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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눈

 

노동과 정치를 잃고, 윤동주에게 공명하다

 

 

김선아 金善娥

창비 청소년출판부, 『시인 동주』 담당 편집자

 

 

시인동주_문고_평면_fmtYun_Dong-joo_01_fmt윤동주(尹東柱) 바람이 분다. 2월 개봉한 이준익(李濬益) 감독의 「동주」가 저예산 영화로는 드물게 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였고, 시인의 유고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을 복원한 책은 탐서가들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면서 출간되기도 전에 예약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김응교(金應敎) 시인은 평전 『처럼』(문학동네 2016)을 내놓음으로써 윤동주 바람에 문학적 깊이를 더했다.

나도 그 바람에 손을 조금 보탰다. 작년에 안소영(安素玲) 작가가 윤동주의 청춘 시절을 정교하게 그린 소설 『시인 동주』(창비 2015)를 편집해 출간하게 되면서부터다. 요즘 단행본은 출간 석달 이후의 운명을 장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인데, 이 책은 윤동주 바람을 타고 출간된 지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발로 독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여러 작품 중에서 윤동주 바람의 진원지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영화 「동주」가 될 것 같다. 나는 윤동주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시인 동주』를 출간하고 얼마 후에 들었다. 영화가 흥행하면 이 책도 더불어 주목받을 수 있겠다는 얄팍한 기대를 품기는 했지만, 영화의 흥행을 점쳐보기는 어려웠다. ‘윤동주의 삶을 어떻게 영화로?’라는 의문이 앞섰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의문은 계속되었는데, 이준익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 시인의 삶에는 스펙터클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북간도에서 태어나 스물두살에 경성으로 유학 와서 연희전문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릿꾜오(立教) 대학과 도오시샤(同志社) 대학을 다녔으니, 시인은 짧은 생의 대부분을 학교만 오간 셈이다.

물론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우리말로 시를 쓰고, 후꾸오까 감옥에서 고초 끝에 옥사하는 등 쉽지 않은 시간을 견디는 동안 시인의 내면에서는 무수한 격랑이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면의 풍경은 영화의 형식으로는 재현하기 어렵다.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일제식민기를 다룬 영화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경성을 뒤흔든 연애 사건이라든지, 배신과 음모가 도사린 혁명 사건이라든지 하는 ‘눈에 보이는’ 스펙터클이 극화하기에는 좀더 적절해 보였다.

그런 면에서는 소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안소영 작가가 좀더 ‘극적인’ 소설을 쓰고자 했다면 윤동주가 아니라 다른 인물에 더 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블록버스터 영화감독보다 고미술 복원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흑백사진으로만 희미하게 남아 있던 시인에게 산뜻한 색채를 입히는 데에 힘썼다. 집필에만 4년여가 걸린 것은, 시인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를 탐독해 시인이 원래 갖고 있던 빛깔을 최대한 그대로 ‘복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금 윤동주 바람을 일으키는 이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안소영 작가와 궤를 같이하는 듯하다. 이들은 윤동주의 삶을 극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힘쓰기보다, 시인이 지녔던 어떤 면모, 어떤 빛깔을 선연하게 드러냄으로써 새롭게 시인과 조우하고자 한다. 이준익 감독은 절친한 사촌인 송몽규(宋夢奎)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인간적인 윤동주를 그렸고, 김응교 시인은 동시를 포함해 윤동주가 쓴 시 한편 한편을 짚어 읽으며 오직 시로써 시인을 그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 복원본은 그 물성 자체로 시인을 소개한다.

스펙터클도 없이 그저 이 선명한 빛깔들만으로 윤동주가 새삼 주목받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가 그만큼 ‘앙상’했기 때문이다. 앙상하다는 표현이 어색할 수도 있다. 사실 윤동주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느끼는 시인이다. 교과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막대한 영향력을 감안하면, 윤동주만큼 친숙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유명세에 흔히 따르는 ‘안티’도 그에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윤동주는 대개 거기까지이다. 교과서에서 정형화된 ‘맑고 고운’ 이미지, 안티가 생기려야 생길 수 없는 영롱한 영혼. 안소영 작가는 관련 자료가 빈약한 시인이 1970년대에 당시 오륙십대가 된 지인들의 ‘회고’를 통해 주로 기록된 터라 순수한 청춘의 면모가 더 부각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다른 연구자들 또한 엄혹한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시인을 지켜내기 위해 이념이나 사상 등을 구태여 부각시키지 않은 측면도 있을 것이다.

윤동주 바람을 일으킨 이들은 그 아름답지만 앙상한 뼈대에 살을 붙여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들은 우리가 윤동주에 대해 갖고 있는 친숙함과 호감에 기대어 노스탤지어를 환기하는 데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노스탤지어를 해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시인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

그런데 왜 공교롭게도 다들 지금 시점에 윤동주를 떠올렸을까? 그 계기가 되었을 만한 외부적 요소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자 시인의 70주기였으며, 올해는 시인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나는 해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그의 이름이 눈에 띄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간 시인을 끈질기게 탐구해온 저 창작자들의 결과물을 볼 때 그런 단편적 요소를 결정적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 듯하다. 그보다 저마다의 의식 속에 각자 다른, 좀더 진지한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것이 어떤 ‘염치있는 인간’의 발견과 관계있다고 믿지만 함부로 넘겨짚지는 않겠다.

창작자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는 어렵지만,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조금 짐작해볼 점은 있다. 나는 주로 『시인 동주』의 독자들을 만나봤던 터라 이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특히 청년들이 윤동주에게 공명했다. 『시인 동주』 독서모임에서 한 이십대 독자는 작품 속의 윤동주가 부럽다고 했다. 시인이 무려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취업과 생계 걱정으로 초조한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그래도 윤동주는 사사하고 싶은 학자가 있는 대학을 택하고, 교정에 모여 또래들과 시를 토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시대다운 소감이다. 물론 그 청년이라고 해서 그런 부러움이 얼토당토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중년 독자들도 윤동주의 ‘청년다움’에 공명했다. 한 사십대 독자는 윤동주에게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며 살고자 하는 청년을 보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자신도 보았다.

경성 청년 윤동주와 오늘날의 청년들이 공유하는 좌절이 있다면, 노동과 정치의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점이다. 『시인 동주』 속의 동주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등단하거나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도, 왜곡된 현실을 바꾸기도 어렵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역사의 무게는 다르지만 오늘날의 ‘흙수저’ 청년들이 느끼는 좌절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동과 정치의 기회가 없다는 것은 곧 제대로 어른이 될 기회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먼저 살았던 윤동주가 청년들에게 주는 희망이 있다면 그런 절망 속에서도 한줄 시를 길어올리던, 어떤 묵묵한 인간의 존재 그 자체일 것이다.

독자들을 만나면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사실 하나는, 많은 이들이 「팔복」이라는 시에 ‘꽂혔다’는 점이다. 「팔복」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여덟번 반복된 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끝나는 단순한 시이다. 저 주문과도 같은 구절이 여덟번 반복되는 동안 저마다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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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작품을 선별해 싣는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씨리즈 초판을 만들 때 창비 편집부에서 39종 국어교과서의 작품을 일일이 세어봤다. 「서시」 「별 헤는 밤」 등 교과서마다 수록작은 조금씩 달랐지만, 단일 시인으로는 윤동주의 작품이 가장 많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