 지나 거실을 지나 문을 지나 정원을 지나 길을 지나 엄마가 있는 교회를 지나 아침을 지나 일요일을 지나 잠을 지나 계속 걸었다
없는 발을 만드는 놀이를 하면서 좋은 곳으로 좋은 곳으로
혈연
입안에 돌멩이가 가득한 것처럼
아무말도 하지 말자
누운 채로 손을 잡고
살냄새를 혀로 조용히 굴려보는 일
가장 포근한 빙하기를 덮고 잠들었던 저녁
어떤 고백에는 말보다 이빨자국이 더 많고
서로의 살을 한입씩 베어물고 나서야
우리는 웃었지
이름은 꼬리뼈 같아서
부를 수 있지만 만지지 못하는 것들이
내 전생에는 가득하다
중생대 어디쯤 두고 온 몸뚱이의 배고파하는 소리가
밤의 두꺼운 지층을 파내고
나는 다시 당신의 고기 맛을 가장 잘 알고 싶은 사람
이 지독한 식욕이 사랑이라고
내가 뱉은 말이 누군가의 얼굴에 던져질 때
돌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나는 이것을 우리의 혈연을 확인하는 방법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
1) 칼 크롤로브 「흰」, 『시간의 흐름』, 태학당 1996.
시 | 심사평
촉수 예민한 예비 시인들이 보내온 시편들은 대체로 새로운 감수성을 앞세워 낯설게 아름다운 시세계를 열어가고 있었다. 패기와 실험정신이 넘치는 시작품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저마다의 편차는 분명 있었지만, 심사위원들은 시적 완성도를 떠나 1,300여편의 시를 보내온 응모자 모두에게 아낌없는 응원부터 보내고 싶었다. 크게 아쉬웠던 점은 이상하리만큼 혼자 웅얼거리는 것 같은 시가 여럿 눈에 띄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유형의 시작품들은 대체로 외래어나 비속어를 난삽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미사여구에 현학적이거나 관념적인 언어까지 무분별하게 더해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시편들은 다소 난감하기까지 했다. 선자들의 손에 끝까지 남은 시는 다섯 응모자의 작품이었다.
먼저, 「호스피스」 외 4편은 서정에 서사를 덧입히는 기법이 매력적이었다. 위태로운 ‘형’을 그리고 있는 표제시는 간결한 호흡으로 시를 밀고나가는 힘이 남달랐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 딸, 남편이 나오는 시편들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인지 다소 말이 많았다. 말수를 줄여 긴장감을 불어넣었으면 어땠을까. 「이사」 외 4편은 자신의 감정을 일상적 삶에 밀착시켜 단아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낼 줄 아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이 응모자의 시작품은 읽을수록 깊이가 있는 것들이어서 읽는 이들의 마음을 오래 잡아끌기에 충분했는데, 나지막한 어조로 삶과 사물의 이치를 차분하고도 순하게 알아가는 점이 유달리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미 익숙해 보이는 지점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에 대해 좀더 고민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사물의 월식」 외 4편은 어떤 현상에 대해 품은 의문에 의문을 더하며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근성이 만만찮아 보였다. 하지만 표제시와 함께 동봉한 한두편의 시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아끼지 않아 두고두고 아쉬웠다. 「진단」 외 4편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극을 특유의 감성으로 조절하며 상상의 폭을 넓혀가는 솜씨가 각별했다. 차분한 어투와 간결한 언어를 툭툭 던지면서 낯선 시세계를 열어가는 남다른 재능에도 오래 눈길이 갔다. 하지만 다소 작위적이다 싶은 몇몇 행이 내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사위원들이 큰 이견 없이 당선작으로 결정한 「전염」 외 4편은 시를 직조하는 손길이 다부졌고 행간을 힘있게 밀고나가는 패기 또한 유달랐다. 시의 결을 섬세하게 매만질 줄 아는 미덕도 높이 평가할 만했다. 특히 표제작 「전염」은 “정적”과 “총성” “어둠”과 “햇볕” “매복”과 “행군”, 그리고 “우리”와 “그들” 같은 것들을 날줄과 씨줄 삼아 엮어내며 고요와 역동의 시세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좀더 가다듬거나 덜어냈으면 하는 행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작품 간의 편차가 거의 없다는 점도 이 응모자에 대한 신뢰를 더하기에 충분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밀린 응모자들에게는 심심한 격려를 보낸다.
박성우 장석남 조용미
시 | 당선소감
글이 바뀌는 때가 있습니다. 겉에 드러나는 분위기든 글에 대한 태도든 무언가가 바뀌었으면 좋겠고 바뀌어야만 할 것 같은, 그래서 아플 때가 있습니다. 왜 바뀌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더 좋은 글이 쓰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사실 좋은 글이 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도 쭉 모를 것 같아 걱정이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다만 하나의 글을 끝내고 다음 글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런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누적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읽고 쓸수록 그런 때는 더 자주 찾아옵니다. 하지만 계속 읽고 써도 그때가 오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면 왠지 더 아프고 저에게는 요즘이 그랬습니다.
방법을 궁리하다가 해본 적 없던 투고를 했습니다. 썼던 것들을 어떻게든 떠나보내려고, 바뀌려고. 제 글들에게 멋진 이별 선물을 준 것 같아 기쁘고 조금 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을 생각하고 있고 다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상은 또한 제 다음 글들에 대한 믿음으로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당선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함께 글을 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같이 밤을 새우는 동료이자 제 시의 첫 독자인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과 술을 전하고 싶습니다.
자랑스러운 모교 고양예고와 서울예대의 선생님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작품을 읽으면서, 선생님들께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들이 글을 배우러 다른 도시에 가겠다고 할 때 걱정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 늘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끝으로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좋은 상을 만들어주신 대산문화재단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장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