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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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의 창비장편소설상에는 예년에 비해 한층 늘어난 총 395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응모편수에 못지않게 작품마다 각자의 개별성을 지향하는 감각적 사유와 형식의 고민이 새겨져 있었기에 심사과정 역시 흔쾌한 긴장과 집중의 시간이었다. 그같은 지향과 고민이 실제로 단독성을 구축하는 지점까지 도달하기란 물론 드문 일이다. 역사물이나 판타지가 줄어든 대신 당대의 사회적 소재들이 넓은 스펙트럼으로 다루어졌고, 특히 최근의 ‘헬조선’ 논의를 되비추듯 극단적인 곤경과 그에 대한 병리적 혹은 이상심리적 반응을 그린 잔혹서사도 꽤 있었다. 관건은 그저 스토리를 이어가는 차원을 넘어 밀도있는 서사의 조성으로 옮겨갔는지 여부일 것이다. 이 차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은 채 작위적이고도 평면적인 층위에 머문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제 주류가 된 1인칭 서사에서 화자가 이야기의 단순 전달자로 기능한 사례가 많다는 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올해 응모작들이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 세계와 현실을 향한 탐구와 대결의식은 장편소설 장르의 여전한 잠재성을 입증해준다.

본심에서는 다섯편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오늘의 잠』은 세련되고 안정된 문장과 실제 인물에 토대를 둔 주인공 ‘맥레이디’의 형상화가 강점이었다. 고도성장의 신화가 피워낸 한떨기 꽃과도 같이 속물성과 자존감, 허위의식과 정당성이 기묘하게 뒤섞인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키면서도 그 ‘신뢰 불가능함’을 적절히 유지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장편에 부합하도록 이 인물이 갖는 사회적 징후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살렸는지 의문이었고, 무엇보다 그를 지켜보는 또 한명의 화자인 방송국 PD의 존재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정쩡했다.

『라의 눈』은 음모론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니만큼 그런 장치의 중압과 한계를 어떻게 감당했는가 하는 점이 논의의 초점이었다.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짜맞추어가며 스파이와 혁명가, 그리고 소설가의 경계를 지우고 뒤집어 태생적으로 거대서사일 수밖에 없는 음모론을 변주하고 해체한 시도가 참신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알레고리의 위력을 체감하게 해줄 어떤 핵심적 통찰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거대한 수박겉핥기라는 음모론의 함정을 떨쳐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랑 호텔의 투숙객들』 역시 음모론의 틀을 차용했으나 최근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 텍스트 조립형의 노선을 택한 점이 흥미로웠다. 사실의 느낌을 버무린 허구의 텍스트들을 거듭 인용하며 IMF 이후 한국의 상황이 글로벌 금융자본의 움직임에 종속되어 있음을 부각하는 한편, 작가 ‘루카치’의 방한 강연을 통해 이곳의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사실들, 더욱이 설명투의 만연체로 반복된 사실들만으로 장편소설의 형식을 제대로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코스모스 사운드트랙』은 성장서사의 형식에 삶에 대한 감성적 통찰을 담은 작품이었다. 청각장애가 가져다준 감각의 색다른 풍성함을 전달한 초반의 디테일들이 매혹적이고 소리를 매개로 삼은 몇갈래의 변주와 인용도 나름의 울림을 만들어냈다. 그에 비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작위적 요소가 늘어나고 구성력이 약해지면서 장편소설이 요구하는 성숙한 서사에는 못 미친다는 느낌이었다.

긴 논의 끝에 당선작은 『망고 스퀘어』로 결정되었다. 다수의 작품이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하거나 때로 동의하기 힘든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데 비해,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이야기를 끊고 잇는 고유한 리듬을 조성하며 담담한 듯 노련하게 서사를 이끈 점이 돋보였다. ‘코피노’(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삶을 다루지만 이 소재에 따르는 통상적인 기대치를 가뿐히 지나친 점도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계획과 인내와 규범에 매이지 않는 삶을 묘사하는 방식이 또한 드물게 분방하고 담백한 것이어서 이 작품을 읽는 과정은 곧 다른 ‘문화’의 체험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가 한국문학의 지평을 얼마나 넓힐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이 작가가 보여준 서사의 역량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앞으로 만나게 될 더 많은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더불어 장편소설상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의 관심과 정성에 깊이 감사드린다.

 

 

 

수상소감

 

금태현사진_fmt

금태현

1963년 울산 출생.

 

 

 

 

소설의 터를 넓히기 위한 창비의 노력에 감사드린다.

부족한 작품을 읽고 뽑아주신 분들의 노고에 고맙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다.

 

며칠 전 문상을 다녀오느라 왕복 12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어릴 적 초등학교 교정에서 양팔을 벌려 끌어안아보려던 은행나무는 여전히 크기만 했다. 양팔은 조금 늘어났을 뿐이었다. 나도 많이 컸구나, 하고 상상할 수 있는 세월 동안 은행나무는 더 두툼하게 자라 살아 있었다. 은행나무의 ‘변함없는 성장’에 대한 나의 생각들.

 

고향에 돌아왔을 때 당선 소식을 들었다.

저녁 하늘을 자신들의 날개로 가리고 펼치던 ‘5만마리’의 까마귀들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정착을 좀 하지 그랬어, 하고 나는 생각한다. 빈 하늘을 보면서.

천천히, 아득하게 뒤척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대나무숲이 감싸는 강변을 걷는다.

 

떠오르는 단어.

소설, 소설을 쓰던 사람들.

 

『망고 스퀘어』는 매일 똑같은 길을 걷는 동안, 변화를 요구하던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지도를 거꾸로 돌려놓고 앞쪽 바다를 건너 여행을 했다.

늘 봐왔던 까마귀들이 도심 그곳에서 이동 중이었다. 나는 한적한 곳을 찾아갔다. 조그만 뭉치처럼 보이는 대나무숲에서 소설 속의 할아버지를 만났다. 여주인공 ‘베렌’이 나타났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편견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들과 단 하루 ‘정원이 있는 마을’에서 살았다. 떠나던 날 오후 내내 촘촘한 가랑비가 어깨를 적셨다. 현실을 재촉하겠다는 듯이.

 

나는 일상을 향해 움직였다.

두선, 을림, 영민, 영애, 진경, 민석, 현실 속의 인물들이 꿈틀거렸다.

소설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겸손과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들, 하늘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에 진실이 존재함을 일깨워준 실존인물들, 멀어지거나 가까이 달라붙는 논픽션 구성들.

 

모처럼 새로운 기획을 마련해준 창비에 한번 더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른 응모자들께는 미안한 마음이다.

우리의 한땀 한땀이 모이면 새로운 샘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