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큰 적공을 위한 작은 적공이 필요하다
●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네 속담이 떠오른다. ‘2013년체제 만들기’가 실패로 끝난 이후, 대부분의 중도좌파 성향 시민들은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산발적 부르짖음이나 비겁한 타협 혹은 노련하지 못한 몸짓으로 스스로 일어설 힘을 놓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한번 대가들의 균형진 시선과 조망 위에서 시세를 분별하는 일일 것이다. 백낙청 선생의 특별기고문은 우리 앞에 놓인 혼탁한 정치적 과업에 거장의 노련함과 섬세함이 어떻게 투과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내게 바늘구멍 같은 미세한 숨통으로 다가왔다. ‘53년체제’와 ‘87년체제’를 수용하면서도 넘어서는, 그리하여 이 시대의 대한민국호(號)가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지를 다양한 식견을 토대로 조곤조곤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세분화한 분야별 논의들이 좀더 연계성을 가지고 다루어질 수는 없었는지 하는 점이다. 물론 『창비』는 여전히 온몸으로 그러한 열정을 구현하고 있지만 말이다.
김봉근 k2bongkk@naver.com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 가장 좋은 치유
● 세월호사건 이후로도 우리에겐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세월호는 사회 한켠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사건 발생 후 8개월이 접어든 지금 실종자를 모두 찾지 못한 채 수색은 종료됐고 특별조사위원회도 좀처럼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결국 우리에겐 반목과 갈등, 그리고 변화에 대한 불신만이 남았다. 어떤 이들은 지겹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희생자와 유가족을 조롱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상처 입은 자들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 겨울호 ‘대화’에서 정혜신 박사가 제시한 ‘사회적 치유’가 인상 깊었다. 여기서 치유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유가족에게 핫팩 하나를 건낸 한 여학생의 행동처럼 사소해 보이는 움직임이 근본적인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다. 우리 모두가 슬픔의 과정에 동참하는 치유자가 되어야 함을 알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이송주 inarr@naver.com
광주법정의 ‘이웃집 천사’
● 겨울호 대화 「이웃집 천사를 찾아서」를 유익하게 읽었다. ‘이웃’은 안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는 광주법정에도 있음을 알리려 한다. 광주에는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시민상주모임이 있는데, 재판이 있는 날에는 진실 마중길을 하고 있다. 유가족 곁에 이웃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나는 이 모임에서 유가족을 호칭할 때 처음부터 ‘누구 엄마’라고 불렀는데, 학생들이 죽어가며 엄마 아빠를 얼마나 불렀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게 잘한 일이었음을 정혜신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니 다행스러웠다. 이제 이웃의 사랑으로 세월호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돈보다 사람 중심인 사회, 경쟁하기보다 사랑을 나누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회로 나아가길 바란다.
장헌권 suhjungchk@hanmail.net
백년지대계를 상실한 우리나라 교육과정
● 겨울호 교육시평을 잘 읽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지금까지 여러차례 바뀌었다. 60년간 아홉차례나 개정되었으니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라 할 것이다. 게다가 2015년 또 한차례 개정을 앞두고 있는 실정이다. 매 교육과정이야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짜임새있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실행 단계에서 마치 컨베이어벨트처럼 똑같은 인재들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창조와 창의를 외치지만 결국 대학입시와 취직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모두가 우리 교육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문제는 해결방법이다. 교육에도 정치색을 드리우는 작금의 현실에서 쉽게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어렵더라도 ‘백년지대계’에 맞는 안목을 갖추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길 바란다.
김경목 kyungmok2@daum.net
소통이 필요한 시대의 시
● 바야흐로 ‘소통’이 중요한 시대이다. 어떤 문학 장르든 그렇겠지만 시는 더욱이 감정을 소통하기 위한 글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는 실질적으로 ‘소비’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하상욱의 『서울 시』가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끈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황현산의 평론 「시의 미래와 과거의 낙서」가 이 부분을 다루며 시가 대중과 나름의 접합점을 찾는 방법을 재시해준 것이 유익했다. 과거의 ‘낙서’가 미래 시의 지향점이 되는 것이다. 지하철역의 시구나 등산로의 글귀들은 시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희망이다. 시가 문단에서만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만나는 날이 꼭 오리라 믿는다.
최보성 zbosung@naver.com
명확히 다가오는 슬픔의 실체
● 오랜만에 집중해서 단편 하나를 읽었다. 원래 김애란의 글을 좋아했지만, 겨울호에 실린 「입동」은 서늘한 듯 따뜻한, 요즘 같은 날씨에 읽기 적당한 글이었다. 「입동」의 서사는 복잡하지 않으나,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생에 대한 버거움이 다양한 층위에서 결합되어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화자의 목소리 덕분에 주인공을 침식하는 슬픔의 실체가 더욱 명확히 다가왔다. 새하얀 벽지에 남은 얼룩처럼, 부모의 가슴에서 아이를 잃은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녹여내 슬픈 듯 슬프지 않게, 아픈 듯 아프지 않게 묘사한 것이 압권이었다. 좋은 소설을 읽어서 오늘 하루 기분이 좋다. 작가와 창비에 감사드린다.
전미라 immi2ra@naver.com
봄을 향한 구불거림
● 늙은 나무는 늙어도 늙지 않았다. 생을 향해 부단히 제 가지와 뿌리를 뻗치고 있다. 이러한 노목의 활기는 김기택의 「늙은 나무」에서 “구불거린다”라는 동사로 표현되고 있다. 겨우내 몸속 사리처럼 고여 있던 얼음을 터뜨려 거친 나무껍질에 균열을 내고 나이테, 가지 마디 등 온 기관을 구불거리며 노목은 ‘봄’을 준비한다. 고요히 매일을 늙어갔지만 그 안에선 역동적인 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우리 사회에서의 목표는 부도 명예도 아닌 ‘살기’라고 한다. 작년 한해 수많은 대형사고가 우리 사회를 덮쳤지만 아무도 제대로 책임지는 이가 없다. 뻔한 당위적 말들과 실현 가능성 없는 정책만 쏟아진다. 그러는 사이, 살고 있지만 사는 게 목표가 된 것이 어제오늘의 현실이다. 봄이 온다. 우리 사는 모양은 봄이 아닌데 부지런한 자연은 봄을 데려온다. 우리 사회에도 늙은 나무의 정력이 있기를, 그래서 역동적 생의 기운이 ‘구불거려’ 봄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희원한다.
하민지 hmj9431@naver.com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는 책이길
● 계절마다 나오는 『창비』를 즐겨 보는 편이다. 그러나 내용이 대체로 전문 작가나 작가를 꿈꾸는 사람을 위한 것 같아 아쉽다. 딱딱하고 전문적인 글뿐 아니라 소박한 서민들이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추억담이나 사진 등도 좀 보고 싶다. 글을 꼭 매끄럽게 잘 써야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소 표현이 서툴고 맞춤법이 틀리더라도 진솔한 이야기를 담았거나 색다른 일화를 갖춘다면 누구에게나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다. 우리가 책을 보는 목적은 재미와 감동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책이라도 재미와 감동이 부족하면 독자에게 다가가기 어렵다. 『창비』는 문예와 사회 비평을 지향하는 잡지이지만 독자를 좀더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도 bjd1004@naver.com